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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0화 (70/235)

70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6)>

―끄레레레렉!

―캬아아아악!!

시체 인형들의 비명.

번개가 살을 태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졌다.

“귀찮은 새끼들 같으니.”

푸직, 뿌드득!

사복검을 휘둘러 전방의 인형들을 빠르게 정리했다. 시야가 확보되면, 조금씩 가면 사냥꾼을 향해 전진한다.

‘지금.’

촤르륵!

그러다가도 순간적으로 사복검을 늘어뜨려 기습을 감행했다.

뱀처럼 유려하고 신속한 궤도로 날아가는 칼날 채찍. 푸각! 거인의 어깨에 명중한다.

―그오오오오!

대형 시체 인형이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에 떤다.

하지만 나는 혀를 차며 사복검을 회수했다. 정작 노렸던 가면 사냥꾼은 이미 낌새를 눈치채고, 다른 거인의 어깨로 갈아탄 상태였다.

“…잽싸긴, 더럽게 잽싸네. 진짜로.”

그러면 다시 첫 프레이즈로 돌아간다.

좀 더 멀찍이 후퇴한 가면 사냥꾼을 향해 조금씩 진격한다. 그걸 막아서는 수많은 시체 인형들을 자르고, 지지고, 죽인다.

―퀘에에에엑!!

그리고 그것의 반복, 또 반복.

계속해서 그 과정을 되풀이한다.

―키에아아악!

―끄엑! 캬아아악!!

다시금 시체 인형들의 비명이 울린다.

후두두둑, 새카맣게 탄 살점. 사복검에 썰려 나간 육편들이, 내 아래로 한가득 쌓여나갔다.

‘이렇게 시간 끌리면 안 되는데.’

가면 사냥꾼의 시체 똘마니들은 여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이러는 와중에도 동료들을 꾸역꾸역 늘려가고 있다.

‘시간은 가면 사냥꾼의 편이다.’

인근 사람들을 습격해서 똑같은 시체로 만들고, 얼굴 가죽을 기워 붙여 부활시킨다.

그래서 놈들의 물량이 끝이 없다. 이 싸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다.

‘벌써 15분째…….’

이건 좋지 않다.

이놈 하나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다.

앞으로 사냥꾼을 세 마리나 더 죽여야 해서 최대한 마력을 온존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가 없다.

“좀 적당히 발악하고 죽어주지 그러냐.”

나는 가면 사냥꾼을 향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철컹!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합쳤다. 그리고 주먹을 있는 힘껏 쥐었다.

“서로 편하고 좋잖아. 응?”

키이잉!

칼날과 주먹을 중심으로, 새빨간 혈류가 나선을 그리며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스파이럴 블러드]

콰아아앙! 벽력같은 굉음. 내뻗은 주먹에서 날카로운 혈류의 폭풍이 쏟아져 나간다.

이번 건 많이 피하기 힘들 거다. 가면 사냥꾼.

“……!”

콰드드득!

혈사포는 직선상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것은 내 목표물이었던 대형 거인과 가면 사냥꾼도 마찬가지였다.

―끄… 헉……!

처음으로 가면 사냥꾼이 목소리를 냈다.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명중.’

주먹을 불끈 쥐고 조용히 쾌재를 흘렸다.

놈이 타고 있던 거인은 오른쪽 상반신이 거칠게 뜯겨나갔고, 가면 사냥꾼은 뒤늦게 회피했지만… 다리 한쪽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흐.”

씨익.

놈의 몰골을 보자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이제 도망은 다 쳤구만.”

푸확!

블러드 스트림을 발동. 단숨에 공기를 찢고 가면 사냥꾼에게 접근했다.

순식간이었다.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냥꾼의 목덜미를, 내 오른손이 틀어쥐었다.

―커윽.

피로 새빨갛게 젖은 가면 속, 가면 사냥꾼이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것이 놈의 유언이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콰자자작!

제로 거리에서 몰아치는 나선의 번개 폭풍. 직격당한 가면 사냥꾼의 피부가 연신 폭발하며 핏줄기를 쏟아낸다.

그리고 곧, 격렬하게 떨던 몸이 정지했다.

“…귀찮게 하긴.”

혀를 차는 한편. 시커멓게 탄, 가면 사냥꾼을 대충 던져버렸다.

털퍽, 시체가 한참 동안 추락하다 지면에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놈의 사지가 퍼석거리며 흩어졌다.

―그… 어, 어어억…….

―크우… 그우우우…….

가면 사냥꾼이 죽자, 시체 인형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새빨갛게 타오르던 안광이 천천히 사그라진다. 마치 연료가 다한 라이터의 불꽃처럼.

이내 털썩, 털썩. 하나씩 바닥에 쓰러져 간다.

“후우.”

나는 피에 젖은 오른손 갑주를 대충 털어냈다.

아직 쉴 틈은 없다. 곧장 다음 사냥꾼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스킬 발동: 블러드 스트림]

방향을 설정하고, 허공을 힘껏 한 번 밟았다.

투학!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다음 타깃은 혈액 사냥꾼.

이번에도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 가면 사냥꾼이 있던 곳에서 북서 방향으로 쭉 날았다.

화물 부두 주변의 한 공사장이었다.

시야 끝자락으로 한강이 햇살을 받아 번쩍였고, 그 주위로… 온통 시뻘겋게 피 칠갑이 된 시가지의 전경이 들어온다.

“그새 가지가지 해놨구나, 혈액 사냥꾼.”

처참한 파괴현장이 이어지는 가운데, 도처에 목이 잘린 시체가 한가득하다.

시체들은 하나 같이, 미라처럼 온몸이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

“많이도 박살 내고. 많이도 빨았구만.”

혼잣말하듯이 계속 말을 걸었다.

공사장에 방치된 거대한 타워 크레인의 꼭대기, 내리쬐는 눈부신 정오의 태양 아래.

그녀… 혈액 사냥꾼은 위태롭게 선 채, 나를 빤히 쳐다본다.

―흐응, 나한테 안 들키고 어떻게 올라왔나 했더니.

혈액 사냥꾼의 외관은 소녀였다.

흑발에 양갈래 머리. 앞머리가 덥수룩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송곳니가 유난히 길다.

―아저씨는, 그냥 사냥감이 아니구나?

어깨 위엔 때 타고 해진 거적때기 같은 것을 걸치고 있다.

그 안의 차림새까진 보이지 않는다. 봐도 사실 눈 건강에 좋은 건 딱히 없다.

―날 사냥하러 온… 사냥꾼이구나?

번득.

앞머리 너머로 새빨간 안광이 날 직시했다.

그녀가 거적때기를 들추고 오른팔을 꺼냈다. 그녀의 손이 눈앞에 드러난다.

―근데. 나, 안 죽어줄 거야?

철커덕. 끼기기긱!

사냥꾼의 오른손이 기괴하게 변형되었고, 살점으로 이루어진 총신이 튀어나온다.

흉하게 튀어나온 살덩이들이 꿀렁거리다가, 철컹! 탄피 하나를 팔뚝에서 뽑아낸다.

사냥꾼은 총구를 곧장 내게 들이밀었다.

―우리 내기할까? 누가 죽는지!

타타탕!

세 번의 총성.

새빨간 혈탄(血彈) 세 개가 미간으로 쇄도했다.

딱히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파리 내쫓듯, 세 번에 걸쳐 손사래를 쳤다.

“내기는 무슨.”

티티팅!

세 번의 금속음.

순식간에 휘두른 세 번의 손짓에, 모든 총알이 튕겨 나갔다.

―…허?

혈액 사냥꾼의 표정이 일순 뒤틀렸다.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한 행색이다.

허, 허허. 내뱉었던 헛숨은 헛웃음으로 진화했다.

―뭐, 뭐야? 지금 내 혈탄을, 손으로 쳐낸 거야?

“그래.”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마하 3의 속도로 쳐내면, 손날로 총알을 튕겨내는 것쯤은 간단하지.”

―…으에?

“헛소리다. 죽기나 해.”

쉬리릭!

순식간에 변화를 마친 사복검이 뱀처럼 빈틈을 파고들었다.

혈액 사냥꾼이 어깨를 흠칫 움츠렸고, 이내 거적때기에 숨어있던 왼팔을 꺼냈다.

―흐읏!

키이잉!

사냥꾼의 짤막한 신음과 함께 금속음이 터졌다. 그녀의 왼팔이 변형되어, 붉은 검신의 칼날이 돋아나 있었다.

사복검은 거기에 둘둘 말려 막힌 상태다.

―…으흥, 대충 알겠네.

문득 사냥꾼이 흥미 어린 탄성을 흘렸다.

그녀의 눈은 사복검의 칼날 채찍에 가 있었다. 핥는 듯한 붉은 시선이 연신 칼날을 쓸어본다.

―아저씨. 그 갑옷도 혈질(血質)이구나?

혈질. 피를 매개로 하는 장비들을 뜻한다.

혈질 장비들의 공통적인 특성. 전체적으로 성능이 매우 강력하지만, 사용할 때 본인의 생명력을 소비한다.

그리고 또 하나.

같은 혈질 장비끼리는, 그 강력한 힘이 대부분 상쇄된다.

―그렇구나. 그래서… 혈탄을 쉽게 막았구나?

혈액 사냥꾼이 사용하는 오른팔의 핏빛 총, 그리고 왼팔의 핏빛 검.

저것 역시 자기 피를 매개로 하는, 혈질 장비의 일종이다.

‘전에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년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혈질 방어구인 혈천갑은 혈질 무기의 극상성, 하드 카운터.

지금의 혈액 사냥꾼은, 문자 그대로 내 밥이다.

“투항하면 고통 없이 보내준다.”

철컹!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합치며 선고했다.

아공간 인벤토리를 열었다. 찢어진 균열 사이에서 블라이스의 단검을 꺼냈다.

“이거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지.”

지금만큼은 이 단검을 쓰기로 했다.

사복검 역시 혈질 장비. 내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상성 관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내 말에 사냥꾼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 그게 협상이 돼?

“안 될 게 뭐지.”

―살려주면 모르겠는데, 어차피 죽일 거잖아? 근데 내가 왜 투항을 해?

“…흐음.”

―음. 난 최대한 저항이라도 하다 죽고 싶은데! 노력하다 보면, 어쩌다 살 수도 있잖아?

솔직히 맞는 말이다.

나부터가 저런 스타일이라 반박을 못 하겠다.

아무리 구질구질해도, 결말을 스스로 알고 있어도. 희망의 여지만 있으면 절대 포기를 안 하지.

“굳이 서로 피곤하게 만들긴.”

혈액 사냥꾼을 향해 가볍게 불만을 토로했다.

스르릉. 단검을 사냥꾼의 면전에 겨누었다.

“그래라, 끝까지 개겨보든가.”

―크큭. 그래, 그럴 참이야!

펄럭!

혈액 사냥꾼이 거적때기를 크게 휘날렸다.

그녀가 허리춤을 뒤져 무언가를 꺼낸다. 둥글고, 새빨갛게 젖어있는 무언가를.

―흐흐. 처음부터 필살기를 꺼내야겠지?

사람의 잘린 머리통이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가죽끈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최소 10개 이상. 흡사, 사람의 머리로 만든 포도 같기도 하다.

사냥꾼이 꺼내든 것은, 그중의 하나였다.

―흐흐음.

혈액 사냥꾼이 머리통을 보고 입맛을 다신다.

이내 덥석. 절단된 부분에 입을 갖다 대고, 있는 힘껏 들이마시기 시작한다.

―스읍… 꿀꺽, 꿀꺽.

머리통 묶음은 일종의… 그녀의 비상식량.

말하자면, 영양 드링크를 채워 넣은 수통 같은 것이다.

―…….

꼴깍, 꼴깍.

그녀의 목울대가 연신 출렁인다. 입가에 시뻘건 혈선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사냥꾼의 작태를 딱히 방해하지 않았다.

―푸하아.

머리통 하나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뒤에야, 사냥꾼은 입술을 뗐다.

입가를 피 칠갑한 사냥꾼이 잔인하게 미소 짓는다. 그것을 신호로 그녀의 오른팔이, 기괴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변형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려줄 줄은 몰랐네. 최소한의 견제도 없어?

꾸드득, 꾸르륵.

이내 살점으로 이루어진 대포가 형성된다.

실로 크고 아름답다. 구경이 내 허리만 하다.

―뭐… 강자의 여유 같은 건가?

혈액 사냥꾼은 내게 그것을 겨누었다.

붉은 안광이 전에 없이 강렬하게 나를 쏘아본다.

―그러다 후회해도, 난 모른다?

콰아앙!

사냥꾼이 대포를 발사했다. 나를 향한 직사(直射)였다.

새빨간 대구경 포탄이 붉은 궤적을 그렸고,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날아든다.

“…….”

나는 이번에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오른손을 앞으로 뻗는다. 정확히 포탄의 사선 정면 방향이었다.

사냥꾼의 미소가 한계까지 짙어진다.

―죽어어어엇!!

콰아아앙!

손바닥이 포탄과 닿으며 가공할 충격파가 터졌다. 세찬 혈류의 폭풍이 착탄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아하하하핫!!

쿠구구궁!

공사장의 짓다 만 건물들이 충격을 못 견디고 속절없이 무너진다. 우리가 전투를 벌이던 타워 크레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포탄에서 터져 나온 핏빛 안개가, 자욱한 분진과 뒤섞여 시야를 뒤덮었다.

―…해치웠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피 안개 속을 울렸다.

사망 플래그를 거침없이 꽂고 있다. 죽은 빌런도 벌떡 살린다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대사만 안 쳤어도 내가 죽었을지 모르지.

“할 거 다 했냐.”

서걱! 서늘한 절삭음.

자욱하던 붉은 안개가, 횡으로 예리하게 찢겨나갔다.

“이제 뒤져.”

내가 휘두른 단검의 궤적이었다.

질척거리는 그림자를 머금은 참격이, 안개를 통째로 갈라버린 것이다.

―커흑.

참격의 끝에는 혈액 사냥꾼이 있다.

상체가 대각선으로 깔끔하게 토막 났다. 피를 철철 쏟으며 바닥에 엎어진 그녀가, 멍청한 탄성 끝에 시선을 돌린다.

아직 꼿꼿이 서있는 자기 하체 쪽이었다.

―…아.

털썩. 시간 차를 두고 하체가 쓰러졌다.

자신이 베였다는 것도 지금 겨우 깨달았다는 듯이.

―아하, 하핫.

이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부들부들 떨리던 사냥꾼의 상체에서 힘아리가 빠져나간다. 허공을 주시하는 붉은 안광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냥… 항복이나 할 걸, 그랬네.

뒤늦은 후회를 내뱉는 사냥꾼.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후우.”

나는 한숨과 함께 혈액 사냥꾼의 시체를 지나쳤다. 그리고 지면을 박차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갑주엔, 흠집 하나 추가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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