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
예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우르르르! 골목 너머의 어둠 속. 깜빡이는 가로등 빛무리 사이로, 일련의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에 손부터 집어넣었다.
‘정말로 왔군.’
스릉!
손에 익은 청백색 단검을 역수로 쥔다. 그리고 상체를 바싹 낮춰 전투태세를 취했다.
빠르게 사위를 살핀다. 그리고 혀를 찼다.
‘퇴로도 막혔나.’
저벅저벅.
뒤쪽에서도 무수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일련의 양복쟁이들이 퇴로를 단단히 막아서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 앞뒤로 수십 명의 사람이 바글바글. 도망칠 구석이 요원하다.
“무슨 용건이냐.”
먹히지도 않을 D급 헌터 연기는 애초에 관뒀다.
이세라에 따르면, 어차피 우리는 곧 전투할 운명. 저쪽이 나에게 확정적으로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니까.
우릴 둘러싼 양복쟁이들 중 한 명이 터벅.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헌터 협회 소속 D급 헌터, 한정용. 맞습니까.”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건장한 체격에 투 블럭 스타일을 한 30대 정도의 남자. 훤칠한 키와 길게 찢어진 뱁새눈이 인상적이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정용이다.”
“헌터 협회 감시과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동행해 주시죠.”
“무슨 용건이냐고.”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가면서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도 동행해 줄 수 없다.”
“부탁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한정용 헌터.”
“…….”
“따라오세요. 좋은 말로 할 때.”
감시과가 날 잡으러 오다니.
역시 오원태는 배신자였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협박을 해야 했나?’
아니면 리스크를 알고도 놈과 다시 거래했던 것. 그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속으로 오원태를 씹고 있던 찰나였다.
“음?”
모여든 인원들 중, 나는 익숙한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
여자였다. 작고 날렵한 체형에,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수수께끼의 여자.
나는 대번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저 여자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체형도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녀의 정체를 단박에 간파했다.
마력 잔향 덕분이다.
‘현자의 눈.’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 작업은 놓치지 않는다.
삐빅. 곧장 여자의 상태창이 떠오른다.
[인물 정보]
[명칭: 김진희]
[별칭: D급 헌터, 헌터 협회 얼굴마담, 슈레더 소속 암살자]
[체력: 55 마력: 33 신체 상태: 정상]
[힘: 18 민첩: 31 지능: 25 포텐셜: 47]
[최종 전투력: 105]
아니나 다를까.
어제 헌터 협회에서 만났던 친절한 안내양. 김진희였다.
피식, 씁쓸한 조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어쩐지.”
그제야 습격자들의 진짜 정체를 깨달았다.
미안하다, 원태야. 내가 의심 암귀에 휩싸여 생사람을 잡을 뻔했다.
나는 ‘자칭 감시과’ 놈들을 한 번씩 넓게 둘러본 뒤. 비아냥거리듯 중얼거렸다.
“D급 헌터 하나 잡으러 온 감시과치곤, 인원이 너무 많다 싶더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한정용 헌터.”
“장수혁이 나 데려오라고 시키냐? 슈레더.”
“……!!”
대화하던 사내뿐 아니라, 모든 괴한들이 일제히 흠칫 놀랐다.
그 반응이면 충분하다. 다른 놈들 상태창까지 일일이 열어볼 필요도 없어졌다.
한층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어째 감시과에서도 슈레더에서도 전혀 못 본 얼굴들밖에 없다 싶었는데. 그 면상들은 인피면구를 쓴 거냐? 아니면 스킬의 일종인가?”
“…….”
“암부가 갑자기 날 왜 노리냐. 이유나 좀 알고 잡혀가자.”
파지직!
칼날을 타고 뇌전이 흐른다. 그것을 놈들을 향해 겨누었다.
일대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흐른다.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냥은 안 가준다.”
반응은 이미 알고 있다.
이세라의 예언에 따르면. 아마 그들은 대답하길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적중했다.
“…굳이 피를 보는구만. X발 새끼가.”
리더의 가벼운 턱짓과 욕지거리.
부우웅. 문득 후열에 서 있던 한 대원에게서, 묵직한 마력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나는 즉각 파동의 정체를 파악했다.
‘침묵 스킬.’
마력의 성질을 파악하자, 발동된 스킬의 정체도 금세 깨달았다.
그리고 스킬의 정체를 깨닫고 난 뒤. 놈들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바탕하시겠다?’
예측은 정답으로 드러났다.
직후 슈레더 대원들은 일제히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었고.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수많은 발소리가 앞뒤로 우리를 조여들었다.
“아, 아빠……!”
그 숨 막히는 적의를 감지한 걸까. 이브가 불안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소맷자락에 전해지던 이브의 아귀힘이 한층 강해진다.
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
스르륵, 이브의 머릿결을 따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손길을 몇 번 왕복하자, 금세 이브의 얼굴에서 불안이 씻겨 내려갔다.
나는 그 틈을 타 힘있게 속삭였다.
“평소대로만 하면 된다. 이브.”
“으, 으응.”
이브는 내 손길을 보채듯 더욱 머리를 내게 붙여온다.
어째 쓰담쓰담이 여전히 효과 만점이군. 신체의 급성장에 정신이 따라오지 못한 것인가.
생각보다 이브의 내면은, 외형이 어렸던 며칠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세라.”
그쯤에서 이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이브 못지않게 긴장한 표정이었고. 내가 부르자 퍼뜩 어깨를 떨었다.
나는 긴장 풀라는 의미로, 약간 경박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
“너한테 신경 별로 못 써줄지도 모른다. 제 몸 건사할 수 있냐.”
“…글쎄요.”
“시원찮은 대답이구만. 전 S급이면서.”
“그, 그것도 그러네요. 이래 봬도 전 S급이니까요. 노력해볼게요!”
이세라도 결의를 굳힌 듯이 손을 앞으로 뻗는다.
시답잖은 농담들로 분위기를 푸는 사이. 이미 슈레더의 스크럼은 지척까지 다가왔다.
“…….”
선두와의 거리 약 10미터.
헌터가 한 번 도약하면. 칼끝이 맞닿을 거리다.
“이브. 가자.”
놈들의 태세를 주시하는 한편. 빠르게 앞섶을 풀어헤쳐 이브 쪽으로 들이밀었다.
이브는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내 품에 달려들었다.
“아웅!!”
콰지직, 뿌득!
이브가 내 생살을 씹어 삼킨다.
여느 때와 같이 질펀한 파육음과 함께 선혈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
“무, 무슨.”
우리를 둘러싼 슈레더 대원들이, 그 갑작스러운 엽기 행각에 당황했다.
덕분에 놈들은 사고도 움직임도 일시적으로 마비되었고. 일제 습격의 타이밍을 한 템포 뺏겨버렸다.
“…푸하아.”
그 한 템포.
이브가 내 피를 한계까지 빨아들이는 찰나의 시간.
그 시간이, 너희들이 도망칠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한계까지 생명력을 소비합니다.]
[생명력의 50%가 갑주로 환원됩니다.]
쿠르르륵!
이브의 형체가 빠르게 허물어진다. 그 위로 시뻘건 핏줄기가 휘몰아쳐, 갑주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내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피의 갑옷이 단단히 굳어갔다.
“이런……!”
슈레더 대원들이 당황과 낭패의 신음을 흘렸지만. 후회는 늦었기에 후회인 법이다.
키리릭! 나는 오른손의 사복검을 늘어뜨리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변신은 진작에 끝나 있었다.
“후웃!”
짤막한 기합성.
동시에 스스슥! 슈레더 전열(前列)의 몇 명이 유령처럼 홀연히 움직였고. 내 후방을 점하고 나타나, 각자의 무기를 순식간에 찔러 들어왔다.
“하아앗!”
왼쪽에서 길쭉한 트라이던트. 정면은 균형 잡힌 롱소드.
그리고 오른쪽은, 거대한 할버드다.
“…….”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고. 피하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피할 이유가 없어서 그렇다.
“어딜.”
그저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쉬리릭! 매서운 파공음을 흩뿌리며, 붉은 칼날의 파도가 일순 눈앞에 번득인다.
한동안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크헉.”
“꺼, 허억……!”
그리고 털썩, 털썩.
배후의 습격자 세 명이 일제히 쓰러졌다.
“우선 셋.”
모두 상반신이 지저분하게 도려내져 있었다.
처음에 엎어진 건 상반신뿐이었고. 한 템포 늦게, 꼿꼿이 서 있던 하반신들이 뒤따라 널브러졌다.
“X발……!”
“이, 이런 미친!”
슈레더 친구들이 일제히 한 발짝씩 물러섰다.
터무니없이 일방적인 학살로 인한 동요. 당황의 술렁임이 그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이, 일단 후퇴! 거리를 벌려야……!!”
슈레더의 리더가 황급히 명령한다.
아니지. 명령하려 했다만, 순식간에 지척까지 접근한 내게 저지당했다.
“허어억!”
아찔한 신음. 그것이 유언이었다.
퍼걱! 나는 당황으로 벌어진 놈의 입에, 그대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끄욱……!”
푸화악!
놈의 머리통은 그대로 폭발 사산했다.
잘게 조각난 살점과 뼛조각이, 핏방울과 함께 화려하게 비산했다.
“티, 팀장님!!”
“흐, 어……!! 으어어어!!”
경악. 그리고 공포.
놈들의 분위기가 또다시 한 차례 격변했다.
놈들은 뱀 앞의 개구리들 마냥 겁에 질린 채, 분노와 경외를 담아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나는 그 시선을 말없이 응시했다.
철그럭! 늘어진 사복검을 회수해 장검화 했고. 그것을 그대로 놈들에게 겨누었다.
붉은 칼날이 가로등 빛을 받아 번득인다.
“레드 저거너트를 아는 사람이… 벌써부터 있으면 안 되겠지.”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나긋나긋하게, 선고한다.
“내일 해 뜨는 거 볼 생각은 접어라.”
판결을 내린 뒤엔 집행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흐아아아악!!”
“끄하악!!”
“꺄아아아악!!”
푸확! 빠드득!
비명과 절규. 사람이 으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들 손으로 깔아놓은 침묵 마법 덕분에,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 * *
어느 순간. 사위가 압도적인 적막으로 물들었다.
악단의 지휘자처럼 격렬하게 휘젓던 내 손도 그제야 멈췄다.
“후우.”
나직한 날숨을 내쉬었다.
한 꺼풀 긴장을 놓는 한숨.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사위를 슥 훑었다.
“…으음.”
나도 모르게 코부터 막았다.
온통 진동하는 피비린내. 좁은 골목이 온통 살색과 붉은색으로 점철되었다.
두 발로 서있는 이… 아니, 사람의 형체가 남아있는 이조차, 나와 이세라뿐이다.
“끝났네.”
현자의 눈까지 발동시켜 일일이 사망 여부를 확인해 봤다.
그제서야 나는 완전히 경계를 풀었다.
[혈천갑을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립니다.]
우선 혈천갑의 발동부터 해제했다.
쉬리릭! 갑주의 형상이 허물어져 시뻘겋게 허공에 일렁거렸고. 그 중심에서 이브가 순식간에 재구성되었다.
“푸하. 이번에도 힘들었다아…….”
이브는 애늙은이처럼 허리를 두들기며 꿍얼댔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장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손을 뻗었다.
그리고 흠칫. 직전에 멈췄다.
“…….”
이브의 부쩍 성장한 외관이 눈에 띄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건 너무 애 취급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직 생후 2개월 차인데, 애 맞지 않나?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
의문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치길 잠시.
결국 나는 손을 조금 내려, 툭툭.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줬다.
“고생했다. 이브.”
“으응. 격려는 말이 아니라 딸기우유로 부탁해?”
“…그래.”
어느새 발칙한 농담도 할 줄 알게 된 이브.
역시 애가 크긴 컸구나. 미묘한 격세지감을 느끼며 고개를 슬슬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 괴, 굉장하다.”
지금껏 배리어를 둘러치고 숨어있던 이세라였다.
전투가 끝난 지금, 배리어는 진작에 풀어졌지만. 아직 떡하니 벌어진 그녀의 입은 다물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 저, 정용 씨.”
문득 이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러왔다.
나는 태연자약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왜.”
“이, 일단 예의상 물어보긴 할게요. 다친 데 있으세요?”
“있어 보이냐.”
“아뇨……?”
“제대로 봤네.”
“그,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이세라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내 피떡이 된 시신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다시 얼굴을 내 쪽으로 향했다.
“그, 무사하신 것까진 좋은데요. 이래도 괜찮나요?”
“뭐가.”
“다 죽여버려도 괜찮냐고요. 정체는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 차치해도요. 왜 갑자기 정용 씨를 노리고 습격했는지… 그런 걸 좀 더, 추궁했어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요?”
“딱히. 의미 없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쌈박하고 명쾌한 부정. 이세라의 미간에 슬며시 골이 팼다.
“의미가 없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추궁한다고 뭐 하나 뱉을 놈들이 아니야. 약간만 틈을 보여도… 별의별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칼같이 자살해 버리니까.”
“…아아.”
그제야 이세라도 납득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질렸다는 듯이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시신의 잔해들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힘의 차이를 눈앞에서 봐놓고도…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았죠.”
“그래. 목숨보다 명령이 우선인 놈들이다. 협상도 협박도, 심지어 정신 지배 스킬도 안 먹혀. 전생에 다 해봐서 안다.”
“그렇겠죠. 이런 이념의 노예들은, 정말 어쩔 도리가 없으니까요.”
이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수많은 감정이 함축된 복잡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나는 그녀를 주시하다가, 쓴웃음을 짙게 머금었다.
“이념의 노예. 정말 그렇지.”
굉장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
이내 시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토막 난 머리통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내 눈이 슬쩍 크게 뜨였다.
“…김진희.”
아래턱이 완전히 뜯겨 나가서 확실하진 않았다.
하지만 고통으로 부릅뜬 저 서글서글한 눈매. 피로 흠뻑 젖은 코.
분명히 최근에 본 기억이 있는, 익숙한 여자의 인상이었다.
“이렇게 될 것 같더라, 어째.”
이브가 못 듣게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감상에 젖는 건 거기까지다.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 전방을 주시한다.
어둠에 잠긴 골목길을 한눈에 담았다.
“가자.”
“네. 그래요.”
슈레더가 나의 행보에 대뜸 견제를 쑤셨다.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내겐 오히려 이것이 호재로 느껴졌다.
그래서 수색은, 절찬리에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