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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5화 (95/235)

95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6)>

오원태와는 일단 구두 계약만 마치고 곧장 헤어졌다.

그는 떠날 때도 주변을 연신 살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제가 준비되는 즉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정용 씨.”

“네. 잘 부탁합니다.”

마음 같아선 우리 집에 묶어놓고 24시간 연구만 하게 만들고 싶다.

하지만 우리 집엔, 가장 중요한 연구 시설과 장비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연구 관련의 주도권은 무조건 오원태 쪽에 있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이쪽은 가장 중요한 준비물, 연구의 대상 자체가 수중에 없는 상태다.

그래서 지금부턴 그걸 되찾으러 갈 예정이다. 당장.

“가, 가출 중이라고? 그 흰머리 꼬마가?”

서윤에게 대충 사정을 설명하자, 황당하다는 어조로 되물어온다.

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됐다.”

“아니, 실화냐? 뭘 어쩌다 걔가 가출을 해?”

“…….”

“싸웠냐?”

싸웠냐고 하면… 일단 싸운 건 맞다.

근데 과정을 말로 풀자면 좀 복잡한데. 내 말재주로 설명해 봤자 나만 나쁜 새끼 될 것 같고. 어떻게 설명하면 잘 설명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습관대로 대충 얼버무렸다.

“…약간 부녀 갈등이 있었어.”

“너는 뭔 X발, 대체 어떻게 살길래 이세계 외계인이랑 부녀 갈등이 일어나냐? 애초에 진짜 부녀도 아니잖아!”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게 있어.”

“또라이 새끼 진짜. 가지가지 한다, 아주!”

아무튼 나는 가출한 이브를 찾으러 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강서윤이 당연하다는 듯. 내 옆으로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슬쩍 벌렸다.

“…넌 왜 따라오냐.”

“외계인 양녀랑 부녀 갈등 해소 과정이 궁금해서 그런다. 꼽냐?”

“꼽진 않은데… 오버 랭커 강서윤. 그렇게 한가하냐?”

“협회에 억지 부려서 시간 좀 냈다, 왜. 존나 고맙지?”

“…….”

내가 뭘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흐름으로, 예상치 못하게 강서윤과 같이 가출 소녀 회수 프로젝트에 나섰다.

“그럼… 바로 가보자고.”

강서윤이나 나나 텔레포트 사용자.

나는 곧장 텔레포트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어… 자, 잠깐. 야!”

하지만 직전에 강서윤에게 제지당했다.

나는 끌어올리던 마력의 출력을 살짝 조절했고. 그녀에게 슬쩍 시선을 뒀다.

“왜. 문제 있냐.”

“이, 있지! 지금 설마, 텔레포트로 가려고?”

“그럼, 뭐로 보였냐.”

“아니! 협회 허가도 없이 함부로 쓰면 안 되지! 불법이잖아!”

정의 소녀 강서윤이 정론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고지식함은 이미 뼛속까지 아는 바다. 나는 헛웃음이 나와 손사래를 쳐버렸다.

“전에 내 문자 받았을 때. 기억 안 나냐.”

“아? 무, 문자?”

“우리 집 거실에 튀어나와서 내 멱살부터 잡더니만. 그때는 허가받고 순간이동 했나 보지?”

“…아.”

강서윤은 나직한 탄성을 흘렸고, 이내 표정을 당황으로 물들였다.

그녀가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 그때는!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이……!”

“나도 지금 그만큼 급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한 번만 좀 쓰자.”

“…아, 진짜! 아오!”

“혹시나 걸리면 책임은 내가 진다. 급한 건 진짜니까 좀 따라줘.”

그렇게까지 설득하자, 강서윤은 결국 마지못해 내 제안을 수락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하니 추적은 순식간이었다. 우리는 공간을 훌쩍훌쩍 넘어가며, 단박에 이브의 발신기 인근까지 도달했다.

“흐음. 여기야?”

“그래, 위치상으론 이 근방이다.”

도착한 곳은 남산 타워.

바로 전생엔 수아와 함께 여길 왔었는데. 이번엔 언니 쪽이랑 오게 됐네.

특별할 건 딱히 없다만……. 뭔가 감회가 새롭다.

“뭐랄까. 옛날 생각나네. 흐흐.”

강서윤도 추억에 젖어 중얼거렸다.

타이밍 절묘하군. 15년 넘게 친구 해서 그런가. 생각하는 수준도 비슷해지나 보다.

“야, 정용. 이제 어디로 가야 해? 느껴져?”

“위쪽에서 느껴지는데.”

“위쪽? 그럼 전망대인가?”

“그럴지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망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시선이 향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얘 돈도 없을 텐데, 어떻게 들어갔지.’

토막상식. 남산 타워 전망대는 입장료가 있다.

나는 그것이 굉장히 미스터리였는데, 강서윤은 무료입장의 방법론에 대해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타탓! 그녀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오케이. 바로 올라가 보자, 그럼! 빨리!”

“…왜 이리 신났어, 소풍 왔냐.”

“시, 신나긴 누가!”

빠악!

괜히 한 마디 더해서 등짝 한 대 얻어맞았다.

뭔 말만 하면 손부터 나온다. 무서워서 말이나 섞겠나, 이거.

“…….”

“…….”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타고, 인파 속에 끼어서 남산 타워 전망대까지 올라가던 도중이었다.

문득 강서윤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까 있잖아.”

“…….”

강서윤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대개 둘 중 하나다.

날 이유 없이 씹고 싶거나. 그냥 갑자기 매도하고 싶거나.

빠르게 정신적 대비를 마치고 대답했다.

“어. 왜.”

“네가 했던 추가 의뢰 말이야. 소문 조사해 달라는 거.”

“…어. 그거. 왜.”

어제 먹은 점심 메뉴마냥 태연하게 말하는 것치곤, 굉장히 심각한 주제였다.

나는 자세와 정신을 고쳐 잡으며 대답했고. 그러자 강서윤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그 두 사람.”

오히려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해왔다.

질문의 의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두 사람이라니. 애덤 크로스랑 로즈 휴스턴?”

“그래. 그 사람들.”

“내가 그걸 알았으면. 너한테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겠냐.”

“하긴. 그것도 그러네.”

강서윤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그냥 좀 궁금해져서. 이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러냐.”

“어. 이건 그러니까… 음. 내가 좀 더 조사해 본 다음에 말해줄게!”

강서윤은 그렇게 북 치고 장구 치더니, 제 혼자 결론을 내버렸다.

그렇게 혼자 납득하고 끝? 그런 게 어디 있냐.

불완전 연소된 내 호기심은 어쩌고.

“갑자기 왜 물어보냐. 뭔가 알아낸 게 있는 눈치인데.”

“흐음. 그게 좀 애매해서.”

“애매하다고?”

“응. 알아낸 게 있다고 해야 할지, 아직 없다고 해야 할지…….”

본인 말마따나 애매모호 그 자체인 대답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강서윤에게 좀 더 거리를 밀착했다.

“일단 말이나 해봐. 강서윤.”

“어… 야, 야!”

서윤은 깜짝 놀라며 숨을 삼켰다. 지척까지 다가온 내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절찬리에 추궁하기 시작했다.

“정보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뭔데.”

“아, 아니. 근데 이거, 진짜 별거 아닌 얘기일 수도 있는데?”

내가 잡아먹을 듯이 얼굴을 들이밀어서 그런가. 강서윤이 좀 위축된 행색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 여자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닐 텐데. 오늘따라 끝까지 사람 답답하게 하는군.

“내가 판단한다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좋아. 말을 해. 얼른.”

“아, 알겠어! 알았으니까 좀, 일단 떨어져!!”

강서윤은 당황하며 퍼뜩 거리를 벌렸다.

나는 딱히 막지 않았다. 얌전히 그녀가 엘리베이터 구석까지 도망가는 걸 관망했다.

“…하아. 진짜.”

강서윤이 그런 나를 잠깐 빤히 노려봤다.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야. 분명히 협회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한 번 돌았었대. 1년쯤 전인가?”

“그래. 그래서 그 소문의 내용이 궁금했던 거다.”

“카일… 인더스트리였나? 거기에서 던전 발생에 관한 비밀을 전부 밝혀냈다지? 그걸 진두지휘했던 게 그 두 연구원이었고.”

“맞아.”

“그래. 그게 끝이야.”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려서 순간 주저앉을 뻔했다.

“……?”

아니. 이제 뭔가 중요한 게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여기서 갑자기 끝? 실화냐?

어이가 없다 못해, 약간 화가 날 정도의 타이밍이다.

“그게 끝이라니. 뭔가 더 알아냈던 거 아니었냐.”

“아냐. 알아내고 싶어도, 더는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었어.”

그건 좀 의미심장한 소리였다.

잘 듣고 있던 나는 귀를 의심해야 했다.

“…알아낼 수가, 없다고?”

“굳이 말하면 바로 그게 알아낸 점이라고 할까? 내 선에선 이 이상 아무리 조사해도, 절대로 소문의 진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거.”

“……!!”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들이다.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한다.

“…진상에 도달할 수가 없어? 절대로?”

“그래. 절대로.”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절대라는 게 어디 있냐고. 말이 되냐?”

“당연히 말이 되죠?”

강서윤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인다.

누군 심각해 죽겠구만. 지금 상황에 농담이 나오시겠다?

순간 짜증이 울컥 일었다.

“강서윤. 혹시 장난을 치는 거라면…….”

“장난 아냐.”

쿠르르르.

최상층을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묵직한 기동음, 연신 귓가를 자극하는 남산 타워 안내 음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크고 작은 두런거리는 소리.

“내가 지금. 장난치는 면상으로 보여?”

어스름한 조명 속에서 난,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강서윤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눈빛을 보고 겨우 인정했다.

“…진짜 안 되는 거냐.”

실망을 감출 길이 없다. 낙담한 나머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서윤이 그런 나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푸흐. 새끼, 바로 처지긴!”

그녀가 멀어졌던 신형을 살짝 가까이 붙여왔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층 더 낮게 깔았다.

“아직 실망하긴 일러. 한정용.”

“왜. 설마 더 실망할 게 남았냐.”

“그게 아니고 인마. 생각을 해봐. 왜 내가 아무리 조사해도, 이 이상 정보 수집이 안 됐을 것 같아?”

“그게 뭔 말이냐.”

“소문의 조사가 막힌 이유 말이야. 중요한 건 그 이유 쪽이었다고.”

“…이유.”

갑자기 이야기가 새 국면에 돌입했다.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멍하니 강서윤을 쳐다봤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냐?”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물었고.

씨익. 강서윤의 입가에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 소문이 말이야. 찾아보니까 좀 이상한 점이 있더라고?”

“이상한 점?”

“응. 엄청 화제가 됐던 것치고, 소문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갑자기 뜸해졌어. 관련 자료도. 그에 대해 떠드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싹 증발해 버렸다니까.”

“…그건.”

부자연스러운 정보의 증발.

인위적인 개입과 통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어색함.

분명 내가 인터넷의 정보를 조사할 때도, 그런 부자연스러운 미싱 링크가 있었다.

‘그게 헌터 협회의… 입소문에도 적용됐다고?’

이어진다.

뭔가 하나. 결정적인 톱니바퀴 하나만 더 있으면.

뭔가가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소문 자체는 아무리 조사해도, 더 이상 나오는 게 없었거든? 그 대신…….”

단단히 굳어버린 내게, 강서윤이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싹 갖다 댔다. 그리고 최대한 작게 속삭인다.

“그 소문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쪽을 중점적으로 좀 알아봤는데. 소문을 강제로 잠재운 게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

“그게 누군데.”

“누구겠냐. 헌터 협회 암부. 슈레더.”

“……!!”

“이 정도로 철저하게, 이 정도 규모로. 물밑에서 여론과 소문들을 조작할 수 있는 놈들? 아무리 생각해도 협회의 암부 밖에 없어.”

팅!

예술적인 타이밍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남산 타워 전망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지며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우리는 휑해진 엘리베이터 안에, 잠깐 우두커니 서있었다.

“…….”

“…….”

부릅뜬 눈으로 시선이 교차하길 잠시.

나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가다듬었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고맙다. 정말로.”

우선은 감사 인사부터.

나를 위해, 혹은 수아를 위해. 암부라는 거대한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힘써준 것에 대한 솔직한 감사.

“정말 고마워, 서윤아.”

“으, 에? 아니! 가, 갑자기 무슨, 새꺄! 쪽팔리니까 이러지 마!”

강서윤은 당황하며 말리려 했지만, 나는 감사를 멈추지 않았다.

90도로 머리를 숙였고.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이제 됐어. 고생 많았다.”

그다음엔, 곧바로 선 긋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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