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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8화 (128/235)

128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

잠깐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느라 시간을 쏟았다.

마침내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뒤. 나는 더듬더듬 명령했다.

“…네가 그 목소리에게 들었다는 종말의 미래. 빠짐없이 전부 말해봐라.”

다른 건 일단 전부 차치하고.

우선은 그걸 좀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처음엔 진짜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놈의 행색을 보면 그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저게 미치광이 박사의 공상 허언인지 아닌지. 그게 중요해졌다.

“오오. 그래도 꼴에, 믿어주려고 노력하는 건가?”

크로스 박사는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아까처럼 히죽거리면서, 과장되게 생각에 잠긴 시늉을 했다.

“당연히 말해줘야지. 그래. 어디부터 말해주면 좋을까…….”

크로스 박사는 그렇게 자신이 들은 목소리의 예언을 내게 전해줬다.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 말마따나 세세하고 장황하게,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입에 담는 애덤 크로스.

그것을 끝까지 들은 뒤. 나는…….

“…진짜 들었구만.”

놈의 말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 말고 쟤가 회귀자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내 대가리 뚜껑을 열고, 그것을 한 번씩 훑어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내뱉은 예언은, 지금까지 내가 본 미래들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던전의 붕괴 일시, 장소… 대략적인 전개까지. 전부 정답이다.’

크로스 박사는 한국에서 일어날 모든 던전 붕괴 장소를, 정확한 일자로 예측해 냈다. 이세라도 못 하는 걸. 이 미국의 평범한 연구원 놈이 해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야.’

놈은 앞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있는 던전 수십 개들을 줄줄이 읊어줬는데. 내가 알고 있는 100가지의 던전 리스트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한두 개도 아니고. 100가지다.’

이세라는 코인토스 10번을 연속으로 맞춰서 예언자임을 입증했다.

10번 연속이면 예언자란 말도 믿기는 숫자인데. 100개면 말해 뭐 하냐.

이건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놈은 말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

수수께끼의 6개 문장도, 당연히 등장했다.

“광대. 용. 토끼. 까마귀. 눈물. 그리고 옥좌. 그 여섯이 한곳에 모여야… 죽어버린 왕이 부활해, 옥좌를 차지하러 나타난다고.”

“…그래서.”

“우선 왕이 옥좌에 앉지 않으면. 아무것도 끝날 수 없고, 시작되지도 않는다고 했어…….”

처음 듣는 키워드의 향연.

하지만 나는 즉각 눈썹을 치켜뜨며 반응했다.

“…죽어버린 왕이라고?”

“그래. 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니까. 잊을 수가 없지. 그럼!”

왕이 깨어난다.

그리고 옥좌에 앉는다.

그리고 그 전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끝날 수 없고. 시작되지도 않아?”

적어도 그 문구.

영원회귀를 겪는 내 입장에서… 절대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아직 알 수 있는 건 적다. 하지만 거기까지 들은 시점에서. 이런 추측은 가능했다.

‘그 여섯 문장들은, 각각 지칭하는 존재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여섯 개. 혹은 여섯 명의 존재.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여야 한다.

‘그러면… 그 옥좌의 주인이라는 왕이 깨어나고.’

뭔가는 일어나겠지.

끝나지도 않고 시작되지도 않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루프. 영원회귀.

내 추측이 맞는다면. 내 영원회귀에 뭔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날 확률이 높다.

“그래서. 그 왕이라는 게 누군데.”

“낸들 아냐? 당연히 그건 나도 모르지!”

“…쓰읍.”

“그 여섯 문장의 의미도 모르겠어서 미치겠구만. 그걸 내가 알았으면, 이렇게 영문도 모르고 도망이나 치고 있겠냐? 응?!”

크로스 박사는 답답하다는 양 가슴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물론 답답한 건 듣고 있던 나도 매한가지다. 혼란스러운 나머지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래도 정말로… 뭔가를 듣긴 했군.”

“그래! 그렇다니까? 그렇다고 했잖아, 내가!”

“그래. 믿는다. 이 정도면 믿을 수밖에 없겠어.”

“으, 응? 그, 그래. 고맙다……?”

순순히 인정하자, 크로스 박사는 되레 놀란 눈치다.

짐짓 점잖은 척 헛기침을 하지만. 숨길 수 없는 기쁜 기색이 온몸에서 물씬 느껴졌다.

‘짠하구만, 저것도.’

본심은 몰라도, 표면상으로라도 믿는다고 말해줬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히도 기쁜 것이다.

‘알지. 어떤 기분인지.’

내가 회귀자라는 걸 설명할 때. 수아가 으레 보여주던 일그러진 표정이 어른거렸다.

역시 동병상련을 너무 자주 일으킨다. 이 새끼.

“그, 근데. 갑자기 무슨 근거로 날 믿는다는 거냐?”

그리고 믿어줘서 기쁜 것도 잠시.

크로스 박사의 얼굴이 바짝 일그러지며 깊은 의문을 띄웠다. 흥분이 식고 나니 일말의 이성이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의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크로스 박사. 그래서 던전은… 던전 마스터는 뭐냐?”

그저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을 계속했다.

어쩌면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걸 모르고선 아무런 얘기가 진행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크로스 박사는 이마를 바짝 쥐어 싸맸다.

“…뭐냐고? 그렇게 물어봐도. 그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라서, 설명해도 아마 모를 텐데?”

“내가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어. 그러니 뭐라도 설명해 봐라. 빨리.”

“그, 그래. 간단히 말하면. 던전은 실패한 세계야.”

“실패한……?”

던전은 ‘실패한 세계’.

그것이 애덤 크로스가 내놓은, 던전의 정의였다.

“…그, 그리고. 던전 마스터는. 실패자들이지. 낙오자들이고, 의지의 무게에 짓눌려서 꺾여버린 패배자 놈들이야.”

그리고 그것이 던전 마스터의 정체였다.

실패자들. 그리고 실패한 세계.

나는 눈살을 깊게 찡그렸다.

“실패자들이라니. 뭘 실패했는데.”

“몰라. 그, 그건, 다 달라. 던전 마스터들마다 전부 달라. 그렇다고 했어.”

“다르다고……?”

“그래. 어쨌든 놈들은 전부 실패했어. 자기 사명에, ‘의지’의 부응에 실패해서… 그놈들의 세계도, 실패하게 된 거야. 그래서 던전이 생겨나고, 던전 마스터가 돼서, 여기에 다시 나타난 거지. 싫어도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

“이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어. 발표할 때도 대충 이런 식으로 발표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뜬구름 위의 또 뜬구름.

한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의 향연이었다.

‘이건… 더 물어도 소용이 없겠는데.’

애덤 크로스가 맨 처음에 거짓말은 안 했군.

정말 그의 말대로다. 당최 뭔 개소린지, 들어도 도저히 모르겠다.

나는 결국 얘기를 원점으로 돌리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 목소리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다고 했나?”

내 목소리에 담긴 짜증을 느낀 것인가. 크로스 박사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 안 들려. 나도 방금 깨달은 건데……. 정확히 너랑 만난 시점부터, 그 목소리가 안 들리기 시작했어.”

“목소리가 너한테 뭐라고 명령했다고?”

“광대야. 왕이 사라진 옥좌를 찾아내라…라고.”

“잠깐.”

그쯤에서 크로스 박사의 설명을 중단시켰다.

나는 크로스 박사를 빤히 주시했고, 그에 따라 그도 멀뚱히 나를 응시했다.

“…….”

“…….”

한동안 침묵 속에서 시선만 복잡하게 얽혔다.

결국엔 내가 먼저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끝까지 애덤 크로스는 표정 하나 변화가 없었다.

그 태연한 반응에 내가 다 놀랐다.

‘뭐지. 왜지?’

이런 중대 사항을 입에 담고 있잖아.

놈은 정말로 아무 위화감도 못 느끼고 있는 건가? 아니면 모른 척을 빡세게 하는 건가?

그가 태연하게 넘어간 그 부분을, 친절하게 되짚어 줬다.

“그 말은. 그 목소리가 너를 ‘광대’라고 불렀다는 소리가 되겠군.”

“…어?”

“주저앉은 광대. 여섯 개의 문장 중 하나지.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네가 그중의 하나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지 않나?”

“어? 어어어?”

거기서 애덤 크로스가 완전히 벙쪄버렸다.

이 당연한 소리를, 마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는 양. 경악스러운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난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뭘 놀라고 있어. 존나 간단한 추측 아니냐?”

“어, 그… 그게……. 생각해 보니, 그러네?”

크로스 박사가 입을 틀어막고 허공을 주시했다.

깊은 상념에 빠져 무거운 침음을 흘렸고. 이내 혼잣말을 중얼중얼 주워섬기기 시작한다.

“그, 그러네. 왜 그런 당연한 걸… 내가 왜 간과하고 있었지?!”

크로스 박사도 자신의 처참한 지능에 경악한 모양.

놈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고, 이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광대… ‘주저앉은 광대’는, 바로 나였다고……?”

하. 하핫.

허탈한 웃음이 놈의 입에서 질질 새어 나왔다.

아니. 하지만 이게 정말 가능한 상황인가? 애덤 크로스가 살짝 맛이 간 건 맞다만, 그래도 정상적인 뇌는 탑재한 놈처럼 보였는데.

‘이걸 눈치 못 챈다고? 진짜로?’

저놈은 명색이 박사다.

던전 연구에 모든 걸 바쳤고,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까지 딴, 애덤 크로스 험버트 ‘박사님’이란 말이다.

머리가 나보다 안 좋을 리가 없다고.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진짜로… 지, 지금까지, 정말로 머리털도 안 스친 생각이야!”

크로스 박사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곧장 항변해 왔다.

뭐 좋다. 저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은 넘어가 주겠다.

내가 진짜로 묻고 싶은 건 지금부터다.

“어쨌든 끈덕지게 머릿속을 맴돌던 명령이 갑자기 멈췄다. 그것도 나를 만난 직후에?”

눈을 한껏 가늘게 뜨고 크로스 박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피식,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다는 건. 그 목소리가 말하던 ‘비어있는 옥좌’라는 게… 나라는 소리 아니냐?”

“아, 아……!!”

“그 ‘비어있는 옥좌’라는 게 ‘죽어버린 왕의 옥좌’와 같은 의미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가정도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나?”

“아아! 그, 그럴… 그럴 수도. 맞아! 그렇군! 그럴 수도 있겠어!!”

어김없이 찰진 리액션을 연발하는 애덤 크로스.

얘는 X발 방청객 알바 하러 왔냐? 그쯤 되자 슬슬, 그의 생각 없음에 분노까지 느꼈다.

“크로스 박사.”

한 번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은 선 넘었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 놈의 면전에 극딜을 먹이기 시작했다.

“넌 지금 제정신이 맞긴 한 거냐?”

“아, 아니! 그게……!”

“이 정도 간단한 추리도 못 떠올린다니. 돌아버린 게 아니고서야 그럴 수가 있냐.”

“그, 그게… 그게.”

크로스 박사는 연신 ‘그게’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놈의 표정이 의문과 혼란으로 점철되기 시작한다.

“나, 나는. 정말로, 제정신…이었던가?”

농담 반 비난 반으로 던졌던 말이었는데.

생각보다 애덤 크로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다.

아까부터 진짜 농담이 안 통하는 양반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됐어. 의미 없는 소리다. 이제 와서 자학하지 마라.”

“아냐. 자학이 아니고. 나는……!”

“너도 여러모로 혼란스러웠겠지. 그럴 만도…….”

“아니. 아니야. 난, 분명… 제정신이 맞는데. 아닌데. 아니라고! 진짜로 난……!”

하지만 그 순간.

애덤 크로스에게서, 뭔가가 급격하게 변했음을 느꼈다.

“아니. 아니야. 광대라니. 나는… 아니야.”

‘평소에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때부터 혓바닥 위치가 신경 쓰이는 것과 비슷한 건가?

아니. 그런 단순한 변화는 분명히 아니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X발!! 끼어들지 마!!”

분위기가 변했다, 그런 수준이 아니다.

내가 ‘너 미친 것 같다’라는 말을 한 직후. 그가 정말로 미친놈처럼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야. 나는, 나는 괜찮아. 정말이야. 로즈……! 나는 멀쩡하다고! 믿어줘! 제발!! 로즈!!”

갑자기 제 혼자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다 싶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로즈 휴스턴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울분에 찬 목소리. 그리고, 처절하게 울먹이는 얼굴이다.

“…크로스 박사?”

원인 모를 불안감이 가슴에 들어찬다.

갑자기 크로스 박사가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척 봐도 느껴지잖는가.

저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뭔가가 잘못돼 간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진실에 닿기 직전마다, 항상 무언가가 기막힌 타이밍에 견제를 들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비슷한 직감이 등줄기를 후려쳤다.

‘우선은 재워버려야……!’

파지직!

푸른 마력의 섬광이 손아귀에 맺혔다. 스킬 영창이 완료되자마자, 그것을 곧장 크로스 박사의 면상을 향해 들이밀었다.

파스슥! ‘슬립’ 스킬이 크로스 박사의 피부에 스며든 순간.

[알림: 스킬 사용 불가]

[해당 대상은 모든 스킬에 면역 상태입니다. 스킬 효과를 일체 무시합니다.]

삐빅.

난리 통에 잊고 있던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아.”

스킬 면역.

지금의 애덤 크로스는 재머의 영향으로, 이브와 똑같은 상태.

‘현자의 눈’을 제외한 모든 스킬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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