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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1화 (111/235)

111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2)>

“오오오오!!”

양호성이 장중한 기합과 함께 내 품을 파고들었다.

챙, 채애앵! 짧게 휘둘린 거검을 단검으로 쉽게 막아냈다. 그러나 직후, 양호성이 내 가슴팍에 차징을 먹였다.

“타핫!!”

투쾅! 강렬하고 묵직한 충격이 전신에 퍼졌다.

강화계 스킬이 섞여 있는 일격이 분명했다. 고작 어깨 차징 따위에, 내가 두 걸음이나 밀려났기 때문이다.

“하아아앗!!”

벽력같은 고함.

고개를 들어보니, 놈이 어느새 내 우측에서 돌격해 들어온다.

세 발의 견제용 화염탄이 놈을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쯧.”

펑, 퍼펑!

첫 번째 화염은 피했고. 그 뒤로 타이밍 좋게 파고드는 두 발은 단검으로 잘라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방. 양호성 본인이 내 후방으로 대검을 휘둘러왔다.

‘어딜.’

채애앵!

순식간에 허리를 꺾어 기습에 대처했다. 단검과 츠바이핸더가 허공에서 마찰하며, 섬짓한 불꽃을 토해냈다.

완벽하게 수비했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걸렸군……!”

휘리릭!

양호성의 손목이 기형적으로 춤을 췄고.

놈은 손잡이를 쥐던 한 손을 놓아, 검에서 힘을 풀어버렸다.

“후웃!”

키리릭!

순간 츠바이핸더가 눈앞에서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그러자 단검의 칼날이, 굵직한 츠바이핸더 옆면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

순식간에 일어난 기묘한 공방.

양호성이 구사한, 일종의 패링이다.

“아.”

가벼운 탄성을 흘렸고.

나의 태세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츠바이핸더의 칼날 쪽을 고쳐 쥔 양호성이,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었다.

“카아아앗!!”

투콰아앙!

놈은 폼멜과 손잡이 부분으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시원한 타격음. 매서운 충격파에 심장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강맹한 일격.

그러나 양호성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이 괴물 같은 새끼……!”

양호성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쿠르르르!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화염구가 응집된다. 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내 머리 위로 냅다 내리꽂았다.

“그만 좀, 뒤져버려라!!”

쿠과과과광!

제로 거리에서 일어난, 고위 화염 마법의 일점 폭격.

시야 일대가 순식간에 화염으로 뒤덮였고. 가공할 충격이 지하 7층 전역을 휩쓸었다.

[경고. 경고.]

[상정 외 고출력 에너지가 감지되었습니다.]

아무리 슈레더의 기밀 기록 보관소가 항마력 설계가 돼 있다곤 하지만. 양호성의 혼신의 일격을 버텨내진 못했다.

[시설의 붕괴가 감지되었습니다. 신속히 안내에 따라 탈출해 주십시오.]

쿠르르르!

천장의 균열이 서서히 사방으로 늘어나더니, 이내 복도까지 이어졌다.

한 번 시작된 붕괴는 통제 불능으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지하층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허억. 허억… 허어.”

무너져가는 헌터 협회 지하 7층. 그 한가운데.

나와 양호성은, 아까 그 자리 그대로. 아직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래.”

나는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어쨌든 결과만 말해주자면. 양호성이 휘둘렀던 츠바이핸더는, 결국 내 안면을 강타하지 못했다.

“이런 공격법도 있었지. 기억났다.”

직전에 가로막고 있는 내 왼손.

그 위로 츠바이핸더의 손잡이가, 정확히 안착해 있었다.

“시도는 좋았어. 양호성.”

그리고 나는 오른손을 전방으로 내뻗은 상태.

당연한 수순으로. 오른손에 들려있던 크로노스 대거의 칼날이, 양호성의 가슴팍을 관통하고 있었다.

“쿨럭……!”

양호성이 기침한다.

대량의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

“…강수아를, 살리고 싶은 게… 아니었나?”

양호성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지. 죽어가는 와중에도 날 향해 물어왔다.

저승길 가는 선물로 대답은 해주기로 했다.

“살리고 싶었다. 지금도 살리고 싶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어차피 너희들한테 한 번 찍힌 이상. 이제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

“…….”

“잘 아니까. 이런 상황에서 너희들이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너희가 몰라도 나는 알거든. 개새끼들아.”

뿌드득!

다시 한번. 크로노스 대거가 양호성의 몸에서 빠져나간다.

풀썩, 양호성이 재차 바닥에 쓰러졌다.

“…….”

양호성은 아까처럼 상처를 회복하려 하지 않았다.

멍하니 바닥의 격자무늬를 응시할 뿐이다.

‘포기했나.’

내가 한 차례 봐줬고. 그럼에도 다시 누운 것은 자신이다.

체념. 놈은 살아남기를 포기한 것이다.

“먼저 가있어라.”

퍼억!

그런 양호성의 멍한 면상을 짓밟았다.

이렇다 할 반응은 없다. 나는 목석처럼 굳어버린 양호성을 향해, 씹어뱉듯이 선고했다.

“이번 죽음이 끝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양호성. 우리는 조만간. 반드시. 다시 만날 거다.”

확신을 담아 뇌까리는, 나의 서슬 퍼런 목소리.

아무리 체념한 양호성이라도 그 말의 저의는 궁금한 듯하다.

“…뭐……?”

반쯤 죽은 듯한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나 이번엔 대답해 주지 않았다.

“또 보자. 다음 지옥에서.”

콰작!

머리뼈가 운동화 밑창에 으깨지는 소리.

사이렌과 건물의 붕괴음이 한창인 와중에도. 유난히 선명한 음색이었다.

“…후우우.”

긴 날숨이 전투의 끝을 알린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시선을 내려, 으깬 감자처럼 퍼진 양호성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이내 털썩.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읏차.”

난 이곳을 탈출하지 않는다.

헌터 협회 지하 7층. 이곳이 이번 생의 내 종착지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다.

‘바로 자살한다.’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블라이스의 단검을 꺼냈다.

건물이 완전히 붕괴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다. 산소 결핍이든 압사든 간에, 지금 내 스펙으론 죽는 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시간이 없어…….’

두 마리 식신의 소멸이 통보된 지, 벌써 3분가량이 경과했다.

수아가 해코지당하는 건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

‘양호성에게 인질 가치가 있는 존재니까.’

강서윤 때처럼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을 테니, 부하들에게 단단히 경고했을 거다.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수아가 아니다.

“…이브.”

수아와 함께 우리 집에 체류하고 있는 존재. 종말의 이브.

그녀는 놈들의 계산 밖의 존재다. 그러니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행여 죽여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놈들이 이브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죽인다.

단검의 칼날 끝을 배 위로 가져갔다. 그러다 흠칫, 뒤늦게 단검을 물렸다.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실수다. 습관적으로 배를 찌르려 했다.

빠르게 죽으려면 목을 찔러야 한다. 목을 관통하면 출혈량이 차원이 달라서, 내 방대한 체력치로도 1분 내에 숨이 끊어질 수 있다.

‘…스스로 목을 찌른다. 그게 문제지.’

몇 번을 죽어도, 죽음은 역시 두렵다.

죽음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의식중에도 자연스럽게, 배를 찌르려 한 것이다.

“자살한다느니… 그런 말. 제발, 그렇게 쉽게 하지 말라고……!”

“아빠… 그런 짓 하면 안 돼. 응? 약속! 약속해!!”

물론. 지금의 거부감은 단순히 그 이유뿐만은 아니다.

함부로 자살하지 않겠다고 분명 약속했었다. 강서윤, 그리고 이브에게. 두 번이나.

“널 구해줄게. 내가.”

하지만 반대로.

나는 강서윤의 앞에서 약속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최후의 최후엔 반드시 내가 그녀를 구해내겠다고. 나 자신에 대고 맹세했다.

내 안에서 지금. 그 두 개의 약속이 상충하고 있다.

“흐.”

의외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꾸드득.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나는 단검을 힘껏 쥐었다.

‘의미가 있나. 이딴 고민이.’

첫 번째 약속의 당사자인 서윤이는 이미 죽었다.

두 번째 약속의 당사자인 이브까지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딴 고민이 소용이 있는 거냐. 고민하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냐.

“네 부탁. 내 고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미안하다, 서윤아.

내가 널 반드시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네가 죽어버린 지금의 세상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미련이 안 생긴다.

난 근본이 이기적인 놈이다. 그러니까 고집 좀 부리자.

“널 구해줄게. 내가.”

다시 한번 다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일단 결심을 하고 나면. 행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

푸화악! 단검이, 내 목을 수직으로 관통한다.

“끄욱……!!”

참지 못한 신음을 토해냈고. 그 자리에 엎어져 한동안 꺽꺽댔다.

그런 내 꼬라지가, 신의 눈에도 퍽이나 처연해 보였던 것인가.

“…아.”

쿠르르륵!

천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거대한 바위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비트는 한편. 방어 관련 모든 패시브 스킬을 해제했다.

“…….”

퍼걱!

마지막으로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 뒤로는, 오직 암흑뿐이다.

* * *

[1002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이변은 없다.

언제나 반복하던 프레이즈가 이번에도 진행된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3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당연히 ‘예’ 선택.

이젠 뭐, 반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내가 있었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이쪽은 딱히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클리어한 던전이래 봐야 고작 세 개. 그중에서 딱히 좋은 물건을 얻은 것도 없었고. 괜찮은 스킬이나 스킬 포인트도 없다.

고민할 게 없으니 머리는 안 아파서 좋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만.

‘능력치 계승.’

결국은 모든 계승을 포기하고, 얌전히 자유 능력치나 받기로 했다.

[해당 회차에서 획득한 능력치는 체력+0, 마력+0, 힘+0, 민첩+0, 지능+0입니다.]

[최소 능력치 계승치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최소 능력치 계승치인 자유 능력치 1포인트를 인계합니다.]

딱히 이 1포인트에 대단한 가치가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 있나. 이럴 때도 있는 법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런 회차가 더 흔했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마침내 모든 계승의 의식이 끝났고.

지긋지긋한 역겨움과 어딘가로 영혼이 쏠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어김없이 전신을 엄습해온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23일. 오전 3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16일. 오후 2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8일. 오후 2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7시.]

새하얀 빛이 망막을 태울 것처럼 찌른다.

눈이 너무 부시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강렬한 섬광이 가신 후. 모든 메스꺼움이 가라앉은 끝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돌아왔다.’

심각할 정도로 익숙한 방의 풍경에 숨이 잠깐 막힌다.

토할 것 같은 익숙함에 진저리치기도 잠시.

“…에휴.”

나는 언제나처럼 침대에 엎어졌고, 통한의 한숨을 흘렸다.

허무하게 끝나버린 전생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죽 쒔네. 죽 쒔어.”

아쉬움과 별개로 수마는 어김없이 몰려온다.

복잡한 머리를 비울 겸. 이번에도 낮잠이나 자면서 머리를 좀 식히기로 했다.

천천히 눈이 감기며, 빠르게 의식이 꺼져가던 그 순간.

“어, 아빠!! 아빠아아!!”

잠이 확 달아났다.

번쩍. 상체를 번개같이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이다.

이브가 울먹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브.”

이브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왜 울먹이는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건 일단 차치하고. 나는 일단 이브의 모습부터 빠르게 살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꼼꼼히 훑어본 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무사히 내 옆에 돌아와 줬다는 점이 천만다행. 지금은 그런 안도감뿐이었다.

그런데 내 말에 뭔가 울컥한 것인가.

“이익…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별안간 이브가 눈물을 왈칵 터뜨리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덥석! 그리고 내 품에 바싹 엉겨 붙어,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흐흐흑! 아빠, 바보! 진짜 바보 멍청이야! 어디 갔었던 거야, 진짜아!!”

“미안하다.”

“갑자기 막,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엄마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단 말이야! 나 너무 무서웠어! 무서워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알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고!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미안하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브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이브가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아 몰라, 됐어!”

이내 퍼뜩!

이브가 원망 반, 투정 반씩 섞인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아빠. 이제 어디 갈 때, 무조건 내 허락 맡고 다녀! 알았어?”

“노력해본다.”

“아니면 무조건 나 데리고 가! 절대, 절대로 나랑 떨어지지 마! 알겠지?!”

“…노력해 본다.”

“아이 씨! 아빠 뭐 앵무새야? 노력해 본다, 말고 다른 말 좀 해보라고!!”

“…노력해 볼게.”

절대, 절대로 떨어지지 말라고 한다.

내 입장에선 좀 웃기긴 하다. 전생에 멋대로 혼자 가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사람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세를 전환해도 되는 거냐.

‘사람 아니구나, 참.’

맞네.

그럼 인정할 수밖에.

“흐. 흐흐.”

난데없이 입술 사이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빨리 입을 꽉 닫아버렸지만. 이브는 퍼뜩 쌍심지를 치켜세웠다.

“뭐, 뭐야. 갑자기 뭐가 좋다고 웃어, 아빠! 내 말이 장난 같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뭔데! 왜 갑자기 웃었는데?!”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회귀로 시간이 돌아왔을 때.

나를 맞아주는 다른 사람이 있다. 나를 기억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 생각을 잠깐 떠올렸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웃음이 나올 줄은.’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이야.

상상도 못해 본 상황이기에. 나도 내가 웃어버린 것에, 놀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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