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8화 (88/235)

88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이브는 대체 누구인가.

한층 성숙해진 이브에게 그것을 재차 물어봤다.

“너는 대체 누구냐.”

여러 방면에서 지식이 풍부해진 그녀가, 전과는 다른 대답을 내뱉을까 봐.

한편으론 그냥 현 상황이 답답해서 심술을 부린 것도 있다.

그리고 이브가 울먹이며 내놓은 대답은…….

“몰라! 나도 나를 잘 모르겠고. 아빠가 뭔 대답을 원하는지도… 도저히 모르겠다구!”

어휘만 좀 더 풍부해졌을 뿐. 전의 청문회와 대동소이한 대답이었다.

“내가 아는 건! 내가 엄마랑 아빠 때문에 여기에 있다는 거. 그것뿐이란 말이야!”

이브는 영혼을 토해내듯 빽 소리쳤고. 이내 격해진 숨을 골랐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안다.”

“알긴……! 아빠가, 이… 바보 아빠! 아빠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사춘기 소녀 단골 멘트에 직격을 당했다.

내 인생에 절대로 들을 일 없었던 문장이라 그런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덕분에 반응하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뭐가 어째?”

“그렇게 날 괴롭히면 재밌어?! 아빠 미워! 죽어버려!”

“난 죽어도 다시 네 앞에 살아난다. 이브.”

“시끄러워! 지금 그게 중요해?! 흐흑! 나다운 게 대체 뭔데!!”

청춘 드라마 단골 멘트 추가타가 날아온다.

면전에서 들으니 어질어질하구만. 이거.

“나도 이제 몰라! 흐윽!”

덜컹! 이브가 탁자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다가갔다.

“아빠 혼자, 평생 라면이나 먹으면서! 잘 먹고 잘살아 보라지! 흥!”

이브는 식식거리며 현관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러다 주섬주섬, 냉장고로 부리나케 달려가 딸기우유 몇 개를 주머니에 챙긴다.

“뭐 하냐, 이브.”

“…….”

내가 물어봐도 이브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저 흥, 하고 매몰차게 콧방귀를 뀔 뿐. 빠르게 외출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지금 가출이라도 할 셈인가.

“멈춰라. 이브.”

“웃겨. 내가 왜?”

“밖은 위험해. 혼자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는다.”

“허락하지 않으면. 아빠가 뭐? 어쩔 건데?”

덜컹.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이브의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대놓고 현관문 앞을 막아섰다.

“막아야지. 어떻게든.”

“그래? 좋아! 막아봐!”

“…….”

“지금 나를 막으면. 앞으로 아빠 피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빨 거니까! 그건 확실히 알아두라고!!”

“……!”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이브.

그녀를 막아섰던 나는, 혈천갑이라는 초대형 인질이 잡히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고. 이내 주춤주춤 비켜주는 수밖에 없었다.

“흥. 그럼 그렇지.”

이브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가, 이내 우거지상으로 날 노려본다.

어딘가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어차피 아빠한테 난, 그 정도 가치일 뿐인 거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브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가출 준비를 속행하기 시작했다.

‘트레이스.’

어쨌든 이대로 두고 볼 순 없는 노릇이니.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마력 발신기를 붙여, 특정 대상의 위치를 추적하는 스킬. 수아에게도 24시간 언제나 걸려있는 스킬이었다.

[스킬 발동: 트레이스]

피핑!

손끝에서 뻗어 나간 푸른 빛무리가 이브의 등에 적중한다.

물론 이건 이브 본인에게 쓴 게 아니다. 본인에게 써봤자 어차피 스킬 면역이라, 발신기를 튕겨낼 게 분명하니까.

‘이브가 입은 옷. 원피스에 붙인다.’

스르륵.

마력의 빛무리가 이브의 원피스 주변으로 녹아든다.

이내 조용히 맴돌며, 은은한 마력 파장을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이브는 내 추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갑자기 미쳐가지고, 길거리에서 원피스 벗고 스트립쇼를 벌이지 않는 한.

“다시는 찾지 마. 아빠 따윈… 꼴도 보기 싫어! 흥!”

이브는 현관문을 닫기 직전. 빼꼼 열린 문틈으로 날 향해 빽 소리쳤다.

쾅! 문이 닫힌다. 잠깐 집 안에 정적이 강림했다.

“…허.”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세수하듯이 얼굴을 부볐고. 씹어뱉었다.

“대체 뭐냐. 진짜.”

내가 대체 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암컷 외계인 년이랑, 팔자에도 없던 부녀 갈등을 연출해야 하냐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도저히 실감이 안 난다.

‘이 정도면 황당한 걸 넘어서, 좀 무서운데.’

수아가 격변해 버린 나한테 공포를 느끼듯. 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번 생의 전개에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종말의 이브. 무서운 아이.

“…….”

갈 곳 없는 시야를 이리저리 돌리다, 이내 탁자 위로 향했다.

그사이 탱탱 불어 터져버린 라면이 포착됐다. 멍하니 시선을 박았다. 그리고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별일은, 없겠지?”

막상 눈앞에서 이브가 없어지니 약간은 불안이 일었다.

이브가 스킬 면역이라곤 해도, 정작 물리적 완력이 평범한 인간 수준이니까. 누군가 작정하고 해코지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나마 1차 붕괴 직후라 다행이네.’

아직은 대한민국의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기능하는 시기. 대낮에 길거리에서 살인, 강도, 강간이 일어나는 붕괴 중후반이 아니다.

이건 불행 중의 천만다행이다.

‘치안 좋기로 소문난 한국이니까. 뭐.’

잠깐은 냅둬도 별일은 없을 거다.

…아마도.

“…밥이나 다시 먹을까.”

폭풍이 지나가자 허기가 몰려온다. 스트레스 받아서라도 좀 먹어야 쓰겠다.

털썩. 식탁 앞에 힘없이 걸터앉은 뒤. 한계까지 불어 터진 라면을 크게 한 젓가락 들어 올렸다.

‘어디.’

그대로 입에 가져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컹! 닫혔던 현관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음?”

뭐지. 설마 벌써 이브가 돌아왔나.

아무리 의지박약이라도 그렇지. 고작 5분 만에 가출 소동이 끝난다?

기대 반 의문 반으로 슬쩍. 현관에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런데 웬걸. 이브보다 더 곤란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 들어왔고. 성큼성큼 내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오빠, 이브랑 싸움이라도 했어요? 엄청나게 화난 얼굴로 뛰쳐나가던데.”

수아였다.

그녀가 현관 쪽을 얼떨떨하게 쳐다보며 내게 묻는다.

‘선수 교체냐.’

참담한 심정으로 라면에서 손을 뗐다.

오늘 점심밥 먹긴 그른 것 같다.

* * *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와 수아가 앉았다.

아까 이브 때와 비슷한 구도.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다.

나는 예상대로 수아에게 절찬 추궁을 받았고. 그에 대해 변명하느라 한참을 주절거렸다.

“…….”

수아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따각, 따가각. 그녀의 손가락이 탁자를 규칙적으로 두들긴다.

“하아.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거죠?”

진득하게 듣던 수아가, 한숨과 함께 말문을 텄다.

날 노려보는 시선이 실로 복잡 미묘하다.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우선 이브는 던전과 관련된 무언가인데. 전에 한 던전에서 주워온 아이템이 갑자기 부화해서, 지금처럼 사람의 모습이 됐다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깨어나자마자 오빠를 아빠라고 부르면서 따랐고. 덤으로 저는 졸지에 엄마가 됐고요?”

“그래. 정확해.”

이번엔 진짜로. 거짓말은 하나도 안 했다.

다만 진실을 적절히 취사선택해서 밝혔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영원회귀만 빼놓고. 나머지는 전부 사실대로 밝혔다.

‘당장 회귀까지 납득시키는 건, 패 죽여도 무리야.’

그건 오늘 하루 다 쏟아도 모자란다.

전에 많이 해봐서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행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 상황이라, 사실 오빠도 이브에 대해서 아는 것도 거의 없고 앞으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처우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거잖아요?”

“요점 정리 참 잘하는구나. 학습지 팔아도 되겠다.”

째릿. 곧장 불같은 눈초리가 쏟아졌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X발아? 그런 의미가 200% 확실했다.

“미안. 나도 모르게.”

아가리 고이 닫았다. 자숙의 의미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에휴. 수아가 통한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뭐, 그래요. 오빠 말은 일단 전부 사실이라고 칠게요. 치는데요.”

툭툭. 수아가 탁자를 두들기던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쳤다.

나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오빠. 저 지금 화났어요. 알아요?”

“그래 보인다.”

“그럼. 왜 화가 났는지는 알아요?”

“…글쎄. 그것까진 잘.”

“오늘 한 말이 사실이라 치면요. 어제는 왜 거짓말했어요?”

“…….”

그래. 역시 그거겠지. 아무렴.

나는 수아의 찡그린 표정을 조심스럽게 훑어봤다.

“제가 오빠 말을 안 믿어줄까 봐요? 아니면, 제가 뭐… 오빠를 던전 생물 밀반입 죄로 신고라도 할까 봐?”

정면으로 마주한 수아에게선 서운함이 물씬 느껴졌다.

입이 100개 뚫려있어도 할 말이 없어지는, 수많은 감정을 함축한 표정. 내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냐. 그,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그냥…….”

“그냥? 그냥 제가 아예 못 미더워서 그랬던 걸까요?”

“…….”

“뭐, 어느 쪽이든 제가 신뢰받지 못했다는 뜻인데. 솔직히 좀… 슬프네요. 응.”

수아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온몸에서, 슬픔과 우울의 아우라가 무럭무럭 솟아나고 있으니까.

“어… 그…….”

멍청하게 입을 우물거리길 잠시.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쾅! 나는 대가리부터 즉시 식탁에 처박았다.

“미안. 미안하다.”

그리고 ‘미안’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몇 번이고, 끊임없이.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정말로. 내가, 미안하다. 미안했다, 수아야.”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런 게 아니다.

진심으로. 송구스러움이 뱃속부터 끓어 넘쳐서 그랬다.

“어… 오, 오빠. 됐어요. 그만, 그만해요. 다치겠어요!”

나의 무한 석고대죄 사죄 러시에 오히려 수아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날 말리려 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는다.

쾅, 쾅, 콰앙! 탁자에 계속해서 머리를 찧었다.

“이제부터라도. 절대로 거짓말 안 한다. 약속해. 이번엔 진짜야.”

“미, 미안한 줄 알면 됐어요. 알겠으니까 그만!”

“정말로,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 오빠! 제 말 듣고 있어요?! 이 오빠 또 왜 이래……?”

안일해졌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한 달 속에서, 기억이 퇴색하고 풍화됐다. 타성에 젖어 그때의 맹세를 반쯤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은 실로 무섭구나. 새삼 실감한다.

“오빠… 약속. 저랑, 이것만 약속해 줘요.”

내가 그때.

무슨 심정으로 수아와 약속을 했는지.

처참한 몰골로 죽어가는 그녀의, 필사적인 미소를 보면서.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 기분이었는지.

“다음 생의, 저한테는… 절대로.”

그렇게나 잊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결국의 결국엔. 나 역시 시간의 고집을 꺾지 못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예요. 알겠죠?”

머리로는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수아에게 거짓말을 시도한 것. 이것 자체가 그 증거다.

“미안해. 미안하다. 다시는, 절대로 안 할게. 미안하다…….”

나는 안일해졌다.

이 정도의 멍청함은 죄다. 무기징역급 죄다.

이 썩어 빠진 정신머리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죽을까? 할복할까?’

그래. 일단 한 번 자살해. 죽음으로 속죄한다.

죽음의 고통을 통해, 영혼에 다시 한번. 지금의 맹세와 감정을 깊게 각인하겠다.

“아오, 진짜! 됐어요! 용서해 준다니까요!”

결국 수아가 큰 소리로 일갈했다.

난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

부정적으로 쏟아져 내리던 사고의 흐름이 뚝 멎었다.

수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좀 무서워요! 그, 그렇게까지 미안해하니까, 제가 뭐 천하의 개년이 된 것 같잖아요!”

“넌 잘못이 없어. 잘못한 건 나다. 거짓말을 한 내가 잘못이야.”

“그, 그건 맞는데… 에이 씨! 이 얘기는 여기서 끝! 끝이에요!!”

수아가 대화를 강제로 끊었고. 이내 탁자 앞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그녀는 손사래와 함께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됐어요. 오늘이라도 사실대로 말했으니, 특별히 이번만 용서해 줄게요. 알겠죠?”

“…….”

“대답!”

“…그래. 고맙다.”

“대신, 저랑 약속 하나만 해요!”

순간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내뱉지 못했다.

“…약속?”

“네. 약속.”

방금 수아가 내뱉은 한마디와 어조. 그리고 표정까지.

숨이 막히도록 익숙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저한테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예요. 알겠죠?”

역시나.

수아는 예상대로의… 아니, 기억 그대로의 멘트를 내뱉었다.

피식. 반사적으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약속한다. 꼭 지킬게. 이번에야말로.”

“…네? 이번에야말로?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냐. 아무것도 아니다.”

기억도 안 날 만큼 낡았던 맹세가 갱신되었다.

이번 약속은 얼마나 오래갈까. 의문이 드는 한편, 확신도 같이 든다.

‘최소한 전보다는 오래가겠어.’

근거는 없다.

그러나. 자신은 있다.

* * *

우여곡절이 많았던 휴일이 지나갔다.

시간은 용서 없이 흘러 다음 날이 되었고. 월미도 유원지의 한복판에서 두 번째 붕괴가 일어났다.

“꺄아아아악!!”

“뭐야, X발! 살려, 살려줘어어!!”

익숙한 아비규환.

절규를 내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인파의 격류.

그 중심에 내가 장승처럼 박혀 있다.

“…….”

나는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주변의 소란이 전부 남 일인 것처럼 침묵하던 나였고.

이내 씨익, 입매를 한껏 비틀어 올렸다.

“…드디어.”

기대에 찬 미소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손님이 행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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