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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22화 (122/235)

122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

결국 나의 판단은 정답으로 드러났다.

그 뒤로도 슈레더의 습격은 2차, 3차, 그리고 4차까지. 줄기차게 이어졌다.

“끄하악!”

“커… 허억!”

물론 놈들은 이렇다 할 위협은 되지 않았다.

3차 습격 때부턴 그냥 혈천갑도 쓰지 않았다. 이브에게 줘야 할 딸기우유 개수가, 서울의 부동산 시가 마냥 통제 불능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카하아악!!”

사실 딸기우유 수급이 딱히 어려운 건 아니다만.

애 버릇 나빠진다. 그리고 이빨 썩는다.

“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그리고 4차 교전에서 놈들을 깔끔하게 몰살한 지금.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거였군.”

슈레더가 습격해 온 게 아니었다.

놈들은 지금 철저한 수비 태세. 방어를 하고 있었다.

“습격자는, 오히려 나였나.”

갑작스럽게 들쑤시고 찾아온 외부인, 한정용의 습격.

나한테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기 구역을 사수하는 것이다.

‘증거는…….’

지금까지 만난 슈레더의 팀장들이 내뱉었던 첫 대사.

그들은 항상, 이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서 서문을 텄다.

“헌터 협회 감시과에서 나왔습니다.”

“한정용 헌터 되십니까.”

“잠깐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이것 자체가 결정적인 증거였다.

놈들은 암부.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비밀 단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쾌히 죽여버리는 비정한 놈들이다.

‘그런 슈레더가 굳이. 일단. 어떻게든. 이 주변에서 날 이탈시키려 했다.’

원래가 말보다 칼이 앞서는 새끼들인 주제에.

헌터 협회 감시과라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까지 지껄여서 말이다.

‘놈들의 목적이 공격이 아니라, 수비라는 증거.’

처음이나 두 번째 조우까진 그렇다 쳤다.

하지만 세 번, 네 번이 반복되자 나는 위화감을 느꼈고.

이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구나.’

슈레더는 카일 인더스트리와 연관이 있다.

직접적인 연관은 없더라도. 최소한 헌터 협회 수뇌부와 슈레더의 장수혁은, 애덤 크로스라는 인물을 확실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애덤 크로스가 해운대에 있는 지금.

슈레더가 구역마다 꼼꼼히 배정되어, 자기 구역을 필사적으로 사수하고 있다.

‘이게 우연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그렇다면 놈들이 이곳에서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혹시 카일 인더스트리의 연구원들은 아닐까?

이걸 반대로 얘기하면, 이런 소리가 된다.

‘슈레더가 배치된 곳을 역으로 추적하면. 그 연구원들을 만날 수 있을지 몰라.’

확정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해볼 가치가 있다. 그 일말의 가능성을 사냥하기 위해 해운대까지 온 거다.

“끄아아아악!!”

“크하아악!!”

부디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고생한 가치가 있기를.

5차 슈레더 습격을 분쇄하는 와중. 그런 염원을 떠올렸다.

* * *

지겨운 반복 작업.

지겨운 살육과 지겨운 비명을 얼마나 더 감내했을까.

거물이 등장했다.

“대체 어떻게… 내 부하들을 다 죽인 거냐. 이 개새끼야.”

유들유들한 인상에 건장한 체격의 내 또래 남자.

슈레더의 8차 습격을 지휘하는 남자는… 무려 슈레더의 헤드. 장수혁이었다.

내 일방적인 살육 행진을 보다 못해, 수장이 직접 행차한 듯하다.

“한정용. 넌, 대체 뭐 하는 새끼냐? 정체가… 뭐야?”

정갈하게 정리된 투 블럭 머리칼 아래, 죽 찢어진 뱁새눈. 얇은 눈꺼풀 사이로 날카로운 안광이 날 훑어 내렸다.

뱀이 피부를 기는 듯한 불쾌감이 전신에 치달린다.

“한정용. 25세. D급 헌터. 충남 예산 출생.”

그리고 난 대답해 주기 시작했다.

장수혁은 물론이고, 이세라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쳐다봤다.

그러든 말든. 나는 대답을 이어 나갔다.

“헌터 일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지금 기준으로 대충 7년쯤 전. 부양자였던 아버지가 죽어버렸고, 집구석에는 거액의 빚이 남아있었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생활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어치워, 새끼야!”

“…….”

“누가 X발 그딴 거 궁금하댔냐? 개소리하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정체가 뭐냐’라고 물어봤잖아.

그래서 묻는 말에 대답해줬더니. 왜 개지랄이지.

‘하긴.’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 새끼와 뭔 말을 더 섞겠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 정체. 그래.”

어떤 대답을 원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사나운 미소를 입가에 두른 채,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네 저승사자다.”

투학!

지면을 박차고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얼빠진 장수혁의 면상이 순식간에 지척까지 치달았다.

“큿!!”

채애앵!

두 줄기 섬광이 일점에서 맞닿았다. 금속음이 길게 퍼지며, 묵직한 진동이 찌르르 울린다.

호오. 나는 장수혁을 향해 옅은 탄성을 흘렸다.

“이걸 막네. 수혁이 제법이야.”

“이… 새끼……!”

키리릭. 키긱!

나와 장수혁은, 단검과 손도끼를 맞붙은 채 대치하고 있었다.

“크우욱!”

장수혁이 연신 힘에 겨운 신음을 흘렸다.

놈의 머리통 바로 위에 내 단검이 짓누르고 있었고. 장수혁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어렵사리 그것을 막아내고 있다.

이내 놈의 눈가에 짙은 오기가 번득였다.

“D급, 주제에… X발!! 깝치지 마!!”

쿠우웅!

장수혁을 중심으로 무형의 마력이 파동처럼 퍼져나갔다.

이 특유의 운용법. 발동된 스킬을 단박에 파악한 나는, 그대로 백스텝을 밟아 거리를 벌렸다.

“죽어어어!!”

직후, 쉬리릭!

장수혁의 기합성과 함께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무언가가 내 등을 노리고 날아온다.

“안 되지.”

하지만 전부 예상하던 바다.

채챙! 가볍게 상체를 비틀어 두 번의 참격. 드높은 금속음이 지척에서 울려 퍼졌다.

가소로운 나머지 중얼거렸다.

“당해주는 것도 원투데이다. 수혁아.”

두 자루의 특이한 검이, 참격에 튕겨 나가 허공에서 흐느적거렸다.

장수혁의 소드브레이커. 그리고 펄션이었다.

“이럴, 어, 어떻게……!”

어검술을 이용한, 비장의 양쪽 측면 동시기습.

장수혁은 그것이 실패하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간파당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해봤다는 표정.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뿐이다.

“크윽!”

놈은 금세 평정을 되찾고 손을 까딱였다. 그 손짓에 반응하듯, 튕겨 나갔던 두 자루 검이 빠르게 장수혁을 향해 날아갔다.

부우웅. 두 자루의 검을 호위병처럼 둥둥 띄운 채. 놈은 손도끼를 내밀어 전투태세를 갖췄다.

“인정하지. 너 이 새끼. 괴물… 괴물 그 자체야. 평범한 D급 헌터가 아니었군.”

“그걸 부하를 여덟 번이나 꼴아박고 알았냐. 슈레더 대장이란 새끼가 좀 띨하구나.”

“이 X발……!”

장수혁은 분노와 경악이 뒤섞인 얼굴을 했다.

분노야 내가 놀렸으니 당연한 반응이고. 경악은 아마,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슈레더’란 말이 튀어나와서 그럴 것이다.

“되도 않는 아가리 털지 말고.”

스르릉.

나도 그쯤에서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것을 장수혁의 미간에 정면으로 겨누었다.

까딱까딱, 최대한 꼴받게 흔들거렸다.

“덤비기나 해. 수혁아.”

장수혁을 향해 빠꾸 없이 도발했다.

물론. 나 역시 지금 장수혁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한 게 많은 상황이다. 마음 같아선 이대로 좌판 깔고, 진득한 대화의 장이라도 마련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겠지.’

그런데도 대화의 시도조차 안 하는 이유.

하다못해 부하 한 놈쯤 생포해서 추궁하거나, 고문할 생각조차 않는 이유?

“나나 너나. 어차피 뭐 하나 알려줄 생각 없잖아.”

“……!”

그게 아무짝에 쓸모없으리란 것을 안다. 숱한 경험으로 뼛속 깊이 새겨졌다.

슈레더는 기본적으로, 추궁이 전혀 의미가 없는 조직이다.

‘서로가 속내는 밝히기 싫고. 상대한테 알고 싶은 건 많고.’

저쪽이나 나나 지나치게 욕심이 많다.

그래서 난 슈레더와 싸울 때는 말을 길게 안 한다. 언제나 그냥 가차 없이 죽여버린다.

원래 패 죽여도 말이 안 통하면, 패 죽이는 수밖에 없는 법이다.

“뭐 하고 있어! 엄호해라!!”

문득 장수혁이 조직원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리고 파팟! 내게 한 줄기 섬광처럼 달려들었다.

성난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거칠지만 날카로운 습격이었다.

“으, 흐아아앗!!”

“하아아압!!”

장수혁의 뒤로 나머지 슈레더 대원들이 추격한다.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나를 향한 의문과 공포가 뒤범벅된 채. 광기의 들쥐 떼처럼 달려든다.

“점점 더 궁금해지는데.”

챙, 챙! 채채챙!

좌 측방, 후방 하단, 정면. 그리고 머리 위.

한 템포 쉰 다음 이번엔 우 측방부터 역순으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장수혁의 3방향 참격을 받아내는 와중.

나는 짐짓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슈레더가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장수혁까지 출동해서 숨기는 무언가라니.”

“닥쳐. 닥치라고 했지, 내가!”

“더더욱 보고 싶어졌어. 아니. 내가 꼭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닥쳐어어어!!”

키기긱!

장수혁이 직접 휘두른 도끼를 유려하게 흘려냈다. 그리고 그 반발력으로 공중에 훌쩍 뛰어올랐다.

털썩. 사뿐히 착지한다. 이세라의 바로 옆이었다.

“이세라. 이브 좀 부탁한다.”

“…네. 걱정 마세요.”

파지직!

이세라가 이브를 힘껏 끌어안았고. 그녀들의 주변으로 샛노란 배리어가 구축되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세라는 그래도 전 S급 헌터.

직접 전투 능력은 C급에조차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보조계 스킬인 배리어의 구사만은 S급의 명성에 걸맞다.

여기서 저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 건 나나, 장수혁 정도뿐이다.

“잘 숨어있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꼼짝도 하지 마.”

“네. 정용 씨도… 조심하세요.”

걱정할 사람을 걱정해야지.

이세라의 말에 쓴웃음을 짓는 한편. 나는 재빨리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파지직!

내 앞으로 반구형의 방어막이 빠르게 생성되었다.

직후, 콰콰콰쾅! 수많은 스킬의 폭격이 방어막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그 잠깐을 못 기다리냐. 새끼들.”

지축이 진동하고 폭연이 자욱한 가운데. 가려진 시야 너머를 향해 중얼거렸고.

피피피핑! 방어막에 응축된 마탄들을, 일제히 되돌려 보냈다.

“끄아아악!”

“카하악!!”

폭연 너머로 단말마가 들려온다.

현자의 눈을 발동. 연기 너머 상황을 대충 파악해 봤다.

대부분의 슈레더는 반사된 탄환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지만. 상대적으로 민첩이 떨어지는 마법사 몇 명이 절명한 듯했다.

“하아아앗!!”

어느 순간 비명 같은 고함이 가까워졌고.

푸화악! 폭연을 뚫고, 사방에서 사람의 신형이 달려들었다.

“이야아아!!”

“으아아아악!!”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슈레더 대원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킬 발동.’

거부하진 않는다.

오히려 환영이다. 빨리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뿐이다.

배리어를 해제하고, 재차 놈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킬 발동: 글레이프니르]

쿠르르륵!

허공에 열린 거대한 문. 그 안의 질척한 무저갱에서 꿈틀거리는 사슬 다발이 쏟아진다.

내 주위의 타깃을 단숨에 포착하고, 쏜살같이 날아가 속박했다.

“끄헉!”

“이, 이건, 뭐야……!”

가장 앞서 달려들던 열 명. 검게 일렁거리는 사슬에 사지를 칭칭 묶였다.

한계까지 상체를 낮췄다. 빠르게 동선을 계산한다.

‘여유 시간 5초.’

사람 열 명 죽이기엔 충분하고도, 잔돈이 남을 시간.

지면을 박차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발동: 비약]

어김없이 5연속으로 발동.

혈천갑이 없던 시절만 해도 나의 주력기였던 스킬이다. 그 어떤 스킬보다도 익숙하다.

속박계 스킬과의 연계는, 예전부터 효과가 만점인 편이었지.

“후우.”

가볍게 숨을 머금고, 허공을 연신 차올렸다.

파파파팍! 순식간에 지그재그로 다섯 번의 도약. 내 신형이 사슬 사이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끄……!”

“푸허억!”

뿌드득!

열 명 전원. 허리 부근에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다.

“…끄르륵!”

열 개의 신형이 동시에 두 동강 났다.

5초가 지나고 사슬이 사라지자, 털퍼덕. 총 20개의 고기조각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열 명 모두 즉사. 몰살이었다.

“이럴… 수가.”

“히, 히이이!!”

용맹 무쌍하게 돌격하던 슈레더 대원들에게,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다.

그만큼 압도적이고. 잔혹하고. 또한, 패악적인 광경이었다.

나는 단검에 잔뜩 묻은 피를 휙휙 털어냈다.

“숨지 마라. 장수혁.”

키잉!

대충 털어낸 그것을 다시 전방으로 겨누었다.

어느새 폭연은 거의 걷혀 있었고. 그 너머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장수혁이 보였다.

나는 그를 도발하듯, 칼끝을 까딱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이미 없던 일이 되어버린 전생의 끝자락.

나는 놈을 향해 다짐했었다. 절대 곱게 못 죽게 만들겠다고.

분명 이 악물고 그렇게 다짐했었다.

“절대 곱게는 못 죽게 해줄게. 반드시.”

전생에선 양호성의 난입 때문에 그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놈은 양호성의 화염 마법에 허망할 정도로 쉽게 죽어버렸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번 생에라도. 맹세를 지킬 것이다.

“주, 죽여! 죽여버려!!”

장수혁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고. 솔선수범해 행동으로 보여줬다.

쇄애액! 세 자루의 애검과 함께, 재차 쇄도하는 장수혁.

“으아아아아!!”

“하아아앗!!”

장수혁은 신호탄이었다.

슈레더의 모두가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피로 미끌거리는 단검을 한껏 세게 쥐었고.

“와라.”

푸화악! 우드득!

전후좌우.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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