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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9화 (129/235)

129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8)>

“이런……!”

아찔한 깨달음의 탄성도 잠시.

나는 불에 덴 듯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애덤 크로스의 상태를 확인했고.

그대로 덜컥,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래. 광대? 아냐, 내가 아냐. 아니라고……. 싸물어! X발 좀 닥쳐 봐!!”

철커덕.

잠깐 한눈판 사이, 바닥에 주저앉은 크로스 박사는 권총을 주워든 상태였다.

총구 끝은,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있다.

“나쁜 건… 미친 건! 내 머릿속에서 계속! 계속 지껄여대는!! 이 개새끼란 말이야!!”

놈은 그 순간에도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거리고 있었다.

입은 실성한 듯이 웃고 있는데. 눈에선 눈물이 줄줄 쏟아진다.

“아.”

크로스 박사의 행색을 본 순간.

광기 어린 행동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보다도 먼저, 이런 생각부터 떠올랐다.

‘주저앉은… 광대.’

우는 동시에 웃는,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표정.

허리와 어깨를 둥글게 말고, 패배자 마냥 무릎 꿇고. 땅을 보며 통곡하는 그 모습이란.

주저앉은 광대. 그 자체가 아닌가.

“로즈. 아니야. 정말이야. 나는, 진짜로 아니라고, 로즈……!”

그는 계속해서 부정해 오던 무언가를,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타아앙! 벽력같은 총성이 터졌다.

“…꺽…….”

후두둑.

새빨간 선혈이 질척한 건더기와 함께 흩날린다.

그 위로 철퍼덕. 크로스 박사의 육체가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

애덤 크로스는 그렇게 죽었다.

살려낼 여지가 없는 즉사. 총알이 머리를 관통했으니 당연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분명히 막을 기회가 있었다.

“…….”

하지만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않았다. 이게 좀 더 맞겠다.

몸이 굳어서 못 움직인 게 아니다. 나는 그가 자살하는 것을 일부러 관망했다.

‘왜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왜냐하면,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나 자신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그래.

“…알 것 같았다.”

애덤 크로스가 본능적으로 옥좌를 찾아 한국에 왔듯이. 그리고 놈이 나를 마주친 순간, 머릿속의 목소리가 거짓말같이 끊겼듯이.

나도 놈이 자살하는 그때.

예언이나 계시에 가까운, 어떤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이게 정답이야.”

애덤 크로스. 네 말이 맞다.

너는 아니었다. 주저앉은 광대는 네가 아니야.

‘진짜 광대는 따로 있다.’

내 본능이, 그리고 오감과 육감이.

지금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아, 아빠! 뭐야? 무슨 일이야?!”

총성이 들려서일까. 멀찍이서 숨죽인 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이브가, 화들짝 놀라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는 겁먹은 그녀를 안심시켜 주는 한편. 내 등 뒤로 그녀를 숨겼다.

“아빠? 왜 그래?”

“잠시. 조용히.”

“……?”

바싹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밀어 넣고, 죽은 애덤 크로스의 시체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뿌우우우!

문득 우스꽝스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질적이면서도,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

소리의 정체를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골똘히 생각하니 기억났다. 생일 파티에서나 사용하는, 불 때마다 코끼리 코처럼 쭉쭉 늘어나는 장난감 피리.

일명 코끼리 나팔. 그것이다.

‘어디서 들린 거지.’

문제는 지금 이 심각한 상황에, 그런 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다는 것.

나는 숨을 한껏 죽이고. 오감에 온 신경을 집중해 봤다.

뿌우우우!!

다시 한번 나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확실히 알았다.

나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뭐야.”

죽은 애덤 크로스의 머리통.

그곳에 휑하니 뚫려 있는 총알구멍. 그 안이 확실했다.

지금도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을, 부릅뜬 눈으로 주시하는 찰나.

[모든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삐빅.

갑자기 그런 패널이 튀어나오더니.

[잊혀진 던전의 던전 마스터, ‘주저앉은 광대’가 현현합니다.]

푸화악!

총알구멍 사이를 비집고, 거대한 팔뚝이 솟아났다.

* * *

뿌, 뿌, 뿌부우.

―카하하핫!

장난스런 코끼리나팔 소리.

뒤이어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핫. 카하하하핫!

뿌드득, 뿌득!

그리고 애덤 크로스의 머리에 뚫린 그 비좁은 총알구멍 안에서. 거대한 누군가가 꾸역꾸역 솟아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부릅뜬 눈으로 관망했고.

“…숨겨진, 던전 마스터?”

패널이 고지해 줬던 통보를 재차 입에 담았다.

숨겨진 던전 마스터. 그렇게 고지된 무언가가… 지금, 애덤 크로스의 머리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끄…응, 차핫! 카하핫!

한껏 힘을 주는 소리. 코끼리 나팔 소리. 그리고 웃음소리.

처음엔 팔뚝이 튀어나왔고, 뒤이어 다른 한쪽 팔. 그리고 머리까지.

머리가 완전히 튀어나온 뒤에야, 그것의 윤곽이 대충은 가늠되었다.

“…광대.”

거대한 광대.

상체 크기만으로도 코스모의 거신병만큼이나 거대한, 기분 나쁜 피에로다.

―크후후. 으히히히히!

시체처럼 허옇게 갈라진 피부.

시커먼 눈물이 줄줄 흐르는 충혈된 눈알.

귀까지 찢어진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달린, 소름끼치는 피에로.

―끄아아앗. 아하하하핫!!

놈이 비명 같은 광소를 흘리며 양팔을 허우적댔다.

뿌드득, 우드득! 마치 블랙홀로 빨려드는 장면을 역재생하듯. 질량과 부피의 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그 거대한 체구가 마침내, 비좁은 총알구멍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카하하하하핫!!

콰콰콰쾅!

놈이 광소와 함께 두 팔을 허우적거렸고. 그것만으로도 주변 골목 벽들이 장난감처럼 죄다 으스러졌다.

순식간에 폐허가 된 골목의 한복판. 나는 거대한 광대와 대치해 섰다.

“허.”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쉬었다.

놈은 무지막지한 거체였지만. 생각보다 눈높이는 높지 않았다. 두 다리가 허벅지 아래로 무참히 짓이겨져, 땅을 어기적어기적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광대.”

그 중2병스러운 문장은 당연히 비유적 표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를 직접 보니, 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존나 직관적이네. X발.”

눈앞에 등장한 ‘주저앉은 광대’.

그야말로 닉값을 톡톡히 하는 외관이었다.

‘일단은, 전력 파악부터……!’

돌발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나는 습관에 따라 현자의 눈을 발동시켰다.

키잉! 날카로운 마력광이 눈가에 깃들었다.

[몬스터 정보]

[명칭: 주저앉은 광대ㅡ던전마스터형]

[체력: ??? 마력: ???]

[힘: ??? 민첩: ??? 지능: ???]

[상세: 최초이자 최후의 던전, ‘잊혀진 근원’의 여섯 던전 마스터 중 하나. 죽어버린 왕의 하수인. 왕이 임명한 자만이 불러낼 수 있고, 왕이 허락한 자만이 복속할 수 있다.]

“…물음표?”

온통 물음표만 가득한 광대의 상태창.

상세 항목도 저들만 아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뿐. 좀처럼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 없었다.

상태창을 본 뒤 의문이 사라지긴커녕, 오히려 증폭됐다.

‘이… 이렇게 되면.’

사전 탐색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모르면 맞아가며 배우는 수밖에.

[스킬 발동: 안티 노멀 리플렉터]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파지직!

나는 우선 기절한 이세라와 로즈 휴스턴을 한곳에 잘 그러모은 뒤. 두 사람의 위에 방벽을 견고하게 설치했다.

그 다음은 곧장 이브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브. 가자.”

나는 등 뒤에 숨겨놨던 이브에게 나직이 중얼거렸고. 뿌드득, 자연스럽게 셔츠 앞섶을 거칠게 찢어발겼다.

“응, 알았어!”

이브는 어딘가 신난 기색으로 내 품에 달려왔다.

그리고 콰작! 여느 때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욱신거리는 통각. 피가 심장에서 직접 빨려나가는 듯한, 뿌리 깊은 탈력감이 순간적으로 온몸을 지배한다.

[한계까지 생명력을 소비합니다.]

[생명력의 50%가 갑주로 환원됩니다.]

우드득! 빠각!

익숙한 감각과 함께 갑주들이 몸 위로 구성되어 간다.

혈천갑이 완성된 그 순간, 투학! 곧장 지면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스킬 발동: 블러드 스트림]

푸화악!

발밑으로 세찬 혈류가 회전하며 내 몸을 밀어냈고. 추진력을 얻어 한층 더 가속했다.

맹렬한 돌격. 광대의 안면을 향해 일직선이다.

―캬캬캇… 아하?

광대는 내가 코앞까지 도달해서야 기척을 눈치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른손의 사복검을 한계까지 들어 올린 상태였다.

“어디. 죽어보자.”

파파파팟!!

미친 듯이 오른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오른쪽.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 그리고 사선 방향. 놈의 거대하고 끔찍한 면상을 미친 듯이 난도질했다.

―으핫! 으하하! 캬하하하핫!!

푸확! 파바밧!

질척한 살점이 튀고, 핏방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크기가 워낙 거대하니 대충 휘둘러도 반드시 맞는다.

광대의 얼굴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으하하하핫! 카하하하핫!!

하지만 그렇게 걸레짝처럼 유린당하는 와중에도 광대는, 절대 광소를 멈추지 않았다.

“…정신 나가겠네. 내가.”

이내 나는 참격을 멈추고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코앞에서 그 쩌렁쩌렁한 광소를 듣고 있자니. 골이 다 띵해져서 더는 못해 먹겠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광대의 행색을 빤히 살폈다.

‘대미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외적으론 분명히 수많은 상처를 냈다.

14차 붕괴의 코스모의 거신병도 단숨에 썰어 죽일 참격을, 단 몇 초 만에 수십 번이나 갈겼으니까.

‘그런데도 반응이 없어.’

광대는 웃음을 멈추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아니, 반응이 없다 뿐일까. 이건 그런 느낌을 넘어서…….

‘허공에 삽질한 느낌인데?’

분명히 살을 베었다.

그 느낌이 분명히 피부로 전해졌다. 그러니 실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 느끼는 기묘한 감각에 나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그래. 게임으로 따지면…….’

그래픽상으론 분명히 화면에 존재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꼬여서, 피격 판정이 일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스킬 면역의… 물리 버전.”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중얼거렸고. 방금 중얼거린 그 말이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스스로 감탄했다.

―으호호호호!!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기습적으로 광대의 반격이 이어졌다.

콰콰콰! 놈의 거대한 손아귀. 그 끝에 달린 날카로운 시커먼 손톱들이, 양옆에서 날 압사할 듯이 쇄도해 왔다.

호흡을 가파르게 정돈했고. 곧장 회피기동에 들어갔다.

“후우……!”

부우웅!

머리 위로 종이 한 장 차이. 놈의 거대한 손톱이 주위를 연신 찢어발긴다.

콰콰콰쾅! 민가와 상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속절없이 박살나 흩어졌다.

“꺄아아아악!!”

“뭐, 뭐야? 갑자기 저거 뭔데!!”

“몬스터……? 몬스터다!!”

더 이상 알량한 침묵 스킬로는 소란을 무마할 수 없다.

해운대구… 아니, 부산의 어디서 봐도 보일 법한 초거대 흉물의 등장. 그리고 순식간에 발생한 막대한 파괴.

주위 민간인의 주목도는, 단숨에 이쪽으로 쏠리게 됐다.

“뭐, 뭔데 저게. 세상에……!”

“헌터! 헌터 불러! 빨리!!”

사람들은 우선 주저앉은 광대의 거대함에 한 번 놀랐고. 이후엔 참혹하게 일그러진 광대의 비주얼 자체에 한 번 더 놀랐다.

혼비백산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발이 안 떨어지는지 망부석처럼 서있는 이도 있다.

‘일단 다른 사람들도 보이긴 하네.’

시민들의 반응으로 그 사실을 캐치해 냈다.

역시 저건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건 아니었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내 공격이 대미지가 박히지 않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기믹 보스.

특정 조건을 달성해야 공략이 가능한 던전 마스터일 가능성이 있다. 미명정원의 렘마나 장난감 왕국의 에티가 그러하듯이.

일단 그 사실을 염두에 두기로 했다.

―으호호! 캬하하하학!!

와중에도 광대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놈은 갓난아이가 투정부리듯, 길쭉한 팔을 마구잡이로 휘저어 댔다.

면적은 지나치게 넓지만, 궤도 자체는 실로 단순하다. 나는 능숙하게 블러드 스트림을 조정해 그것들을 피해나갔다.

―캬하하아아앗!!

콰드득! 콰콰콰콰!!

광대의 팔뚝이 휘둘릴 때마다, 가공할 풍압과 파공음이 온몸을 짓눌렀다. 비행기가 코앞에서 지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당연히, 미련하게 계속 회피만 하고 있을 내가 아니다.

‘지금.’

투학!

단숨에 광대의 상체를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입매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멍석도 깔렸겠다. 시험이나 해보자.”

파사삭!

직후 혈천갑의 등갑을 뚫고, 거대한 두 장의 날개가 돋아나며 붉은 깃털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 후. 다시 내뱉지 않았다.

“간다.”

지금껏 쓸 일이 없어서 아공간에 방치되었던 혈천갑의 부속품, 레드 리뎀션.

드디어 상황과 구색이 맞춰졌다. 이 거추장스러운 붉은 날개를 써볼 찬스가 드디어 도래했다.

그래서 지금, 사용해 볼 생각이다.

[스킬 발동: 팬텀 베인]

쿠우웅!

내 의지에 따라 스킬이 발동되었다.

마력과 생명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며 묵직한 파동을 쏟아냈고, 동시에 스킬과 관련한 모든 지식이 머릿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흐.”

잠깐의 시간이 지난 직후.

나는 여전히 사나운 웃음을 두른 채, 손을 광대에게 뻗었다.

“한 번 더. 죽어보자.”

키이잉!

날개에 달린 깃털들이 일제히 부르르 떨린다.

이내 시뻘건 빛을 토해내며, 쿠구구궁! 둔중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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