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9)>
오늘은 휴일이다.
게이트 붕괴도 없고, 그래서 나 역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카일 인더스트리 관련 조사도 꽉 막혔다. 더 이상 파고들 건덕지가 없어서다.
‘차라리, 지금 이세라한테 가보는 건……?’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금세 포기했다.
‘이세라의 예언은 만능이 아니야.’
보이는 미래도 거의 무작위성인데다, 보려는 대상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으면 손톱만치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가 볼 수 있는 미래는, 대부분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신변잡기적 일들이 대부분이다.
‘천칭의 눈으로는… 지금 애덤 크로스나 로즈 휴스턴의 소재를 알 수 없다.’
결론은 그것이다.
결국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열렬하고 애틋하게 강서윤의 조사 활동 응원하기. 속칭 ‘해줘’ 메타.
그뿐이라는 소리가 되시겠다.
“아니지. 참.”
생각해 보니, 할 일이 있다면 있긴 하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 생겼지, 어제 새벽의 돌발 사건 때문에.
‘수아한테 할 변명거리, 생각해 봐야지.’
오늘은 그 과제만 해결해도 대성공이다.
나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는, 오늘도 어김없이 라면이었다.
“…….”
“…….”
“…후르륵, 크흠.”
“…….”
그렇게 침묵 속에서 얼마나 라면을 흡입했을까.
나는 따가운 시선을 느낀 나머지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음.”
식탁 반대편.
이브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다.
몰라보게 성숙해진 그녀가 턱을 괴고, 무심하게 반쯤 뜬 눈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
“…….”
잠깐 식탁 위로 무거운 침묵이 강림했고, 의미 없이 눈싸움이 지속됐다.
결국 먼저 나가떨어진 건, 나였다.
“할 말이라도 있냐, 이브.”
“응, 있어.”
이브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외관이 청소년기에 접어든 지금. 그녀의 발음은 전보다 훨씬 또박또박해졌고, 어조나 어투도 서울 토박이처럼 자연스러웠다.
눈 감고 목소리만 들어보면 한국인 다 됐을 정도.
‘대신 말은… 좀 짧아졌다만.’
존댓말 하다가 말을 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녀는 어린 싹수부터 반말을 찍찍 쌌다.
이제 어릴 때처럼, 마냥 헤실거리고 살갑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소리다.
‘대가리가 굵어졌다 이건가.’
말투가 많이 무미건조해졌다.
언뜻 차갑게도 느껴질 때가 있다.
흡사… 진짜 이 나이대 소녀들이, 자기 아빠를 대하듯이.
“그거, 맛있어?”
이브가 턱짓을 까딱이며 물어왔다.
루비처럼 붉은 시선은 컵라면 그릇에 박혀 있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호기심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빠, 맨날 그거 먹더라? 그 빨갛고 꼬불꼬불한 거. 그렇게 좋아해?”
내가 전생부터 라면만 주야장천 먹었다 보니, 그녀도 뒤늦게 호기심이 발한 듯하다.
새삼스레 컵라면을 가만히 쳐다봤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저냥, 먹을 만하다.”
“핑크맘… 아니. 딸기우유가 맛있어? 아님, 그게 더 맛있어?”
‘핑크맘마’를 급하게 딸기우유로 정정하는 이브.
일단 ‘딸기우유’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차치하고.
‘저건 그야말로, 그거구만.’
뭐랄까.
중삐리 고삐리들이 어떻게든 어른 행세 하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행색이다.
그걸 백발 적안의 외계인 소녀가 하고 있으니, 실로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사람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
어쨌든 나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재미는 없을지언정, 음식의 호불호에 대한 정석적인 대답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아. 그리고 사람들 입맛은 천차만별이니, 내가 함부로 뭐가 더 맛있다고 단정짓기가 좀 애매하다.”
“치, 뭔 대답이 그래. 두루뭉술하네.”
이브 역시 대답이 재미없었음인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그냥 아빠 기준으로. 아빠는 뭐를 더 좋아해?”
“…내 기준 말이냐.”
“응, 아빠 기준. 애초에 난 아빠의 생각이 궁금했던 거라고.”
방금의 문답에는 솔직히 많이 놀랐다.
지금 대화들은, 사실 일종의 어휘력 테스트를 겸하고 있었으니까.
‘기호, 천차만별, 단정, 애매, 두루뭉술, 기준. 이 단어의 의미를 전부 알고 있다.’
유년기의 이브라면 최소 세 개 이상은 몰랐을 거다.
당시의 이브는 웬만한 한자어를 모두 어려워했다. 뉴스에서나 쓰일 법한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 예능 프로 등에도 쓰이는 쉬운 한자어도 몰랐다.
‘어휘가 딱, 어린이 교육 방송 수준이었는데.’
먼 과거의 얘기도 아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랬다. 그녀가 모르던 한자어를 풀어서 설명해주느라, 쓸데없이 골머리를 썩은 게 바로 어제 일이란 말이다.
근데 지금은 이렇게 스무스하게 대화가 이어진다?
‘본인이 공들여 습득하지 않아도… 외형이 성장하면, 저절로 지식도 늘어나는 거냐?’
그런 놀라운 결론이 도출되었다.
가정하고도 믿기지 않지만, 정황이 거의 확실해서 안 믿는 것도 웃기다.
‘게임 캐릭터도 아니고, 뭔.’
경험치가 쌓이면 알아서 변신도 하고, 레벨 업 되는 거냐.
그게 뭐야, 뭔 원리야.
‘대체, 무슨 메커니즘이냐고.’
이브에 대한 의문이 오늘도 하나 적립된다.
의문 마일리지가 하도 쌓여서, 이제 집 한 채쯤은 일시불로 지르겠다.
“저기, 아빠! 뭔 생각을 그렇게 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브의 심통 난 목소리 때문이었다.
허공을 헤매던 시선을 다시 이브에게 고정했다.
“내가 말한 거 듣긴 했어? 대답 안 해줄 거야? 아님, 일부러 무시?”
굉장히 익숙한 표정의 이브가 보인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내가 생각에 잠기면 으레 수아가 지어 보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저 띠꺼워 하는 표정은… 엄마한테 배워왔나.’
어떻게 분위기가 저리 소름 돋게 똑같냐, 진짜 모녀 사이도 아닌데.
슬쩍 몸서리를 쳤다.
“무시한 건 아냐. 잠깐 딴생각을 좀 했다, 미안.”
“흐응. 그래서, 대답은?”
“굳이 말하면, 나는 라면 쪽을 좋아하는 편이다.”
“라…면. 그 꼬불꼬불한 거?”
“그래, 꼬불꼬불한 거.”
“왜?”
“보존성이 좋고 같은 가격 대비 포만감과 열량이 높고, 단맛이 적어서 상대적으로 덜 물린다.”
지극히 효율충스러운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뭐랄까, 하루 만에 수년 치 나이를 먹은 외계인 딸내미와 이렇게 평화롭고 목가적인 대화나 나누고 있자니.
‘…아스트랄한 기분이군.’
여긴 누구고, 나는 어디지.
지금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런데, 이브.”
아까부터 자꾸 현실감이 증발하려 한다.
나는 정신 줄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로 했다.
“갑자기 그런 시답잖은 건 왜 궁금해하는 거냐.”
“음, 그냥? 궁금해질 수도 있지. 왜, 난 아빠에 대해 궁금하면 안 돼?”
“…안 될 거야 없다만.”
“전에 아빠는 나한테 엄청나게 질문했었잖아, 그 안대 아줌마랑 엄마랑, 셋이서 나 꽉꽉 둘러싸고.”
“그래, 그랬었지.”
“그때 있잖아,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움찔. 공격적인 반문 세례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반응의 연속이다. 어안이 좀 벙벙하다.
‘이브가… 말대꾸?’
대가리가 굵어지긴 굵어졌군. 꼴에 사춘기 소녀 됐으니 반항 모드다 이거냐.
나는 이브의 붉은 눈을 응시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거냐.”
“딱히. 이제 와서? 그리고 별로 미안한 거 같지도 않은데?”
“그럴 거다, 별로 안 미안하니까.”
“이잇……!”
꾸욱. 이브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면전에서 ‘안 미안함’ 선언을 들으니 꽤 분한 기색이다.
이내 그녀는 화를 꾹 참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그때 나는 순순히 대답해 줬잖아.”
“대부분은 모른다는 대답이었지. 건진 게 놀라울 정도로 없었다.”
“모, 몰라! 어쨌든! 그러니까 아빠도 내가 질문하면 순순히 대답해줘야지. 그렇잖아?! 그래야 공평하다구!”
결국 이브는 격하게 도리질 치며 빽 소리쳤다.
사춘기가 뒤집어썼던 얕은 이성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던, 본래의 이브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 저게 차라리 익숙한 반응이지.’
이제야 적응되는 모습을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내 이브에게 제안했다.
“원한다면 말동무야 해주마. 대신 너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한다.”
“으응. 부탁? 뭔데?”
“좀 있다가 아마 수아가 찾아올 거다. 그때 말을 좀 맞춰줬으면 좋겠는데.”
“응? 말을 맞춰? 아빠, 엄마한테 거짓말하려고?”
이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온다.
그녀는 미간을 슬쩍 모으더니, 이내 글렀다는 양 고개를 살살 젓는다.
“으음.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왜냐.”
“아빠는 엄마한테 거짓말 같은 거 하면 안 돼! 보나 마나 끝 맛이 안 좋을걸?”
“…….”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이브.
입가는 싱글싱글, 미래라도 보고 온 양 확신에 차있다.
실제로 이번 사태가 어떤 경위로 악화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소리긴 했다.
“뭐… 그래, 그건 맞긴 하지.”
나는 마지못해 수긍하는 한편.
문득 이브에게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근데, 얘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냐.’
전에 없이 강렬한 의문이었다.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수아가 특히 내 거짓말을 잘 간파한다는 사실.
그걸 대체… 이브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이것도 그, 자동 습득된 지식의 일부인가?’
내가 수아와 대화하는 모습을 이브가 유심히 지켜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이브에게 수아 문제로 진지하게 상담했을 리도 없다.
결국, 주입된 지식 중에 나와 수아에 대한 정보도 섞여 있다는 소리인데…….
‘대체 주입된 지식의 기준이 뭐야.’
고민해 보길 잠시, 금세 그만뒀다.
길게 생각해서 뭐 하냐. 혼자 고민한다고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소용없을 게 뻔하니 금세 포기한 것이다.
‘전에도 이랬었지, 망할.’
이브의 성장은, 의문점 버닝 이벤트에 불과했다.
쓸 곳도 풀어낼 곳도 없는 의문만 켜켜이 쌓인다.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무거워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이브에게 되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
“어떻게 하다니,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사실대로 말이냐.”
“응! 엄마한테 그냥 전부 사실대로 말해버려. 아빠!”
피식. 미약한 조소를 흘렸다.
그 ‘사실대로’라는 말이 가소롭다 해야 하나, 현실성이 결여돼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리고 이브의 눈썹은 곧장 곧추섰다.
“뭐야, 왜 웃는데?”
“네가 누구인지, 엄마… 수아한테 사실대로 말하라는 거냐?”
“응! 뭐 문제라도 있어? 기분 나쁘게 왜 실실거려!”
“네가 누구냐.”
나는 기습적으로 질문했고.
이브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아빠.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한다, 이브. 난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몰라. 딱 잘라서, 하나도 모른다.”
“어, 어?”
“한 회차에 걸쳐 유심히 지켜봤는데,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많아졌다. 난 널 도저히 모르겠다.”
“아…….”
이브가 천천히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자기 손가락을 멍하니 응시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고, 원피스 끝자락을 움켜쥐며 날 쳐다봤다.
“아빠! 나, 나는 그냥……!”
“또 나는 그냥 나다, 그렇게 비빌 거냐?”
“…윽!”
“90년대 청춘 드라마 찍냐. 자기소개에서 A는 A다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
“이브, 너는 설명해 줄 수 있는 거냐. 너는 대체 누구냐.”
이건 좀 짓궂은 괴롭힘에 가까웠다.
저번 회차의 청문회에서 이미 대답은 들었다. 이브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선 제대로 모른다.
나 치매 아니다. 전생의 일 정돈 웬만한 건 다 기억한다.
그냥,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 거다.
‘… 혹시 또 모르지.’
혹시나 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이브가 성장하면서 생긴 지식들. 거기에 혹시, 이브의 정체에 대한 단서도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똑같은 질문에 대답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떠냐, 이브. 내가 수아한테 널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봐라.”
“으, 으우…….”
“자, 어서 말해봐. 어서.”
나는 이브를 압박하듯 계속해서 종용했다.
이브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분한 듯이, 고개를 푹 떨궈버렸다.
“…몰라. 나도 모른다고. 모른다고 하잖아!”
이브는 씹어 뱉듯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잔뜩 젖어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울먹거리는 것 같았다.
‘사춘기라고, 감수성 폭발하시는군. 아주.’
이브야 울든 말든.
어쨌든 내 입장에선, 실망스러운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