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11월 29일. 오늘은 1002번째 제1차 던전 붕괴가 일어나는 날이다.
이번 생엔 붕괴가 꽤 느지막하게 발생했다.
오후 3시가 다돼서야 일어났으니, 거의 버저 비터를 울린 격이다.
“야. 새꺄, 오늘 용산에서 게이트 붕괴 일어난다며. 어? 일어난다며!”
강서윤은 오늘 하루 종일 내 옆을 졸졸 따라붙었다.
내 말의 진의를 직접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혹시나,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같이 게이트 붕괴를 막아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X발, 역시 다 개구라였냐?! 에휴,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3시 직전까지 붕괴가 일어나지 않자, 강서윤은 나를 마구 질책하기 시작했다.
같이 따라왔던 이브는, 강서윤의 불같은 시선을 피해서 내 다리 뒤로 숨어들었다.
“우응… 아빠, 이모한테 잘못한 거 있어?”
이모. 이브가 강서윤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래 뭐, 엄마의 자매니까. 이브 입장에선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이브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이모, 아빠 싫어하나 봐.”
“그러게나 말이다.”
“으웅, 나는 사이좋은 게 좋은데에.”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는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밀담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강서윤은 한층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하여간에. 믿은 내가 병신이었다, 병신이야! 쯧쯔. 바쁜 사람 데리고 뭐 하는 거야! 진짜!”
원망이 반, 그리고 안도가 반이었다.
나한테 속은 건 짜증나지만, 차라리 거짓말이라 다행이라는 거겠지. 보고 있는 나로선 참 안타깝기 그지없는 반응이다.
“서윤아. 우리 업계에선 보통, 그런 대사를 사망 플래그라고 한다.”
“응? 뭐?”
“이제 세 시 다 됐지, 그러면 이제 무조건…….”
내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파지지직! 용산의 하늘이 거칠게 찢어졌고, 시퍼런 균열에서 스파크가 일렁거렸다.
―키오오오오오!!
균열 속에서, 천지를 전율시키는 포효가 쏟아진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수십 마리의 드래곤들이 몰려나왔고. 하늘을 여러 색으로 뒤덮어 꿈틀거렸다.
―키에에에엑!!
―크라락! 키아아악!!
드래곤들이, 괴성과 함께 일제히 브레스를 뿜어냈다.
쿠르르르! 숨이 막히는 열기가 사방에서 쏟아진다. 전자상가 일대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꺄아아아악!!”
“모, 몬스터! 몬스터다!!”
“게이트가 붕괴했어!!”
어지러운 비명이 사운드를 가득 채운다.
나는 그때까지 벙쪄 있던 강서윤 앞에,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봐라, 붕괴했지.”
“좋겠다 X발! 뻐길 때냐 지금?!”
강서윤이 빽 소리치더니, 이내 다급하게 전방으로 뛰쳐나갔다.
투학! 그녀가 지면을 박찬다. 단숨에 하늘로 솟구친 육체가 쉬쉭, 스산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하아아앗!!”
한층 높은 상공에서 서윤의 고함이 다시 들려왔다. 어느새 무수한 병장기들이 그녀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회전했다.
피피핑! 서윤이 손짓하자, 날붙이들이 일제히 드래곤들에게 발사되었다.
“죽어버려!!”
유성우처럼 쏟아진 무수한 섬광의 궤적.
퍼퍼퍼퍽! 병장기가 일거에 드래곤들의 비늘을 파고든다. 질척한 파육음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키에에엑!
―크가각! 캬아아악!!
불의의 기습을 당한 드래곤들이 일제히 신음했고. 그 거체를 휘청거리며 몸부림쳤다.
―으르르르……!
―크르릉!
스르륵. 놈들의 시선이 서서히 한 점으로 뭉친다.
당연히 강서윤이 떠 있는 장소였다.
“오냐. 그래! 전부 나한테 덤벼!!”
강서윤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호기롭게 외쳐댔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노렸을 거다. 더 피해가 번지지 않게 하려고, 최대한 화려한 광역 기술로 드래곤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킨 거다.
―그르르르르…….
드래곤들의 장중한 그로울링이 속속들이 강서윤을 향해 모여든다. 이내 대부분의 드래곤 이목이 강서윤 하나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사방팔방이 완벽하게 포위되어 버렸다.
―으르르르!
그리고 포위해온 드래곤들의 중앙.
커다란 드래곤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또 위압적인 외형의 시커먼 드래곤이 하나 있다.
―크오오오오오!!
블랙 드래곤 칼라마이트.
놈이 시뻘건 눈을 이글이글 태우며 강서윤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서윤은 짐짓 위태롭게 웃었고, 이내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뭐… X발아. 꼽냐?”
어디까지나 태연한 척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여유로운 시늉을 하는 거다.
“덤벼 봐! 개새끼들아!!”
파지직!
서윤이 공중에 손을 뻗었고, 손끝에서 발생한 스파크가 허공에 작은 구멍을 냈다.
그녀는 곧 찢어진 공간 너머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익숙한 생김새에 나는 낮은 탄성을 흘렸다.
‘크로노스 대거, 오랜만에 보네.’
전전생의 2차 붕괴 때.
강서윤이 저걸로 묘지기 광대를 썰어대던 장면이 얼핏 기억을 스친다.
따지고 보니 고작 2회차 전인가? 그렇게 오랜만도 아니군.
나는 피식 웃으며 이브의 어깨를 툭툭 쳤다.
“슬슬 우리도 일해야겠다, 이브.”
“어, 응!”
이브도 헤실거리며 곧잘 알아들었다.
직후 이브가 내게 양손을 쭉 뻗어온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팔을 목에 두르고,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이젠 이브나 나나 꽤 익숙해진 프레이즈였다.
“아빠아. 이번 건, 핑크맘마 줘?”
“세 개.”
“앗싸아!”
이브가 뛸 듯이 기뻐한다.
그리고 콰지직! 날카로운 송곳니가 빠르게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생명력을 한계까지 소모합니다.]
[전체 체력의 50%가 갑주로 환원됩니다.]
꾸드득, 뿌드드득!
온몸의 관절이 뒤틀리는 불쾌한 소리가 전신을 울린다. 시야가 붉게 칠해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세상이 미쳐 날뛰는 듯한 고양감 속에서, 시뻘건 피의 갑옷이 전신을 감싸 올렸다.
“후우.”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쉬었다.
이브의 변신이 끝났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
시선을 슬쩍 위로 올렸다.
전자상가 상공, 강서윤과 드래곤 무리의 격렬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죽어어어엇!!”
이글거리는 드래곤의 화염포.
그리고 수많은 칼날과 총탄의 비가 교차한다.
―키에에에엑!!
드래곤의 거대한 살점들이 사방으로 난무했다.
그리고 강서윤 역시, 몸 여기저기가 잔뜩 그을렸고 이마엔 어느새 굵직한 핏줄기가 흐르고 있다.
‘역시, 혼자서 전부는 무리인가.’
강서윤 정도의 스펙이면 아마, 혼자서 드래곤 네댓 마리 정돈 거뜬히 동시에 잡을 거다.
하지만 수십 마리는 역시 무리였다.
‘부상도 꽤 심해 보이는데.’
전황은 얼핏 만 봐도 강서윤이 불리했다.
상처를 입었으니, 이 불균형은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질 거다.
“텔레포트.”
나는 고군분투하는 강서윤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육성 영창에 따라 스킬이 즉시 발동된다.
[스킬 발동: 텔레포트]
쉬쉭! 시야가 어지럽게 격변했다.
어느새 강서윤이 코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 뭐야?!”
강서윤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온몸을 움츠리며 나를 경계했고, 이내 얼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빨간, 갑옷……? 대체 뭐야, 당신?”
아, 갑옷.
그렇군. 투구 때문에 나인 걸 못 알아보겠구나.
그걸 미처 생각 못 하고 있었다.
‘이거 투구만 따로 벗지는 못할 텐데.’
목소리도 기괴하게 변조되던 걸로 기억한다.
전전생에선 박현우가 날 여자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으니, 아마 확실하다.
‘가만있어 봐라.’
어떻게 설명하면 한 번에 잘 알아들을까.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 차.
“아, 아무튼! 당신! 누군진 몰라도 여긴 위험해!”
강서윤이 먼저 퍼뜩 소리쳤다.
그녀는 내게 급박하게 손사래를 치며 축객령을 내렸다.
“얼른 도망쳐!! 내가 시간을 최대한 벌어볼 테니까!!”
와중에 내 피난부터 챙기는 강서윤이었다.
아무튼, 아가리만 험했지… 사람이 근본부터 존나 물러 터졌다. 투구 속에서 쓴웃음을 진득하게 머금었다.
“…….”
그리고 소리치든 말든, 나는 그 자리에서 부동자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강서윤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한층 앙칼지게 소리쳤다.
“야! 이 X발! 당신 진짜 뒤지고 싶……!!”
서윤의 말이 중간에 뚝,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망연자실한 두 눈이 내 등 뒤를 쳐다본다.
나도 덩달아 등 뒤로 고개를 돌려봤다.
“음?”
눈앞이 온통 시커멓다.
어느새 코앞까지 쇄도한 칼라마이트가 보인다.
놈의 쩍 벌어진 아가리가, 온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크에에에엑!!
우렁찬 포효가 공기를 찢어발긴다. 서윤의 짧은 단발이 광풍에 미친 듯이 나부꼈다.
강서윤이 애처롭게 손을 뻗어왔다.
“아, 안 돼!!”
우드득!
칼라마이트가 나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사방에 새까만 어둠이 들이닥쳤다.
서윤의 일그러진 표정도, 어둠에 파묻혀 사라진다.
“쓰읍.”
물론 나는 멀쩡하다.
불꽃의 숨결 덕에 좀 지나치게 뜨뜻하고, 더러운 침 때문에 미끄덩거리는 것만 빼면. 일단 갑옷에 기스조차 안 났다.
“사람 무는 개새끼는…….”
날 씹기 위해 열심히 입을 우물대는 칼라마이트도, 지금쯤 직감하지 않았을까?
X발.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뭐 이런 식으로.
“된장 발라야지.”
쉬리릭!
길게 늘어뜨린 사복검을 크게 한 번 휘둘렀다.
파바바박! 새빨간 칼날 파편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휘몰아친다.
―크에에에엑!!
칼라마이트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른다.
동시에 시야가 다시 환하게 트이며, 전자 상가의 전경이 보였다.
―쿠엑! 크에아아아악!!
칼라마이트가 고통에 허덕인다. 허겁지겁, 날갯짓을 해 내게서 멀어지려 애쓴다.
거칠게 뜯겨나간 놈의 아래턱이 추락하고 있었다.
“…어?”
그리고 강서윤, 넋이 반쯤 나가서 날 쳐다보는 서윤이 뒤늦게 포착됐다.
다시 보니 반갑다. 나는 손을 슬쩍 들어 그녀에게 인사해줬다.
“하이.”
흠칫. 강서윤이 깜짝 놀라서 파바박 멀어진다.
그녀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서 날 가리켰다. 그리고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너… 설마. 저, 정용이였어? 한정용?”
“…….”
이번엔 내가 깜짝 놀랄 차례였다.
“어떻게 알았냐,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어, 어떻게는 X발아! 이 상황에 갑자기 ‘하이’ 이 지랄 할 만한 새끼가, 너 말고 누가……!”
“잠깐만.”
촤르륵!
강서윤의 얘기를 듣다 말고, 나는 대뜸 사복검을 휘둘렀다.
방향은 전방. 강서윤의 목을 향해 칼날의 채찍이 순식간에 쇄도했다.
“어, 무슨……?!”
당연히 강서윤은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녀가 뒤늦게 방어태세를 취해보지만, 이미 피하기는 늦었다.
“읏!”
퍼거걱!
파육음이 터졌다.
사복검이 살갗을 무참히 헤집으며, 강서윤의 온몸은 대량의 선혈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키에에에에엑!!!
드래곤의 비명이 울린다.
강서윤의 바로 뒤쪽. 내가 목을 관통해 버린 드래곤이 내지른 소리였다.
“어엇?!”
그제야 강서윤도 흠칫, 후방에서 순식간에 접근한 드래곤을 눈치챈다.
그녀가 얼떨떨하게 목을 쓰다듬었다.
“…아, 아.”
자신이 방금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곱씹는 듯하다.
나는 피식 웃었고, 지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가서 민간인 대피나 돕고 있어라, 서윤아.”
“…뭐, 뭐?”
“이건 내가 전부 죽여놓는다. 여긴 신경 쓸 거 없어.”
“아, 아니. 너 혼자, 이 많은 놈들을……?!”
“그래. 그동안 할 것도 없으니, 가서 민간인 대피라도 좀 돕고 있으라고.”
“웃기지 마! 날 뭘로 보고 그딴 말을 해!! 나도 같이……!”
강서윤이 소리치는 찰나.
나는 좌측에서 빠르게 접근하던 드래곤 하나를, 정면에서 어깨로 들이박았다.
퍼어억!! 육중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쿠게게엑……!
차징 싸움에서 나가떨어진 건, 오히려 드래곤이었다.
촤르륵! 사복검으로 놈의 목을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내 쪽으로 힘껏 끌고 와, 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쇄애액! 놈의 미간을 향해 새빨간 주먹이 날아갔다.
“나 대화 좀 하자, 대화 좀.”
콰아앙!
파육음이 아니라 폭발음이 났다.
내 주먹에 강타당한 드래곤은, 그대로 대가리가 폭발해 흩어져 버렸다.
“쯧.”
혀를 차며 사복검을 다시 원상 복구 했다.
쿠구구궁! 몸통만 남은 드래곤의 육체가, 뒤늦게 바닥에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