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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3화 (93/235)

93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4)>

―이야. 실로 살기등등한 얼굴이군, 초인.

노스페라드… 아니. 그녀의 뒤에 숨은 존재가 즐거운 듯이 이죽거린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심히 아니꼽다.

―살기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나는 이 순간만도 수십 번은 살해당했을 거다.

노스페라드의 흐리멍텅한 눈이 나를 빤히 응시한다.

놈은 연민하듯이, 그리고 조롱하듯이. 입꼬리를 헤죽거리며 계속 말했다.

―초인. 그렇게나 내가 미운가?

“말이라고. 이 개새끼야.”

이를 바득바득 갈며 뇌까렸다.

그 이상은 말로 옮기지 않았다. 더 내뱉을 수 없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살의를 주체 못하고 노스페라드를 죽여버릴 것 같았으니까.

‘…안 돼. 그럴 순, 없어……!’

아무렴, 안 되고말고.

이게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아직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 모른다.

순간의 분노와 충동으로 빙의된 노스페라드를 죽여버리는 건, 언어도단이다.

‘참아야 한다.’

날뛰는 머릿속을 강제로 진정시켰다.

머리를 식혀라. 지금은 침착과 평정을 유지할 때다.

‘참아, 참자.’

분노의 조절. 회귀를 반복하며 수없이 해왔던 짓이다.

어려울 건 전혀 없다.

‘참아야, 한다……!’

아니. 사실 거짓말이다.

이번만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참아… 참으라고!’

서울 상공에서 무차별 번개 폭격을 쏟아내던 전생이 떠오른다. 그때 이상으로 내면에서 분노가 미쳐 날뛰고 있다.

솔직히 이제, 나 스스로도 폭주하는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숨쉬기도 쉽지 않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드는 것 같다.

―고민하고 있구나. 분노를 어찌 해소하면 좋을지 모르겠나 보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코앞에서 그 분노의 근원이 히죽거리는 데다, 주기적으로 장작을 투입해 대서 문제다.

―흐흐. 고생이 많군, 초인. 매사에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

“…닥쳐. X발 아가리 여매라.”

―오, 무섭군. 내 지금부터는 좀 자중하도록 하지.

옆에서 자꾸 한 마디씩 덧붙이며 사람 속을 박박 긁는데.

진짜, 존나게, 패 죽여버리고 싶었다.

“후, 후, 후우…….”

라마즈 호흡.

애국가 4절 완창.

반야심경과 사도신경을 아는 데까지 심독했다.

아무튼. 분노를 잠재우는 데 좋은 민간요법, 웬만한 지랄들은 지금 이 순간 모두 이룩했다.

‘명경지수. 심두멸각. 정신통일…….’

그런 내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

분노가 서서히 누그러졌고, 세차게 요동치던 심장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후우우.”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을 때. 드디어 심마가 사라지고, 가까스로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지금 내가 곧 생불이다, X발.

―제풀에 못 이겨 날 죽이는 쪽을 바랐건만. 결말이 맹탕이라 시시하군.

노스페라드의 입에서 한숨이 슬며시 흘러나왔다.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나의 인간 승리 현장이 꽤 아니꼬운 듯하다.

이내 놈이 끄덕,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뭐, 좋다. 방금 자네의 분노에 찬 표정만으로도 재미는 볼 만큼 봤다. 구태여 진실을 밝힌 값은 했군.

“…닥치라고 했을 텐데. 내가.”

―그래. 안 그래도 바로 닥쳐줄 생각이다, 초인.

히죽.

놈이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닥치라니 닥쳐주겠다니. 갑자기 왜 이리 순종적이지. 나는 경계심을 담아 놈을 노려봤다.

“…아?”

의문은 증폭되어 의심이 되었고, 의심은 순식간에 하나의 가정을 도출했다.

불안감. 최악의 가정 하나가 뇌리를 후려친다.

“잠깐……!”

나는 다급하게 오른손을 번쩍 들었지만.

동시에 노스페라드의 손도 흐느적거리며 올라갔다.

―그만 가보겠다.

노스페라드의 입술이 달싹인다.

쿠르르륵! 그녀의 손아귀로 빠르게 혈류가 모여들었다.

―재회할 일은 없길 바라지. 초인.

아니나 다를까. 퇴장 선언이 나왔다.

역시, 바로 닥쳐주겠다 함은 그것을 의미했다. 놈은 지금 노스페라드를 자살시키려 한다.

안 될 일이지. 누구 마음대로.

‘전에는 늦었지만…….’

전생의 8차 붕괴 때. 나는 장난감 성에서 에티의 자살을 막지 못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어.

‘이번엔 다르다!’

나는 병신이고 머저리일지언정, 학습을 하는 인간이다.

키이잉! 이미 짙푸른 마력의 회오리가 손아귀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천라!!”

육성으로 영창해 긴급 발동했다.

내가 가진 군중 제어 스킬 중 가장 발동 속도가 빠르며. 또한 투사체 속도도 제일 빠른 스킬이다.

[스킬 발동: 천라]

파지지직!

허공에서 번개의 거미줄이 속속들이 구성된다.

투학! 그물이 노스페라드의 엎드린 신형을 향해 날아가, 그녀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좋아……!’

놈의 손속보다 살짝 빨랐다.

이제 노스페라드의 육체는 한동안 옴짝달싹 못할 것이다. 당연히 자살도 못하게 된다.

짜릿한 달성감에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알림: 스킬 사용 불가]

삐빅. 작은 시스템 패널 하나가 눈가를 간질인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허?”

어찌나 의심했는지. 몇 번이나 세차게 눈을 감았다 떠봤을 정도다.

물론 패널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해당 대상은 모든 스킬에 면역 상태입니다. 스킬 효과를 일체 무시합니다.]

이어지는 상세 설명 패널까지 등장했을 때. 나는 비로소 의심을 거뒀다.

의심 대신 차오르는 건, 짙은 낭패감.

“이런. 미친.”

그리고 천라의 번개 그물이 노스페라드의 육체에 맞닿는 순간. 파스스스! 그물은 푸른 연기로 변하며 홀연히 소멸해 버렸다.

패널의 내용을 직접 증명하듯이.

―종말의 이브에게 스킬 면역 기능을 달아준 것. 누구일 것 같나?

흠칫. 나는 킬킬거리는 비웃음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데이트 연장은 정중히 거절하겠다. 초인.

진득하게 미소 짓는 노스페라드의 면상이 보인다.

콰드드득! 그 의기양양한 얼굴이 무참하게 우그러지고, 찢어발겨지는 모습도 확실히 보인다.

―끄아! 아아아아악!!

최후에 들린 드높은 비명.

그것만은 확실히… 노스페라드 본인의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던 혈류가, 머리통을 산산이 분쇄해 버린 것이다.

[제12던전 ‘고성 바르칼라이드’의 던전 마스터, ‘진조 노스페라드’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삐빅. 노스페라드의 사망 선고가 눈앞에 떠오른다.

눈을 부릅뜨고 호흡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채. 눈앞에서 속속들이 진행되는 상황을, 멍한 정신에 주입 당한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파지지직!

허공의 거대한 균열이 빠르게 아물었고. 월미도 전역에 일렁이던 붉은 마법진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

안개 속에서 일렁이던 폐성 역시, 안개와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던전 마스터 ‘진조 노스페라드’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스킬 ‘베놈 블러드’를 획득하셨습니다.]

토벌 보상은 이미 보유한 스킬을 얻었다.

노스페라드는 그렇게, 썩어 넘치는 스킬 포인트 1로 화했다.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허.”

그제야 가까스로 한 마디. 참았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복잡한 심경을 압축한 한숨이었다.

* * *

한때는 내가 영웅이 된 줄 알았다.

그래서 영웅이 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죽어도 되살아나는 능력.

세상의 시간을 되돌려 처음부터 도전할 수 있는 힘.

나만이 기억하는 전생의 기억들.

“내가 바꿔야 해.”

이건 신이 내려준 기회이자 축복이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내가 선택받은 거다.

보잘것없는 쓰레기 하류 인생인 줄 알았던 난, 사실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못하니까. 내가……!”

그런 병신 같은 생각을 진심으로 했던 순간이.

한때 나도 있었다.

“미안해요, 오빠.”

그래서. 결과는?

뭐, 1002번째 나를 보면 대충 예상은 될 것이다.

“오빠. 정말… 미안해요.”

“미안해요. 오빠… 그리고, 고마워요.”

마음이 꺾인 전사가 됐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었고, 될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토할 것처럼 반복된 회귀.

수십 년 치 한 달을 되풀이하면서.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불변의 진리는 단 하나다.

“나는… 진짜 히어로가, 아니었구나.”

그래서 무언가 얻기 위해선 대가가 필요했고. 무언가 지키려면 무언가는 포기해야 했다.

회귀의 반복은 곧, 지킬 대상의 범위를 줄여가는 나날이었다.

“왜, 우리만… 이렇게까지 희생해야 하는 걸까요. 오빠.”

처음엔 세계 전체.

그게 실패한 다음은 대륙 하나.

실패한 뒤에 우리나라. 실패하고 대도시 하나. 예산 산골의 내 고향 마을 하나.

그것마저 실패하면 내 주변 사람들.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가장 소중한 그녀.

강수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어째서. 우리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렇게 살과 뼈를 떼어주고. 끊임없이 손에 쥔 걸 줄여나간 끝에.

최후의 보루였던 그녀마저 지키지 못했다.

“오, 오빠! 왜 그래요!! 그러지 마요! 제발!!”

진리를 깨달은 뒤. 나는 거침이 없어졌다.

도덕과 이상을 내려놓자, 마음도 몸도 한결 편해졌다.

모든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건. 진짜배기 영웅들이나 그런 거지.

“당신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아아!!”

내가 지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선을 확실히 긋는다.

그리고 어차피 지킬 수 없는 목숨이라면. 최대한 단물을 빨아먹다 버린다.

그뿐이다.

“오빠. 나 때문에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수아가 무슨 대답을 원했는지는 모르겠다.

옛날의 나는 확실히 정답을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회귀가 까마득하게 반복된 지금, 진짜 정답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변하고 뒤틀린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거밖에 남은 게 없어.”

지금 내겐 그게 정답이었다.

아직도 목숨을 걸고 노력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 * *

어김없이 다음 날은 밝았다.

나는 무겁기 그지없는 육체를 침대에서 끄집어냈다. 옅은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끄응.”

피곤하다.

어깨가 천근만근 무겁다. 머리도 살살 아려온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인지 잠을 설쳤다. 덕분에 악몽 비슷한 것도 꿔버렸다.

‘요즘 들어… 개꿈을 많이 꾸는데.’

옛날 기억이 꿈에 자주 나오는 것도 피곤의 여파지 싶다.

피곤한 일들 때문에 잠을 청하는데. 피곤한 일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악순환이냐.

‘목마르다.’

나른하게 얼굴을 부비고,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냈다.

한참을 벌컥벌컥 들이켜다, 푸하. 밀린 숨을 몰아쉬었다. 시원한 기운이 목을 넘어 가슴을 두들긴다.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입가의 물기를 닦아내는 찰나.

“음?”

침대 한편에서 핸드폰이 번쩍거리는 걸 목격했다.

부우웅, 부웅. 전화가 와 있었다.

‘누구지. 이 타이밍에.’

지난 전생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

그것만 해도 내 기대감을 부추기기엔 충분했다.

나는 약간의 호기심과 기대를 하고 핸드폰 액정을 살폈다.

전화 상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강서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득달같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라도 찾아냈냐.”

[최소한 ‘여보세요’ 정돈 하지? 고생한 건 난데 뭐 그리 바빠.]

“그렇게 나한테 여보 소리가 듣고 싶냐. 다음부턴 만날 때마다 해준다. 딱 대.”

[읏……! 이, 이 새낀 진짜 말을 해도!]

강서윤은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농담을 쳤던 거겠지.

솔직히 거기에 어울려줄 심적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일부러 강서윤이 질색하는 커플링 드립을 쳤다.

예상대로 효과는 만점이었다.

“됐으니까. 얼른.”

나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지금 그만큼 급한 거 맞다. 그러니 어서 용건이나 내놔라, 라고.

[후우. 일단 만나. 만나서 얘기해.]

강서윤은 역시 이십년지기 친구였다. 그녀는 두루뭉술한 내 말에서 단박에 의도를 눈치챘다.

어느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한껏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거… 전화나 문자로 할 얘긴 아니니까. 어느 쪽이든.]

‘어느 쪽이든’이라고 했다.

말인즉슨. 들려줄 얘기가 하나가 아니라는 소리가 되겠다.

‘역시 강서윤.’

그새 양쪽 의뢰에 전부 수확이 있는 건가. 내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다니까.

즐거운 기대에 부풀어 입가를 씰룩거렸다.

“좋아. 어디서 만날까.”

[그거 말인데. 네가 여기로 좀 와줘야 할 것 같아. 가능하냐?]

“쌉가능.”

[좀 집에서 멀 텐데. 괜찮겠어?]

“서울권이면 어디든 1분 내로 도착한다.”

[…진짜로?]

“진짜로.”

[아, 알겠어. 그러면…….]

그렇게 정확한 위치 좌표를 문자로 수신받았다.

나는 동봉된 지도를 한번 슬쩍 훑었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쿠우웅! 온몸의 마력을 심장 언저리로 끌어올린다.

“텔레포트.”

조용히 시동어를 영창하는 순간.

파팟!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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