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
강서윤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 뭐? 방금 뭐라고?”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사실은 전부 들었으면서. 찡그린 얼굴로 재차 물어온다.
나는 차분하게 재방송 해줬다.
“이제 충분해. 더는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야. 그게 뭐야! 이, 이렇게 갑자기?!”
“엘리베이터 닫히겠다. 일단 내려.”
“어… 어어!”
나는 강서윤의 등을 꽉꽉 밀며 엘리베이터를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덜컹! 직후 등 뒤에서 문이 닫힌다. 눈앞에는 남산 타워 전망대의 탁 트인 서울 정경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슈레더의 조사와 접촉부턴, 내가 알아서 한다.”
서울의 풍경을 가만히 부감하며 통보했다.
강서윤은 이해가 안 되는지 연신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니… 야! 그, 그럼 나는. 난 이제 뭘 하면 되는데!”
“아무것도 안 하기. 그걸 해주면 된다.”
“뭔 소리야! 그딴 게 어딨어!!”
“카일 인더스트리의 소문을 협회 암부가 직접 통제했다. 이걸 알아낸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해줬어. 이쯤에서 손 떼라. 서윤아.”
“뭐가 어째?!”
“꼬리가 길면 무조건 밟히는 법이야. 이 이상 네가 깊게 파고들면 무조건 위험해진다.”
슬쩍, 강서윤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잔뜩 구겨진 얼굴에 나를 향한 분노가 잔뜩 서려 있었다.
“야, 한정용.”
그녀가 으르렁거린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설마 이제 와서… 내 걱정 해주는 거냐?”
“그럴 리가.”
“그러면! 다짜고짜 한배 태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딴 X같은 소릴……!”
“이제 와서가 아니야. 처음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
노발대발하던 강서윤이 입을 콱 다물었다.
좋아. 내 의사를 말하려면 지금뿐이다. 그녀가 조용한 틈을 타서 몇 마디 더 얹었다.
“처음부터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하겠다 싶으면, 바로 그만두게 할 예정이었고. 슈레더가 개입했다면 지금이 그 위험한 상황이야. 틀리냐.”
“…그, 그야.”
“그래서 내 초기 계획대로 널 뺀다. 그런 소리야.”
“아… 으, 진짜!”
강서윤이 발을 동동 구른다.
뭐라 표현하기 애매한 복잡다단한 표정이 떠있다.
뭔 생각을 하고 있을진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제대로 납득한 표정은 아니네.’
그렇다면 난 강서윤을 납득시켜 줄 의무가 있다.
그것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준 그녀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고.
“어… 아빠?”
선수를 뺏겼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먼저 불러버린 것이다.
굉장히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다.
“어.”
“응?”
나와 강서윤이 거의 동시에 탄성을 흘렸다. 우리의 시선이 퍼뜩,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거기엔 이브가 멀뚱히 서있었다.
“아빠… 설마, 나 찾아온 거야?”
이브는 하루 새 상당히 꼬질꼬질해진 몰골이었다. 나를 향해 반가움 반, 곤란함 반씩 섞인 붉은 시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녀가 나를 빤히 응시하길 잠시.
“응? 뭐야. 이모도 있네?”
이브는 내 뒤에 서있던 강서윤을 발견했다.
그녀가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별안간 퍼뜩 어깨를 떨었다.
“아니. 자, 잠깐만?”
이브의 두 눈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이내 손가락을 번쩍 들어, 나와 강서윤을 번갈아 가리키나 싶더니.
“아, 아빠! 설마 이모랑, 바람피우고 있었어?!”
제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X발.
초장부터 반인륜적인 끔찍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 * *
이브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펄쩍펄쩍 뛴다.
경악에 찬 표정과 어조로, 연신 소리친다.
“막장! 세상에! 완전 개막장! 불륜! 패륜! 웬일이야!!”
근데 이상하게 좀… 행색이 들뜬 것 같다.
연예인 불륜 현장을 캐치한 파파라치 같달까. 흥미진진한 표정과 흥분에 찬 눈동자를 여실히 드러내는 중이다.
“엄마는?! 엄마도 둘이 지금 여기 있는 거 알아?”
“…아니. 모른다.”
“그럼! 알 리가 없지! 알면 엄마가 가만있을 리가 없으니까! 응!!”
시끌벅적, 야단법석. 온갖 지랄발광을 다 벌인다.
전망대를 구경하던 주위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제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저래?”
“몰라. 불륜? 불륜이라 그러던데?”
“세상에. 저 둘이 불륜이야?”
반인륜적인 오해가 점점 커진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다. 급기야 주변의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전염되었다.
설상가상.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잠깐만. 저거, 마스크 쓴 여자! 저거 눈매가… 좀 익숙하지 않아?”
“가, 강서윤이다! 오버 랭커 강서윤 아니야?!”
“어?! 가, 강서윤이 불륜?!”
오버 랭커의 스타성이 한 번 더 발목을 잡았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한층 커졌다. 모두의 이목이 일순간에 강서윤 하나로 집중되었다.
그러자, 논란의 중심에 선 강서윤은…….
“뭐, 뭐야. 갑자기?! 왜 일이 이렇게 되는데!!”
오버 랭커라고 뭐 대단한 수가 있겠는가. 그저 울상을 지으며 날 빤히 쳐다볼 뿐이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호소한다.
‘해줘.’
무슨 방법이라도 좋다. 어떻게든 지금 사태를 수습해 줘. 딱 그런 시선이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일단 이렇게 된 데는 분명 내 책임도 있다.
애초에 강서윤이 안 따라왔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건 뭐 결과론이고.
그냥 내 책임인 걸로 하자. 이제 깊게 생각하기도 귀찮다.
‘스킬 발동.’
오른손을 머리 위로 번쩍 뻗어 올렸다.
손가락 끝에서 선혈처럼 새빨간 빛의 실 다발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이내 피피피핑! 전방위로 방사되었다.
[스킬 발동: 괴뢰의 실]
키이잉!
빛의 실들은 전망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정수리를 파고들었고. 한 차례 불길한 적색광을 울컥 토해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빠르게 초점이 사라져 갔다.
“아…….”
“으, 아… 아으…….”
모두 얼굴이 멍청하게 풀어졌고. 지능이 퇴행한 것처럼 옹알이만 웅얼댔다.
자세는 일괄적으로 차렷 자세. 손가락 하나도 함부로 까딱하지 않는다.
“으, 어? 뭐야? 무, 무슨 일이야?”
초유의 사태에 강서윤이 당황했다.
그러든 말든. 나는 빛의 실이 연결된 손가락을 연신 까딱거렸다.
‘링크된 모든 괴뢰에게 일제 명령 주입. 기억 조작.’
마음속으로는 연신 시동어를 되뇌며, 분주하게 스킬을 조작했다.
불끈. 주먹을 틀어쥐며 마무리한다.
‘나. 강서윤. 그리고 이브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가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하든. 일체 신경 쓰지 마라.’
두근!
심장이 한 번 크게 요동친다.
쿠르륵! 방대한 마력이 빛의 실을 타고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크으…….”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성이 흘러나온다.
마력. 생명의 근원이 뭉텅이로 쏟아내지는 탈력감. 그에 따른 참을 수 없는 신음이었다.
‘장난 아니네. 이거.’
상상 이상으로 빨려 나가는 마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까지 여러 개체를 동시 조종하는 건 처음인데.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한 번에 주무르면 이렇게 되는군.
오늘도 자잘한 지식이 늘었다.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으, 어… 어어……!”
“으극……!”
움찔, 움찔.
빛의 실에 연결된 사람들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온몸을 잘게 경련했다.
그것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이다.
[알림: 조작 완료]
[모든 괴뢰가 하달된 명령을 이행했습니다.]
마침내 그 패널이 눈앞에 떠올랐을 때. 나는 손을 내렸다.
파사삭! 뻗어 나왔던 붉은 실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소실되었다. 사람들의 눈동자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온다.
“어… 어?”
“나, 방금… 어라? 뭐지?”
“끄윽. 머, 머리야!”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부여잡고 의문의 탄성을 흘려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아. 구경. 그래.”
“전망대. 경치, 구경…해야지.”
“…기념품.”
그들은 빠르게 의문을 거두고, 홀린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절대적인 누군가가 그러라고 명령한 것처럼.
“엄마, 엄마! 여기 봐! 저기! 개높아!”
“어허! 그런 말 쓰면 안 되지!”
“와, 자기야! 이거 봐봐! 예쁘다! 그치?”
주변이 다시 전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불륜 소동 따윈 기억도 안 난다는 듯이.
아니. 이건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아예 나와 강서윤, 이브가 안중에도 없는 행색이다.
이 악물고 존재 자체를 무시받고 있었다.
“헤에…….”
강서윤이 신기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슬쩍, 내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조금은 다시 봤다는 표정이다.
“너. 이런 것도 가능했냐?”
“가능은 하지.”
“가능은 하다? 그 말은?”
“웬만하면 쓰기 싫다는 소리다.”
“그래? 왜? 엄청 편할 거 같은데!”
“마력도 존나 많이 들고. 남의 뇌를 주무르고 나면 내 기분도 X같아져서.”
“아아…….”
강서윤이 아쉬운 듯한 얼굴로 마지못해 납득했다.
하긴. 그녀 입장에선 부러운 스킬일 수도 있겠다. 오버 랭커의 인기가 인기다 보니, 평소에 알아보는 사람이 연예인급으로 많을 테니까.
“일단 급한 불은 껐고.”
이제 엑스트라들에게는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간 뒤, 덥석! 혼란을 틈타 얼렁뚱땅 탈출하던 소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어, 딜도, 망가.”
“으극.”
소녀… 이브가 신음을 흘리며 멈춰 섰다.
이브의 고개가 슬며시 돌아간다. 잔뜩 위축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직도 꺾이지 않은 반항기가 얼굴에 한가득이다.
“…뭐야. 이모랑 오붓하게 계속 데이트나 하지, 왜?”
“그건 오해다. 이브. 그 소리 한 번만 더하면, 진심으로 화낸다.”
“흥. 오해는 무슨! 현장 검거당해 놓고 변명하는 거야? 그럼 이렇게 좋은 날에, 왜 둘이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너 찾아다녔지. 뭔 헛소리냐.”
“…아.”
이브가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저 반응 뭐냐. 왜 저리 놀라.
‘진짜로 나랑 강서윤이 데이트한다고 생각했나.’
날 곤란하게 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사가 피곤해진 나머지, 휘휘 손사래를 치며 제안했다.
“아무튼 이 정도면 만족했겠지. 슬슬 집에 돌아와라.”
아니지.
좀 어폐가 있었다. 제안한 게 아니다.
이건 명령이었다.
“네가 없으니 여러모로 곤란해. 나한텐 네가 필요하다. 이브.”
강압적이고 직선적인 시선이 이브를 짓누른다.
거기에 가득 담긴, 살기라고 해도 좋을 날카롭고 육중한 압박감.
“돌아와. 당장.”
단순 사념을 넘어, 물리적인 압력이 느껴질 정도의 강력한 언령.
나는 그 모든 것을 서슴없이 이브에게 행사했고.
“시, 싫어. 싫다구! 안 돌아갈 거야!!”
이브는 육신을 옥죄는 압박감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완강하게 나를 거부했다.
이 반응은 좀 예상 밖이다.
‘여기까지 버틴다고?’
솔직히 이 정도쯤 하면 알아서 슬슬 기어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브의 의지가 단단하다.
그만큼 나한테 화가 많이 났다는 건가?
“…흐음.”
한껏 조여놨던 살기와 압력을 전부 풀어버렸다.
그리고 말투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좋아. 그래. 진짜 내가 졌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먼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싸워봐야 잃을 게 많은 건 무조건 나고.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움 받으면, 손해 보는 것도 나다.
‘을이라 서럽군, 진짜로.’
진짜 부녀지간이 그렇듯이. 결국.
잃을 게 많은 아버지 쪽이 져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브, 대화를 하자.”
“흥. 대화? 무슨 대화!”
“네가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아니면 전에 못 한 얘기라든가. 뭐라도 좋다. 전에는 서로가 좀 감정적이었던 부분이 있었지. 대화로 풀어나가면…….”
“됐어! 이제 와서 아빠랑 할 얘기 없어!”
고개를 팩 돌리며 야멸차게 거부하는 이브.
예나 지금이나 딱밤을 부르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참을 인’을 주문처럼 머릿속에 되뇌어, 1차 살인 고비를 어떻게든 넘겼다.
“이브. 내가 미안했다.”
“흥. 말만? 실제론 안 미안하다더니?”
“…….”
“미안하게 됐네.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라서! 아직 다 기억하고 있네요~! 대충 사과해서 얼버무리려 해도 어림도 없다 이거야, 아빠!”
2차 살인 고비가 빡세게 찾아왔다.
참을 인. 참을 인. 참을 인……. 그래. 세 번째 참을 인에서 간신히 제동됐다.
울컥하기 직전이었다. 아슬아슬했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솔직히 이다음, 3차?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 자신의 변모를 장담할 수 없다.
“…이브. 내가 대체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
답답한 나머지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하지만 이브는, 끝까지 퉁명스럽게 비아냥거릴 뿐이다.
“해주다니. 뭘? 아빠. 이제 와서 신경 써주는 척이야?”
“아니. 써주는 척이 아니고…….”
“흐응. 내가 없으니 곤란하긴 한가 봐? 잘만 쓰던 도구가 없어지니 답답해졌어? 그런 거지? 응?”
“…….”
머리를 열심히 굴려본다.
하지만 틀렸다. 대화 의지가 완전히 단절된 이브와 어떻게 화해하면 좋을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브의 냉대는 계속된다.
“됐어, 아빠. 아빠는 그냥 아빠 맘대로 살아! 나는 내 맘대로 살 거니까!”
“그러지 마라. 일단 대화로 서로 오해를 좀 풀고.”
“됐다니까 왜 이래? 나는 이제 할 말 없으니까, 서로 갈 길 가자고! 원래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아빠가 내 기분 따위 전혀 신경도 안 쓰듯이, 나도 그냥……!”
쫘아아악!!
별안간. 굉장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잘난 듯이 떠벌리던 이브의 목소리도,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아?”
한참 후.
이브는 멍하니 탄성을 흘렸고.
이내 두 손을 들어 오른뺨을 감싸 쥐었다.
“아… 으, 아!”
하얗던 뺨이 불난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브의 감싸 쥔 손바닥 사이. 시뻘건 손바닥 모양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아, 아… 아파……!”
그녀는 지금.
별안간 싸대기를 풀 스윙으로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