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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0화 (90/235)
  • 90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

    쿠르르륵!

    바닥에 붉고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던전 마스터, ‘진조 노스페라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비대해진다.

    불길한 선홍색 빛을 일렁이며 점점 더, 점점 더 지면을 가득 뒤덮어 간다.

    “어, 어어?”

    “뭐, 뭔데. 뭐야! X발!!”

    도망 다니던 사람들은 당황의 탄성을 터뜨린다.

    사람들의 분주하던 발걸음이 일제히 멎었다. 그리고 불안에 찬 눈으로, 바닥에 스멀스멀 퍼져나가는 핏빛의 마법진을 망연히 내려다본다.

    “…시작했나.”

    쯧. 혀를 낮게 차며 눈을 돌려버렸다.

    화풀이하듯, 그사이 따라잡은 서큐버스의 목을 힘껏 틀어쥐었다.

    ―커어… 허억! 사, 살려…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 제발……!

    서큐버스가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온 얼굴에 공포가 가득하다. 내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

    나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뿌드득! 그저 손아귀에 힘을 준다.

    ―끄르륵!

    가느다란 목이 쥐어짜여 그대로 끊어져 버린다.

    손이 피와 살점으로 질척거렸다. 옆구리에 대충 쓱쓱 문질러 닦아냈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뭐, 뭐야! 대체, 흐아아악!!”

    처절한 통곡이 가득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슬쩍 내려갔고. 익숙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 몸, 에서 피가……!”

    “으아아아아악!!”

    마법진은 어느새 월미도 전역을 한가득 뒤덮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선 사람들. 월미도에 갇혀있던 모두의 몸에서, 일제히 피가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그만! 그, 그만해!”

    “뭐야… 왜, 왜 이래! 피가… 피, 피가……!!”

    눈, 코, 입, 귀. 그리고 온몸의 모공까지.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쏟아내고 있다.

    “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아, 안 멈춰… 피가, 사, 살려줘어어!!”

    사람들이 쏟아낸 핏줄기는, 마법진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마법진은 탐욕스럽게 모든 피를 빨아들였고. 더욱 새빨갛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도와주세요!! 누, 누가, 제발……!”

    “피, 피가, 피가 안 멈춰!!”

    사람들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절규한다.

    도움을 구한다. 구원을 부르짖고 선처를 바란다.

    자길 이렇게 만든 게 누구인지도, 그리고 자길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끄… 어억……!”

    “그르륵……!”

    “크하악!”

    그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길 잠시.

    하나씩 점점 야위어갔고. 이내 바싹 마른 고목나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다.

    이변이 시작할 때 그랬듯이. 나는 이번에도 중얼거렸다.

    “…끝났나.”

    확정성 사건이 어김없이 완성되었다.

    월미도의 생존자가 전원 사망했다. 마법진에 온몸의 피를 강탈당해, 단 한 사람도 살지 못했다.

    방금 현자의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다. 틀릴 수가 없다.

    “쯧.”

    큰소리로 혀를 찼다.

    쿠구구궁! 지진이 난 듯 월미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지면이 쩍쩍 갈라졌고, 공기가 무겁게 진동하며 육중한 소음을 낸다.

    그리고 번쩍! 마법진이 눈부신 붉은 섬광을 토해냈다.

    “…….”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잠깐 그대로 대기했다.

    눈꺼풀 밖을 간질이던 섬광의 폭풍이 이내 잠잠해진다.

    ‘등장 씬만 쓸데없이 화려해 가지고는.’

    속으로 투덜대길 잠시.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천천히 선명해지는 시야 너머. 월미도의 테마파크는 어디로 가고, 아스라한 붉은 안개에 휩싸인 낡은 폐성(廢城)이 등장했다.

    “…오랜만…도 딱히 아니군.”

    그 웅장하고 고요한 성곽의 꼭대기.

    전에는 없던 사람의 형체 하나가 고고히 서있었다.

    “그새 또 보는구나. 던전 마스터.”

    자연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상대는 고개를 갸웃, 이해가 안 된다는 양 모로 꺾었다.

    ―또 보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건방진 인간 놈.

    새빨간 머리칼.

    그리고 눈처럼 하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기괴한 디자인의 붉은 드레스와 오른손의 거대한 검은 양산이 인상적인… 여성형 몬스터.

    ―아무튼 한눈에 알아봤다. 인간.

    펄럭!

    여인이 한 발짝 힘차게 뻗어 붉은 드레스 자락을 크게 흔들었다.

    스르륵. 치마의 깊게 팬 슬릿 사이로, 관능적인 맨다리가 하얗게 드러났다.

    ―네놈이군. 내 충직한 심복들을 무참히 살해한 자가.

    당연한 소리지만, 여성의 정체는 이 던전의 주인.

    진조 흡혈귀. 노스페라드였다.

    ―네놈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살기. 못 알아볼 수가 없느니라.

    노스페라드는 굉장히 불편한 심기를 비추고 있다.

    당연한 노릇이긴 하다. 내가 자기 부하들을 학살했으니까. 나도 딱히 변명할 생각 없었다.

    ―말해봐라, 인간이여.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냐. 다른 먹잇감들과는 존재감부터가 다르군.

    “…….”

    ―무슨 목적으로, 대체 어떻게 내 심복들을 그렇게 빠르게 학살한 게냐.

    “…….”

    ―끝까지 침묵인가. 건방진 놈 같으니.

    내가 침묵을 고수하자, 노스페라드가 한껏 인상을 구겼다.

    쿠르륵, 쿠륵. 그녀의 기분을 표상하듯, 노스페라드의 주변으로 새빨간 피의 웅덩이가 격렬하게 넘실거렸다.

    “…흐음.”

    나는 이렇다 할 리액션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놈을 빤히 주시하며 나직한 탄성을 한 번 흘렸을 뿐이다.

    [몬스터 정보]

    너무 오래 쳐다봐서인가.

    삐빅. 현자의 눈이 오작동하며 상태창이 떠올랐다.

    [명칭: 진조 노스페라드]

    [체력: 70 마력: 98]

    [힘: 26 민첩: 32 지능: 47]

    [상세: 제12던전 ‘고성 바르칼라이드’의 던전 마스터. 수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존재. 기나긴 생에서 권태에 절여진 끝에, ‘영원한 무언가’를 광적으로 추구한다.]

    물론 딱히 관심은 없다.

    날고 기어야 2차 붕괴 몬스터. 토끼가 열심히 수련해 이단 옆차기를 갈겨봐야,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노스페라드의 면상이나 계속 쳐다봤다.

    ―…뭐냐. 인간이여. 아까부터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 불쾌하기 짝이 없도다.

    노스페라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그러든 말든. 나는 그녀의 생김새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뭐랄까, 새삼 이렇게 유심히 보니…….

    “닮았구만. 엄청 많이.”

    ―…뭣이?

    “아니, 혼잣말이다.”

    종말의 이브라는 외계인 소녀를 알게 된 지금.

    나는 노스페라드의 면상에서, 이브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머리랑 눈 색. 그리고 나이만 다른 수준인데, 이건.’

    이브한테서 색 반전을 시켜놓은 느낌이랄까.

    ‘엄마’라는 칭호는 사실 수아보단 노스페라드 쪽이 훨씬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외견이 닮아 있었다.

    ‘…앞으로 한 번쯤?’

    이브가 지금 상태에서 한 번만 더 성장하면. 정확히 지금 노스페라드의 외견이 되리라.

    그런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다.

    “뭐, 서로 길게 얘기할 거 없지.”

    그쯤에서 길었던 관찰 시간을 종료했다.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는 한편.

    [스킬 발동: 인챈트 / 번개의 분노]

    파지지직!

    블라이스의 단검에 새파란 전광을 깃들인다.

    “일단 맞자.”

    칼날을 그대로 노스페라드 방향으로 겨누었다.

    흠칫. 사나운 번개의 기세. 그리고 살벌한 시선에, 노스페라드가 한 발짝 주춤한다.

    “문답은 그다음이다.”

    나는 상체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일방적인 통보였고. 동시에 선전포고였다.

    “간다.”

    콰콰콰쾅!

    허공을 연속적으로 밟아 폭발적으로 가속. 노스페라드의 면전으로 쇄도했다.

    망연자실한 노스페라드의 표정이 시야에 한가득이다.

    ―…이, 이이……!

    단 한 번의 호흡.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나는 이미 노스페라드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단검을 순식간에 내리쳤다.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미천한 놈이!!

    파지지직!

    번쩍이는 섬광 속으로, 노스페라드의 필사적인 기합이 섞여든다.

    보스전이 시작되었다.

    * * *

    ―크아아아아!!

    비명 같은 고함이 하늘을 가른다.

    나를 피해 도주하던 노스페라드가 내지르는 것이었다.

    ―오, 오지 마… 오지마라!!

    파파팍!

    노스페라드가 도망가다 말고 방향을 급선회한다.

    놈이 나를 마주한 채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며 날 똑바로 응시했다.

    키잉! 순간 강렬한 이명이 머리를 꿰뚫었다.

    [마안의 매혹이 침투를 시도합니다.]

    노스페라드의 고유 스킬. 마안의 매혹.

    포식자인 그녀가 피식자들에게 행하는 본능의 압제.

    이른바, 인간 한정 절대복종의 시선이다.

    “……!”

    나는 지금 그 눈을 정면에서 직격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킬 발동: 불괴의 정신]

    채채채챙!

    주위에서 유리 같은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토글형 스킬, ‘불괴의 정신’을 발동합니다.]

    보이지 않는 압제의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

    다시 말하면. 노스페라드의 정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는 소리다.

    노스페라드는 한층 아찔한 표정으로 꿍얼거린다.

    ―…한낱 인간 주제에, 대체 어떻게!! 이건! 마, 말도 안 돼!

    “돼.”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노스페라드가 정신 공격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몇 번이나,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모든 상태 이상, 지속 피해 효과를 즉시 해제합니다.]

    [발동 후 10초간 모든 상태 이상, 지속 피해 효과를 무시합니다.]

    [10분마다 자동 반복합니다.]

    패널이 등장해 어지러운 상황을 한 번에 설명해 준다.

    가소로운 나머지 히죽, 비릿하게 웃었다.

    “재롱 잔치는 사절이다.”

    투학!

    허공을 한 번 가볍게 도약. 내 신형은 노스페라드의 지척까지 똑바로 진격했다.

    노스페라드의 얼빠진 면상이, 한껏 선명해지며 눈에 들어온다.

    ―으, 으아… 아아아아!!

    노스페라드가 황급히 등을 돌려 손을 뻗었다. 내가 단검을 내려치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야, 얕보지 마라!!

    노스페라드가 악바리에 차서 일갈했다.

    그러자, 쿠르르륵! 노스페라드의 주변으로 시뻘건 핏방울들이 빠르게 응집되었다.

    ‘이런.’

    모여든 핏방울은 세찬 혈류가 되었고. 곧 노스페라드의 온몸을 둥글게 감싸 보호했다.

    ‘일단 후퇴.’

    공격을 즉각 중단했다.

    곧바로 백 스텝을 밟아, 노스페라드에게서 멀어지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2차 붕괴라도. 직격은 좀 아프지.’

    방금 노스페라드가 사용한 저 기술. 세차게 회전하는 핏줄기의 방어막.

    이제부터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부 알기 때문이다.

    “스킬 발동.”

    적정 거리를 벌린 뒤. 곧장 방어 스킬부터 전신에 둘둘 둘렀다.

    [스킬 발동: 아이언 스킨]

    [스킬 발동: 경질화]

    [스킬 발동: 안티 매직 리플렉터]

    쿠우웅!

    고속으로 회전하던 노스페라드의 혈류에서, 거대한 파동 같은 것이 퍼져나갔다. 방어막 표면이 불길하게 일렁거린다.

    그리고 투두두두! 수많은 혈탄이 전방위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쯧.”

    나는 인상을 바짝 찌푸렸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날카로운 피의 탄환이 가득하다. 마치 새빨간 혈우(血雨)가 내리는 듯하다.

    사각지대가 없는 죽음의 세례. 회피할 곳이 없다.

    ‘일일이 쳐내기도 귀찮다.’

    방어 스킬을 떡칠한 이유는 이거다.

    그냥 얻어맞거나, 쳐내서 버티기. 일단 노스페라드가 저 상태에 돌입하면, 지금 장비 상태론 제대로 된 반격이 불가능하다.

    대처법이 이거밖에 없는 것이다.

    “후읍.”

    어금니를 살짝 악물었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그대로 참았다.

    퍼버버벅! 날카로운 피의 송곳들이 온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크으…….”

    악문 입술이 절로 벌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데미지는 방어 스킬들로 흡수했다. 그러나 피격 수 자체가 초당 수십, 가히 100번에 가깝게 쏟아진다.

    ‘저 X발, 숟가락 살인마 같으니.’

    개미한테도 초당 100번 물려대면 아프지 않을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딱 그 짝이었다.

    ―끼야아아아악!!

    여기저기서 드높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난사된 혈탄 세례에 노출된 건 나뿐만이 아니다. 다른 잡몹 서큐버스들도 당연히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크헤엑!

    ―끄아아아!!

    ―어, 어머니. 왜. 대체 왜……!!

    서큐버스들이 시원하게 갈려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혈탄의 폭우는 절대 멈출 생각을 않는다.

    애초에 잡졸들 목숨 따위, 노스페라드 역시 아무 관심 없는 것이다.

    ‘귀찮아 죽겠네.’

    나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지금도 맹렬히 회전하는 피의 방어막을 향해 징글징글한 시선을 쏟아냈다.

    현자 타임 비슷한 게 온 나머지, 중얼거렸다.

    “…혈천갑 마렵다. 진짜.”

    노스페라드는 종족부터가 피를 주식으로 하는 흡혈귀.

    그래서 사용하는 스킬부터, 육탄계 기술인 할퀴기 공격까지. 모든 공격이 혈질 속성이다.

    ‘맞딜 하면 10초 컷일 텐데.’

    혈질 속성 방어구인 혈천갑만 있었으면?

    가드 풀고 난타전을 벌여도 내 피해는 한없이 0에 가까웠겠지. 그야말로 일방적인 딜교환이 성립됐을 거다.

    노스페라드가 토해낸 아이템이, 오히려 그녀의 하드 카운터인 셈이다.

    ‘이이제이를 못하는 게 아쉽네.’

    치명적인 약점을 클리어 보상으로 뱉는 던전 마스터.

    이건 사실 영원회귀 전부터 흔히 있던 케이스다. 노스페라드 역시 그런 던전 마스터 중 하나였다.

    ―허억… 헉, 허억……!

    문득 격렬하게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 그쪽으로 시야를 돌렸고. 깨달았다.

    “드디어 멈췄군.”

    더 이상 혈탄들이 날아오지 않았다.

    노스페라드를 감싼 혈액의 방어막이 흐물거리며 허물어지고 있다.

    ―그… 흐, 으윽……!

    천천히 형체를 잃어가는 피의 구체 안쪽.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는 노스페라드가… 점점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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