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1003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잠깐 알싸한 침묵이 흘렀다.
이세라는 약간 얼떨떨하면서도, 감탄한 듯한 표정이었다.
“천칭의 눈을 진짜 잘 아시네요? 혹시 제가 직접 말해줬어요?”
“뭐, 그렇지.”
“제가 제 얘기를 쉽게 꺼내진 않았을 텐데. 저랑 정용 씨는… 그렇게 서로를 자세히 알 정도로, 많은 회차를 함께했나 보죠?”
“…뭐, 그렇지.”
사실 내 기준으론 그렇게까지 많은 회차는 아니다.
1천 회차 중에 고작 백몇 회차. 그야말로 모든 회차를 함께했던 수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세라는 상황이 약간 특수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회귀자라는 걸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채고.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미 그것만도 내가 관심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럴 만한, 사건도 있었지.”
또한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뼛속까지 절망하고. 완전히 마음이 꺾여버렸을 때.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된 인물이, 바로 이세라였다.
“흐응. 그럴 만한 일이요. 그건 좀 궁금하네?”
이세라는 짐짓 흥미롭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고.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잖게 내게 말했다.
“그러면 뭐, 이런 미래를 본 것도 그래서 아닐까요? 전생부터 이어진 각별한 사이라서!”
“…뭐?”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도 잘 몰라요!”
에라 모르겠다는 양,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 펴는 이세라.
정말로 심하게 솔직한 대답이었다. 덕분에 나는 약간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모른다고?”
“네. 혼란스러우시죠? 근데 당사자인 제가 더 혼란스럽지 않겠어요?”
“그건 무슨 소리냐.”
“스킬이 제멋대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동됐다고요. 혼란은 둘째 치고요? 전 오늘 아침만 해도… 엄청나게 무서웠어요. 정용 씨.”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나는 억울하고 불안한 표정을 짓는 이세라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뭐.”
“왜 갑자기 당신이랑 만나는 미래를 본 건지. 가게에서 나갈 생각도 없던 내가 부산까지 와서, 당신이랑 즐겁게 대화하고… 당신이 회귀자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고요. 몰라서 너무 무서워요.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이세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휘적휘적. 그녀가 컵라면을 의미 없이 휘젓다가, 다시금 내게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도 저는 결국 여기에 와 있죠.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냐.”
“미래가 이거밖에 안 보였어요.”
이세라가 컵라면에 박혀있던 고개를 쳐들었다.
시커먼 안대 너머.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는 착각이 일었다.
“오늘 하루 종일. 심지어 지금, 이 순간도요. 회귀자 한정용하고 만나서 대화하는… 당신이랑 관련한 미래밖에 안 보이네요.”
“…….”
그것은 내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세라는 1분 1초마다 몇 개, 몇십 개의 미래를 엿본다. 각기 다른 순간, 다른 공간의 미래들이 마구잡이로 스쳐 간다고 했다.
“꼭, 저한테 허락된 미래는 이것밖에 없다고. 누군가가 엄포를 놓는 것 같아요.”
나라면 진작에 정신이 나가서 미쳐버렸을 것 같다만.
어쨌든 그런 괴기스러운 상태가, 이세라에게 있어서는 ‘정상’이다.
“그건… 무서울 만도 하네.”
결국 나는 이세라의 말을 긍정했다.
공감해줬다는 건, 곧 이세라의 말을 믿는다는 소리기도 했다.
“…후후.”
이세라도 그것을 깨달은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미래를 봤음인가.
그녀가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라면을 휘적거렸다.
“고마워요.”
“내가 할 말이지.”
오히려 내 쪽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은 나를 만나러 와줬다는 거 아니냐.
나는 이번에도,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도와줄 거냐.”
“당연한 걸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대답하자면… 그럼요!”
내 상상 이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허. 복잡한 한숨을 흘렸다.
“…내가 뭘 부탁할 건지는 알고 말하는…….”
“카일 인더스트리 소속 수석 연구원이었던 애덤 크로스. 그리고 로즈 휴스턴. 두 사람을 해운대 일대에서 수색하는 거?”
“…….”
“이유는 잘 몰라요. 그것까진 정용 씨가 절대 안 말해주더라고요! 어떤 미래에서도 절대로요. 쩨쩨하게.”
인정한다.
이건 의심한 내가 병신이었다.
나는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이번에도 말 안 해줄 거다.”
“네. 알아요.”
“어쨌든 도와주는 거로 알고 있는다.”
“그러세요. 애초에 제가 거절할 거였으면요. 무려 부산까지 발품 팔았을 리가 없지 않아요?”
이세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었던 미소는,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제 발로 관 뚜껑 박차고 나온 걸… 후회하지 않게 해주세요. 정용 씨.”
안대 너머의 절박한 시선이 따갑다.
그리고 난 그제야 깨달았다. 이미 탱탱 불어 터진 라면을 휘적거리는 그녀의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결의와 확신을 담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본다.”
그런 것치곤 매가리 없는 멘트가 나왔다.
* * *
다시 CCTV가 비치던 골목 주변으로 돌아왔다.
땅거미에 잠겨가는 골목을 세 명이서 나란히 걷던 와중. 문득 이세라가 내 쪽을 퍼뜩 쳐다봤다.
“근데, 정용 씨. 뭐 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그래라.”
“저 애… 이브라고 했던가요? 쟤는 정체가 뭐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 내 옆에 철썩 붙어있던 이브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세라의 말투엔 짙은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 제가 본 미래엔 저런 애는 없었어요. 저렇게 눈에 띄는 외관이면, 잠깐만 스쳐 지나갔어도 기억에 남았을 텐데.”
“그야 그렇지.”
“무려 정용 씨의 일행인데. 저 애만 유독,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 그야 그렇지.”
“…제대로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저 화내요?”
그리고 우리의 대화가 들렸던 것인가.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브가 별안간 깜짝 놀랐다.
“응? 아니. 잠깐만!”
이브는 어이가 없다는 양, 자기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세라의 앞에 한껏 상체를 들이밀었다.
“아줌마. 나 몰라? 진짜로?”
“아줌…….”
정작 이세라는 다른 포인트에서 울컥했는데.
다행히 전생과 달리 폭발시키진 않고. 직전에 간신히 수그러들었다.
“흐, 흐흠.”
이세라가 헛기침을 하며 이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걸려있는 미소가 쉴 새 없이 경련하는 모습이란. 퍽이나 처연하다.
“나, 나는 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브는 날 본 적이 있나 보네?”
“당연히 있지! 엄청 많지! 대화도 했었잖아!”
“그, 그래……? 미안. 내가 잘 기억이…….”
“아줌마 바보야? 왜 날 기억을 못 해? 나이를 너무 먹어서 치매라도 왔어?”
“…….”
거기서 별안간, 이세라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웃는 채로 얼음처럼 굳어버려서 살벌한 기세를 풍긴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한 대만 때려도 되죠?”
“…그러지 마라.”
전생이나 현생이나 이브한테 감정 지배당하는군. 회귀로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의 먹이 사슬 같은 게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한숨을 슬쩍 흘리는 한편.
“어떻게 된 거냐면…….”
전생에서 그랬듯이. 이브의 정체를 이세라에게 낱낱이 밝히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이세라의 입은 경악으로 벌어져갔다.
“정말로, 많이 특이한 애였군요.”
내막을 끝까지 들은 뒤. 이세라의 짤막한 감상은 그랬다.
깊은 공감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 한마디가 대화의 마지막.
우리는 다시 침묵 속에서 골목을 걸었다.
그러나 이번 침묵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세라가 또 다른 주제로 질문한 것이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런 말 하기도 좀 그렇지만요. 제가 도움이 되긴 될까요?”
“말이라고.”
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라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난 이유를 말해줬다.
“일정 구역을 수색하기 시작하면 금방 결과부터 보일 거 아니냐. 찾아낸 미래나, 못 찾아낸 미래.”
“아. 하긴…….”
“그것만 미리 알아도 획기적으로 시간 손해를 줄일 수 있겠지.”
이세라도 납득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지만 이내 퍼뜩, 다시 내 쪽으로 얼굴을 마주해 왔다.
“어, 하지만 정용 씨. 괜찮겠어요?”
“뭐가.”
“제 능력 잘 아시잖아요? 그럼 알지 않아요? 제 미래 예지의 모순이요.”
“…아.”
그제야 나는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이세라가 보는 미래는 수억 가지 가능성의 일부를 엿보는 것.
그런데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일부 미래들은, 생각지도 못한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모순. 그래. 그런 게 있었던가.”
이세라가 관측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미래가 확정돼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관측했기 때문에, 확정에 가까웠던 미래가 틀어지는 경우. 그런 게 간혹 있다고 했다.
이세라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래를 예측한다고 하면 거창해 보이긴 하는데요. 사실 그런 케이스 때문에, 사람 찾는 데 적합한 스킬은 아니거든요?”
“…흐음.”
관측 여부 따라 미래의 결괏값이 바뀌는 원리는 나도 모른다.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한참 전에 들려주긴 했던 거 같은데.’
이세라가 예전에 양자 역학이 어쩌구, 불확정성이 저쩌구 하면서 가르쳐줬는데. 잊어버리기까지 30초쯤 걸렸다.
사람 봐가면서 가르쳐야지. 고등학교조차 중퇴한 나한텐 너무 어려운 소리였다.
“…그래도 괜찮아. 넌 무조건 도움이 된다.”
난 이세라의 필요성을 끝까지 긍정했다.
이세라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더니. 이내 쓴웃음을 머금었다.
“괜히 저 무안할까 봐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왜요?”
“머릿수가 늘잖아.”
“아하.”
“하나보단 둘이 찾는 게 무조건 빠르겠지. 눈도 귀도 두 배가 되는데.”
“그것도 그러네요. 후후.”
단순 명쾌한 해답에 이세라의 미소가 약간 짙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그녀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정용 씨.”
별안간 바싹 굳은 얼굴로 호명하는 이세라.
뭔가 잘못 말했나 싶어, 나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왜 그러냐. 갑자기.”
“혹시 부산에 오기 전에요. 협회에 밉보일 만한 짓이라도 했어요?”
“…….”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자연스레 이세라도 걸음을 멈췄고. 그녀가 나와 얼굴을 빤히 맞대왔다.
나는 지금 절찬리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걸, 이세라가 어떻게.’
나는 당연히 오원태 건을 떠올렸다.
협회에 밉보일 만한 짓인 건 모르겠고. 회귀 후에 켕기는 짓이라곤 그것밖에 안 했으니까.
결국 직설적으로 이세라에게 물었다.
“…그런 건 왜 묻는데.”
“그게, 지금 갑자기 미래가 보여버려서요.”
“미래의 내가 오원태에 대한 걸 말했냐.”
“오원태……? 아뇨.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요.”
그런데 웬걸.
정작 오원태 얘기가 나오자, 이세라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부정한다. 모르쇠였다.
그리고 직후에 이런 말을 한다.
“정용 씨. 여기서 곧… 헌터 협회 감시과 사람들이랑 싸우게 돼요.”
“……!”
“양쪽 다 전력으로. 서로 죽일 기세로요. 아니. 실제로… 죽이네요?”
헌터 협회 양지의 인간 사냥꾼, 감시과와 싸운다는 예언.
내가 협회 놈들한테 먼저 덤빌 리는 없으니. 해석할 여지는 하나뿐이다.
“곧 그놈들이 와요. 주의하세요.”
헌터 협회가 날 노리고 있다.
놈들이 곧 덮쳐온다는… 그런 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