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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4화 (74/235)

74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0)>

예배당 끝자락에 긴 원형 복도가 나왔다.

2층으로 이루어진 회랑이었다. 회랑 한쪽 벽면엔 수많은 문들이 달려있었고, 그 앞에 이름이 적힌 팻말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편 길목의 귀퉁이에 숨어 유심히 살펴봤다.

‘저 중 몇 개가 간부실일 텐데.’

전생들과 다를 것은 없었다.

수많은 경비 병력이 긴 원형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특히 간부실 주변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하다.

“…….”

내 눈은 경비병들의 어깨와 목, 그리고 볼과 등을 훑었다.

문양. 뱀과 십자가가 엮여있는 기괴한 문양이 신체 어딘가에 문신되어 있다. 던전교 교도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이다.

다만 한 가지, 전생과 확연히 다른 점도 있었다.

‘…투구?’

경비병 중 일부가 투구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다.

피처럼 새빨간 색. 생김새는 모두 똑같은 걸 보아, 의식적으로 맞춰 쓴 것임은 틀림없다.

그 생김새를 유심히 눈에 새긴 결과.

“레드 저거너트.”

나는 곧 깨달았다.

그것들은 조잡하지만, 분명히 혈천갑의 투구를 모방한 생김새였다.

‘왜지.’

불쾌한 의문에 휩싸인다.

저 투구가 왜 여기서 보이는 거지, 나는 놈들에게 초상권이나 저작권을 팔아넘긴 기억이 없는데.

이유를 찾아보던 나는,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레드 저거너트. 던전교…….”

두 개체에서 곧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우상, 숭배의 대상. 레드 저거너트의 우상성이 던전교에게… 교주 놈의 약팔이에 이용당했구나. 그것을 직감했다.

나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X발, 족같은 새끼들이…….”

이번 생의 어느 때보다도 분노했다.

주변의 공기가 낮게 떨릴 정도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외부로 표출되었다.

바짝 붙어있던 이브가 흠칫 놀라서 몸을 떨 정도였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인데.’

던전교 놈들이 나의 노력을 비웃고 있다.

수아를 위해 내가 벌였던 일들, 내 심각한 고민의 결과를 제들 잇속에 이용해 먹고 있다.

이렇게 화가 나본 것도 오랜만이다.

“죽여버린다.”

지금까지는 빛바랜 의무감이었다면, 이번엔 뚜렷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초토화를 시켜주겠다. 던전교.

‘무기는…….’

나는 후드 집업과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찰그랑. 동전 몇 개와 다용도 주머니칼이 나왔다.

언제 넣어놨던 거지, 잘 모르겠다. 자기도 모를 정도로 오래됐다는 건 확실하다.

“뭐, 이거면 충분하지.”

마력을 사용하는 무기군은 쓰지 않는다. 감시망에 걸릴 우려가 있다.

그래서 인벤토리도 열지 않는다. 인벤토리 자체가 아공간. 마력 그 자체로 이루어진 온오프형 아이템 같은 것이다.

어쨌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브에게 흘깃 시선을 뒀다.

“이브.”

“…….”

“지금은 대답해도 된다.”

“푸하! 으응. 아빠!”

허공에서 이브의 숨넘어가는 대답이 들려온다.

조용히만 하라니까 숨은 왜 참고 있냐.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이해하길 포기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녀에게 조용히 통보했다.

“여기 잠깐만, 꼼짝 말고 조용히 있어.”

“으응? 아빠는?”

“나는 잠깐 할 일이 있다. 내가 사라지면 다시 숨바꼭질 시작하는 거다. 알겠지?”

“응. 알았어! 나 조용히 있을게. 흡!”

이브가 다시 숨 참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러다 숨 막혀서 죽는 거 아니겠지. 터무니없긴 하지만, 뭔가 이브라면 그럴 법도 해서 살짝 불안해진다.

어쨌든 차칵! 나는 접혀있던 주머니칼을 곧게 폈다.

“다녀온다, 이브.”

푸스슥!

미미한 어둠 속, 내 신형이 복도를 순식간에 가로지른다.

어떤 스킬도 가미하지 않은 순수한 피지컬. 민첩 99스탯에서 나오는 가공할 은밀성과 기동성이다.

“…응?”

문득 붉은 투구를 쓴 경비원 하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내 인기척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그리고 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초상권 침해, 저작권 침해.”

난 이미 놈의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고소하러 왔다. 개새끼들아.”

서걱!

서늘한 절삭음. 경비병의 목이 투구째로 솟아오른다.

터벅. 양손으로 분리된 몸과 머리를 각각 낚아챈다. 시체가 나뒹구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는다.

“전부 사형, X발.”

판사도 법원도 다 쳐 망한 시점이다. 판결은 내가 직접 내린다.

전원 즉결 처형. 당사자와 원만히 합의됐다.

‘바로 다음.’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 틈에 이 구역의 경비병을 모두 정리하겠다.

‘이건 대충 치워두고.’

목 잘린 경비병의 시신은 복도 구석으로 팽개쳐 놨다.

어차피 바닥에 흥건한 피 때문에 곧 발각되겠지만, 당장 시체가 나뒹구는 것보단 덜 눈에 띄겠지.

경비병 전원 몰살, 그때까지의 시간 벌이면 충분하다.

“후우.”

심호흡하듯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내뱉지 않았다.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지면을 한 번 더 박찼다.

투학! 단숨에 신형이 상승한다.

유령처럼 홀연하고 고요하게, 회랑의 하얀 벽을 타고 달려 올라간다.

“…….”

회랑 2층 난간을 붙잡고, 손목의 스냅으로 가볍게 넘어갔다.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우측 복도 끝자락, 두 명의 경비병이 포착된다.

‘저긴가?’

긴가민가하지만, 일단 죽이고 보기로 했다.

스스스! 수십 미터 떨어진 복도의 반대편, 우두커니 서 있는 경비병들의 신형이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경비병들은 끝까지 내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윽!”

“크웃!”

피핏!

분수처럼 쏟아지는 두 줄기 선혈, 하얀 벽이 시뻘건 핏방울로 물든다.

아찔한 단말마, 그것이 경비병 둘의 최후였다. 비명조차 내가 틀어막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흐음.”

도려내진 목에서 피를 콸콸 쏟는 경비병들. 나는 무심하게 잠깐 내려다봤다.

그중 한 놈의 투구를 벗겨냈다. 허옇게 질린 채 눈을 까뒤집은 맨얼굴이 드러났다.

쯧. 나는 조용히 혀를 찼다.

‘일반 신도. 꽝이다.’

던전교 놈들에겐 제들 나름의 계급이 있다.

일반 신도와 열심 신도, 장로 그리고 교주까지. 총 네 개의 계급.

창설한 지 10일도 안 된 종교 주제에 뭔 계급인가 싶겠지만. 오히려 10일도 안 된 조직이기에, 더더욱 통솔력을 위해 계급이 필요한 거다.

“얼굴과 어깨, 목. 교주는 가슴이었던가.”

놈들을 구별하는 지표는 바로, 문신의 위치다.

일반 신도는 얼굴, 열심 신도는 어깨, 장로급은 목이나 쇄골. 그리고 교주는 가슴 한복판에 던전교의 마크가 문신으로 박혀 있다.

‘원래 이건 놈들끼리만 아는 극비 정보지만…….’

뭐, 전생에 던전교 신도였던 적도 있는 마당이다.

극비가 대수인가. 교주만 알아야 할 사실들도 이미 줄줄이 꿰고 있다.

“우선 장로급들부터 죽여야지.”

장로급은 말이 장로급이지, 딱히 신앙심이 투철해서 장로인 게 아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그냥 던전교 무력의 중추. 고위 헌터라는 이유로 각종 우대를 약속받고, 잇속에 따라 던전교에 가입한 놈들이다.

‘그래서 장로들부터 죽여야 하는 거고.’

직접 진입하고 안 사실인데. 지금 이 예배당 전체에 마력의 발생을 감지하는 스킬이 깔려 있다.

술식의 견고함이나 정교함을 봐선 최소 A급 헌터. 장로급이 분명하다.

진형(陣形) 술식은 디스펠로 깰 수 없다. 술자를 찾아내 죽여야만 한다.

‘장로의 방을 지키는 경비병은, 최소 열심 신도급.’

어깨에 문신이 박힌 경비병을 찾아내야 한다.

전에 무법지대 상가에서 만났던 화염계 캐스터. 그놈도 어깨에 문신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던전교의 열심 신도였겠지.

“…가볼까.”

그러니까 그런 놈들을 찾아내면.

그놈이 지키던 방이, 내 최우선 타깃이다.

* * *

지금부터는 잠입과 수색의 시간.

진득한 인내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놈들이 전생마다 항상 같은 방에 묵어 줬으면 참 좋았겠지만, 인원 구성이 매번 달라지는 만큼 장로들의 개인실 위치도 항상 달라지곤 했다.

‘육감이 좋은 놈들만 적었으면 좋겠네.’

감이 좋으면 암살하기 불편하다.

그런 개인적인 바람을 떠올리며, 타탓! 순식간에 2층의 회랑을 휩쓸기 시작했다.

푸직, 뿌드득! 핏줄기가 터져 나오고, 어김없이 사람 머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흩어진다.

“……!”

“……!!”

경비병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다.

반파된 예배당의 회랑이 새빨간 선혈로 점철되어 갔다. 시체가 순식간에 늘어 간다.

그렇게 살육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여기다.”

유난히 경비가 삼엄하다 싶은 회랑의 한구석.

몰살시킨 경비병들의 어깨에 하나 같이 던전교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던전교의 열심 신도들이 분명했다.

기념적인 첫 번째 장로의 방. 나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음.”

철컥철컥.

돌아가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잠겨 있었다.

피식. 쓴웃음을 슬쩍 머금었다.

‘뭐, 그렇겠지.’

차칵. 나는 피로 젖은 주머니칼을 들어 올렸다.

찐득하게 엉긴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아낸 다음, 칼날을 문고리에 쑤셨다.

“…….”

차칵차칵.

한동안 집중해서 칼날을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아예 락픽을 갖고 왔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수아랑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챙겨오는 걸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문 따는 것도… 너희들이 알려줬었나, 던전교.’

내가 이걸 왜 알고 있나 했더니, 여기서 배운 거였다.

한참 옛날의 전생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아와 함께 던전교 소속이었을 때가 있었다.

이 락픽질은 그때 배운 거다.

‘밥벌이 해오라고 약탈조에 소속돼서, 억지로 배웠지.’

던전교는 사실상 종교의 탈을 쓴 무장도적 집단.

그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때나마 소속돼 있었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난세를 틈타 종교로 사람을 홀리고, 약탈과 폭동으로 마침내 대성한다니. 21세기 럭키 황건적이 따로 없네.

‘그렇게 배운걸, 던전교 본부 소탕할 때 제일 유용하게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상황에 조소가 멈추지 않는다.

어느 순간 철컥, 격철음이 울렸다. 나는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이. 천천히 문이 열렸다.

“…….”

널찍한 개인실이다.

시시각각 종말로 향해가는 세상치곤 호화스러운 침대 한복판에 30대 중반 정도의 남자가 세상모르게 자고 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컴컴한 새벽, 자는 게 정상인 시간이긴 하지.

“잠꾸러기시네, 장로님.”

남자는 초면이었고, 나는 혼잣말을 속삭였다.

그러고 보면 세상 참 넓고, 헌터는 더럽게 많단 말이야.

‘이 좁은 서울 땅덩이에서… 아직도 초면인 사람이 나오니.’

희미하게 조소를 머금는 한편.

뿌드득! 나는 자연스럽게 주머니칼을 놈의 목에 쑤셨다.

남자가 눈을 번쩍 뜬다.

“끄…웁!!”

벌겋게 충혈된 눈알이 뒤룩뒤룩 구르고, 갑자기 찾아온 격통에 온몸을 부르르 떤다.

나는 놈이 신음을 지르지 못하도록 입부터 틀어막았다.

“쉿.”

“……!!”

손가락 사이로 침과 핏물이 뒤섞여 울컥 솟아난다.

저항해도 소용없다. 손바닥을 더욱 세게, 머리통을 부숴버릴 듯이 짓누른다.

찍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컥.”

이내 남자는 절명했다.

버둥거리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진다. 나도 꽉 누르고 있던 왼손에 힘을 뺐다.

“후우.”

멈췄던 숨을 한 번에 쏟아냈다.

뿌득, 칼날을 뽑았다. 장로의 목에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피가 콸콸 솟았다.

‘다음.’

시체엔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덜컹. 문을 닫고 다시 복도로 나왔다. 내가 죽인 경비병들로 피투성이가 된 복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목격자만 없으면, 그게 암살이지.”

피식.

힘아리 없는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 복도를 유유히 걸어갔다.

본격적인 암살은 이제 시작이다.

* * *

짝짝.

짝짝짝.

나는 연신 박수를 쳤다.

“야, 야. 일어나 봐라.”

주목을 끌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아무래도 박수와 호명만으론 안 될 성싶다.

입맛을 다시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쓰읍.”

결국 나는 다시 한번 양손을 들어 올렸고.

눈앞의 의자에 묶여있는, 반라의 돼지 새끼 뺨아리를 미친 듯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야, 새꺄. 일어나 보라고.”

짝, 짜짝! 쫘라라작짝!

아무리 깊이 잠들었어도, 양 뺨을 쉴 새 없이 울리는 타격감에는 버티지 못했다.

번쩍! 돼지의 투실한 눈꺼풀이 드디어 뜨였다.

“어, 으어! 아, 아파! 아프잖아! 누구야! 어, 어떤 새끼야?!”

투실한 중년 남자… 던전교 교주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

혼란으로 벌벌 떨리는 시선이 사방을 훑는다.

“어, 어……? 이게, 이게 뭐야!”

놈은 곧 자기를 결박한 밧줄과 의자를 봤을 거고.

자신이 램프 등 하나만 불길하게 깜빡이는 어두운 골방에, 팬티 바람으로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내 놈의 표정은 당황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너, 이 새끼……!”

마침내 교주의 시선은 내게 향했다.

램프 등의 어스름한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놈을 내려다보는 내가, 놈에게 포착된 것이다.

“이, 개새끼야! 너, X발!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이딴 짓을!!”

“던전교 교주겠지. 아니냐?”

흠칫.

당연하다는 듯이 정답을 말하자, 놈이 몸을 움츠린다.

이내 놈의 얼굴엔 사특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알았으면 X발아! 이거 당장 풀어! 지, 지금이라면 용서해주마!”

“싫다면, 어쩔 거냐.”

“이…새끼가!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던전교 장로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으냐?! 곧 나를 찾으러,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해올……!”

“그렇군, 뭐 믿고 그리 깝치나 했더니.”

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슬쩍, 손가락을 들었다. 골방의 구석탱이를 가리켰다.

“얘네들 말이냐.”

내 손가락을 따라 교주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놈의 멍하니 풀려있던 두 눈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흐, 으아!”

교주는 얼빠진 탄성을 잠깐 흘렸고.

이내 골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거기엔 내가 손수 하나씩, 일일이 멱을 따준 장로들의 시신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뭐야… 너, 이 새끼……! 대, 대체, 대체 뭐야!!”

남자 24명.

그리고 여자 8명.

총 32명, 전원 몰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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