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4화 (94/235)

94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5)>

강서윤이 찍어준 좌표는 구로구 어딘가의 한 음습한 골목길이었다.

나는 구불구불한 골목길 한복판에서 파팟! 별안간 새파란 마력광과 함께 등장했다.

눈앞에서 강서윤이 번쩍 나타났다.

“왓, X발! 깜짝아!”

강서윤은 처음엔 흠칫 놀랐지만,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가 헛기침을 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어. 와, 왔구나.”

“그래.”

“그… 우선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아?”

“그래.”

“좋아. 일단 따라와 봐.”

그렇게 우리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골목을 유심히 살피며 앞서가는 강서윤. 그리고 바짝 붙어 뒤따라가는 나.

한동안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

“…….”

무슨 속셈인지. 어디로 가는 건지. 그리고 왜 인적 뜸한 골목으로 불러낸 건지.

그런 자잘한 건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뭐, 알아서 생각이 다 있겠지.’

강서윤에 대한 굳건한 신뢰에서 나오는 침묵이었다.

그렇다. 우리가 괜히 이십년지기 친구겠는가. 이런 쥐죽은 듯한 침묵도 이제 어색하기보단,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이라고 할 수…….

“야. 한정용. 뭐 좀 말이라도 해봐!”

“…음?”

“답지 않게 왜 아가리를 꽉 물어? 조, 존나 어색하다고. 나까지 미칠 것 같잖아! 새꺄!”

“…….”

…그런 사이 아니었군.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아무튼. 강서윤은 남이 해주길 오매불망 기다리기보단 목마르면 직접 우물 파는 여자다.

“그나저나… 너 오늘도 그 옷 입었냐? 그 존나게 칙칙한 후드 티.”

그녀가 어색함을 타파하기 위해 먼저 화두를 꺼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 험담부터 나오는 게 레전드라면 레전드다.

“너 뭔 만화 주인공이냐? 어떻게 항상 옷이 똑같아. 대체 그 옷 얼마나 좋아하는 거야.”

“왜. 불만 있냐.”

“아니. 불만은 둘째 치고. 사시사철 시커먼 후드만 입는 이유가 대체 뭔데?”

“후드 상의는 여타 모든 의류보다 기능적으로 우월하며,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 고사기에도 기록된 내용이지.”

“또 뭔 개소리야. 이 개 미친 또라이 새끼 진짜…….”

강서윤이 어질어질한 표정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몰라. 아무튼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반박 시 네오나치 빨갱이로 간주하겠다.

“진짜 제발, 그 존나 후줄근한 후드 티 좀 안 입으면 안 돼?”

그런 의미에서 강서윤은 네오나치 빨갱이가 분명하다.

과거 동대문 시장에서 5만 5천 원에 열 벌을 떨이 구매해온 이 후드 티의 멋짐을 모르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옹졸하고 편협한 패션관이 가엾고 딱할 따름이다. 강서윤.”

“하. 개또라이 새끼… 말하는 꼬라지 봐. X발.”

“먼저 시비 건 게 누군데.”

“아 그래. 줫대로 입어라 입어. 에휴.”

시답잖은 얘기를 간간이 주고받으며.

저벅저벅, 우리는 점점 골목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됐어. 여기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강서윤은 한 거대하고 낡아빠진 컨테이너 창고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긴.”

컨테이너 전방. 출입구 위로 박혀 있는 간판에 시선을 뒀다.

엄청나게 오래된 간판이다.

[구로 내쇼날―후레쉬 마켙]

글자도 거의 지워져 있어서 간신히 알아봤다.

‘켓’ 발음을 0.5초로 끊어 쳐야 할 것 같은 ‘ㅌ’ 받침이 복고풍을 한층 더하고 있다.

“흐음.”

아무튼. 결론. 간판만 읽어선 뭐 하는 곳인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난 결국 강서윤에게 시선을 향했다.

“여긴 뭐냐.”

“뭐냐니. 보면 몰라?”

“봐도 모르겠어서 물어봤지. 내쇼날 후레쉬 마켙은 대체 뭘 파는 마켓이냐.”

“아니 븅신아. 옛날에 뭐 팔았는지가 뭐가 중요해! 여기가 접선 장소야. 접선 장소!”

경멸을 듬뿍 담은 업계 포상 시선이 쏟아진다.

그런 한편. 그녀의 입에서는 의미심장한 말이 하나 튀어나왔다.

나는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접선이라니. 누구를.”

“누구겠냐. 네가 찾아달라며.”

그 대답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허.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내 예측을 뛰어넘는 강서윤의 추진력과 실행력에 놀란 것이다.

“…어느 쪽 용건의 접선자냐.”

“메인 의뢰 쪽.”

“메인이면. 이브의 신체를 조사하는?”

“그래. 그거.”

새삼 낡은 육류 창고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무의식중에 홀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로 미팅까지 주선한 거냐.”

“뭐… 어쩌다 보니. 얘기가 그렇게 됐어.”

강서윤은 곤란한 듯이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이내 그녀가 엄지를 치켜들어 창고를 가리킨다. 정확히는, 그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누군가를 가리킨 것이다.

“사실. 이 접선도 내가 주선했다기보단 그쪽이 먼저 얘기를 꺼냈어. 생각보다 엄청 열의를 보이더라고?”

“어쨌든 그런 인재를 찾아내고 데려온 건, 너지.”

“뭐… 그야 그렇지?”

“역시 넌 대단해. 강서윤. 이래서 널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 쫌! 그, 그런 말 좀 쉽게 하지 말라고! 이 개새꺄!!”

빠악! 빠박!

평소보다도 한층 격렬하게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이런 빈말 칭찬은 대충 흘려 넘기면 될 텐데, 요령이 없긴. 저게 또 놀리는 맛이 있어서 좋긴 하다만.

“어쨌든 좋아.”

나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고. 쓴웃음을 지으며 곧장 창고 방향으로 향했다.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다.

“빠른 접선은 이쪽도 바라는 바다. 바로 만나주지.”

“어, 야! 잠깐… 같이 가!”

강서윤이 당황하며 내 뒤로 바짝 따라붙는다.

덜컹! 낡은 정문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밀어젖혔다.

끄그그긍. 굵고 육중한 문의 비명이 창고 안으로 울려 퍼진다.

“아, 드디어 왔구만.”

우리가 음습한 창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있던 신형 하나가 우릴 반갑게 맞이했다.

“이야 이거,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쪽이 그… 한정용 씨, 맞습니까?”

저벅저벅.

접선자가 이쪽으로 서슴없이 걸어오며 말을 걸어왔다.

남자의 목소리다. 중년에 가까운 중후하고 웅혼한 목소리.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정용이다.”

“하핫, 그렇군요. 얘기는 그동안 서윤이한테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정용 씨.”

“인사치레는 집어 쳐. 이름이나 밝혀라.”

파각. 옆에서 강서윤이 팔꿈치를 굽혀 내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조용히 속삭였다.

“너 뭐, 상전이야? 기껏 어렵게 모셔왔더니. 왜 그리 고자세야!”

“이런 건 기세와 첫인상이 중요한 건데.”

“닥쳐. 닥치고 예의나 차려. 너보다 한참 나이 많다고, 개새꺄!”

“…씁.”

내 방식을 고수하고 싶었지만, 기껏 소개해 준 강서윤의 고생을 생각해서 참았다.

나는 잠깐 투덜대다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한정용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하하. 네. 저는 오원태라고 합니다.”

그쯤에서 마침내 중년 남자… 오원태가 지척까지 걸어왔다.

깨진 창문으로 들어온 아스라한 빛에 남자의 얼굴이 슬쩍 비친다. 나는 놈의 외관을 유심히 관찰했다.

훑어보는 시선이 절로 가늘어졌다.

‘나이는, 한 40대 중반쯤인가.’

반백에 듬성듬성한 머리칼.

남성형 탈모가 빡세게 온 머리 스타일이 먼저 눈에 띈다.

전체적으로 인자해 보이는 얼굴에, 길게 늘어진 눈을 덮은 도수 높은 뿔테 안경. 코와 턱 주변으론 듬성듬성 수염이 자라 있다.

그리고 펑퍼짐한 몸에는 순백의 가운을 걸쳤다.

‘연구원. 아니면 의사 쪽인가.’

꾀죄죄한 중년 학자의 표본 같은 행색.

첫인상은 딱 그 정도다. 한평생 펜대만 굴려보던 샌님 같다고 할까.

‘…일단 기억에는 없는 면상인데.’

영원회귀에서 스쳐 지나간 모두를 기억하진 못한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유의미하게 엮였던 사람이라면. 대면했을 때 약간의 기시감이라도 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남자는, 완전히 초면일 확률이 높았다.

“하핫.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한정용 씨.”

오원태는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어 왔다.

악수 요청이었다.

“헌터 협회 소속 던전 생태 연구부, 생물과 3―F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혹시 들어는 보셨습니까?”

“…….”

“어… 저, 정용 씨?”

날아가던 참새 부랄이라도 본 양, 잠깐 그 손을 멀뚱히 쳐다봤다.

이내 나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제가 뭘 부탁할 건지. 서윤이한테 듣긴 했습니까?”

한순간에 서릿발처럼 싸늘해진 기세와 어조. 오원태는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강서윤도 흠칫 숨을 삼켰다.

강서윤이 안절부절못하다, 내 소매를 꽉 잡아당겼다.

“야. 너 갑자기 왜 화를 내? 돌았어?!”

“놔봐. 알아서 할 테니까.”

이번엔 져주지 않았다.

반쯤 강제로 강서윤의 손을 떼어내고, 다시 오원태를 직시했다. 그러자 오원태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 예. 무, 물론입니다. 미지의 던전 생물 조사라고 들었는데요, 맞지요?”

“그것도 인간을 아주 닮은 지성체. 그것까지 들었습니까.”

“…그, 그건.”

오원태가 거기서 살짝 주저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찔리는지, 컨테이너 양옆을 곁눈질로 빠르게 살핀다.

‘그럴 수밖에.’

저게 일반인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던전 생물 밀반입은 중범죄 중의 중범죄니까.

‘거기다 인간을 닮은, 말이 통하는 지성체를. 신고도 없이 보유하고 있다?’

이건 들키는 즉시 관련자 전원이 검은 마티즈 타고 끌려가서, 슈레더의 장수혁과 1 대 1 심층 면담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던전 중범죄다.

나는 쏘아붙이듯이 계속 말했다.

“난 당신이 협회 소속이든, 일반인이든, 하물며 암부 소속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과거는 일체 묻지 않는다. 그건 확실히 보장해 주지.”

“그, 그렇습니까.”

“다만 이건 알아둬라. 이 일은 세상의 명운이 걸린 일이야. 오원태.”

“……!!”

세상의 명운이 걸린 일.

스케일 큰 얘기가 나오자 오원태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굵직한 안경알 너머. 오원태의 떨리는 눈동자를 뚫어져라 직시했다.

“지금부터 내가 물어볼 건 딱 하나다, 오원태.”

“뭐, 뭡니까.”

“나도 장담해 줄 수 없는, 수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성을 감당할 각오. 그리고 연구 중에 알아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 각오. 확실히 돼있냐?”

거기서 오원태가 다시 한번, 어깨를 크게 떨었다.

잠깐 무거운 침묵이 강림한다.

“…….”

“…….”

휘이잉!

겨울바람이 컨테이너를 두들기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린다. 쪽창으로 비친 한 줄기 빛이, 오원태의 안경에 반사되어 번득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예. 물론입니다.”

대답하는 오원태도 약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놈은 호승심과 도전정신에 불타는 눈빛을 이글거렸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 양한테 이미 다 들었습니다. 전부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냐.”

“오히려 반대입니다, 정용 씨.”

“반대?”

“그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그리고 중요한 조사다. 그걸 들었으니까 서윤 양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어쩔 테냐는 듯이 입매를 비틀어 웃고 있다.

샌님 같은 면상에 어울리지 않는, 통제 불능의 야수 같은 일면.

“흐음.”

흥미 반, 의심 반이 섞인 침음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오원태의 눈을 잠깐 응시했다.

내 입에선 다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이 협력으로 뭘 얻고 싶은 겁니까, 오원태 씨.”

“음? 제, 제가 얻고 싶은 거… 말입니까?”

“예. 행색을 보아하니 돈이 궁해 보이진 않아서. 좀 궁금해졌습니다.”

“…그렇습니까?”

금전에 쪼들려 사는 사람은 일거수일투족에 조급함이 있다.

영원회귀 전만 해도 내가 그 돈 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특유의 느낌을 아주 잘 읽어낸다고 자부한다.

지금 오원태에게선 그런 절박함이 전혀 없다.

“이 연구로 뭔가 다른 걸 얻길 원하지요. 딱 봐도 알겠습니다.”

“하핫.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딱히. 평범합니다.”

내가 교섭 카드로 내세웠던 지원 금액은 한화 30억.

강서윤에게 30억까지는 쾌척할 테니, 최대한 여러 사람을 커넥션 해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이 사람. 분위기가 좀 다르다.’

아무리 봐도 그 돈을 보고 미끼를 문 게 아니다.

뭔가, 자기만의 특별한 노림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그건 꼭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목적성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차라리 돈에 솔직한 사람이면 좋았다.

‘목적이 단순하고 명료하니까.’

오원태의 목적을 지금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나중 가서 놈의 목적과 내 목적이 상충하고, 반목할 가능성이 있다.

뒷북은 곤란하지. 거를 거면 지금 당장 걸러내야 한다.

“예. 잘 보셨네요. 사실 전 돈 따윈… 아무래도 좋습니다.”

역시나. 오원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긍정했다.

놈이 안경을 손끝으로 추켜세우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건. 그냥, 말하자면 호기심의 충족입니다.”

“어떤 호기심입니까.”

“그야 당연히! 던전의 생물들이지요!!”

갑자기 오원태의 언성이 한 옥타브 높아졌다.

놈은 웅변가라도 된 양, 별안간 피를 토하는 열변을 시작했다.

“던전이 처음 발생하고 10년 동안, 오직 던전 조사에만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제 30대를 죄다 박아서요! 던전의 생태를 완벽하게 규명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아… 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망할 협회 새끼들은 규정이니, 안전 문제니 하면서……! 저희 부서한테 할당된 정부 지원 연구비조차 제대로 지급도 안 해주고!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반입한 던전 물품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면서 압류해 가질 않나!! 아주 무소불위의 폭거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 천하의 개 같은 새끼들!!”

오원태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격정적으로 외친다.

충혈된 눈에는 이미 내가 보이지도 않는 듯하다. 아무래도 헌터 협회에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보다.

“그, 오원태 씨. 일단 진정하시고요.”

“허구한 날 헌터들 배나 채우는 데 급급하고, 연구진은 죄다 찬밥 신세에 뒷전이고!! X발 엿이나 먹으라지! 그렇게 조직 전체가 무식하니까, 어?! 이번 용산 사태, 월미도 사태 때 쪽도 못 쓴 거 아니냐고! 꼴이 아주 좋아!! 응?!”

“음… 선생님?”

나와 강서윤이 발광하는 오원태를 빤히 응시했다.

강서윤은 살짝 무서워하는 기색까지 보였다. 굉장히 낯설어하는 표정이다.

“펴, 평소엔 저런 사람 아니었는데……?”

그 중얼거림이 들렸는지 어쨌는지.

뒤늦게 오원태의 눈빛에 이성의 기운이 돌아왔다.

“핫.”

오원태의 아차 싶은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그는 운석 맞은 익룡처럼 깩깩대던 걸 멈춘 뒤, 멋쩍은 듯이 헛기침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성을 잠시 잃었습니다.”

“미안하다니. 뭐가요.”

“아무리 그래도, 며칠 사이 사람이 엄청나게 죽어 나갔는데… 꼴이 좋다니. 이건 제가 선을 많이 넘었네요.”

헌터 협회 쌍욕 한 건 안 미안하고. 죽은 사람들한테 악담한 건 미안하다고 한다.

얘 갑자기 존나 마음에 들려고 하네.

특히 협회에 대한 사상 쪽이.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만약 이번 1, 2차 붕괴 때 수아가 휘말렸다면. 방금 발언으로 오원태의 대가리는, 내 주먹질에 즉시 폭발 사산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러니 아무리 심하게 말해도 상관없다. 엑스트라들 10만이 뒤지든 100만이 터지든, 감정에 기별도 안 온다.

이내 오원태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미친놈이라 실망하셨습니까?”

“아뇨. 미친놈이라 안심했습니다.”

피식. 만감이 교차한 나머지 옅게 웃었다.

일단 이걸로… 오원태가 연구 협력에 참여할 명분은 확실히 알았다.

거짓말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방금 저게 연기였으면 대종상 영화제 남우 주연상 감이다.

“오원태 씨.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는 오원태의 눈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오원태는 찔끔하더니, 이내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하핫. 지금 마음 같아선 절대 안 할 것 같은데.”

“같은데.”

“연구를 하다 보면 으레 100%는 없기 마련이었던지라. 저도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래. 모름지기 진짜 연구자라면 그렇게 말해야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왔던 대답 중에 제일 마음에 듭니다.”

덥석. 결국 나는 오원태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힘껏 맞잡고 묵직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오원태 씨. 내 믿음을 배신하지 마십쇼.”

“아, 예…….”

“난 죽었다가 살아나서라도 반드시 복수하는 사람입니다.”

“…예?”

“몇 번이라도 되살아나서. 반드시.”

언뜻 유치하게 들릴 협박을 했다.

오원태도 그렇게 생각했음인가. 살짝 병든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그의 손가락이 똬리를 트는 뱀처럼, 내 손아귀로 진득하게 얽혀온다.

“하핫. 명심하고, 주의하겠습니다, 한정용 씨.”

그렇게 이브의 신체를 조사하기 위한 기반이 성립되었다.

이제 남은 준비물은… 단 하나.

‘이브 이 새끼. 빨랑 찾아와야겠네.’

조사 대상.

종말의 이브.

본인만 있으면 모든 게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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