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6화 (86/235)

86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8)>

“난 사건 보고 때문에 협회 좀 갔다 올게.”

그렇게 이번 회차의 1차 붕괴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후.

서윤은 부리나케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채비가 끝나는 즉시 헌터 협회로 향했다.

“간 김에… 겸사겸사, 네 의뢰도 전부 처리할 거니까. 다시 올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떠나기 직전, 서윤은 내게 그런 말들을 남겼다.

나는 혹시나 해서, 헌터 협회엔 내 정체를 밝히지 않도록 함구를 요구했다.

그러자 서윤의 반응은…….

“야, 넌 날 그렇게 병신으로 보냐? 당연히 말 안 하지! 의문의 빨갱이 히어로가 도와줬다 그럴 거다. 됐냐?”

아주 바람직하고 훌륭한 대답을 해줬다.

역시 헌터 짬이 있어서 눈치도 빨라. 이래서 강서윤을 싫어할 수가 없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 없는 동안, 내 동생한테 뭔 일 있기만 해. 알았어?!”

강서윤은 텔레포트를 위해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그 과정 내내 바가지를 긁어댔다.

척,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 면상에 삿대질한다.

“안 그래도 게이트 붕괴 때문에 많이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내가 옆에 없더라도, 네가 똑바로 지켜주란 말이야! 똑바로!”

쉬쉭!

강서윤은 걱정 어린 협박을 마지막으로,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텔레포트다. 그녀가 헌터 협회로 가버린 것이다.

‘좋아, 저쪽은 됐고.’

일단, 헌터 협회 쪽으론 할 수 있는 조치는 전부 취했다.

이제 강서윤이 대부분은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해결해줄 거다.

그러면… 내 쪽에서도 행동을 개시할 차례다.

“나도 조사 좀 해볼까.”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 창을 띄우고, 빠르게 검색 엔진을 돌렸다.

우선은 사전 조사부터 가볍게 시작해 보도록 할까.

“카일, 인더스트리…….”

중얼거린 그대로 검색창에 입력한다.

주르륵,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해일이 모니터 너머로 쏟아진다. 빠르게 그것을 조사하며 쭉정이를 솎아내고, 하나씩 읽어 내려간다.

“흐으음.”

깊은 침음이 입술을 비집고 흐른다.

날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그만큼 상념도 깊어져 간다.

* * *

“오빠, 오빠!”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엔 무슨 꿈인 줄 알았다.

“…으음?”

비몽사몽 한 시야 너머, 어스름한 새벽의 청색광 속에서 수아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나는 보고도 안 믿긴 나머지, 결국 물어봤다.

“수아야, 이거 혹시 꿈이냐.”

내 입장에선 합리적인 의심이다.

그렇잖은가. 난 분명 카일 인더스트리를 조사하다, 밤이 깊어서 그대로 잠들었는데. 갑자기 새벽 시간대에 수아가 날 깨우는 상황이니까.

‘뭐냐, 이 초현실적인 상황.’

수아가 갑자기 날 왜 깨우냐.

아니, 그것보다 새벽에 우리 집에 왜 있냐.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왔고.

현실이라기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네? 꿈이요? 아뇨! 뭔 꿈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수아는 황당하다는 어조로 내 말을 부정했다.

꿈이 아니란다. 그러면 이게 현실이라는 소리인데.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엔 의문이 섞이기 시작했다.

“뭔 일이냐, 수아야. 새벽바람부터.”

“아, 다, 다른 게 아니고요. 이브가……!”

“…이브?”

그 이름이 남아있던 잠기운을 번쩍 날려 버렸다.

고개를 휘저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맨정신으로 다시 보니, 수아는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

꼭두새벽부터 저 다급한 행색, 게다가 난데없는 이브 발언.

뭔가 잘못됐다. 또 이브와 관련해서, 무슨 이변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런 직감이 뇌리를 후려쳤다.

“대체 무슨 일이냐, 수아야.”

나는 수아의 어깨 위로 두 손을 턱, 올려놓았다.

그러자 수아가 퍼뜩,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이, 이브의 상태가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구체적으로.”

“그… 아, 뭐, 뭐라 설명해야 할지……!”

수아는 고민을 거듭하다, 이내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겼다.

“이, 일단 좀 따라와 보세요!”

나는 수아에게 질질 끌려 침대에서 빠져나왔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덜컹! 복도로 나왔다. 그러자 수아네 집 현관문 옆에… 이브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넋이 완전히 빠져버렸다.

“…이브.”

가까스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스르륵. 이브의 새빨간 눈동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굴러온다. 그녀가 한동안 빤히 나를 주시한다.

그리고, 피식. 힘없는 미소를 머금는다.

“뭐야. 아빠네?”

이브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 시니컬한 말투와 입가의 비관적인 조소, 권태로운 붉은 시선까지.

모두 빠짐없이 뇌에 억지로 욱여넣었고, 이내 나는 농담 비슷한 걸 만들어 냈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이브.”

안 그래도 길던 은발은 더욱 길어졌고, 그만큼 신장도 쭉쭉 자라났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훨씬 성숙해진 형상. 체형도 그렇고 얼굴도 마찬가지다.

지금 그녀는, 10대 중반 정도의 소녀를 연상시켰다.

‘전에 이어서, 또 한 번이냐.’

이제 신체에 뚜렷하게 굴곡이 생겼다.

내가 입혀놨던 흰색 원피스는 사이즈가 안 맞아, 타이트하게 그녀의 온몸을 조이고 있었다. 그 덕에 성별을 주장하는 미려한 라인들이 한층 돋보였다.

‘이브가… 나이를 먹었다.’

더 이상 내가 알던 어린이가 아니다.

사춘기 소녀. 이제 누가 봐도 여자로 보일법한, 훌륭한 암컷 외계인이 되었다.

* * *

“끄응.”

야트막한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찌뿌듯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몸이 찌르르 울리며 아침 햇살을 받아들인다.

“후우.”

한숨과 함께 눈을 비볐다.

그리고 완전히 눈뜬 다음에야 깨달았다.

어느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언제 잠들었던 거지…….”

잠들기 전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갔다.

카일 인더스트리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정보들을 이것저것 수집했다.

그러다 피곤이 쏟아져서, 자정쯤 바로 잠들었던가… 그래. 대충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이렇다 할 정보는 딱히 없었고.’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대부분 표면적인 정보들뿐이었다.

카일 인더스트리뿐만이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정보인 두 연구원… 로즈 휴스턴과 애덤 크로스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된 건 없다.

‘아니. 이 둘은 심지어, 거의 존재 자체가 말소되다시피 했지.’

약 1년 정도 전부터 두 사람의 소식이 부자연스럽게 뚝 끊어졌다.

그전까진 학계와 저널에도 나름 활발하게 얼굴 비치던 사람들이었는데. 급격하게 두문불출하고, 완전히 종적을 감춰버렸다.

‘소재만 확실하다면… 당장 미국에라도 날아갈 의사가 있건만.’

정작 그 소재 부분이 불분명해서 문제였다.

그러다 앞으로 며칠 뒤. 12월 초순경에, 시체들만 떨렁 발견된다 이 말이지.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1년 전.”

분명 이세라가 두 연구원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던 것도… 분명 1년 정도 전이었다고 했다.

공백. 부자연스러운 미싱 링크.

바로 여기다.

‘잃어버린 1년, 여기에 뭔가 중요한 게 있어.’

그곳을 중점적으로 파헤쳐야 한다.

그것이 두 연구원의 행방에 접근하는 열쇠가 되리라. 그런 직감이 강렬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뭐, 그건 당장 내 재량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일단은 서윤이가 잘해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

헌터 협회에 카일 인더스트리의 소문이 괜히 돌았을 리 없다.

강서윤이 작정하고 소문을 수집하면, 분명 어떤 형태로든 단서가 나올 거다.

“…일단 밥이나 먹자.”

그러니 나는 오늘을 열심히 살면 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스르륵,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으웅, 음냐.”

가벼운 잠꼬대 소리가 들려온다.

옆으로 퍼뜩 시선을 돌려봤다. 거기엔 당연하다는 듯이 이브가 잠들어 있었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게 된 이브가 말이다.

“아.”

잊고 있었던 새벽의 해프닝이 플래시백 됐다.

그래, 이브가 한 번 더 성장했었다. 완연한 소녀의 모습을 띠고, 복도 난간에 기대어 새벽하늘을 쳐다보던 옆모습이 선하다.

달빛을 반사하던 눈부신 은발이 유난히 인상 깊었다.

“꿈이, 아니었네.”

뭔가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흡사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 회상하는 지금도 꿈인지 헷갈릴 정도.

“으응, 으움…….”

하지만 눈앞에서 새근거리는 이브는, 명백히 어린이 티를 벗어난 소녀의 형상이다.

전날 밤의 기억이 분명히 현실이었음을 시사한다.

“큰일 났네, 이거.”

거기까지 모두 인지하자, 당장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고민거리는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이거였다.

‘수아한텐 또 뭐라고 둘러대냐, X바.’

하루 만에 몇 년 어치를 훌쩍 커버린 이브.

그녀의 변모를 최초로 발견한 건 내가 아니다. 애석하게도 수아였다.

‘숨긴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봉쇄돼 버렸고.’

변명을 생각해 낼 유예 기간도 없다.

아마 당장 오늘, 수아가 일어나자마자 본격적으로 추궁하러 찾아오겠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골치 빠개지는구만.”

대체 어쩌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왜, 대체 어째서. 하필이면, 한창 꿈나라에 있어야 할 수아가 이브를 먼저 발견해 버렸나.

그 전말은 어제 수아가 직접 얘기해 줬다.

“왜는요! 이브가 먼저 절 찾아왔어요!”

말인즉슨, 심플한 얘기였다.

밤늦게 이브가 직접 수아를 찾아갔다고 한다.

“속이 울렁거린다고, 무섭다고 하면서요! 펑펑 울면서 저희 집 문을 막 두들겼다니까요?”

여기까지 들으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이브는 방에서 버젓이 퍼질러 자던 나를 놔두고, 구태여 수아네 집까지 찾아갔는가?

‘역시 아플 때는 아빠보단 엄마가 더 의지되나? 그건 외계인도 공통인 건가?’

나도 결국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또한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오빠가 안 일어났대요!! 꼬집고 깨물고 별짓을 다 해봤는데, 이 악물고 안 깼다잖아요!”

그런 이유였다.

내가 잠귀가 좀 심각하게 어둡긴 하다. 이건 나도 알고 있던 사항이다.

게다가 조사 활동으로 안 쓰던 머리를 오랜만에 풀가동 했더니, 더욱 피곤이 쌓였던 것도 있다.

“애가 얼마나 불안했으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저한테 울며불며 매달리는데… 어휴!”

이브가 가끔 지능이 와리가리 해도, 일단 유아 이상의 지능은 확실히 탑재했다.

완전히 아기 때라면 모를까. 우리 집 문을 열고 옆집을 찾아가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한참 이브를 달래주는데, 막, 갑자기……! 이브한테서 새빨간 빛이 확, 쏟아졌어요! 그, 그러더니… 저, 저렇게……!”

수아는 그 뒤로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다만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고,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이브를 떨리는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이브는 그때도 멍하니 하늘에 뜬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빠. 이거 꿈, 아니죠? 네?”

수아는 마침내 내게 물어왔다.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물어봤던 그 질문, 우습게도 그대로 돌려받았다.

“오빠. 이브는 대체, 뭐예요?”

의문은 겹치고 겹쳐, 의심으로 탈바꿈한다.

눈초리, 혼란과 의심이 찌든 수아의 시선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저한테… 뭔가 숨기고 있지 않아요? 오빠.”

넌 뭔가 알고 있지? 알고 있을걸? 알고 있잖아.

그건 해명을 종용하는 추궁의 눈빛이었다.

“스으읍.”

입맛을 길게 다셨다.

그리고 이브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순진하게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래서 거짓말은 싫다니까.”

이브의 정체를 밝혔을 때 발생할 리스크를 우려해서, 임시방편으로 거짓말을 했었다.

회귀 초창기인 지금은 그게 멘탈 관리에 더 좋다고 판단했다.

‘근데, 아니었구만.’

결과적으론 내 판단이 틀렸다.

숨긴 결과가 이거다. 안 들켰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결국은 거짓말이 발각됐다.

이러면 사실상 최악의 사태로 흘러간 거다.

‘수아에겐 의심을 샀고, 이제 와서 진실을 밝히면… 신뢰가 무너지겠지.’

신뢰가 무너진다.

이게 아주 치명적이다.

신뢰는 모래성 같은 거다.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고, 후에 다시 쌓을 수야 있겠지만. 한 번 무너지고 다시 쌓은 모래성은… 절대로 전과는 완벽하게 같은 모양이 되지 않는다.

“…….”

스르륵, 스륵.

침묵 속에서 이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단 같은 은색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넘실거린다.

얼마나 헛짓거리를 계속했을까.

“너무 빨리 크는 거 아니냐, 이브…….”

공허한 푸념을 허공에 중얼거렸다.

이내 뭔 청승인가 싶어, 그것도 그만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