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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6화 (106/235)

106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7)>

잠깐 시야가 깜빡 점멸했다.

다시 눈앞이 환해졌을 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주위를 스윽 훑어봤고, 이내 금세 깨달았다.

‘…헌터 협회.’

장수혁, 혹은 오윤나의 스킬로 텔레포트를 했다.

우리는 어느새 헌터 협회 내부에 와있었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생전 본 적도 없을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어지간히도 내 정체가 궁금한가 보지.”

오랜만에 본 광경에 비릿한 향수까지 느꼈다.

나는 앞서 걷던 장수혁 들으라고 비아냥거렸다.

“곧장 여기로 데려올 줄은 몰랐는데. 너도 똥줄 좀 타는구나?”

“허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한정용 헌터?”

“헌터 협회. 지하 7층이겠지.”

멈칫. 장수혁이 걸음을 멈춘다.

오윤나도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

장수혁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내게 얼굴을 비치지는 않았다. 그저 멈췄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헌터 협회에 지하 7층이 어디 있습니까. 지하 5층의 주차장이 끝인 걸로 아는데.”

이내 가라앉은 장수혁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뭘 이제 와서 발뺌하고 지랄일까.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슈레더를 알기 전까진.”

“…오호.”

“헌터 협회 암부장 장수혁. 지원 2팀장 오윤나. 이미 다 알고 있다.”

“…….”

“숨긴다고 개지랄할 필요 없어. 그냥 니들 동료처럼 편히 대해.”

그쯤 되니 장수혁이 드디어 나를 돌아봤다.

아까보다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 나는 대놓고 비웃음을 머금었다.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장수혁 군.”

짐짓 잔망스럽게 애교를 부려봤다. 장난을 잘 치는 한정용 군의 맹공이 어떠냐.

뿌득. 처음으로 장수혁의 눈썹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허. 참나. X발.”

분노.

그것도 아주 격렬한 분노.

그에게서 감정다운 감정이 드디어 드러났다.

“…꽤 태평하시군.”

“내가 조급할 이유라도 있냐.”

“우리의 정체를 훤히 안다면서. 이제 네가 무슨 짓을 당할지는 모르나?”

“나를 고문하겠지. 너 새끼들 하는 짓이 어디 가겠냐.”

이번엔 장수혁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흡사 괴생물을 쳐다보는 시선. 나를 향한 복합적인 의문들이 느껴진다.

그 반응만 봐도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윤이도 여기서 죽였냐.”

“…….”

바짝 경직된 그들에게 나직이 질문했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번에도 정답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과장스럽게 박수를 쳐줬다.

“재주가 대단하시네.”

“뭐가 말이냐.”

“오버 랭커… 그것도 위상 변이계 헌터를 하루 만에 슥삭하다니. 슈레더 부장 자리도 묵찌빠로 딴 건 아닌갑지.”

“부하들이 많이 도와줬지. 공간 이동을 봉쇄하는 것만도 진땀을 뺐다.”

장수혁은 더 이상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리 도발해 봐도 상투적인 대답만 늘어놓으며, 다만 걸음을 점점 빨리한다.

반응이 영 재미가 없다. 이러면 타깃을 좀 바꿔볼 차례지.

“오윤나. 이중생활은 좀 할 만하냐.”

“…읏.”

오윤나는 자신이 도발 대상이 된 걸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냉랭하게 고개를 돌린다. 아예 무시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럴 수 있을까? 네가?’

아니. 천만에.

넌 절대 내 도발을 무시할 수 없다.

누르면 반드시 발광하는 네년의 발작 버튼. 내가 아주 잘 알고 있거든.

“요즘 박철민이랑 사이는 어때.”

“……!!”

“박철민도 아냐? 네가 슈레더 팀장 자리까지 꿰차서. 협회에 거역하는 사람은 민, 군, 경 할 것 없이 죄다 처죽이고 다니는 거.”

“다, 닥쳐.”

벌써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이글거리는 시선이 쏟아졌고. 나는 비웃음을 한층 비릿하게 머금었다.

“알 리가 없지. 그놈은 머저리일지언정 착한 새끼거든. 네 정체를 알았으면, 너랑 팀을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어. 그렇잖아?”

“닥쳐. 이 X발아! 철민 씨는, 지금 철민 씨는 상관없잖아……!”

“상관이 없긴. 이런 역겨운 개썅년한테 속고 있는 불쌍한 새낀데. 같은 남자로서 좀 측은해진다고 할까. 뭐 그런 느낌이지.”

“닥치랬지!! 이 개새끼야!!”

역시나.

박철민을 연거푸 언급하자, 오윤나는 곧장 꼭지가 돌았다.

오윤나가 결국 내게 손을 뻗었고. 손끝에선 시퍼런 마력광이 살기를 품고 모여들었다.

“오윤나 팀장! 잠깐……!”

장수혁이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콰아앙! 마탄이 오윤나의 손끝을 떠난다. 순식간에 내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그녀와 나는 거의 제로 거리.

아무리 스피드계 헌터인 장수혁이라도, 막을 수 없다.

“아가리 닥치라고! 이 X발!!”

콰아앙!

오윤나의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내 눈앞에서 시퍼런 마력탄이 폭발했다.

육중한 충격파가 지나가고, 폭연이 가라앉은 순간.

“…허?”

“무, 무슨!”

오윤나와 장수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황의 탄성을 터뜨렸다.

내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오윤나 팀장!”

“네, 넵!”

파팟!

두 사람은 당황한 와중에도 능숙하게 서로를 등졌고. 살기를 바짝 세우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두 쌍의 시선이 빠르게 사위를 훑는다.

“뭐야. 그사이 대체 어디로……!”

푸화악!

오윤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파육음에 삼켜졌다.

쿨럭. 오윤나는 문득 기침했고. 입에서 대량의 피가 쏟아졌다.

“어.”

오윤나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 이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가슴팍 언저리. 시뻘겋게 피칠갑 된 손아귀가 하나 튀어나와 있다.

“…어?”

오윤나는 그것을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쳐다봤다.

물론 그녀를 관통한 팔은, 내 것이었다.

“뒤지는 이유는 세 가지다, 오윤나.”

두근, 두근!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세차게 맥동하는 오윤나의 심장이 보인다.

그것은 피로 흠뻑 젖은 내 손에 떡하니 쥐어져 있다.

“첫째로 D급 헌터라고 방심해서, 나한테 구속구를 씌우지 않은 점. 둘째는 방금의 기습이 실패한 시점에서 바로 도망가지 않은 점. 그리고 마지막은…….”

퍼걱!

나는 심장을 오윤나의 눈앞에서 쥐어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가 이번 생에 최후로 들을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앞선 모든 것을 지켰어도. 어차피 상대가 나였다는 점.”

뿌드드득!

남은 왼손으로 오윤나의 어깨를 붙잡고, 관통했던 오른팔을 거칠게 뽑아냈다.

“끄허, 어윽… 그으으윽!”

털퍼덕.

오윤나의 육신이 힘없이 엎어졌다. 그녀의 몸이 본능에 따라 사지를 버둥거린다.

나는 그것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S급 헌터도 참 쉬운 게 아니지.”

“그으… 끄우욱……!”

“기본 체력치가 엔간히 높아져서. 심장이 터져버려도 한참을 살아있으니……. 그 고통은 나도 잘 알아. 그럼.”

나는 오윤나의 머리 위로 발을 올리며 중얼거렸고.

퍼걱! 그대로 발을 굴렀다.

“…….”

쓸데없이 늘어지던 고통을 종식시켜 줬다.

숨죽인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나는 신발 밑창에 묻은 건더기들을 툭툭 털어냈다.

“우선 하나.”

그리고 카운팅을 시작했다.

이건 그냥 다대일 전투에서 으레 나오던 습관이다.

당연히 죽인 놈, 년 숫자 세는데, 크게 의미는 없다.

“…어떻게.”

문득 장수혁이 중얼거렸다.

놈의 시선이 오윤나의 흩어진 대가리 파편들을 훑었고. 끝내는 다시 내게 쏠렸다.

그새 바싹 마른 입술로 더듬더듬 목소리를 흘린다.

“분명. 지금도. 느껴지는 마력은, 펴, 평범한 D급… 헌터인데.”

“근데 무슨 수로 오윤나를 죽였냐. 어디서 난 힘이냐. 뭐 이런 소리가 하고 싶겠지.”

“……!”

“안 알려줄 거다. 죽기 전까지 열심히 궁리하든가.”

“크윽!”

대놓고 조롱하자 장수혁이 이를 악물었다.

파팟! 그가 곧장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상체를 한껏 낮추고 경계 태세를 유지한 채, 왼쪽 손목의 헌터용 스마트워치를 조작한다.

[경고. 경고.]

[비상 상황 발생. 코드S.]

위잉, 기이잉―!

복도 전역에 쩌렁쩌렁한 사이렌 소리.

긴급 상황을 알리는 건조한 안내 음성이 반복적으로 울린다.

[긴급 격리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키리리릭!

이내 복도의 일정 구간마다 두터운 격벽이 빠르게 내려왔고. 장수혁과 나를 널찍한 장방형 공간에 가둬버렸다.

“…….”

딱히 그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벽이 완전히 내려올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려 주다가, 태연하게 물어봤다.

“슈레더 회식 계획 짜는 중이냐?”

“……!”

흠칫. 장수혁이 행동을 멈추고 날 쳐다봤다.

부릅뜬 눈이 파르르 떨리다, 이내 히죽 웃는다. 위태로운 조소가 놈의 입가에 떠올랐다.

“흐. 대, 대단한 자신감이군. 알면서도 기다려 주겠다… 이건가?”

“기다려 줘야지. 내가 무슨 권리로 막겠냐.”

“그래. 좋아. 꼴에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만. 곧 뼈저리게 후회할 거다.”

“그러냐.”

“우리가 왜 널 여기까지 끌어들였는지. 지금부터, 그 이유를 똑똑히 알게 해줄……!”

“그건 말이 좀 잘못됐는데.”

지원 요청 끝났다고, 신나서 지껄이던 장수혁의 아가리를 봉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반박했다.

“반대야.”

“뭐… 바, 반대?”

“너희가 날 이리로 끌어들인 게 아니다.”

네가 서윤이를 죽인 순간.

그리고 그녀의 시신을, 내가 목격해 버린 그 순간.

이번 생에서 내가 최우선적으로 가야 할 목적지는… 무조건 여기뿐이었다, 장수혁.

“내가. 너희를 여기로 끌어들인 거지.”

슈레더 놈들이 알아서 내 앞에 총출동해 준다고?

그것도 놈들이 자랑하는 이 극비의 지하 요새, 헌터 협회 지하 7층으로?

“나야 좋지. 알아서 모여주면.”

암부들만 아는 비밀 장소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암부 소속 인물들만 죄다 죽여버리면, 장소의 존재조차 아는 사람이 없어진다. 시체 뒤처리조차 안 해도 된다는 소리.

그렇다 뿐일까. 오히려 헌터 협회가, 솔선수범해서 증거를 인멸해 주겠지.

“이런, X발……!!”

장수혁도 그제야 내 계획을 눈치챘다. 아찔한 표정으로 다시 시계를 조작하려 한다.

그건 좀 곤란하지.

“어딜.”

나는 놈을 향해 손을 뻗었고.

쿠르르륵! 내 뒤에 열린 거대한 문에서, 시커먼 사슬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스킬 발동: 글레이프니르]

순식간에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간 사슬 다발.

콰드득! 살벌한 마찰음과 함께 장수혁의 사지를 꼼짝없이 조여든다.

“끄하악!”

장수혁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그대로 손아귀를 힘껏 조였다.

[스킬 발동: 피직스 그랩]

우드득!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한 차례.

장수혁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아귀에 온몸이 짓눌려, 손가락 말단까지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당했다.

“끄… 커헉!”

괴로운 날숨을 토해내는 장수혁.

그의 온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다. 헤 벌어진 입에선 연신 색색대는 신음을 냈다.

“이… 새, 끼가……!”

이내 장수혁은 나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파지직! 파직! 놈의 온몸에서 연신 백청색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러자 장수혁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뭣. 아니. 씨, X발……!”

디스펠 스킬의 사용.

그리고 거듭된 실패로 인해 발생하는 마력 스파크였다.

“왜, 어째서… 안 풀리는 건데! X발!!”

“백날 해봐라. 그게 풀리나.”

“X발… X발! 어떻게, 대체 어떻게… 고작, D급 헌터 새끼가아아아!!”

장수혁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놈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부질없이 노력했다. 자기를 뒤덮은 마력의 손아귀를 풀기 위해. 완력과 스킬을 끊임없이 동원해댔다.

‘전에도 비슷한 구도가 있었지, 아마.’

전생의 레드스컬 소탕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상대했던 레드스컬의 속공 마법사 놈… 그, 뭐시기였지. 이름이 벌써 기억 안 난다.

엑스트라를 일일이 기억해 줄 만큼 내 뇌가 한가하진 않아서.

“지금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장수혁.”

“끄… 으, 그윽……!”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너 빼고 전부 몰살할 때까지.”

“……!!”

아직 장수혁은 죽이지 않는다.

놈은 이후에도 막중한 임무가 하나 남았다.

1년 전에 슈레더가 은폐했던 두 연구원의 정보. 그것을 내게 직접 보여준다는, 아주 중요한 임무.

‘어차피 암부가 습득하는 모든 정보는… 최종적으로 헤드에게 들어간다.’

장수혁만 있으면 된다.

슈레더 기밀문서 아카이브의 접근 권한을 저놈이 갖고 있다.

그러니까 저놈만 살아있으면. 슈레더가 관리하는 대부분의 극비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오윤나까진 필요 없어.’

그래서 죽였다.

당연히 나머지 암부 인원도, 전부 필요 없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보이는 놈들 전부. 몰살한다.’

그렇게 결심을 마쳤을 때.

푸쉬익, 철컹! 복도의 격벽과 철문이 잠깐 열렸다.

그 너머에서 우르르르, 수백 명에 달하는 인파가 쏟아졌다.

“부장님!”

“저 새끼다! 포위해!”

“부장님을 지켜!!”

주변으로 웅성거리는 소란이 가득해졌다.

8차선 도로처럼 널찍했던 복도가 순식간에 인파로 바글거린다.

나름 면식 있는 얼굴들이 사방에 한가득. 이글거리는 증오와 적의가 나를 향해 오롯이 쏟아진다.

“많이도 와줬구만. 기특하게.”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장수혁의 얼굴엔 낭패감이 가득해졌다.

“자, 잠깐. 기다려……!”

시시각각 포위를 조여오는 슈레더 대원들을 보며 장수혁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초조한 듯이 발을 동동 구르다, 이내 나를 향해 외쳤다.

“하, 한정용 헌터. 나, 나랑… 거래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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