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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9화 (79/235)

79화

<1002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

전에도 한 번 말한 적이 있다만.

사람이 타인에게 호의를 갖는 데는 대단한 이유가 필요 없는 법이다.

특히 나는 사람이 단순해서 그런가, 더더욱 그런 편이다.

생각 없이 던진 돌이 개구리를 죽인다지.

반대로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는,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한다.

“…오빠.”

이건 영원회귀 전의 일화.

기억 밑바닥에 침잠되어 어렴풋이 기억나는, 몇 안 되는 에피소드.

내가 강수아에게 호의를 갖게 된 계기다.

“그, 언니 친구분 맞죠? 옆집에 사시는.”

처음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정말 별것 없었다.

대단한 사건도 전혀 없고, 그냥 평범하게 있을 법한 일상의 편린이었다.

“혹시 저 아세요?”

내가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따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때. 하필이면 그 타이밍, 그 절묘한 시점.

“저 강서윤 동생이에요. 강수아!”

복도에서 수아가 말을 걸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호의를 갖기엔 충분했다.

“오빠가 고등학교 때인가? 몇 년 전에 언니랑 오빠랑 가끔 놀았었는데.”

그날은 나한테 많이 힘든 날이었으니까.

사흘 전, 협회에서 임시로 짜준 스쿼드와 함께 D급 게이트 레이드에 나갔고 성대하게 실패했다.

스쿼드가 개폐급만 모여 있었다.

좀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순전히 다른 팀원들 때문에 실패했다.

“혹시… 기억나세요?”

게다가 설상가상, 도망치는 과정에서 놈들이 나를 미끼로 삼고 튀었다.

덕분에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의 심각한 중상을 입었고. 협회 소속 힐러한테 3일 내내 회복 받다가, 오늘 간신히 퇴원한 상태였다.

“…….”

나는 한동안 입을 닫고 멍하니 강수아를 쳐다봤다.

하도 지쳐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것도 있었고.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여자에 대한, 막연한 의구심도 있었다.

“음… 기, 기억 안 나시나 보다. 아하하… 죄송해요. 괜히 아는 척해서!”

수아는 내 지긋한 시선에 뻘쭘해졌는지, 이내 말을 얼버무렸다.

그제야 나도 좀 정신 줄이 돌아왔다.

‘아니, 내 정신 좀 봐라.’

아무리 피곤하고 짜증난다 해도 그렇지, 사람 앞에 두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멍했던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대답을 쥐어짰다.

“수아. 강수아. 알지, 서윤이 동생……. 그래. 약간은 기억나.”

내가 영원회귀 전후로 은근히 안 변한 습관이 하나 있는데, 바로 말투다.

내 말투는 이전부터 건조하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왜 불렀냐, 강수아.”

얼핏 들으면 화난 것처럼 보일 말투였다.

실제로 그때는 피곤한 데다 몸도 아프고, 개 같은 팀운에 화가 엄청 나있었다.

그러니 전혀 없는 말은 아니긴 하다.

‘그래도, 기껏 아는 척을 해줬으니…….’

그러니 최소한의 인사치레를 하려고 했던 거다.

기분이 안 좋아도 좀 더 숨길 수 있지 않았나.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

어쨌든 수아는 당황하며 퍼뜩 말했다.

“아, 아뇨.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아니고.”

“그냥, 엄청… 힘들어 보여서요. 괜찮으신가 하고.”

머뭇거리며 수아가 내뱉은 한마디.

조금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생각도 못 해본 말이 나와서 그렇다.

“…내가 힘들어 보인다고?”

“네. 그,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신데요.”

“…….”

“오빠는 언니보다도 한참 전부터 헌터 일을 하셨다고, 언니한테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혹시 일하시다 어디 다치셨어요?”

내가 오죽 죽상이었으면, 친하지도 않은 강서윤 여동생이 걱정돼서 말을 걸었을까.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오지랖 넓은… 착한 부분은 제 언니랑 판박이구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괜찮다. 진짜로. 신경 쓸 필요… 없어.”

하긴, 당연히 얼굴에 드러났겠지.

자괴감이나 허탈함, 고통이나 분노. 뭐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

안 드러나는 게 이상한 상황이니까.

‘당장 걱정거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뭐…….’

힐러 대금이 무서워서 완치도 못 하고 도망치듯이 협회를 나왔다.

한동안 몸조리하느라 헌터 업무도 제대로 못 할 판이었다. 헌터는 한 번 몸이 아프면, 돈벌이에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도 적성에 안 맞고, 사람도 족같고. 헌터… 역시 때려치우고, 다시 노가다나 할까 싶네.’

팀원들에 대한 울화부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고민까지. 당시의 나는 생각할 게 좀 많았다.

어쨌든 그렇게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곧장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뭐, 어쨌든…….”

한동안 하릴없이 뒷머리를 긁적였고, 여러 잡생각을 마친 후.

이내 지친 웃음을 억지로 띠웠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기운이 좀 나네.”

그래도 딴에 내 걱정해 준 거 아니냐.

당장 치료비 때문에 빈털터리라 해줄 건 없다. 그러니 솔직하게 감사라도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라. 서윤이 보면… 안부나 좀 전해줘.”

철컹. 현관문을 열었다.

쑤시는 삭신을 어루만지며 집으로 들어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잠시만요!”

갑자기 수아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이내 들고 있던 봉지에서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줬다.

나는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봤다.

“…이건.”

“드세요. 그거 오빠한테 드릴게요!”

빨간 바탕의 작은 우유 팩엔 대문짝만하게 딸기가 그려져 있다.

딸기우유였다.

“기분 안 좋을 땐, 단 걸 먹어야 돼요.”

수아는 싱긋 웃으며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멋쩍은 듯, 약간은 부끄러운 듯. 그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거 언니랑 먹으려고 산 건데, 오늘도 못 들어온다 그래서요. 그냥 오빠가 드세요!”

이내 퍼뜩!

강수아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수그려 인사했다.

“그, 그럼! 들어가세요!”

후다닥, 강수아가 도망치듯이 제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콰당. 문이 닫힌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복도를 잠깐 멍하니 쳐다봤다.

“…….”

침묵 속에서 집 안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비척비척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에 들린 딸기우유를 만지작거리길 잠시, 이내 우유 팩을 뜯어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크.”

달다.

맛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딸기우유를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너무 맛있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크, 흐흐.”

몸이 다 나으면, 곧바로 다음 레이드 알아봐야겠다.

어느새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있었다.

“먹고는 살아야지.”

그런 일이 있었다.

정작 강수아는 이런 시답잖은 에피소드 따위, 진작에 잊어버렸을 거다.

그러나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녀의 표정과 어조, 그리고 유난히 달게 느껴졌던 딸기우유의 맛까지.

솔직히 손주 태권도장 등록까지 이미 머릿속에서 끝마친 상태였다.

“야, 강서윤.”

[…뭐냐? 한정용, 존나 오랜만에 전화하네. 웬일이냐?]

그래서 나는 그 길로 곧장 강서윤에게 전화를 했고.

그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네 동생 좀 소개시켜줘.”

이건 진짜 순수한 의미다.

강수아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는 소리였다.

내가 십덕 같은 망상을 한 거랑은 별개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그건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조건 반사 같은 거다.

[이 X발! X같은 새꺄!!]

하지만 강서윤은 나만큼 순수한 영혼이 아니었다.

곧장 욕이 한 바가지 싸박혔다.

[동생 건들면 뒤진다. 진짜 죽여버릴 거야!]

“아니, 내가 뭔 말을 했다고…….”

[걔랑 말도 섞지 마, X발놈아! 병신 끼가 옮는다고!!]

이 음란마귀 새끼. 기어코 나의 순수한 뜻을 곡해해 음해하려 드는구나.

악의로 가득 찬 강서윤의 호통을 들으며 한숨을 흘렸다.

“후우.”

…아무튼, 그런 기억이 있다.

* * *

“크흠.”

얕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사방을 둘러본다. 대충 쳐놓은 블라인드 틈새로 햇살이 눈을 찌른다.

내리쬐는 햇살이 강하다. 이미 한낮인 듯했다.

“…….”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파악해본다.

그래, 10차 붕괴가 끝나고 자살. 새로운 회차. 1002번째, 11월 28일의 한복판.

확인. 전부 파악했다.

“하루를 내리 잤구만…….”

중얼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잠을 오래 자서 그런지 일단 몸은 개운했다.

반대로 너무 오래 자서 나른한 느낌도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컨디션은 좋은 편이다.

“끄응.”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뚜둑, 뚝. 몸에선 관절 삐걱대는 소리, 입에선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풀린 몸을 이끌고 슬슬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음냐아.”

부스럭.

문득 침대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퍼뜩 돌렸다. 이불 위로 어지럽게 흩어진 새하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으음… 아빠아.”

자고 있는 여자애다. 아주 익숙하게 생긴.

뭔 꿈을 꾸는지 연신 히죽거리는데, 잠꼬대로 종종 아빠를 찾고 있다.

“…이브.”

뭐, 당연히 이브였다.

아니지. 당연한 게 맞나?

‘생각해 보면 이건, 엄청 놀라운 일이잖아.’

이브가 내 옆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자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뭘 X발, 당연하다는 듯이 납득하고 있는 거냐. 한정용.

“…이브, 이브. 일어나 봐라.”

정신이 번쩍 들어 이브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이브가 몸을 뒤척거리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으웅… 응?”

이브의 와인 같은 붉은 눈동자가 반쯤 풀려, 나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이내 입가에 히죽, 안도한 듯한 미소가 걸렸다.

“와아. 아빠아… 눈 떴네? 응, 다행이다. 다행이야!”

이브에게 물어볼 것이 정말 많았다.

어떻게 노원구에 있어야 할 네가, 이 시점에 우리 집에 있는지. 시공 회귀를 하면서 뭔가 신체적으로 변화가 있진 않았는지.

“이브, 대체…….”

그리고 넌.

이전 생의 나를, 1001번째 나를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정말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 갑자기 왜 우는 거냐.”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그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에에엥. 으후윽!”

이브가 헤실거리다 말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나 싶더니.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아빠아! 흐흑!”

마치 긴장이 풀려서 안심한 사람처럼. 계속 다행이란 말을 연발하며, 내 옷소매를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 나머지, 물었다.

“다행이라니, 무슨 뜻이냐.”

두 번째 질문은 그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브의 대답으로, 일단 이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빠가아… 갑자기, 목을 콱! 찔렀잖아아!”

“…그건.”

“피가 엄청 나왔다구. 아빠,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다구! 흐아아앙!”

나를 원망하듯이 빽빽 소리치는 이브.

그녀는 전생의 내가 한 ‘아주아주 나쁜 짓’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확하고 세세하게 기억했다.

“…그랬구나.”

이브는 시간이 회귀해도 전생의 기억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확실해졌다.

“미안하다. 미안, 내가 미안해…….”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안도감 속에서. 나는 미친놈처럼 사과를 연발했다.

내 앞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강수아가, 항상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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