131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
허탈하기 그지없는 결론이었다.
내가 떠올린 해답이 맞는다면. 결국 지금 저 거대한 흉물을 쓰러뜨릴 방법은, 아예 없다.
그냥, 애초에 없는 것이다.
“꼼짝없이 죽어야 된다니……. X발. 존나 부조리하네.”
그냥 최대한 저항하다 죽으면 된다.
왜냐하면 놈의 유일한 대항마인 내가 죽일 방법을 알고 있어야 정상인데, 정작 나는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준비가 안 됐다. 이 말은.’
주저앉은 광대를 조우하기 전 단계.
그러니까… 애덤 크로스를 만나기 전. 아니면 최소한, 그가 자살해서 저놈이 세상 밖으로 풀려나기 전.
그 단계에서 뭔가, 절차가 부족했다는 의미일 거다.
‘선택지 한 번 잘못 골랐다고 배드 엔딩 직행이냐.’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애꿎은 사람들이 학살된 원인은 나한테 있었다.
주저앉은 광대. 저 통제 불능의 거신은 지금 이 타이밍에 깨어났으면 안 됐다.
최소한 내가 ‘해답’을 알고 깨웠어야 했다.
“사람들의 목숨값을… 치를 시간인가.”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복검을 휘두르던 손을 내리고, 갑주를 구성하던 마력까지 공급을 차단했다.
스르륵. 꿀럭거리며 허물어진 혈천갑이 내 품에서 뭉쳐들었고. 이내 백발의 소녀 형상으로 재구성되었다.
“…아, 아빠.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품에 슬며시 안긴 이브가, 걱정에 차서 날 빤히 올려다봤다.
그럴 만도 하다. 이번 변신 해제는 굉장히 갑작스러웠으니까.
급격한 마력 공급의 중단에서, 이브도 어떤 불안한 직감을 느낀 듯하다.
“괜찮아. 난 멀쩡하다.”
아프냐고 물어보길래 사실대로 대답해 줬다.
지금부터 할 짓을 생각하면, 몸도 마음도 아플 예정이긴 하다만. 일단 아직까진 괜찮은 게 맞으니까.
나는 이브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는 한편.
“이브.”
그녀를 조용히 불렀다.
퍼뜩, 이브가 고개를 단숨에 치켜들었다.
새빨갛고 맑은 눈동자가 날 빤히 주시한다.
“어, 왜?”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어… 으, 응?”
“이제 곧 내가 죽는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소리야.”
태연하게 내뱉은 말에, 이브의 표정이 대번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내 옷깃을 꽉 쥐었다.
“아, 아빠.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전부 내 계산대로 흘러가는 거니까. 화낼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어.”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깨달았다.
나는 이세라가 아까 해줬던 말을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궤변이 따로 없다.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던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당연히 아직 잊지 않았으니까.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지.’
그런데도 굳이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심정.
그때 이세라가 어떤 기분으로 나한테 그 말을 했던 거였는지. 역지사지로 깨닫게 되었다.
“아빠! 무슨 소리냐니까! 대답을 해! 대답!!”
“온다.”
“…어?”
울먹거리는 이브의 추궁에 대답하지 못했다.
쇄애액! 내 머리 바로 위. 광대가 휘두른 거대한 손바닥이, 어느새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갔다 온다.”
일방적으로 작별을 고했다.
이브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뭔가 소리치려 했지만. 그 전에 내가, 그녀를 지면을 향해 던져버렸다.
전력투구였다.
“흐앗?!”
휘이익!
이브의 아찔한 탄성. 그녀의 가녀린 몸이 유성처럼 순식간에 추락한다.
물론 지면에 충돌해 빈대떡이 되기 직전. 내가 피직스 그랩으로 공중에서 낚아채 제동을 걸었다.
“아, 아빠!!”
방금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듯이. 이브는 황급히 고개를 쳐들어 나를 향해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듯한 붉은 시선.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흐.”
나는 가볍게 웃었다.
습관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따 보자, 이브.”
아마 이브에게까진 들리지도 않겠지만.
오히려 못 들은 게 다행이다. 또 혼잣말 한다고 측은한 시선을 받는 건 사양이니까.
퍼어억! 직후 묵직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컥……!”
광대의 손바닥이 나를 후려친 것이다.
콰아앙! 라켓으로 후려친 테니스공이 그러하듯이. 내 몸은 사선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순식간에 가로질렀다.
“크욱!!”
콰콰콰쾅!
수백 미터 떨어진 건물에 속절없이 처박히고. 깔끔하게 관통해서 그 뒤에 있던 건물까지 한 채를 더 박살 낸 뒤.
가까스로 몸에 제동이 걸렸다.
“끄… 허. 그윽.”
아까 이브를 지상에 던질 때, 이미 모든 방어 스킬을 해제했다.
대미지는 온전히, 전신의 고통으로 치환되었다.
‘아프네. 많이.’
육성으로 내뱉으려 했지만. 틀렸다.
이미 꺽꺽거리는 숨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몸 상태를 대충 체크하고 직감했다. 나는 곧 죽을 것이다.
‘대미지 절륜하구나, 광대.’
꼴에 최종 흑막 언저리의 무언가다 이거냐.
아무리 그래도 내 바닐라 스탯이 만렙인데. 단 한 방 얻어맞고 절명 직전까지 몰릴 줄은 나도 몰랐다.
피범벅 돼서 붉어진 시야를 슬쩍, 위로 올렸다.
―그후후. 으흐흐흐흐……!
흐릿한 시야 너머로 거대한 광대가 비친다.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내 쪽으로.
놈이 내게 비척비척 다가오고 있다.
―키하하하하!
그그극, 쿵. 그그극, 쿠웅.
그 거체를 두 팔로 질질 끌면서. 천천히, 내 목숨을 끊으러 다가오는 것이다.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새꺄.’
다만 놈의 전진 속도가 너무 느렸다.
파지직!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허공에 힘껏 쑤셔 넣었다.
“내가, 간다… 직접.”
이번엔 우리의 목적이 일치하는 것 같으니. 내가 광대를 좀 도와주기로 했다.
스르릉. 블라이스의 단검을 힘껏 쥐고. 그대로 목에 내리꽂았다.
퍼걱! 섬짓한 파육음.
“……!!”
비명조차 막혀버렸다.
이미 상당한 대미지가 누적돼 있던 상황이어서 그런가.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의식이 암전되었다.
* * *
[1003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4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이젠 뭐 반갑지도 지겹지도 않은 패널들의 향연.
물 흐르듯이 일련의 과정들을 넘겼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이번 생은 1차 붕괴조차 시작되기 전에 죽었다.
그나마 유의미해 보이는 아이템을 딱 하나 얻었지. 그러니 내가 계승할 물건도, 무조건 그것이다.
[고유아이템 ‘스킬 재머’를 계승합니다.]
애덤 크로스가 개발했다는 ‘스킬 면역’ 기능의 보석.
의미가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유능력치 1보다야 포텐셜이 높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익숙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역겨움과 함께. 시간이 다시 한번 되돌아간다.
째깍째깍째깍. 시계 침 소리가 뇌를 쿡쿡 쑤셨고.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어김없이 시간은 돌아왔다.
이걸로 1004번째. 그런 실감만이 멍한 머리로 들어온다.
“…후우.”
온몸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탈력감과 무력감.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회귀 직후의 졸음.
이번에도 굳이 참지 않는다. 나는 1004번째 낮잠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아빠아아앗!!”
그러나 찢어지는 비명이 그것을 방해했고.
짜자작! 직후 양쪽 뺨이 얼얼하게 아려왔다. 누군가 연속 싸대기를 갈긴 것이다.
“응허?”
번쩍.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비몽사몽한 눈을 연신 끔벅거렸다.
흐릿한 시야가 점차 돌아오며, 눈앞에 새하얀 소녀가 재구성되어 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싸대기를 갈긴 소녀의 정체는 이브였다.
“으… 우우, 으흐윽!”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린애처럼 눈물을 펑펑 쏟는 이브였다.
“…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번까지 ‘왜 우냐’하고 물어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
그녀는 분명, 나 때문에 울고 있을 것이다.
“이, 이이……. 흐극. 흐아앙……!”
약속을 어겼다.
이브가 보는 앞에서 또 죽었다.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게 화가 나서 우나? 아니면 내 죽음 자체가 슬픈 것인가?
‘모르겠네.’
그것까진 모르겠다만. 뭐 이유야 어쨌든 간에.
죄인 된 입장에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
그래서 아가리 꽉 닫고 멍하니 관망했다.
그러자니 어느 순간, 이브가 눈가에서 손을 치우고 째릿, 날 노려봤다. 눈물 젖은 살벌한 눈초리가 오롯이 쏟아진다.
“…뭔 말이라도 좀 해보지 그래, 아빠.”
이브가 훌쩍이다 말고 내게 발언권을 줬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똑같은 말이잖아!”
뭐 어쩌라고. 그게 사실인데.
이 외계인 소녀는, 대체 나한테서 무슨 신박한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빵 터지는 깔깔 유머 펀치 라인이라도 쳐야 했나?
“…음.”
나는 단어를 고르고 고른 뒤. 고심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내린,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다……?”
“아오! 됐어! 때려치워!!”
이브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답답해했고. 결국은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그러나 금세 힐끔, 곁눈질로 나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아빠.”
“어. 왜.”
“내가 아빠 눈앞에서 칵, 죽어버린다고 쳐! 아빠는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많이 슬프겠지.”
아무렴 슬플 수밖에.
이브가 나처럼 부활할 리도 없다. 혈천갑이라는 트리플 S급 아이템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증발해 버리는 셈이다.
내 타산적인 속내도 모르는 채, 이브는 사뭇 의기양양하게 언성을 높였다.
“그치? 슬프잖아! 아빠라도 분명! 나처럼 펑펑 울어버릴 거라구!”
“…그래. 그런 걸로 하자.”
“그런 걸로 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그럴 거야! 무조건!! 나는… 아빠가 살아나는 걸 알았어도……! 이렇게나 슬펐단 말이야!”
“…….”
그렇구나.
이해했다. 그녀의 말의 핵심을 간파했다.
‘나한테 역지사지를 교육하고 싶은 거군.’
자기가 눈앞에서 죽는 상황을 상상해 봐라. 기분이 어떠냐. 그게 지금 내 심정이다.
요약하면 대충 이런 흐름이지 싶다.
“앞으론 더 조심한다.”
이브가 무슨 대답을 원했는지도 드디어 깨달았다.
그녀는 내가 사과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미안해. 정말로.”
“…흥. 그래. 알면 됐어!”
그래서 나는 그대로 사과의 말을 입에 담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제야 이브의 바짝 치켜 올라간 눈썹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일단 정답 맞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이브가 홱, 다시 한번 고개를 힘껏 쳐들었다.
“그리고! 말이 잘못됐잖아!”
보스의 2페이즈 돌입 예감에 숨을 삼켰고.
불길한 예감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조심하는 게 아니지, 아빠!”
“그럼 뭐. 어쩌라고.”
“앞으로는 절대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알겠지?! 자! 나랑 다시 약속해!”
“…하.”
복잡한 심경을 담아 숨을 내뱉었다.
일견 비웃음 같기도 했고. 한숨 같기도 하다. 웃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노력해 본다.”
이것밖에는 해줄 말이 없었다.
이브가 한사코 내민 약속의 손가락은 결국 끝까지 거부했다. 그러자 이브는 노발대발 머리끝까지 화를 냈지만. 딸기우유 하나 쥐여주니 금세 풀어졌다.
“흐, 흐흠. 그래도 노력한다고 했으니까. 그거라도 꼭 지켜! 알겠지?!”
“…그래.”
진작에 뇌물 공세나 할 걸 그랬다.
캐피탈리즘, 호우.
* * *
나는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장장 20시간 안팎의 기절 수준의 수면. 회귀 직후 웬만하면 거쳐 가는 과정 중 하나였기에 이젠 익숙하다.
다음 날 오전이 되어서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오빠! 드디어 일어났네요?”
그리고 눈뜨기 무섭게 수아가 반겨줬다.
순간 말문과 함께 사고가 턱 막혔다.
“…….”
슬쩍, 눈만 돌려서 상황을 살폈다.
수아 옆에는 이브가 디룩디룩 눈치를 보고 있다. 수아도 어딘가 어색한 표정으로, 나와 이브를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다.
“…음.”
잠깐 인지 부조화가 빡세게 왔다.
눈을 세차게 끔벅거렸다. 그러나 수아가 보이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제야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봤고.
“아.”
전생보다 한참 늦잠을 잤다는 걸 깨달았다.
수아가 우리 집에 찾아올 시간이, 진작에 지나 있었다.
‘X됐다.’
전생에 수아와 빚었던 오해들이 뇌리를 스친다.
너무 급하게 회귀하느라 아직 변명거리 생각 못해 놨다.
뭔가 변수가 없다면, 이번에도 납치범 의혹을 받고 시작할 텐데. 큰일 났다.
‘이번도 시작부터… 수아랑 틀어지나?’
안 돼.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수아와 한 번 엇나가기 시작하면 그녀의 생존율에 영향을 끼칠뿐더러. 일단 내 기분부터가 찝찝해서 싫다.
‘뭐라도 빨리 대책을…….’
어색한 침묵 속에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순간.
별안간, 수아가 웃으며 이런 말을 해왔다.
“오빠, 괜찮아요.”
“응? 뭐가.”
“이브한테 이미 다 들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저건 또 뭔 개소린데.
나는 퍼뜩 이브를 쳐다봤고. 눈이 마주친 이브는 배시시,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데헷.”
데헷은 X발.
불길한 예감만이 등줄기를 후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