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3화 (123/235)

123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

시작은 누구였는지 나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끝은 예상대로였다.

“크하악… 칵, 쿨럭. 커헉!”

다른 슈레더 조무래기들은 진작에 전부 토막 나 널브러졌다.

다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서 있는 자. 이 전투의 종막을 장식할, 슈레더 최후의 1인.

그 주인공은 역시나 장수혁이었다.

“허억… 헉, 커헉.”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끝이다.

장수혁의 가슴팍 한복판엔, 내가 깊숙이 박아놓은 크로노스 대거가 있다.

그 덕에 피가 십수 분에 걸쳐 줄줄 쏟아졌으니. 이미 고위 헌터라도 버틸 수 없는 출혈량을 자랑하는 중이다.

“스으… 크훅. 새액……!”

장수혁의 호흡은 아까부터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불규칙하게 붕괴해 가고 있었다.

“왜… 주, 죽이지… 커헉. 않는, 거냐……!”

그럼에도 장수혁은 끝까지 내게 이빨을 들이민다.

쇄애액! 질문과 함께 두 자루의 날붙이가 내 사각으로 날아왔다.

뒤통수로 소드브레이커. 왼쪽 측면으론 손도끼가 쇄도한다.

“…….”

질문조차 내 빈틈을 넓히기 위해 던진 것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새끼다. 우리 수혁이.

“왜긴. 그야.”

물론. 나는 장수혁의 집념어린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놈의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당연히 의표도 찔리지 않았다.

“재미있으니까.”

비웃듯이 대답하며, 가차 없이 단검을 휘둘렀다.

채채챙! 소드브레이커와 손도끼가 차례로 튕겨 나갔다.

허공을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탱그랑.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진다.

‘떨어졌다?’

날붙이들이 허공에서 제동하지 못했다.

부력을 잃었다. 말인즉슨, 장수혁의 어검술 발동이 해제되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장수혁을 쳐다봤다.

“그으… 후욱. 끄… 으욱.”

죽기 직전의 짐승이 내는 그르렁거림.

장수혁의 두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이미 반쯤은 시체의 그것이었다.

“크… 그어어……!”

그럼에도 한 손에 펄션을 들고 나를 겨누고 있다.

그 집념 어린 적의와 투지는,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뭐, 이쯤 해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천천히 장수혁에게 다가갔다.

스릉. 블라이스의 단검을 역수로 쥔 다음, 놈을 향해 까딱거렸다.

“마음 같아선 리스토레이션도 써먹고 싶은데. 내가 지금 좀 바쁘다.”

“하악… 카학. 훅. 스으…….”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한다. 이번에는.”

“흐… 흐윽?”

그래. 이걸로 만족했을 리가.

여기까지라 함은. 어디까지나 이번 생에 한해서다.

“만약 다음이 온다면 말이다.”

우드득! 나는 놈의 머리채를 힘껏 붙잡았고.

강제로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때도 꼭 또 보자. 수혁아.”

푸각! 장수혁의 정수리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피부와 뼈를 뚫고, 그 외 자잘한 것들을 꿰뚫는 이물감이 손바닥에 전해지길 잠시.

삐죽. 단검의 칼끝이 놈의 턱살을 뚫고 솟아 나온다.

“꺼, 허… 극.”

장수혁이 마지막 숨과 함께 피를 울컥 토해냈고. 눈알이 핑 돌아갔다.

부들부들 경련하던 몸뚱이가 추욱, 늘어졌다.

“…….”

잠깐 허공을 빤히 응시했다.

얼마나 그렇게 멍을 때렸을까. 퍼뜩, 뒤늦은 깨달음에 고개를 휘저었다.

“아. 참.”

나 지금 던전 붕괴 막은 게 아니었구나.

얘네 몬스터 아니고 사람이었지. 방금까지 던전 폐쇄 패널이랑, 보상 패널 나오길 대기하고 있었다.

피식.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걸렸다.

‘이제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도 안 되는 지경까지 왔나.’

아니. 그것도 아닌가. 어쩌면 이미 진작에 분간 못하는 지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진작부터 괴물로 전락했고. 지금의 나는 그저 사람을 연기하는, 인간 언저리일 뿐이었던 거지.

“…정용 씨?”

혼자 궁상을 떨고 있자니.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이세라가 이브와 함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쓸데없는 상념을 접고, 기지개 켜듯 허리를 쭉 폈다.

“안 다쳤냐. 이세라.”

“그, 그건 제가 물어볼 말이죠. 정용 씨야말로… 괜찮으세요?”

이세라가 장수혁의 시신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분위기를 보니, 단순히 신체의 건강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 멘탈 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악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멀쩡해. 보다시피 존나게 멀쩡하다.”

“…그렇군요.”

이세라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이내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침묵했다.

그녀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이다.

“다, 다행이네요. 저도 멀쩡해요.”

“그래. 그래 보인다.”

그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려는데, 툭툭. 별안간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브였다. 그녀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린 채 날 쳐다보고 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냐. 이브.”

“아줌마는 물어봐 주고, 나는 왜 안 물어봐. 아빠.”

“뭘.”

“나도 물어봐. 괜찮냐고!”

“…뭐?

“걱정해 달라고! 아줌마만 위험했어? 나도 똑같이 위험했잖아? 치!”

“…….”

이놈의 외계인 애새끼는 하다 하다, 별 이상한 거로 경쟁심을 불태우는군.

사고방식이 이해가 안 돼서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어려울 건 없는 부탁이니,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다친 데는 없냐, 이브.”

“응. 없어!”

“그래. 참말로 다행이구나.”

“응! 히히.”

그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브.

엎드려 절 받고도 저리 기분이 좋아질 수가 있을까.

나이를 좀 먹었어도, 이세계 하얀 머리 외계인의 심리는 여전히 우주처럼 심원하다.

“뭐… 어쨌든. 시간이 지체됐네. 여길 중심으로 수색이나 계속하자.”

나는 옷가지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냈고. 두 사람을 재촉하며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그 순간, 별안간 이세라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기, 정용 씨. 그거 말인데요.”

“그거가 뭔데.”

“그, 정용 씨가 찾는 연구원들이요.”

“어. 그거. 그게 왜.”

“그 사람들요. 곧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

듣던 중 반가운 소리긴 했다만, 뜬금없어도 유분수다.

하지만 황당하긴 해도… 예언자인 이세라가 하는 말이다. 저게 재미없는 농담이 아닌 이상, 없는 말을 지어냈을 리는 없다.

눈을 부릅뜬 채 그녀를 빤히 주시했다.

“잘됐네.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냐.”

“가만히 있으세요.”

“뭐라고?”

“가만히요. 여기 가만히 계시면 된다고요.”

“…….”

“그러면 만사 오케이. 모든 게 잘 풀릴 거예요. 응!”

해결책은 한층 더 황당했다.

나는 결국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허, 헛숨을 들이켰다.

“너 마법의 소라고둥이냐.”

“어… 그, 그게 뭔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못 믿겠다는 소리죠?”

“비슷해.”

“좋아요. 그럼 내기라도 할까요? 진 사람은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이세라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제안을 해왔다.

진짜 내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소리는 아닐 거다. 내기를 걸어도 될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굉장히 확률이 높은 미래가 보였던 모양이다.

“전 재산 거덜 날 일 있냐. 너랑 예측 내기를 하게.”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본격적으로 대기할 준비를 했다. 이세라의 예언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슈레더를 역추적한 게 정답이긴 했나 보다.’

헛고생은 아니었다는 게 무엇보다도 다행이다.

이렇게나 서로 개고생해가며 미친 듯이 죽여댔는데. 슈레더가 단순히 해운대로 단체 워크숍 왔던 거였어 봐라.

슈레더 친구들이나 나나, 오열 질질 쌌지.

“에이, 재미없게.”

이세라도 입맛을 다시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라락. 묵직한 존재감이 지척에 자리 잡았다.

“……?”

이세라의 체향이 순간 코끝을 스쳤다.

기분 탓인가. 서로의 거리가 좀 지나치게 가까웠다.

“음.”

나는 슬쩍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스르륵, 그녀도 나를 따라 엉덩이를 슬금슬금 붙여온다.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 옮겼고. 어김없이 이세라가 그런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

“…….”

내가 옮겨 앉고. 이세라도 옮긴다.

그것의 반복, 또 반복. 우리는 슬금슬금 옆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었다.

“아니, 아빠. 아줌마랑 뭐 해……?”

보다 못한 이브가 한심하다는 양 물어온다.

나는 그 자리에 덜컥 멈춰버렸고. 그 틈을 타서 이세라가 다시 한껏 거리를 좁혀왔다.

그리고 꾸욱, 이젠 내 소매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한껏 끌어당겼다.

“그래요. 사람 무안하게 왜 자꾸 도망가요? 애도 아니고.”

“아니. 그게.”

“괜히 그렇게 의식하는 게 더 이상해요. 제가 뭐 잡아먹어요?”

“그건 아니긴 한데.”

“그렇죠? 곧 12월이라 날씨도 추운데. 좀 붙어 있자고요.”

“…쓰읍.”

“아으, 진짜 너무 추워! 누구 때문에 사람 찾다가 감기 걸리겠다~ 아아~ 너무 추워 미치겠네~~”

“알았어. 그만해라. 가만있는다고.”

그렇게 앉은뱅이 추격전은 종료됐고. 나는 빼도 박도 못한 채 이세라의 옆에 딱 붙어서 앉았다.

그런 내 반대편으로 털썩, 이브까지 주저앉았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포위진이 완성되었다.

“…….”

“…….”

“…….”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골목길로 몰아치는 초겨울의 바람 소리.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그렇게 얼마나 죽치고 있었을까.

“아… 이브.”

나는 문득 이브를 부르며, 아공간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보수 정산을 위해서였다.

“이거. 받아라.”

파지직!

희미한 스파크와 함께 다시 등장한 내 손 위. 수많은 딸기우유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이브의 앞에 우수수 쏟았다.

“약속한 보수다.”

“오, 헤에!”

“이번엔 좀 아껴 먹어라. 나중에 또 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응! 응응! 그럴게! 무조건 그럴게!”

이브는 아찔한 탄성을 흘렸고. 허겁지겁 딸기우유를 쓸어 담았다.

이내 딸기우유를 품에 한 아름 끌어안은 그녀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우, 흐흐. 츄릅.”

이브가 안달복달하는 기색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파각! 우유 팩에 허겁지겁 빨대를 꽂고, 숨넘어갈 듯이 빨아 마시기 시작했다.

꼴깍꼴깍. 이브의 목울대가 쉼 없이 움직였다.

“푸햐아!”

한참 후.

빨대에서 입을 뗀 이브가 홀린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으헤헤. 언제 먹어도 진짜 맛있어. 최고야아…….”

만면에는 더없는 황홀경. 지고의 행복을 거머쥔 모습이다.

보는 내가 다 복스러워질 수준.

“…허.”

가장 행복한 인생은 가장 단순한 인생이라던가.

딸기우유 하나면 행복해지는 저 뇌를, 내 대가리에 탑재해 보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이브는요, 딸기우유를 되게 좋아하나 봐요?”

그 순간. 이세라가 이브를 흘깃대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나는 당연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하는 수준이 아니야. 환장을 하지.”

“아하. 나름 저 애의 소울 푸드 같은 걸까요?”

“비슷하다.”

“어쩌다 저렇게 딸기우유를 좋아하게 됐죠?”

“그건…….”

대답해주려다 덜컥,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왜냐니? 생각지도 못한 의문에 의표를 찔린 것이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는데.”

그냥 그때 냉장고에 뒹굴던 물건이 딸기우유였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꺼내다 줬는데. 이브는 그 뒤로 딸기우유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뿐이다.

나는 그 과정을 가감 없이 이세라에게 설명해 줬다.

“흐음. 그렇구나.”

이세라는 일단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흥미진진한 얼굴을 한 채, 질문을 이어 나갔다.

“첫입에 반해버린 거네요?”

“그런 느낌이지.”

“그렇다는 건, 딸기우유 외에는 일부러 뭘 먹여본 적은 없다는 소리죠?”

“그렇지.”

“뭔가 다른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은 있나요?”

“있다. 평범하게… 잘 먹었어.”

대답하다 무심결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건 다름 아닌 이세라, 네 주점에서. 다 같이 과일 화채를 먹었기에 아는 사실이다.

아무튼 이세라의 질문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다른 음식들도 딸기우유처럼 환장하던가요?”

“그렇진 않았는데.”

“그러면, 그러면요. 다른 달짝지근한 우유 시리즈들도, 저렇게 좋아하려나요?”

“으음.”

이세라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끊임없이 물어온다.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

의미 없는 질문을 연발하는 이세라에게 의문을 품는 한편.

“…으으음.”

지금까지 궁금할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부분인데.

이세라가 물어보는 바람에, 마지막 건 나도 살짝 궁금해졌다.

“좋아. 기다리는 동안 시험이나 해보자.”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고, 꺼냈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우유 팩… 바나나, 초코, 그리고 커피 맛 우유가 차례로 들려 나왔다.

그쯤에서 이브를 불렀다.

“이브.”

“으응? 왜애?”

“이거. 한 번씩만 마셔봐라.”

“…응?”

이브는 멀뚱한 눈으로 우유들을 쳐다봤고. 이내 홀린 듯이 받아 들었다.

그녀가 나와 우유 팩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빨대를 뜯어 콱, 우유 팩에 쑤셨다.

첫 타자는 초코우유였다.

“우음.”

쭈우욱.

빨대를 타고 올라간 초코우유를, 이브가 꼴깍꼴깍 삼켰다.

“…….”

“…꼴깍.”

이게 뭐 대단한 볼거리라고.

나와 이세라는, 사뭇 긴장된 얼굴로 이브의 리액션을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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