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1)>
“뒤져.”
짧게 선언한 뒤. 곧장 지면을 박차고 전방에 치고 나갔다.
아니. 치고 나가려 했다.
[아이템이 발동되었습니다.]
[아이템이 발동되었습니다.]
삑! 삐빅!!
연속된 두 번의 짧은 경고음. 그리고 아이템의 발동 패널.
그것이 내 돌진에 급격한 제동을 걸었다.
“…….”
나는 한동안 멍하니 패널을 주시했다.
스르륵. 패널이 사라진 뒤, 그 너머에 서있던 양호성을 가만히 노려봤다.
노기가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쩐지. 네가 승산 없는 싸움에 덤벼온다 싶더라니.”
그러나 이 분노는 양호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반쯤은 나 자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어리석고 생각이 짧은 내게 분노가 치민 거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양동 작전이었냐.”
“…그래.”
양호성은 순간 눈을 번쩍 떴지만,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긍정했다.
놈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내 반응으로 작전의 성패를 직감한 듯하다.
나는 씹어뱉듯이 계속 말했다.
“네가 내 발목을 잡고. 진짜 노림수는 수아 쪽이냐.”
“정확하다.”
“…교활한 너구리 새끼.”
“갑자기 어떻게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거,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니 내 기분이 다 좋아? 한정용 헌터.”
“…….”
갑자기 내가 알아챈 이유는 간단하다.
장수혁에게 이끌려 슈레더 본부까지 오기 직전. 나는 우리 집 현관문에 한 아이템을 설치해 놓고 왔다.
문손잡이 쪽에, 아주 작은 종이 하나를 붙여뒀지.
[아이템 정보]
[명칭: 반야의 식신(式神) (B급)]
[타입: 설치형/소환]
[효과: 시전자의 열화 복제품을 1개체 소환.]
[효력 범위: 접촉 시 자동 발동.]
[상세: 제82던전의 던전 마스터 ‘반야’의 클리어 보상. 마력을 불어넣어 부적을 활성화한 뒤, 시전자에게 적의를 가진 이와 접촉시키면 발동한다. 시전자의 능력치를 크게 밑도는 복제품을 소환한다.]
대충 이런 아이템인데.
보통은 적에게 직접 부적을 투척하는 쪽으로 사용하지만. 이런 식으로 함정처럼 설치해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 우리 집 앞 복도에선, 나의 열화 복제품과 습격자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거다.
‘식신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여길 탈출하자.’
이미 아카이브의 모든 정보는 파기되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양호성의 견제를 뿌리치고, 지금 당장 수아를 지키러 귀환해야 한다.
‘우선은 수아를 지키는 데 전력해야지.’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습격자들을 다 죽여버리자.
그리고. 그다음은?
‘도망… 도망을, 가야지.’
그래. 어디로든 좋으니 도망을 쳐야겠지.
헌터 협회의 눈을 피해, 그리고 게이트 붕괴의 여파가 최대한 닿지 않는 곳까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게이트 붕괴를 막는 거다.
지금까지처럼.
그래. 전생에 숱하게 그랬던 것처럼.
‘수아를 데리고… 도망친다.’
어떻게든 수아만은, 수아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러면. 그다음엔.
…그다음은?
“…….”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쉬기가 힘들다. 목이 메어 잠시 숨을 꺽꺽거렸다.
“네가 날 구해줄 거야? 내 동생처럼?”
치지직, 지직.
머릿속으로 기분 나쁜 라디오 노이즈 같은 게 흐른다.
그것이 역겨운 목소리를 싣고 온다.
“널 구해줄게. 내가.”
내 목소리였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역겹고 가증스럽고 추잡한 목소리다.
나는 그제야 생각이 미친다.
‘…수아를 데리고 도망치면. 실패한 전생들이랑, 뭐가 다르지?’
숱한 전생들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사실 서윤이의 잘린 목을 본 시점에서 직감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척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식신이 쓰러졌습니다.]
[부적의 효력이 일시적으로 소멸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은 10분입니다.]
금세 비보가 들려왔다.
순간 힘이 풀린 나머지 단검을 놓칠 뻔했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했다. 새삼 부릅뜬 눈으로 양호성의 얼굴을 노려봤다.
‘…저 표정.’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양호성의 표정. 전생에서 봤던 익숙한 얼굴이다 싶었는데.
‘여유만만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어지간히도 자기 계획이 성공할 거라는 자신감에 들어차 있었다.
방금 등장한 패널에 따르면. 실제로 상황은 내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왜지.’
복합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왜 양호성은 저리 여유로운가.
그리고 아무리 한참 하위 호환이라지만. 나의 복제품인 식신이 벌써 나가떨어지다니.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방금. 내 호위병 하나가 당했다.”
결국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반대편 전황을 이실직고했다.
씨익. 양호성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진다.
“그래. 그렇겠지. 아무렴 그래야지.”
“…무슨 짓을 한 거냐, 양호성.”
“무슨 짓이라니. 내가 뭘?”
“내가 세운 호위병이 이렇게 단시간에 쓰러질 이유는 하나뿐이다. 수아를 잡는데 오버 랭커급 헌터가 기용됐군. 그것도 꽤 많이.”
“…….”
양호성은 침묵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보통 침묵은 긍정이다. 양호성 역시, 그것을 딱히 숨기려 하지 않았다.
놈이 비릿한 미소를 더욱 짙게 머금는다.
“정확해. 거 눈치가 귀신같구만, 한정용 헌터.”
“슈레더 소속의 유일한 오버 랭커… 장수혁은 방금 죽었지. 어떻게 오버 랭커급 헌터를 민간인 납치에 이용한 거냐.”
“뭘. 별 대단한 건 없어. 그냥 약간의 누명만 씌웠지.”
“…누명.”
“던전 생물 밀반입. 이게 진짜, 생사람 잡아들이는 데는 직빵이란 말이야. 음!”
그렇구나.
그 말로 모든 전말이 이해됐다.
그렇다는 건 100% 확률로 오버 랭커 중 누군가가 차출됐을 거고. 식신의 소멸 타이밍을 봤을 때, 최소 두 명 이상으로 보인다.
결론이 나왔다.
“…이미 늦었구나.”
식신의 방어는 곧 뚫린다.
설치한 식신은 두 마리. 한 마리가 벌써 처리됐으니, 나머지 하나를 잡는 건 더 빨라질 거다.
‘길어야 앞으로 1분이겠지.’
양호성의 방해 없이 전속력으로 텔레포트만 사용해도… 늦을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오만 가지 생각을 마구잡이로 떠올리는 와중.
“자. 이제 거래를 하자. 한정용 헌터.”
별안간 양호성이 먼저 제안을 해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조심스럽게 그에 응했다.
“무슨 거래냐.”
“이미 죽은 슈레더 대원들의 목숨값을 왈가왈부하진 않겠다. 그런 건 병신이나 하는 거지.”
“그건 잘 생각했네.”
“강수아 양을 살리고 싶나?”
“그래.”
“그러면 일단 나를 살려줘라. 그리고 내 밑에서, 새로운 암부의 수장으로서 일해 보자고.”
예상 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제안이다.
정확히는 양쪽 중 하나를 예상했는데. 양쪽 모두를 요구해 왔다.
이번 생의 양호성은 욕심이 많다.
“원래는 거, 서로가 더 좋은 국면을 가져올 수 있었는데 말이야. 수혁이 때문에 일이 어그러져 버렸으니. 원.”
양호성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놈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훌쩍 향한다. 가만히 따라가 보니, 그새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버석거리는 장수혁의 시체가 있다.
“쓰으. 장수혁이, 이 멍청한 새끼가. 제일 가치 있는 인질을 칵 죽여버렸으니.”
“…….”
“보나 마나 심문하다 개기니까 홧김에 죽였겠지. 하여간 십X끼 그거. 성질 좀 죽이고 살라니까. 쯧쯔.”
나한테 있어서 제일 가치 있는 인질.
누구를 말하는 건지.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윤이 말하는 거냐.”
“그래. 그년만큼 당신한테 제격인 목줄이 또 없는데. 뒷일 생각 안 하고 죽여버렸으니. 원.”
“…….”
“암부 대가리란 새끼가, 그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뒤져도 싸지, 싸. 에잉.”
하긴. 놈들의 입장에선 그리 보일 법도 하다.
알고 지낸 지도 근 20년. 가족이 하나도 없는 내겐, 그야말로 가족처럼 친하고 목숨만큼 소중했던 친구. 강서윤.
실제로 영원회귀 전까지만 해도, 수아와 서윤이, 그리고 내 목숨 셋을 저울질하라 그러면.
나는 아마 일말의 주저도 없이 강서윤을 택했으리라.
“근데 그거 아냐. 양호성.”
나는 만지작거리던 단검을 가만히 주시했고. 이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양호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반응해 왔다.
“음? 뭘 말이냐.”
“내가 거래 제안받은 거. 여기서만 두 번째다.”
“…그 말은.”
“장수혁도 그 지랄하다 뒤졌다는 소리야, 호성아.”
투학!!
곧장 지면을 차올렸고, 신형은 대포알처럼 발사되었다.
양호성의 얼빠진 면상이 코앞까지 닥쳐온다.
“이 십……!”
쇄애액!!
양호성의 츠바이핸더가 즉각 휘둘렸다. 단두대처럼 내 정수리를 으깨러 쏟아지는 거대한 칼날.
내 돌진에 반응한 건 대단하지만. 너무 발작적인 반응이다.
“당황이 느껴지는데.”
난 오히려 놈이 반응하길 바랐다.
아니, 다른 놈이면 몰라도 양호성이라면 반드시 반응해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걸 함부로 휘두르면 안 되지, 양호성.”
거검(巨劍)은 한방 한방의 위력이 좋은 게 장점이지만.
그만큼 빗나갔을 때 빈틈도 큰 법이다.
[스킬 발동: 비약]
콰콰쾅!
양호성의 코앞에서 공기가 연속적으로 폭발한다.
내가 허공을 박차 양호성의 참격을 회피. 이어서 계속 스킬을 발동해, 순식간에 놈의 등 뒤를 점거한 것이다.
“헛……!”
고위 헌터의 싸움은 1초 그 이하의 세계.
등 뒤를 내준 순간. 이미 전투는 끝난다.
“죽어.”
어떤 속공의 마법이라 할지라도, 내가 손을 내뻗는 것보단 빠르지 못하다.
쉬이익! 양호성의 경추를 향해 단검이 쇄도한다.
“자, 잠깐!!”
놈이 다급하게 외친다.
과연. 아가리 정돈 손보다 빠르게 놀릴 수 있구나. 지식이 늘었다.
푸화악! 멈추란다고 내가 멈추진 않겠다만.
“끄라라아악!!”
얄쌍한 칼날이 양호성의 목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공간을 절단하는 칼날 크로노스 대거. 양호성의 온몸에 둘린 배리어와 배틀 슈트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기고, 기어코 놈의 입에서 선혈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쿠학… 커, 헉!”
뿌드득!
나는 가차 없이 단검을 뽑았고. 양호성은 피거품을 쏟아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털그렁! 츠바이핸더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양호성이 그 옆에서 온몸을 꿈틀거렸다.
“끄… 너, 크럭, 이, 새… 케헥!”
양호성이 증오를 담아 날 노려본다.
뭔가 계속 내게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구멍 난 목에서 선혈과 피리 소리만 줄줄 새서, 언어가 완성되지 못했다.
“끄… 으……!”
우우웅.
결국 양호성의 벌벌 떨리는 손이 새파랗게 물든다 싶더니. 빛무리가 빠르게 환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슈르륵, 슈륵. 거짓말처럼 환부가 빠르게 아물어 갔다.
‘가우르의 축성인가.’
가우르의 축성. 최상급 보조계 마법.
내가 가진 리스토레이션처럼 부작용을 동반하는 ‘수복’이 아니다. 생물의 상처를 고치는 ‘회복’ 스킬이다.
‘오랜만에 보는구만.’
회복 계열에선 극히 드문, A급의 스킬.
세계에서 유일하게 양호성만 갖고 있기에 굉장히 유명한 스킬이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거기도 하고.
“왜, 왜냐.”
다시 사람 말을 하게 된 양호성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철컹! 놈이 츠바이핸더를 다시 들어 전투태세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 물어왔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한정용 헌터.”
“뭐가.”
“지, 지금. 나를 공격한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거래를 거절한 거지. 그렇게 느꼈으면 제대로 알아들은 거다.”
“큭… 이 새끼!!”
타탓!
이번엔 양호성이 먼저 내게 달려들었다.
저돌적인 맹진. 아까처럼 수많은 화염탄이 내 퇴로를 점하고 사방에서 쏟아진다.
“우오오오!!”
“…….”
나는 침묵한 채 대응할 준비를 마쳤다.
콰아아앙! 우선 위에서 쏟아진 츠바이핸더를 정면에서 막아냈다.
[스킬 발동: 비약]
직후 유령처럼 허공을 유영하며 불벼락을 피했다.
쉬쉬쉭! 도저히 피하지 못하겠다 싶은 것들은 크로노스 대거로 베어냈다. 속절없이 토막 난 불덩이가 여기저기서 펑펑 터져댄다.
나를 교묘하게 추격해오던 양호성이 으르렁거린다.
“그 단검. 강서윤 헌터의 유품인가……!”
“정답이다.”
“수혁이가 강탈한 걸 그 새 되찾았다. 뭐 이런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건 마음대로 생각해.”
양호성이 단검의 정체를 알아맞힌 이유는 간단하다.
고위 화염 마법조차 쉽게 절단하는 공간 절단의 단검. 이 정도 성능을 내는 단검이, 세간에 알려지기론 강서윤의 크로노스 대거 밖에 없어서다.
[식신이 쓰러졌습니다.]
그 순간. 아찔한 패널이 떠올랐다.
수아의 사형 선고였다.
“하아아압!!”
잠깐 넋놓은 순간. 어느새 내 꽁무니를 쫓아온 양호성이, 재차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나는 멍하니 관망했다. 투박한 칼날이 내 대가리를 분쇄하기 직전까지.
“…흐.”
그리고 공세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납게 뒤틀린 미소를 두른 채. 양호성과 근거리 교전을 이어 나갔다.
카앙! 카카캉! 어지럽게 검광이 뒤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