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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4화 (124/235)

124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

꼴깍꼴깍. 한동안 이브의 목울대가 침묵 속에서 출렁였다.

그리고 잠깐 시간이 흐른 뒤.

“음?”

이브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이내 바나나, 커피 맛 우유도 같은 과정을 반복.

한 모금씩 빨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고.

“으음. 으으음?”

한결같이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이내 이브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응. 다 마셨는데 아빠. 왜?”

“어떠냐.”

“…응? 어떠냐니. 뭐가?”

“우유들의 맛. 어땠냐.”

“어, 그냥? 달달했어.”

엄청난 거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호감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요리왕 X룡처럼, 이브의 뒤쪽으로 우주가 대폭발하는 대단한 거부 반응을 예상했는데. 맹탕 같은 리액션에 내가 다 당황했다.

“그리고. 또.”

“그리고? 음. 그, 그냥 달았는데? 어… 약간은 끝맛이 비렸으려나? 일단 우유니까?”

“딸기우유에 비해선 어떠냐.”

“뭐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딜 비벼 비비긴!!”

이브가 아리까리한 얼굴로 고개를 꺾던 중. 딸기우유를 들먹이자 단숨에 표정이 험악해졌다.

꾸짖을 갈. 딸기우유 씹더… 마니아의 역린을 건드려버린 듯하다.

“후우.”

어쨌든 이브의 반응은 확실히 파악했다.

우유의 맛은 둘째 치고. 대뜸 제 아빠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쯤에서 의미도 없는 문답을 그만뒀다.

“방해해서 미안했다, 이브. 먹던 거 계속 먹어.”

“응, 알았어!”

일련의 연구 과정은 이세라도 똑똑히 지켜봤다.

나는 그녀에게 흘깃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는데.”

“흐응. 그렇구나. 이건 좀 재밌네요.”

흥이 짜게 식은 나와 달리, 이세라는 아직도 흥미롭게 이브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이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심각하게 잠겨 있었다.

“이걸로 확실히 알게 됐네요?”

“뭘 말이냐.”

“이브는 달짝지근한 우유면 뭐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 정확히 딸기우유라는 음식만, 콕 집어서 좋아하는 거네요.”

“…그렇게 되겠네.”

갑자기 차분해져서 뭐 대단한 소리 하나 했더니.

얘도 그사이 이브한테 허당기가 옮았나. 맹탕 같은 결론을 지껄이고 있었다.

내 반응이야 어떻든, 이세라는 계속 말했다.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저렇게까지 특정 음식을 좋아한다니. 좀 특이하지 않나요?”

“나도 별 이유 없이 라면을 좋아해. 특이할 일이냐.”

“딱히 특이할 일은 아니죠. 쟤가 정용 씨처럼… 평범한 지구의 인간이면요.”

“…….”

“저건 던전 생물이에요, 정용 씨.”

그 말에는 나도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나를 한층 몰아붙이듯, 이세라가 계속 말했다.

“뭔가 착각을 좀 하고 계신 거 같은데. 사람이 아니잖아요. 진짜 정용 씨 딸내미도 아니고요. 행동이나 습관 같은 일거수일투족, 어느 구석이든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고요.”

“으음. 그야, 뭐.”

저렇게 말하니 또… 특이할 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아리까리한 내 앞에서. 문득 이세라는 무거운 침음과 함께 말했다.

“정용 씨.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저 애가… ‘딸기우유’라는 음식만 유독 좋아하는 이유. 정말로 뭐 짚이는 거 없으세요?”

“흐음.”

진득하게 상념에 잠겨봤다.

이브가 딸기우유만 유독 좋아할 이유라.

‘당장 생각나는 건, 그냥 각인 효과 정도인데.’

태어나서 처음 먹은 음식이 딸기우유다.

그렇다 보니 유난히 인상이 깊게 박혀서, 그대로 좋아하게 된 게 아닐까 싶은데…….

연이어 생각이 꼬리를 물던 와중.

“처음으로 마셔본. 달달…한, 딸기우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퍼뜩, 뇌리를 섬광처럼 후려치는 장면. 그것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

무심결에 얼빠진 탄성을 흘렸고. 이세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얼굴을 퍼뜩 가까이 가져왔다.

“뭔가 생각났나요?”

“생각…이 나긴 했는데. 관련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뭔데요? 이상해도 괜찮으니까, 일단 말해 봐요.”

“그때. 냉장고에 하필이면 딸기우유가 있었던 이유. 왜일 거 같냐.”

“으응? 뭔데요?”

“수아가 딸기우유를 좋아한다. 꽤 많이.”

“아……!”

물론 지금의 이브만큼 환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래. 분명 그랬었다.

“분명히 수아는, 딸기우유를 좋아하는 편이야.”

난 그걸 알고 있기에 냉장고에 딸기우유를 쟁여놨던 거였다.

그 딸기우유는 원래… 그날도 어김없이 찾아올, 수아가 먹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분명.’

내가 수아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

생각해 보면 그때도 그랬다.

‘수아는 딸기우유를 건네줬지. 나한테.’

그건 강수아가 언니와 나눠 먹으려고 샀던 딸기우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니까. 본인이 기운 내고 싶을 때 먹던 거니까.

그랬기에 실의에 빠진 내게 딸기우유를 나눠줬던 거였다.

“…수아. 강수아.”

이세라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내 그녀가 황급히 물어온다.

“분명, 정용 씨가 지키려는 사람의 이름이었죠?”

“맞아.”

“이브가 어째선지 엄마라고 부르고 있다는, 그 사람이기도 하고요?”

“…맞다.”

“그럼, 그러면. 이건.”

이세라가 중얼거리다, 말끝을 점점 흐렸다.

안대로 감싸진 얼굴이 나를 흘깃거린다. 한참 눈치를 보던 끝에, 이세라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차라리 우연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깊이 동감한 나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음식의 취향이 겹치는 건 우연일 거다. 우연이어야 한다.

‘저게 우연이 아니라면…….’

수아와 이브의 알 수 없는 연결 고리. 그것이 한층 강화된다는 소리니까.

우연이 아니면, 곤란하다.

* * *

생각지도 못한 고민거리가 생겨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일까. 옆에서 이세라가 꼼지락거리다 못해,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음?”

정신 차린 나는 이세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팔다리를 배배 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

잠깐 왜 저러는지 생각을 해봤고. 이내 짐작 가는 게 하나 생겼다.

나름 젠틀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대충 멀찍이 아무 데나…….”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이세라가 얼굴을 확 붉히며 말을 잘라먹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읽힌 것 같은데. 화장실 이슈는 아니었던 듯하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냐.”

“아, 아뇨. 그게…….”

이세라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술을 질근 악물었다.

뭔가 속내를 숨기려는 기색. 그녀를 추궁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지만, 이번에도 이세라가 한 템포 빨랐다.

“저기, 정용 씨.”

“왜.”

“저 믿으세요?”

“……?”

뭔가 익숙한 대화의 구성이다.

이거 어제 오원태 연구실에서, 내가 이브 설득시킬 때 했던 소리 아닌가.

‘…이런 느낌이었구나, 이브.’

이거 역으로 당하니 약간 골이 띵해진다.

어쨌든 대답 못 할 이유는 없지. 일단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너는 믿지.”

단호하고 확신에 찬 대답에, 이세라가 약간 안심한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내 꽈악, 그녀가 내 옷깃을 붙들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확실히 말해주니까… 저도 좀, 용기가 나네요.”

기분 탓은 아니었을 거다.

옷깃을 붙잡은 이세라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야. 이세라…….”

“잠깐.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보세요.”

이내 이세라가 주머니를 뒤적여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고. 그 위에 마력을 운용해 글자를 휘갈겼다. 그리고 스륵. 그것을 내 주머니에 자연스럽게 꽂아 넣었다.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짓이지.’

내가 그것을 언급하기 전에, 퍼뜩!

이번에도 귀신같은 타이밍에 이세라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정용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갑자기 뭔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세요. 알겠죠?”

“…그게 무슨.”

“전부 괜찮을 거예요. 모두 예정대로 흘러가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믿고, 제가 뭔가 심한 짓을 당해도… 너무 화내거나 당황하지도 마시고요.”

“…….”

“타이밍이 됐다 싶으면요. 제가 드린 이 종이를 그때 펴 보세요. 아시겠죠?”

말이 끝나자 나도 눈을 부릅떴다.

저건 예언이다. 이제 곧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광고하는 수준의 멘트였다.

벌떡!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겹지도 않냐. 너희들.”

예언은 이미 실현되고 있었다.

서막은, 등 뒤에서 들린 음울한 목소리부터였다.

‘이 목소리.’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시선을 옮겼다.

들려온 그 목소리가 심하게 익숙했다. 나는 저 목소리를, 분명히 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기억 속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 입에 담았다.

“애덤, 크로스……!”

내 기억은 틀리지 않았다.

골목길 너머의 어둠 속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외국인 하나가 보인다.

놈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 날 알고 있구나. 너도 나한테 용건이 있는 거겠지?”

놈은 유창한 한국어로 중얼거리며, 가로등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CCTV 화면으로 봤을 때와 똑같은, 30대 중반 정도의 금발 벽안 남성.

기억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CCTV로 봤을 때보다 훨씬 꾀죄죄한 얼굴과 옷차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

“…….”

외국인 사내… 애덤 크로스가,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정면에 섰다.

한동안 침묵 속에서 대치가 이어진다.

‘드디어.’

드디어 저놈을 만났다.

전생 하나를 전부 소비했고. 서윤이까지 죽여가며 놈을 쫓았고. 그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놈을 쳐다보며 연신 입을 뻐끔거렸다.

‘어떤 말부터 해야 하지……?’

머리가 복잡하다. 정리가 안 된다.

알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사내새끼 만나서, 이렇게 벅찬 기분이 될 줄이야.’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아까부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표정 관리 하느라 고역이다.

“…너.”

그리고 그런 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가.

애덤 크로스가 별안간, 더없이 싸늘한 어조로 뇌까렸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이런. 좀 싸이코 새끼처럼 보였나. 안 좋은 이미지를 주면 곤란한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안색을 바짝 굳혔다.

“아니. 웃겨서 그런 게 아니고…….”

“아니긴. 실실 빠개는 걸 방금 똑똑히 봤는데.”

“…그게.”

“너한텐… 헌터들한텐, 사람 목숨도 다 장난이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시체를 몇십 구나 봤다. 그것도 보나 마나 네가 한 거겠지. 응?”

이번엔 놈이 실성한 듯이 픽픽 웃기 시작했다.

광기까지 느껴지는 위태로운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너희들이 주야장천 벌여대는 X같은 정치질. 잇속 싸움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초 단위로 수없이 뒤져나가는데. 그래도 마냥 재밌어 죽겠지, 응?”

“아니. 오해다. 난 그냥…….”

뒤늦게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이미 늦었다.

애덤 크로스는 얼음장처럼 냉랭한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발 뻗고 자본 적이 없어. 근데 넌. 날 만나서 조금이라도 잇속 챙길 생각에… 웃겨 뒤지겠다 이거냐? 어?”

“…….”

“됐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냐. 전부 소귀에 경 읽기지.”

이내 원망하는 것조차 지친 듯, 애덤 크로스는 비릿한 조소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땅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의 눈은… 초점이 반쯤 죽어 있었다.

문득 놈이, 지나가듯 툭 물어온다.

“…한국 헌터 협회 놈들을 죄다 죽여버린 거. 너 맞냐?”

한국 헌터 협회 놈들.

누굴 지칭하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내가 해운대에서 죽여버린 사람은 슈레더 놈들밖에 없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내가 했다.”

“너는 그러면, 한국 헌터 협회 소속이 아닌 거냐?”

“일단… 협회 소속은 맞다만.”

“흠, 내부 분열 같은 건가? 너는 한국 헌터 협회 내의 또 다른 세력이냐?”

“좀 다르지만 비슷하다.”

슈레더에 대해 설명하기 귀찮으니 대충 긍정했다.

그나저나… 지금 놈과 3분 좀 넘게 대화를 했는데. 나는 한편으론 굉장히 안도하고 있었다.

놈의 한국어가 네이티브 수준으로 술술 나오는 점 때문이다.

‘살았다. 이건 진짜 다행이야.’

솔직히 이놈을 만날 때 걱정했던 점을 꼽으라면. 가장 처음으로 나올 부분이 바로 언어의 장벽이었다.

무식한 내 입장에선 더더욱 그랬다.

‘내가 영어를 전혀 못 하니까.’

최종 학력 고등학교. 그나마도 중퇴.

고졸도 아니고 중졸이라는, 막강한 인생 막장 스펙 보유자 한정용.

아는 영어 회화라곤 ‘하이, 하와 유?’와, ‘아임 파인 땡큐, 앤유?’로 이어지는 업계 국룰 프레이즈 정도.

‘스킬이나 아이템 중에… 번역 관련이 있긴 할 텐데.’

물론 있긴 하다만.

그딴 잡동사니 아티팩트를 하나라도 계승했을 리가 만무하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내가 알았겠냐고.

그래서 애덤 크로스가 한국어를 잘한다는 건, 내 입장에선 상당한 호재였다.

“뭐, 그래. 어디 소속이면 어때. 뭐가 달라진다고.”

그 순간, 별안간 애덤 크로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말을 연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어디 소속의 누구든 상관없어. 난 누구에게도 놀아나 줄 생각 없다.”

찰그락.

놈이 별안간 흰 가운의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쉬쉭! 무언가를 한 움큼 쥐어 이쪽으로 힘껏 던졌다.

“옥좌를 찾아내기 전까진, 절대로!”

위기감이 등줄기를 후려쳤다.

그야말로 순간적인 판단이었다. 나는 단숨에 이세라와 이브 앞을 막아섰다.

본능적으로 현자의 눈부터 기동했다.

‘이건……!’

크로스 박사가 날린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찰나였지만.

날아온 그것이 폭발하는 것 또한, 찰나면 충분했다.

파지지직! 강렬한 섬광이 눈앞에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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