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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9화 (89/235)

89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0)>

가능성이 크다고는 예상했다.

순차별, 장소별로 붕괴하는 던전에는 약간의 확률 차가 있다.

지금까지도 특정 순서에 특정 던전이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반면. 반대로 어떤 던전은 지나치게 적게 나오곤 했다.

“꺄아아아악!!”

“괴물! 괴, 괴물이야!!”

그러니까.

혹시나 이번 2차 붕괴 때… 간절히 염원하던 그 던전이 나와주지 않을까. 그런 예상은 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다.

“끄아! 으아아아악!!”

진짜 처음인 것 같다.

회귀를 1002번 반복하면서, 최초로. 처음으로 신이 내 편을 들어준 기분이다.

―꺄하핫! 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핫!!

유리를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도처에서 퍼져나간다.

묘지기 광대를 떠올리게 하는 음침한 고음. 그러나 묘지기 광대보단 훨씬 간드러지고, 또한 째지는 목소리.

전형적인 여성형 몬스터들의 목소리였다.

―끼하하하하!!

나는 목소리의 주인들을 슬쩍, 눈대중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상공에 시커먼 그림자들이 우글우글 득시글댄다.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월미도 전체를 종횡하며, 사람들을 강습하고 있다.

―음후후… 이리 와, 어서……!

―어딜 그렇게 도망가는 거야? 응?

생김새는 전체적으로 인간 여성을 닮았다.

다만 피부는 보랏빛을 띠며 머리에 거대한 뿔 한 쌍과 어깨엔 시커먼 날개가 있고. 육감적인 몸매가 잘 드러나는 뇌쇄적인 검은 가죽옷을 입고 있다.

‘참… 진부하게도 생겼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것이다.

저런 진부하고 전형적인 생김새를 가진 판타지 생물이 하나 있지.

쟤네가 바로 그놈들이 맞다.

[몬스터 정보]

[명칭: 서큐버스]

[체력: 43 마력: 49]

[힘: 16 민첩: 28 지능: 13]

[상세: 제12던전 ‘고성 바르칼라이드’의 레귤러 몬스터. 하트 서커에 해당하는 종으로, 다른 두 종에 비해 민첩성이 높으며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다.]

하늘을 까마득하게 메운 저것들의 정체는 바로, 서큐버스였다.

외관부터가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서큐버스고. 실제로 명칭도 서큐버스로 돼있지만. 당연하게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서큐버스와는 차이가 크다.

“이번은… 하트 서커인가.”

제12던전의 서큐버스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하트 서커. 브레인 이터. 그리고 바이탈 컨슈머. 붕괴마다 3종의 서큐버스 중 하나가 랜덤으로 결정되어 쏟아져 나오곤 한다.

‘하트 서커면 그나마 다행이다.’

각각의 종별 특징은 명칭이 그대로 말해준다.

대단한 건 아니고. 주로 식사 취향의 차이다.

하트 서커는 사람의 심장을 뽑아 피를 짜 먹고, 브레인 이터는 뇌를 파먹는다.

바이탈 컨슈머가 그나마 상식적인 서큐버스와 가장 유사한데. 이놈들은 사람의 생기와 정기 자체를 마법으로 흡수한다. 그래서 다른 종들보다 지능 스탯이 월등히 높다.

“오히려 좋아.”

다른 때 같았으면, 택도 없는 정신 공격을 가해오는 바이탈 컨슈머를 가장 환영했을 거고.

반대로 민첩 스탯이 높아 재빠른 하트 서커는 싫어했을 거다.

‘지금 한정으론, 바이탈 컨슈머면 곤란했다.’

하트 서커는 가장 민첩하지만. 동시에 가장 호전적이기도 하다.

놈들은 공포를 느끼고 도망가는 타이밍이 세 종족 중에서 제일 늦는 편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빨리 보스를 만나야 하는 지금의 나로선, 최적의 조건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고.”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서큐버스 따위가 아니다.

서큐버스가 잡몹으로 나오는 이 던전, 그리고 이 던전의 던전 마스터가 핵심이다.

나는 눈을 번득이며 입맛을 다셨다.

“군침이 싹 도네, 아주.”

제12던전. 고성 바르칼라이드.

던전 마스터는 소위 말하는 흡혈귀다. 사람의 피와 살을 뜯어 먹는 몬스터로, 이름은 노스페라드.

서큐버스처럼 인간을 닮은 여성형 몬스터였다.

‘그리고… 이브의 기원.’

여기가 바로 하트기어의 원산지(?).

내가 이브를 얻었던 곳이 바로 이 던전이다. 이 던전의 던전 마스터. 노스페라드가 이브를 드롭한 것이란 말이다.

‘하나씩. 차근차근. 아는 걸 탈탈 털어 씨불여야 할 거다. 노스페라드.’

너와 상봉하는 이 순간을, 내가 전생부터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모를 거다. 던전 마스터.

뼛속까지 털어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이브. 바로 변신을…….”

중얼거리다 말고 덜컥, 말을 멈췄다.

슬며시 옆을 쳐다봤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졸졸 따라붙던, 익숙한 신형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비릿한 쓴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없었지.”

이브는 현재 가출 상태.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발신기에서 나오는 마력 펄스를 보면, 오늘은 남산 공원 주위를 맴돌고 있는 듯한데……. 하루 만에 우리 집에서 거기까지 걸어가다니.

‘외계인이라 그런가. 체력도 좋아.’

이브는 지금껏 딸기우유 외에 아무것도 안 먹었다. 그러나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러니 굶어 죽을 걱정은 딱히 안 했다.

‘현 상황의 유일한 단점은 사실…….’

내가 혈천갑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뿐.

…그 유일한 단점이 심각한 단점이라 문제인 거지.

‘슬슬 찾으러 가야겠어.’

하트기어는 내가 직접 던전을 돌파해 파밍한 아이템. 그리고 내가, 무수한 던전 보상들을 희생해 가며 계승한, 나의 아이템이다.

“하트기어는… 이브는, 내 거라고.”

아무도 내게서 강탈할 수 없다.

당연히 이브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몸은 엄밀히 따지면 그녀의 것이 아니다.

인간 대접을 해줬다고, 자기가 진짜 인간인 줄 알면 곤란하지. 종말의 이브.

“인벤토리. 오픈.”

파지지직!

비릿한 조소를 유지한 채. 허공을 찢어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스르릉! 블라이스의 단검이 백광을 뿜어낸다.

“슬슬…….”

불러내 보자.

던전 마스터를, 내 앞으로.

“뒤져. 전부.”

투콰앙!

지면을 박차고 허공을 향해 솟아오른다.

로켓처럼 똑바로 상승하는 신형. 가공할 풍압이 뺨을 할퀴며, 나를 순식간에 서큐버스들의 활공 고도에 갖다 놓았다.

[스킬 발동: 비약]

거기서 한 번 더. 공중에서 발을 구른다.

콰아앙! 응축된 공기가 발판이 되었고, 정면으로 몸이 탄환처럼 쏘아져 나간다.

[스킬 발동: 비약]

[스킬 발동: 비약]

[스킬 발동: 비약]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했다.

시야가 종횡무진으로 눈부신 속도로 이동한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 나는 눈을 번득이며 단검을 휘둘렀다.

―꺄아아아악!”

―끄아아! 뭐, 뭐야아아!!

푸확! 퍼버벅!

질주한 경로마다 비명과 피 보라가 쏟아진다. 새빨간 선혈의 진로가, 허공에 선명한 지그재그를 그렸다.

거기까지 한 사이클.

“후우우…….”

푸쉬익!

비행 스킬을 발동해 공중에서 제동한다. 비약 스킬의 연발로 흐트러진 숨을 잠깐 가다듬었다.

눈을 양옆으로 재빨리 굴린다. 남은 서큐버스들의 포진을 빠르게 확인했다.

―뭐, 뭐야……!

―저놈… 조, 조심해! 강해!

―말도 안 되게, 엄청나게 강한 인간이야!

방금의 질주로 수많은 서큐버스가 편육 조각이 되었다.

몇 마리인지 세어볼 시간은 없다. 놈들이 나를 본격적으로 경계하고,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니까.

―죽여!!

―하핫! 죽여버려!!

쇄애액! 선명한 파공음.

사방에서 나를 둘러싼 서큐버스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꺄하하하하!!

놈들의 째지는 웃음소리.

기괴하게 뒤틀린 곱상한 얼굴과 내 심장을 노리는 날카로운 손톱들이 단숨에 가까워진다.

속도가 제법 빠르다. 역시 하트 서커다.

‘뭐, 대략 30~50마리쯤 잡았다 치고.’

잡몹 서큐버스의 300마리 처치.

그것이 놈들의 왕, 노스페라드를 이곳에 현현시키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처치 수는… 약 250 정도.

‘지금이 기회다.’

아직 서큐버스들이 투지를 잃지 않았다. 놈들이 공포를 느끼고 흩어지기 전에… 바로 지금.

일거에 휘몰아쳐서, 할당량을 쓸어 담아야 한다.

“후우우…….”

숨을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키잉! 재빨리 단검을 역수로 치켜든다. 그리고 다시금 공기를 박찼다.

방금의 루틴을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비약.’

쉬쉬쉭! 퍼버버벅!

이변은 없다. 있을 수가 없다.

이건 비유하자면 개미떼와 인간의 싸움이다. 개미가 이기길 바라는가?

뭐, 그러면 유쾌한 맛은 있겠군.

―끄아아아아악!!

―케헤엑!!

채 반응할 틈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몇 놈은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죽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끄… 히긱……!

정신 차리면 하나씩. 아니 수십 마리씩. 옆의, 뒤의, 위의, 그리고 눈앞의 서큐버스 동료들이 일거에 토막 나 흩어졌다.

눈 뜬 채로 코를 베이다 못해, 팔다리와 목이 잘려 나간다.

―으, 흐으……!

―뭐, 뭐야. 뭐냐고, 이게……!

그렇게 몇 번의 루틴을 반복했을까.

서큐버스들의 행동에 본격적으로 공포가 묻어 나온다.

놈들의 공세가 눈에 띄게 사그라드나 싶더니. 내게서 주춤주춤 멀어진다.

―꺄아아악!

―히이이! 사, 살려줘!!

이내, 놈들이 공중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중구난방으로 어지럽게 도망가는 시커먼 신형들. 공포에 찬 표정과 찢어지는 비명.

그것은 굉장히 낯이 익은 꼬라지였다.

“…스읍.”

방금까지 지상의 인간들이 벌이던 풍경이다.

서큐버스들이 피해자로, 그리고 내가 가해자로 입장만 바뀐 채. 공중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나로선 낭패였다.

“실패했네. 망할.”

아직 노스페라드는 소환되지 않았다.

할당량인 300마리를 죽이지 못했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놈들을 쫓기 전에, 우선 정확한 잡몹 처치 숫자부터 헤아려봤다.

‘현자의 눈.’

스캔 범위는 서큐버스의 생체 마력으로 전환.

직전까지 내가 살해한 서큐버스의 총량을 계량한다.

[5분 이내에 사멸한 생명 반응: 286]

아깝기 그지없는 숫자가 떠올랐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도망 다니기 전에 충분히 채울 줄 알았는데. 화력이 아주 약간 모자랐던 모양이다.

나는 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이브만 있었어도…….”

견적이 이렇게 나오자, 혈천갑의 부재가 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혈천갑이 있었으면 여유롭게 300마리 쓸어 담았을 각이니까. 이브의 뾰로통한 표정과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뇌리를 스친다.

입맛을 다시며, 뒷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

“후우.”

안 되겠다.

가정 교육 방침을 좀 변경한다.

원래는 길면 다음 붕괴까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둘 예정이었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다.

‘당장 이번 붕괴가 끝나면. 이브부터 찾으러 간다.’

든 자리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혈천갑 쪽이든 이브 쪽이든. 역시 있다가 없어지니 이래저래 허전하다.

‘비약.’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도. 내 몸은 착실히 서큐버스들의 꽁무니를 추격했다.

푸확! 푸바박! 한 마리씩 확실하게 도륙해 나간다.

―오, 오지 마……!

―으아아아악!!

비약의 연속 발동.

단숨에 좁혀 드는 적과의 거리.

성큼성큼 코앞으로 다가오는 공포에 찬 얼굴.

뿌드득! 한 년의 목을 틀어쥐고, 그대로 힘을 넣어 꺾어버렸다.

―끄아! 으아아아!!

방향을 틀어, 다시 한번 비약.

멀찍이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던 서큐버스를 바짝 추격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도망가느라, 나의 접근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다.

‘이걸로 열 마리. 맞나?’

푸지직!

등짝 한복판에 단검을 박아 넣고, 그대로 사타구니까지 갈라버렸다.

―끄아아아악!

―히이이! 꺄아아악!!

서큐버스들의 비명을 얼마나 연주했을까.

삐빅. 어느 순간 내 눈앞에 패널들이 떠올랐다.

[던전 마스터의 출현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수많은 심복의 죽음에 진조(眞組)가 격앙합니다. 흡혈귀 노스페라드가 현세에 현현합니다.]

서큐버스를 어지간히도 살해했다는 통보.

그래서 개빡친 던전 마스터가 곧 등장한다는, 그런 패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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