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4)>
이브가 새된 탄성을 지른다.
“꺄후!!”
시야가 격변하고, 주변이 환해졌다. 한 번의 도약으로 단숨에 지상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수아의 추격을 뿌리친 직후였다.
“헤에, 이뻐…….”
문득 안겨있던 이브가 멍하니 탄성을 흘렸다.
이브는 홀린 듯한 눈으로,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
이브의 말대로 아름다웠다.
계속해서 쳐다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한동안 거리를 거닐며, 편안한 침묵 속에서 이브와 저무는 노을을 구경했다.
“이 정도 떨어졌으면 됐겠지.”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이세라의 칵테일 바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브를 바닥에 사뿐히 내려줬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브.”
“응, 아빠아.”
“난 이제 자살을 할 거다.”
조막만 한 애새끼한테 대뜸 자살을 선언하는 나.
이브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빤히 올려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자살이, 머야?”
천진난만하게 물어왔다.
나 대신 내 배때기를 찔러줄 수 있나 해서 데려왔더니, 이 반응은 이미 텄다.
그래, 이브한테 뭘 바라겠냐.
‘뭐 언제부터 남이 해줬다고.’
이브는 혈천갑 변신만 꼬박꼬박 잘 해줘도 감지덕지다.
이렇게 된 이상 플랜B다. 대충 얼버무리고 직접 자살하는 수밖에.
“자살은 나쁜 짓이다. 하면 안 되는 거야.”
“으에? 아빠, 나쁜 짓 할 거야?”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다.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는 법이지.”
“으응… 그, 그렇구나.”
“그러니까 이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짓은, 보고 따라 하거나 그러지 마라. 누구한테 봤다고 말하지도 말고.”
쉬잇. 나는 이브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이브는 곧잘 알아듣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쉿!”하고 나를 따라했다.
나는 애들한테만 통하는 치트키를 발사했다.
“오늘 일은 우리만의 비밀이다. 알겠지?”
“우리만의…! 응! 절대 안 말할게! 걱정 마!”
“그래, 약속.”
“히히, 약속!!”
거기까지 확답을 받아낸 뒤.
파지직! 나는 인벤토리에서 블라이스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후우.”
심호흡을 깊게 했다.
한동안 엉거주춤하게 단검을 든 채, 그 상태 그대로 머뭇거렸다.
나는 혀를 찼고, 짜아악! 스스로 뺨을 한 대 후려쳤다.
“…쯧.”
몇 번째인데 아직도 이러냐.
주저하지 마라. 이런 건 괜히 시간 끌수록 점점 더, 하기 힘들어지는 법이야.
푸각! 곧장 내 목을 찔렀다.
“……!!”
목을 뚫고 들어오는 서늘한 이물감.
경추를 헤집고, 살갗에 파묻힌 뼈를 긁어대는 서늘한 금속음.
그리고. 상상을 불허하는 고통이 뇌를 지져댄다.
“커, 허억…….”
찐득한 이명이 윙윙 울렸다.
이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털썩. 바닥에 쓰러져, 본능에 따라 온몸을 버둥거리는 와중.
“…어?”
문득 이브의 얼빠진 탄성이 들려왔다.
시뻘건 시야를 가까스로 들었다. 이브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아, 아…빠?”
석양을 등진 이브의 머리칼이 붉게 타오른다.
일견 후광처럼 보인다.
‘아.’
창백한 하늘에 새빨갛게 타오르는 점 하나.
그렇군. 뭔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오늘의 석양은 꼭 이브를 보는 것 같았다.
붉은 저녁놀은 이브의 눈동자를 닮아있다.
‘…그러고 보니.’
천천히 뭉개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뒤늦게 이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가 회귀하면, 이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를, 기억하나?’
자기 눈앞에서 자살하는 한정용.
가끔은 같이 산책을 나가고 딸기우유를 먹여주고, 변신해서 같이 싸우고 품에 안아주고, 수아와 함께 생에 첫 뒤집기를 구경했던, 한정용.
1001번째 생을 함께했던 나를, 이브는 과연.
제대로 기억해 줄까.
‘모르겠다.’
이브에 대해선 밝혀진 게 거의 없다.
그러니 알 수가 없다. 기억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기억은 고사하고, 시간이 되돌아감에 따라 하트기어 상태로 되돌려질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 의문.
1001번째 회차 동안 쌓여온 수많은 의문들을, 한시라도 빨리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번 생을 최대한 빠르게 끝낼 필요가 있다.
“기, 기… 기…….”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목을 짜냈다. 피거품이 입술 사이로 끓어 넘친다.
오기를 담아, 기어코 색색거리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기…다, 려…라.”
대상은 딱히 없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외국인 연구원들, 영원회귀를 시키는 신이나 그 언저리. 아니면 다시 살아난 던전교 교도들이 될 수도 있겠지.
누구든 좋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목 씻고 기다려라, 곧 내가 간다.
“…끄.”
그리고, 뚝.
의식이 순식간에 침잠되었다.
* * *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곧장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브.”
가장 먼저 이브가 보였고, 그 뒤로는 완전히 쑥대밭이 된 서울의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들어 올렸다. 상공에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하고, 압도적인 어둠을 내뿜는 균열이 보였다.
“…이건.”
최종 게이트 붕괴.
이 압도적인 절망감과 공포가 느껴지는 게이트는, 15차 붕괴가 분명했다.
나는 반쯤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꿈이라고 단박에 인지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브와 최종 붕괴. 두 명제가 공존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이브가 부화한 이후론 15차 붕괴까지 살아남은 적이 없으니까.
“아빠. 괜찮아?”
문득 이브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퍼뜩 시선을 내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이브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흠칫. 나는 온몸을 바싹 굳혔다.
“이브, 그 몰골은…….”
이브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새하얀 머리칼도, 투명한 피부도, 내가 입혀놨던 하얀 원피스까지. 모두 피로 푹신 젖어 시뻘겋게 물들어 있다.
이브가 오히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내가 왜?”
“그 피, 누구의 피냐.”
“이거? 아빠 피잖아.”
“…뭐.”
두근!
그 순간 심장이 크게 요동쳤고, 가슴팍에서 엄청난 통각이 퍼져나갔다.
나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시선을 내렸다.
“…이건, 또… 뭐야.”
가슴 한가운데에 어느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정확히 심장의 위치다. 분명히 직전에 심장 박동 소릴 들은 것 같은데.
정작 내 몸 안에는… 이미 심장이 도려내져 있었다.
“아빠. 이제 정신이 들어?”
이브가 내게 바짝 붙어서 묻는다.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정신이 들긴커녕 혼미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그그그그그그……!
세상 전체가 우르릉, 신음한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전율이 등줄기에 치달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허공의 거대한 균열로 향했다.
―그그그그그그그!!
귀를 넘어, 뇌를 직접 파고드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무언가. 균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빠져나온다.
시커멓고, 무정형에, 세상 그 어느 것보다도 아득하게 압도적인, 무언가가.
‘그것’이 게이트를 빠져나온다.
―그그그그그그그그그!!
소리도 점점 커지고, 지축을 울리는 진동도 점점 격렬해진다. 이내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다.
‘그것’이, 마침내 지상에 수많은 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이브, 이브……!!”
나는 홀린 듯이 이브를 찾았다.
가슴의 뻥 뚫린 상처가 욱신거린다. 피가 동파된 수도꼭지처럼 콸콸 솟았지만, 지금 이딴 상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피투성이인 이브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브, 변신이다. 지금 당장 내 피를 빨아.”
“응? 왜?”
태평하고 느긋한 반문이 돌아온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왜는. 저기, 저. 거대하고 시커먼 저거… 저게 안 보이냐?”
“아니? 보여! 대따 커서 아주 잘 보여! 히히.”
“저걸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힘을 빌려줘, 지금 당장.”
“음… 하지만. 왜?”
이브는 끝까지 다시 물어왔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약간은 반항적인 기색까지 있다.
지금까지 순종적으로 힘을 빌려주던 그녀가 거짓말 같다.
“…허?”
왜? 왜라니.
상상도 못한 형태의 의문이었다.
“이브. 저, 저걸 보고도. 뭔가 느끼는 게, 없냐.”
지금 그녀는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를 보고도, 저걸 왜 막아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것이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아니, 아빠! 왜 싸우려고 해?”
오히려 이브가 물어온다.
아까와 똑같은 어조다. 아니, 오히려 의문이 더 증폭돼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를 빤히 주시한다.
“아빠. 싸우면 안 돼! 저건…….”
삐이익, 치지지직―!!
정신이 아찔해지는 고음이 고막을 찌르르 울린다. 그것이 이브의 말을 틀어막았다.
나는 제대로 듣지 못한 나머지, 재차 물었다.
“방금. 뭐라고……?”
“저거 말이야! 저거 …라고. 왜 모르는 거야, 진짜!”
삐이이익!!
또다. 이브가 ‘저것’에 대해 언급하는 순간만.
귀신같이 노이즈가 들어차, 강제로 인식을 방해해 왔다.
‘이건…….’
이건 못 알아볼 수가 없다.
누군가 일부러 방해하는 것이다. 내가 저것의 정체를 알아듣는 것을 훼방 놓고 있다.
나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이브에게서, 불현듯 한 발짝 떨어졌다.
“이브.”
“응?”
“…넌, 대체 누구냐.”
“…히히.”
이브는 대답 대신 히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그리고 전과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나는 나야, 아빠.”
그 뒤틀린 웃음.
순수와 잔인이 뒤섞인 피투성이의 웃음이… 최종 붕괴의 던전 마스터에 버금가는 공포를 선사했다.
“그런데 아빠.”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이브는 이번에도 내게 질문해온다.
특유의 요사스러운 핏빛 눈동자를 빛내면서.
“아빠는, 대체 뭐야?”
언젠가 이브에게 했던 그 질문을 직접 당해보니, 이렇게 할 말이 없을 수가 없다.
역시나. 사람은 역지사지를 당해봐야 한다.
* * *
혼란스러웠던 꿈에서 깨어나고, 나는 곧 다시 정신이 들었다.
아니지, 이 상태가 정신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그건 여전히 좀 의문이긴 하다.
“…….”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공간.
상하좌우가 어디까지고 끝없이 펼쳐진, 무한의 세계 속.
나는 그 한가운데 있었다.
‘…….’
있다고 해야 하나, 사실 실체조차 제대로 없다.
그냥 어렴풋이, 내가 이곳에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 남아있다.
뭐시기 말마따나 나는 생각하고, 고로 존재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다.
[1001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익숙해져 버린 패널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실패 통보. 나는 1001번째 강수아를 지키지 못했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2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볼 것도 없이 ‘예’를 선택.
어차피 ‘아니오’ 선택해봤자 30초 후에 얄짤없이 회귀한다.
잠깐의 유예 시간을 주냐 안 주냐, 그 차이일 뿐이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물 흐르듯 진행되던 프레이즈가 여기서 잠깐 제동이 걸렸다.
잠시, 혹은 꽤 오랫동안. 시간 감각이 애매한 공허의 공간에서 나는 진득하게 고심했고.
이내 결정을 내렸다.
[스킬 ‘글레이프니르’를 계승합니까?]
나는 시스템에게 곧장 긍정했다.
범위 공격기 블레이드 아크, 범위 CC기 절대 영도 영역, 마력에 투자한 스탯 포인트 11, 그 외 잡다한 아이템들까지.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스킬은 <글레이프니르>.
검증조차 안 된 스킬을 선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단, 사용하면 반드시 적중인 점.’
일발필중.
속박이라는 강력한 제어권을 100% 확률로 맞출 수 있다.
농담 안 하고. 확률이 100%가 아니라 99.9%였다면, 이 스킬은 볼 것도 없이 탈락이었다.
‘하지만 100%라 달라졌다.’
던전 마스터급에겐 0.1초만 효과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 천재일우의 순간에 100% 확률로 0.1초를 묶을 수 있다면, 전황을 그 순간 뒤집어엎을 비장의 카드가 된다.
그만큼 즉발형 CC기의 명중률 100%가 갖는 의미는 컸다.
‘그리고…….’
이성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게 맞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검증이 안 된 스킬이니까.’
블레이드 아크와 절대 영도 영역은 1001회차에서 이미 써봤다.
그러나 이 스킬만 검증이 안 됐다. 오히려 그래서 이 스킬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검증을 해본 두 스킬은… 고점을 이미 알아.’
처음 사용하는 순간, 스킬의 모든 것을 파악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스킬로 낼 수 있는 최고점의 위력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렇다. 깨닫는다.
나는 이번 생에… 이미 깨달아 버린 것이다.
‘모두 좋긴 하지만, 택도 없다.’
부족하다.
이것들로는 최종 붕괴를 막아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수아를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아주 미세한 희망과 확률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무언가에 걸어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토끼발을 가져가기엔, 당장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에티를 자살시켜서 얻은 의문의 아이템. 토끼발.
마음 같아선 그 아이템을 가져가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지만. 이것 하나론 아무런 쓸모도 없기에 기각이었다.
‘당장 쓸모가 있는 유물이 필요해. 뭐라도 좋으니.’
<토끼발>은 완성체가 정 궁금하면, 나중에 자살런이라도 하면 된다.
필요할 때가 오면 그 때. 에티를 세 번 다시 만나서, 세 개의 재료템을 한꺼번에 파밍하기로 했다.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거기까지 의식의 흐름을 정리했을 때.
마침 시스템 패널의 최종 통보가 감각을 자극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1002번째 영원회귀가 시작되고 있었다.
째깍째깍째깍. 귀에 거슬리는 시계 침 소리가 신경을 갉아 먹었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16일. 오후 4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5일. 오전 11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1일. 오후 2시.]
“…….”
무수한 시간의 편린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내가 살아온 이번 회차의 기억들이다. 역겨움과 씁쓸한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는 찰나.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7시.]
어김없이 눈을 번쩍 뜬다.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방. 익숙한 풍경과 익숙한 냄새가 펼쳐졌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7시.]
이번에도 시공 회귀는 성공했다.
…성공하고 말았다.
“후우.”
나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그것을 실감했고, 한숨으로 어지러운 감정을 달랬다.
어깨와 다리가 천근처럼 무겁다. 피곤함이 쏟아졌다.
‘잠이나, 자자.’
털퍽.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침대에 엎어졌다.
1001번 반복했던 졸음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쏟아진다. 저항할 생각도, 힘도 없었다.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몽롱한 정신 속에서 빠르게 흐려져 가는 의식.
문득 어렴풋한 시야 너머로, 새하얀 뭔가가 흐느적거리는 게 보인다.
사라락, 사락. 내 볼을 간지럽힌다.
“…빠… 빠아~! 일어 나아… 아빠아~!”
앙칼진 애새끼 목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 듯했다.
아빠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한테 연신 일어나라고 종용하는 중이다.
근데 그 목소리가, 꼭…….
‘…이브, 같군.’
벌써부터 꿈이라도 꾸는 건가.
아님, 그냥 기분 탓이냐. 가위라도 눌리는 중인가.
“…아빠아~! 일어나아~!!”
그것도 아니면, 우주 명작 영화 클레멘타인을 너무 감명 깊게 봤나.
몇 가지 가정들이 뇌리를 스쳤고.
“스으으…….”
이내 머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1002번째 낮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