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1)>
콰드드득!
이브의 몸이 정수리부터 새빨갛게 허물어져, 내 육체를 부드럽게 둘러쌌다.
[한계까지 생명력을 소비합니다.]
[생명력의 50%가 갑주로 환원됩니다.]
온몸의 뼈마디가 재구성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그리고 약간의 메스꺼움과 함께, 중후한 핏빛의 갑옷이 구성되었다.
혈천갑의 변신이 완료된 그 순간.
“…이건.”
나는 갑주의 외관을 보고 나직한 탄성을 흘려야 했다.
꾸드득. 맨질거리는 검붉은 흉갑을 손끝으로 슬쩍 쓸어봤다.
그리고 실감했다.
‘변했다. 또 한 번.’
이브가 성장하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번에도 혈천갑의 외관이 전과는 약간 달라져 있었다.
갑옷 자체는 전체적으로 변한 게 없지만. 이전의 바이탈 버클러처럼, 추가된 부속품이 하나 있다.
‘날개가 생겼네.’
등갑을 뚫고 거대한 붉은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천사나 독수리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깃털 날개. 한쪽만 해도 내 온몸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다.
나는 날개깃을 손끝으로 만져보다,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의미가 있나?”
혈천갑에는 <블러드 스트림>이라는 비행 스킬이 옵션으로 달려있다.
애초에 지금만 해도 공중에 살짝 떠있는데. 이건 당연히 날개를 쓴 게 아니고, 스킬로 비행하고 있는 거다.
이 갑주에 날개는… 까놓고 말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마. 그냥 겉멋용?’
당연한 수순으로 그런 의심이 들었다.
과거에 유명했던 한 거대 로봇 만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거기엔 이런 명언이 나온다.
다리 따윈 장식입니다.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거대 로봇에게 달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붙는 다리.
혈천갑에 달릴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추가된 날개.
‘진짜 그런 맥락인가?’
그냥 멋있으니까. 낭만 있으니까 괜찮은 거냐?
정말 그런 거냐, 혈천갑?
‘아니지. 버클러 때처럼 뭔가 스킬이 추가됐나? 이 날개로 사용하는?’
이내 그런 합리적 추측까지 도달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삐빅, 기다렸다는 듯이 시스템 패널이 떠올랐다.
[종말의 이브의 특수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스킬 상세 정보를 확인하려면, ‘종말의 이브 특수 스킬 상세’를 영창하십시오.]
역시나. 전과 같은 맥락이다.
이브가 성장하고, 혈천갑의 외형이 변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스킬이 생겨난 것이다.
“…그냥 간지용일 리가 없지.”
나는 안도한 나머지 중얼거렸다.
마음의 준비를 최대한 빨리 마치고. 표시된 시동어를 그대로 영창했다.
“종말의 이브. 특수 스킬 상세.”
삐빅. 어김없이 상태창이 등장한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킬 정보]
[스킬명: 팬텀 베인]
[타입: 지속형/다중 공격]
[효과: 혈액을 주입한 깃털을 전방위로 난사. 이후 1분간 개별 조종 가능.]
[효력 범위: 시전자 기준, 반경 100m.]
[상세: 2차 개량된 혈천갑의 ‘레드 리뎀션’이 장착됐을 때만 사용 가능. 깃털을 전방위로 방출한 후, 1분간 개별 제어권을 갖는다. 사용한 깃털의 양에 따라 생명력을 추가적으로 소모하며, 재사용 대기 시간은 10분이다.]
“오호.”
이건 또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족함을 실감하던 범위 공격기. 그것이 때마침 등장한 것이다.
‘이번 던전 마스터한테 시험해 보면 되겠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비행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백화점 최상층을 향해 전진하던 와중.
“…음.”
나는 침음을 흘렸다.
끼기긱. 인상을 바짝 찌푸리며 비행을 멈췄다.
아니지. 멈춘 게 아니고, 사실 멈춰졌다고 해야겠다. 끊임없이 주변 기물들에 걸리적거리는 날개 때문이었다.
“아니. X발…….”
참다 참다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날개의 크기가 너무 크고 아름다운 것이 문제였다.
‘생각보다, 움직이는데 존나 거추장스럽잖아, 이거.’
혈천갑은 경갑과 중갑 사이의 무언가다.
외형은 풀 플레이트 아머에 가깝지만, 그런 것치곤 놀랍도록 가볍다.
일단 전 스탯 만렙인 내겐 움직임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약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있는 정도의 체감이었다.
“근데 이건. 실내에서… 제약이 너무 많은데.”
하지만 내 몸의 두 배는 될 법한 면적의 날개,
이건 좀 문제가 많이 된다. 부피 가늠도 제대로 안 돼서, 여기저기 부딪치기 일쑤였다.
‘이거 못 없애나?’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짜증과 불쾌감만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급기야 벌써 없앨 생각부터 하는 내가 있다.
‘삭제 마려운데. 진짜로.’
스킬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떼고 싶었다. 기동전과 속도전 위주의 전투를 하는 나로선, 이건 너무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염원을 시스템이 즉각 캐치했다.
[혈천갑의 부속 아이템, <레드 리뎀션>을 해제합니까?]
[유지 상태를 해제하려면 ‘레드 리뎀션 유지 해제’를 영창하십시오.]
웬걸. 날개는 온오프가 되는 부속품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어를 내뱉었다.
“…레드 리뎀션. 유지 해제.”
파사삭!
핏빛의 깃털들이 곧장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깐 내 주변에서 하늘거리며 떨어지다, 이내 녹아내리듯 일제히 형체가 사라졌다.
[<레드 리뎀션>의 유지가 중단되었습니다.]
[재부착하려면 ‘레드 리뎀션 소환’을 영창하십시오.]
삐빅.
다시 한번 시스템 패널이 등장했다.
온오프가 된다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앞으로 혈천갑 사용을 실외로 제한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할 정도로 불편했으니까.
“이번 던전 마스터한테 써보긴 글렀구만. 이거.”
아무튼 덕분에 좋은 거 하나는 알아간다.
2차 개량된 혈천갑의 부속품, ‘레드 리뎀션’은… 충분한 공간이 확보된 상황에서만 사용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 발목만 더 잡힌다.
“좋아.”
어쨌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푸쉬익! 나는 빠르게 발을 놀렸고. 상층을 향해 다시 쾌속 전진했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싫어… 안 돼. 오지 마… 엄마……!!”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광기에 사로잡혀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귀곡성 같은 신음이 도처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쯧.”
처절한 상황에 혀를 차는 한편. 일단은 일절 무시했다.
1층을 제압한 건 곧장 밖으로 퍼져나갈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딱히 사람들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명복은 빌어주지.’
사향 나비에게 일단 현혹당한 이상. 백화점에 갇힌 사람들의 죽음은 확정이다.
구하지 못할 생명에게 할애할 정신은 없다.
난 영웅도 용사도 아니다.
[스킬 발동: 정화의 파동]
[스킬 발동: 생츄어리]
다만 각종 면역계 스킬을 한 층 견고하게, 온몸에 덕지덕지 둘렀다.
던전 마스터가 있는 최상층까지. 이제 고작 한 층 남았다.
―으음? 어머나.
그렇게 최상층에 도달한 그 순간.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여기까지 왔으면, 무조건 사향 나비와 마주쳤을 텐데……?
간드러지고, 아름다우며, 꿈결처럼 희미한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너.
초록빛 머리칼을 일렁거리는 여인이 하나 서있다.
온화한 이목구비로 위험한 미소를 머금었고. 한복처럼 하늘하늘한 회색빛 드레스 차림의 여자였다.
―대체… 정체가 뭐니?
인상은 놀랍도록 희미하고. 또한 덧없다.
직접 보고 있음에도, 진짜 눈앞에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
―내 정원에, 무슨 볼일이라도?
스르릉!
여인은 발치에 꽂아뒀던 거대한 가위를 뽑아냈다.
자기 키보다도 큰 가위였다. 두 개의 손잡이를 각각 양손에 쥐고, 살벌하게 벌어진 가윗날 사이로 나를 겨눈다.
‘…정원이라.’
여인은 이곳을 정원이라 칭했다.
그리고 주변의 꼬라지를 보면. 그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여인에게서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꺽, 끄어헉…….”
“그르륵, 크륵……!”
죽어가는 사람들이 도처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거기선 굵고 거대한 식물 줄기가 튀어나와 있다.
하나 같이 꽃의 줄기였다.
“끄… 으거걱……!”
사혈화.
사람의 뇌. 심장. 각종 장기에 뿌리를 박고 공포를 빨아 생장하는 오색 빛의 꽃이다.
줄기 끝에는 하나같이, 영롱한 꽃잎을 자랑하는 꽃다발이 흐드러졌다.
“카하아악!”
누구는 눈.
누구는 코나 귀.
그리고 누구는 뱃가죽과 배꼽을 뚫고, 아름다운 빛의 꽃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아… 아아…….”
“그만… 제발. 그만…….”
온몸이 식물에 잠식되어 버러지처럼 꿈틀거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인간 동충하초.
그것도 대규모 양식장을 보는 듯하다.
―스스스스…….
―푸스스스…….
그리고 나비들. 사향 나비들이 사혈화의 꽃봉오리에 바글바글 모여 주둥이를 꿈틀거렸다.
아무리 빛으로 이루어진 나비라지만. 수천에 달하는 곤충이 한곳에서 우글거리는 모습은, 경이보단 경악에 가깝다.
“오, 지… 마아… 살, 려줘…….”
그런데도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지. 죽지 못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끄아… 아아……!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했다고…….”
죽으면 더 이상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던전 마스터는 그들을 강제로 연명시켜 뒀고. 사람들은 목숨만 간신히 붙은 채, 영원히 악몽 속에서 헤매는 중이었다.
‘현자의 눈. 상태창 확인.’
그쯤에서 경치 감상은 중단. 즉각 던전 마스터의 상태를 확인한다.
삐빅. 패널이 떠올라 시야를 장악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미명 정원사 렘마]
[체력: 76 마력: 73]
[힘: 45 민첩: 34 지능: 42]
[상세: 제51던전 ‘미명 정원’의 던전 마스터. 그녀가 가꾸는 정원에선 악몽을 양분으로 피어나는 사혈화가 자라난다. 지성체의 인식 기저에 있는 근원의 공포를 다루어, 정신을 서서히 파괴하는 것을 즐긴다.]
현자의 눈은 거짓말을 안 한다.
확실하다. 눈앞의 여자는 내가 아는 그 던전 마스터, 정원사 렘마가 맞다.
‘…아니. 아닌가?’
그러나 단호한 확신도 잠시뿐.
나는 고개를 휘젓고 경계심을 바짝 조였다.
‘확신은 금물이다.’
눈앞의 렘마가 실체가 아닐 가능성.
그리고 이 패널조차 조작된 것일 가능성. 그 일말의 가능성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부터.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래. 저 던전 마스터의 특기를 떠올려라, 한정용.
놈의 대표적인 공격 방식은… 환각과 환상. 그를 통한 기만전술이다.
―흐흥. 별난 걸 무서워하고 있구나? 너.
문득 스르륵, 렘마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허물어졌다.
직후 목 뒤에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
본능적으로 상체를 숙이며 오른손을 휘두른다. 사복검이 힘차게 뻗어 나갔다.
키이잉! 거대한 가윗날이 사복검과 맞부딪쳤다.
―어머? 이걸 막았네.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온다.
카가각! 사복검을 거칠게 휘두르며, 그 반발력을 이용해 신속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흐트러졌던 자세를 순식간에 갈무리했다.
“역시. 환영이었군.”
멀찍이서 일렁거리는 렘마에게 중얼거렸다.
차칵차칵. 렘마는 아쉽다는 양, 가위를 벌렸다가 닫길 반복하고 있었다.
―빨라. 으음. 속도가 엄청 빠르네. 나보다도 훨씬.
렘마는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중얼거렸다.
실처럼 가늘게 뜬 눈꺼풀 속. 시퍼런 눈동자가 한동안 내 주변으로 뒤룩거렸다.
이내 씨익, 그녀의 입과 눈에 천진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면.
문득 렘마가 양손에 잔뜩 힘을 주더니, 단숨에 가위를 활짝 벌렸다.
카아앙! 드높은 금속음을 내며 가위가 둘로 쪼개졌다.
―이래도 피할 수 있나, 한 번 볼까?
휘리릭! 두 자루 날붙이가 그녀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회전한다.
나는 가소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쪼갰군. 쌍수 무기는 단명의 상징이다. 던전 마스터.”
그러나 렘마를 눈에 담은 직후.
조롱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눈앞에 보이는 인물의 형상.
너무 익숙한 모습에, 잠깐 머릿속이 백지가 된 탓이었다.
“…수아.”
강수아가 서있었다.
진녹빛 머리칼의 렘마는 어디 가고. 쪼개진 가윗날을 양손으로 꼬나쥔 수아가, 전방에 서있다.
그녀가 기괴하게 뒤틀린 비웃음을 머금었다.
―네가 무서워하는 거, 왜 죄다 계집애뿐이야?
멍한 정신으로 또 다른 목소리가 쑤셔 박힌다.
그 또한 익숙한 목소리다.
“……!”
오른쪽 측방으로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당연하다는 듯이, 강서윤이 가위를 든 채 서있었다.
―여자 공포증이라도 있는 걸까? 흐후후.
이번엔 이세라의 목소리.
등 뒤였다. 눈가를 붕대로 칭칭 감은 이세라가 어김없이 거대한 가위를 들고 서있다.
―아빠. 내가 무서워? 응? 푸흐흐흐.
급기야는 이브까지.
앞선 셋과는 좀 다른 의미로 내가 무서워하는 존재. 그녀가 마지막이다.
네 명의 여인이, 어느새 동서남북에서 날 포위하고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의문은 이것이었다.
렘마의 신형이 흐느적거리고, 사라졌다 나타난다. 여럿으로 보인다.
급기야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들이, 실제인 것 마냥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당한 거냐.’
전부 렘마의 환술에 빠져들었다는 증거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손바닥 안. 나는 진작부터 그녀의 술수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 때도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자.
―그럼.
―다시 한번.
―가볼까?
강수아. 강서윤. 이세라. 그리고 이브까지.
네 사람의 형상을 한 렘마가 가윗날을 까딱이나 싶은 순간.
―아하하하핫!!
파바박!
째지는 비웃음이 사방에서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