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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1화 (71/235)

71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7)>

다음 순서는 그림자 사냥꾼.

혈액 사냥꾼이 있던 공사장에서 남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를 직진했다.

낙후된 골목길의 한복판, 나는 그림자 사냥꾼의 징조를 발견했다.

“여기 어딘가에 있겠구만.”

골목길의 짙은 그림자마다 시커먼 가시 같은 것이 삐죽삐죽 돋아났다.

변화무쌍하게 꿈틀거리는 그림자의 가시들이, 마치 아름드리나무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마치 그림자로 우거진 숲 같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골목의 심부를 향해 걷길 잠시.

나는 그림자 사냥꾼과 접근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변 풍경이 점점 변해갔기 때문이다.

“흐음.”

골목의 그림자를 뒤덮은 가시는 더욱 빽빽해졌고, 가시 끝자락마다 시체와 찢긴 살점이 꽂혀 있다.

흡사 시커먼 나무에서 고깃덩어리가 열린 듯하다.

“숨바꼭질 끝났다, 사냥꾼.”

어느 순간, 나는 중얼거렸다.

파지직! 번개를 인챈트한 사복검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나와.”

콰콰쾅!

사복검이 구불텅하며 내 주변을 산산이 조각냈다. 골목길의 비좁은 벽들이 형체도 없이 허물어진다.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파파팍! 문득 그림자 가시들이 전후좌우로 쏟아진다.

“귀찮게 하지 마라.”

카카캉!

사복검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가시들을 막아냈다. 그 와중에 수비를 뚫어낸 가시 몇 개가 혈천갑을 스쳤다.

“소용없다고.”

하지만 내 말대로였다.

키잉! 키키킹! 아무 소용없다.

표면에 약간의 흠집만 일어났을 뿐, 데미지는 일절 없었다.

―…큭, 크큭.

문득 흙먼지 속에서 짤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스. 스산한 소리와 함께 골목 한편이 시커멓게 물든다. 퍼져나가는 곰팡이처럼, 어둠이 점점 세를 넓히며 꿈틀꿈틀 몸부림쳤다.

그 중앙에서 사람의 형상 하나가 솟아났다.

―비슷한 냄새가 난다 싶었더니…….

비쩍 마른 장신의 남자.

온몸이 시커멓고 질척거리는 점액질의 어둠에 감싸여 있다.

놈은 질척거리는 어둠 속에서 안광을 빛냈다. 이내 새빨간 시선이 히죽, 호선을 그렸다.

―사냥꾼, 너도 사냥꾼이군. 나 같은 사냥꾼을 사냥하는, 사냥꾼.

뭔 사냥꾼이 어떻다고 지랄 부르스를 추는데. ‘사냥꾼’이라는 말을 하도 반복해서, 게슈탈트 붕괴가 올 것 같다.

내 직업이 일단 D급 ‘헌터’니까, 나는 사냥꾼이 맞긴 하다.

―너는 강하다. 그렇지?

문득 그림자 사냥꾼이 내게 물어온다.

나는 몬스터들에게조차 거짓말을 안 하는 편이다.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나보다도 강하군. 그렇겠지?

“그럴 거다.”

―나를, 사냥하러 왔나?

“잘 아네.”

―긴 사냥의 끝에, 이젠 사냥당하는 건가. 그래, 어쩌면… 네놈이야말로…….

“거 X발, 아가리 좀 합시다.”

과묵하게 생겨갖고 주둥이가 쉬지 않는 그림자 사냥꾼.

듣기 괴로운 중2병 멘트는 그쯤 해줬으면 좋겠다. 사복검을 길게 휘둘러 놈의 아가리를 강제로 봉했다.

콰드득! 번개를 머금은 사복검이 사냥꾼의 복부에 적중했다.

―…아.

그림자 사냥꾼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놈의 시선이 배에 박힌 사복검에 향했고 이내, 쿠르륵. 신형이 슬라임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림자 사냥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성미가 급하구나, 붉은 사냥꾼.

쉬쉬쉭!

후방에서 가시들이 쇄도하며, 그림자 사냥꾼의 목소리를 싣고 왔다.

딱히 피하지 않았다.

“…쯧.”

콰콰콱!

그대로 등짝 한복판에 수십 개의 가시 세례를 얻어맞았다.

나는 짜증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개짓거리, 그만하라고 했지.”

단 하나의 가시도 혈천갑을 뚫지 못했다.

이놈과 만난 게 벌써 몇 번째인데, 놈의 정확한 전력은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다.

어차피 안 뚫릴 걸 아니까, 그냥 맞아준 거다.

“말 안 듣는 애새끼는, 맴매가 답이지.”

콰직!

후방을 습격했던 그림자 가시들을 오히려 내가 움켜쥐었다.

놈이 사용하는 기술은 그림자, 기본적으로 어둠 속성. 그러면 당연히, 그에 상극인 속성은?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빛이다.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자연계 최강의 섬광.

“따끔할 거다.”

빠지지직!!

순식간에 모여드는 나선 번개를 그림자 가시로 흘려 넣었다.

―커헉!!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구불텅!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질척거리던 무언가가, 춤추는 번갯불에 따라 크게 출렁거렸다.

―끄… 우우우욱!!

그림자 사냥꾼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고작 이 정도로 그림자 사냥꾼은 죽지 않는다.

놈은 지금 간을 보고 있다.

“짜릿짜릿하지. 응?”

치명상은 못 주겠지만, 꽤나 아플 것이다.

반격의 가능성을 알았으니, 그림자 가시로 원거리 견제조차 위축되겠지.

뭘 망설이냐. 어서 네 얄팍한 밑천을 드러내라, 사냥꾼.

―이놈……!

드디어 그림자 사냥꾼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직후 놈을 둘러싼 어둠의 형상이 질척거리며,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농락하고 있구나, 나를.

쿠르륵, 쿠륵.

사방에서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뭉쳐지고, 점점 더 비대해진다. 이내 거대한 사람의 형상이 된다.

―감히, 이 나를……!

그림자의 거인.

주변 민가들이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나는, 끝까지 저항하겠다. 사냥당하는 사냥감답게.

거대화한 그림자 사냥꾼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쿠구구구! 놈이 날카로운 손톱을 펼쳐, 그대로 나를 찍어누르려 했다. 햇빛이 손바닥에 가려지며 주위가 까마득하게 어두워진다.

―사냥꾼, 죽어라……!

거대하고 시커먼 손바닥이 신의 심판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뭐. 가위바위보 하자고?”

그래, 하자. 가위바위보.

그림자 사냥꾼, 너는 그대로 보를 내라. 내가 특별히 져주겠다.

내가 내밀 것은, 주먹이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콰아앙!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주먹을 쳐올렸다.

굵고, 거대하며, 압도적인 기세의 혈폭풍. 하늘 높이 수직으로 용솟음친다.

―무, 무슨……!

그림자 사냥꾼의 당황 어린 탄성. 하지만 이미 늦었다.

콰드드득! 새빨간 기류가 그림자 거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팔뚝을 순식간에 찢어발긴다.

―크우욱?!

그럼에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는다.

마침내 오른쪽 몸통을, 완전히 아작 내버렸다.

―크하아아악!!

거인이 흐리멍텅한 안광을 부릅떴다.

휘청. 그림자 거인의 신형이 크게 흔들리나 싶더니, 이내 형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어떻게, 이런… 단, 단 한 방에… 내가……!

쿠우웅!

그림자 거인이 결국 무릎 꿇었다.

대파된 상체를 바닥에 엎어놓은 채, 미친 듯이 꿈틀거리고 꿀렁거린다. 놈을 구성하던 그림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아.

모든 그림자가 흩어지고, 이내 그림자 사냥꾼의 본체만이 덜렁 남았다.

나는 천천히 사냥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빌빌대는 놈의 앞에 가만히 섰다.

“…….”

놈을 슬쩍 내려봤다.

고목나무처럼 바싹 마르고 야윈 육체, 푸석거리는 머리칼과 동태 같은 눈동자.

그림자를 두르지 않은 그림자 사냥꾼은, 실로 초라한 몰골이었다.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좀 진부한 감이 있어.”

1차전에서 개털리고, 수틀리니 2차전에 거대화라니. 2000년대 유아용 전대물 빌런이냐?

요즘은 파워레인저 악당들조차 다양성을 추구하던데. 본인의 캐릭터성에 대한 고민이 좀 부족한 게 아닐까?

“너무 한물간 클리셰 아니냐고.”

씨불이는 꼬라지도 가관이다.

사냥감답게 저항한다? 약해서 처발려 놓고 뭔 가오를 그렇게 잡는지 모르겠다.

“중2병에 소름 돋아서,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야.”

다른 건 모르겠고, 만나서 불쾌한 사냥꾼 순위를 매긴다?

이 새끼는 단연 탑 티어다.

―아… 아, 아아…….

그림자 사냥꾼이 내게 팔을 뻗어온다.

힘을 소진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지, 바싹 마른 입을 연신 뻐끔거렸다.

뭔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나는 딱히 이놈과 더 대화할 생각이 없다.

“지금은 좀 바빠.”

퍼억!

말아 쥔 주먹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놈의 머리통은 속절없이 아작 났다.

손가락에 묻은 건더기들을 털어낸 뒤, 나는 자조 어린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말해라, 다음에.”

중의적인 표현을 담은 회심의 농담이었다.

내가 말한 다음은,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다음 회차를 말한 걸 수도 있다.

혹은 지옥에서 다시 만나자는 소리가 될 수도 있겠다.

“…쯧.”

물론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들어도 이해해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며, 혼자 실실 웃었다.

‘이제 남은 놈은…….’

단 하나.

갈고리 사냥꾼뿐이다.

* * *

갈고리 사냥꾼은 내 기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곳에 은거해 있었다.

―네가 다가오는 것을 진작에 느꼈다.

놈은 권태에 찌든 눈동자에 나를 담은 직후.

내 기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말로 서문을 열었다.

―이미 나 외의 모든 사냥꾼을 죽여버렸겠지.

놈은 다른 사냥꾼들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한 외관이다.

적갈색 꽁지머리의 우락부락한 남성. 붉은 눈동자 아래론 검은 복면을 써서, 하관을 전부 가리고 있다.

―보진 않았지만, 여기서 모두 느꼈다.

복장은 ‘사냥꾼’의 정석인 털가죽 외투 차림.

그리고 ‘갈고리 사냥꾼’답게, 양손에는 갈고리가 달린 사슬낫을 하나씩 들었다.

―날 가장 마지막에 사냥하는 이유는 뭐냐.

스르릉. 갈고리 사냥꾼이 양손의 사슬낫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게 연신 질문해 왔다.

―내가 사냥꾼 중 가장 약하기 때문인가?

약간의 굴욕감이 녹아있는 질문이었다.

이것은 몇 번이나 반복돼 왔던 지겨운 문답이다. 놈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반대다.”

―반대라고?

여기선 사냥꾼이 바라는 대답을 해줘야 내게도 이득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겨운 대답으로 응수한다.

“네가 1 대 1 대인전은 가장 강하지. 다만 사냥의 우선순위가 밀린 거다.”

―그건 어째서냐.

“인간 사냥에 가장 열의가 없으니까.”

―…….

“그래서 너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인명 피해가 가장 적은 사냥꾼이다. 네가 마지막인 이유는 그거다.”

나는 갈고리 사냥꾼의 붉은 눈을 빤히 쳐다봤다.

사냥꾼도 나를 응시하다, 이내 히죽. 복면 안에서 미약한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사냥꾼, 네 눈은 나와 닮았군.

나 역시 전생부터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권태와 실의, 절망과 공허가 뒤섞인 끈적하고 어두운 시선. 나는 갈고리 사냥꾼의 눈동자 밑바닥에서 이따금 내 모습을 보곤 한다.

―네 말이 맞다. 붉은 사냥꾼.

문득 갈고리 사냥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놈은 권태에 빠진 목소리로,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지쳤다. 사냥에서 더 이상 의미를 못 느낀다.

“그러냐. 좋은 자세다.”

―무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를 사냥꾼으로서 죽게 해줄, 내 목숨을 위협할 사냥감을.

“더더욱 훌륭하구만.”

그래서 여기가 어디냐면, 교외의 작은 납골당이었다.

갈고리 사냥꾼은 내가 오기 직전까지 납골 된 항아리 선반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단 하나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여기가 네 무덤이다. 갈고리 사냥꾼.”

파지직!

사복검에 번개의 분노를 인챈트, 채찍처럼 늘어뜨렸다.

그에 맞서듯 갈고리 사냥꾼은 복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귀밑까지 길게 찢어진 입을 쩍 벌렸다.

―그, 우우욱……!

소름끼치는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한편.

쿠르르륵, 철그렁! 놈의 입속에서 혓바닥 대신, 긴 사슬낫이 하나 쏟아졌다.

―준비는 끝났다.

놈은 사슬낫이 연결된 머리를 시계추처럼 까딱거렸고.

총 세 개의 사슬낫을 바닥에 질질 끌며 접근해왔다.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번득. 놈의 붉은 시선에 흉한 적광이 서렸다.

지금까지 모든 사냥꾼들이 그랬듯이.

―나의 장송을 도와다오. 붉은 사냥꾼이여!

어느 순간, 투학!

놈이 지면을 박차고 순식간에 쇄도한다. 세 개의 사슬낫이 각기 다른 궤도로 내 급소를 노려왔다.

나도 그에 맞서 사복검을 휘둘렀다.

“……!”

카카캉! 세 번의 금속음.

어지러운 궤적들이 연신 충격파를 터뜨렸고, 납골당의 공기를 거칠게 할퀴었다.

마지막 사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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