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3화 (63/235)

63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9)>

“이세라는 죽였냐. 딱 그것만 말해라.”

건조한 한마디에 박상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이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죠?”

“이세라는 어제 자기 죽음을 예측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이 시점엔 너밖에 없다.”

“…….”

“그래서 내가 여기에 찾아온 거다.”

잠깐 박상아가 턱을 어루만졌다.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슬쩍 물어왔다.

“세라 때문에 찾아왔다? 그러면 제가 죽였다고 하면… 그땐 어쩌시려고?”

“사실대로 말해봐. 그리고 직접 체험해 봐라.”

“흐응. 제대로 대답을 못 하시네?”

한층 경계심이 짙어진 박상아.

그것을 호위 병력들도 느낀 것인가. 놈들의 시선도 좀 더 날카로워졌다.

일촉즉발의 침묵이 우리 사이에 감돌았다.

“애초에 말이죠.”

그러자니, 박상아 쪽에서 어깨를 으쓱인다.

그리고 되도 않는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왜 제가 세라를 죽이겠어요? 제가 세라랑 얼마나 친한데!”

꿈틀. 미간이 좁아졌다.

박상아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 오늘 세라를 만난 적도 없는데요? 아까 제가 말했던 건, 한참 전에 만났을 때 세라가 해줬던 말을 떠올린 거였어요.”

“개소리 사절이다.”

되도 않는 거짓말을 단박에 차단해 버렸다.

움찔거리며 말을 멈추는 박상아. 나는 그녀의 면전에 대고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너는 몇 시간 전에 이세라의 주점에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이세라를 모종의 방법으로 설득하거나 협박해서, 제 발로 따라오게 만들었다.”

“흐흥?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라도?”

“주점에 남은 이세라와 네 마력 잔향으로 발자국을 재구성했다.”

“…허?”

“저항흔이 전혀 없었다. 이세라는 습격자를 자발적으로 쫓아간 거지. 이세라가 목숨을 내줄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네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상황이다.”

흠칫. 박상아가 눈썹을 구부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호위 병력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문에 찬 시선이, 한 A급 캐스터 똘마니에게 쏟아진다.

“야. 마력 잔향으로 발자국을 재구성? 그게 가능해?”

“이론상으론 가능합니다.”

“실제로 했다잖아. 실제론?”

“…적어도 제 능력으론,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흐응.”

박상아는 흥미로운 탄성을 흘렸고. 이내 짝짝짝,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것이었다.

“역시 대단하긴 하네요? 레드 저거너트. 이 친구도 나름, 한가락 하는 마법사 헌터인데.”

박상아가 오히려 밝아진 얼굴로 나를 칭찬해 왔다.

그리고 이내 끄덕.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아요. 역시 세라 말을 듣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합격이에요!”

별안간 그런 말을 지껄이는가 싶더니.

이내 번쩍. 박상아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내게 대뜸 손을 내밀어왔다.

“당신. 나랑 같이 레드 스컬을 이끌어보지 않겠어요?”

협력 제안.

아니, 단순한 협력을 넘어섰다. 레드 스컬의 공동 리더 제안이었다.

“…….”

당황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중간 과정만 좀 달랐지. 결과적으론 이런 흐름이 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

“봐요. 지금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잖아요, 레드 저거너트!”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는 박상아.

또 시작이군. 징글징글한 마음에 지금부터 다 엎어버릴까 싶었지만. 일단 끝까지 지껄이게 내버려 뒀다.

이번엔 어디까지 가나 보자. 그런 마인드였다.

“제가 이 조직, 레드 스컬을 만든 이유는 말이죠? 이 망해버린 서울을 다시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들고 싶어서예요!”

박상아의 논지는 대충 이런 식이다.

지금 세상엔 법이 없다. 규칙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이런 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죽이고, 빼앗고, 약한 사람부터 도태돼가는 짐승의 세상이다.

옛날의, 20일 전의 평범한 일상.

그게 사람 사는 거다. 여기엔 사람다운 사람의 삶이 전혀 없다.

“다 같이 뭉쳐서, 다시 일어나는 거예요. 옛날처럼요……!”

그걸 위해 헌터들로만 이루어진 조직을 만들었다.

경찰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진압봉과 권총을 들 듯이. 헌터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서울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 한다.

“레드 스컬은, 새 시대의 자경단인 거죠!”

박상아는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자경단. 그들은 스스로 자경단을 자처하고 있었다.

짐승같이 연명하는 사람들을 바로잡고, 이 세상을 옛날로 돌이키려는 자경단.

“레드 저거너트.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힘을 합쳐 같이 시련를 돌파해 나가자.

그리고 타락해 버린 서울의 수많은 사람들을 계도해서, 옛날처럼 사회의 법과 질서를 되찾아 나가자.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내자.

다시 찾아온 평화의 상징으로, 나라는 영웅을 사용하겠다.

“어때요? 저희는! 약탈을 위해 모여든 수많은 어중이떠중이 새끼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고요!”

굉장한 자부심이 깃든 그 말이 마지막.

박상아는 숨을 고르며 희번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어스름한 조명 속에서 올곧은 시선이 예광을 뿜고 있었다.

신념을 넘어서 맹목. 광기를 느낀다.

“뭔 소린지는 알겠다.”

나는 한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년의 개똥철학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최소 몇 회차 전생은 지나서였지. 어느 날 똥 싸면서 문득 생각해 보니 아리까리, 알 것도 같아지더라.

“우선 이것부터 좀 바꾸고 들어가자.”

지금 중요한 상황인 건 물론 나도 잘 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중요한 상황이라서 더 그렇다. 거슬려서 도저히 못 참겠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바로잡고 가야겠다.

“그, 레드 저거너트 말인데.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마. 내 이름은 한정용이다.”

“예……? 아, 예에.”

내가 지은 히어로 네임이긴 하다만. 막상 저 이름으로 면전에서 불리니 개쪽팔리네. 이렇게까지 오글거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건 그래서 제일 먼저 부탁한 사항이고. 다음은 당연히…….

“그리고 너희들의 제안은, 거절한다.”

완고한 거절 의사의 표시였다.

꿈틀. 박상아의 인상이 대번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저희들만큼 정상적인 단체… 저만큼 정상적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사람을, 본 적 있나요?”

없지. 그런 놈들은 다 뒤져버렸으니까.

정상. 올바른 방법인가. 나는 헛웃음을 픽픽 흘리며 박상아의 면상을 흘겨봤다.

꿈틀. 그녀의 눈 아래쪽이 부들거렸다.

“뭐가 웃긴가요? 레드 저거너트.”

“한정용.”

“…왜 비웃으시죠, 정용 씨?”

자기 이상과 꿈이 비웃음 당했다고 생각한 건가. 많이 화난 기색이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고. 그녀를 똑바로 마주 봤다.

“야. 박상아.”

“네.”

“외팔이들만 사는 세상에선. 팔 두 개 달린 새끼가 병신 새끼다.”

“…예?”

“이미 변할 대로 변해버린 게 지금 세상이다. 옛날의 정상을 부르짖는 너희들은 정상이 아니야. 던전교 이상으로 미친 새끼들이다.”

“…….”

하루라도 더 살아남으려고 발악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길거리에 수두룩하다.

빼앗고, 죽이고, 때로는 협력하다가도, 수틀리면 등쳐먹고. 그렇게 근근이 버텨나가는 민초들이, 지금 서울 내의 생존자 대다수다.

그리고 그게 지금 세상의 정상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삶을 연명하고 있다고.

“20일 전. 평화로운 날은 절대 다시 오지 않아.”

영원회귀를 겪는 나만 빼고.

모두가 그 사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결국의 결국엔 인정하고 적응해 나갔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어나간다.

“그러면 아직 살아있는 놈들은 죄다 죄인이고. 정신이 나간 거냐?”

아니지. 그게 아니야.

변한 세상에 적응 못하고 실성해 버린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얘네들이다.

“오빠. 대체 왜 그래요. 괜찮잖아요……?”

치직. 지지직.

머릿속에 기분 나쁜 라디오 노이즈가 울린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강제로 고막을 짓이기고 뇌리를 쑤시고 들어온다.

수아 목소리다. 떠올리기 싫은 그녀의 기억이었다.

“이런 나쁜 새끼들. 죽여버리는 게 훨씬 좋잖아요!”

목숨을 구걸하던 작은 오누이를, 망설임 없이 야구 배트로 때려죽인 수아가 보인다.

희번득한 시선. 광기에 찬 미소가 보인다.

“우리 식량을 털어가려고 한, 버러지 같은! 개새끼들이라고요!!”

옛날의 한 때. 한참 낡은 전생 때.

박상아의 저 빛 좋은 감언이설에 홀려, 수아와 함께 레드 스컬의 보호를 받았던 적이 있었지.

그때 수아는, 딱 지금 박상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 올바른 일을 했단 말이야……!”

내가 만들어낸 말로.

배드 엔딩의 마지막 한 페이지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빠. 대체, 왜. 왜… 그렇게, 힘들어해요? 그냥, 나는! 나쁜 놈들 죽인 건데……!”

아니다.

나는 그 오누이가 죽어서 힘들어했던 게 아니야.

네가 그들을 자비 없이 패 죽이고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아서다.

그렇게 변해버려서. 나처럼 괴물이 되어버려서. 그게 힘들었던 거다.

“야. 박상아.”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너희는 계속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한참 전의 전생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모르겠다.

너희가 던전교 개새끼들과 다른 점. 대체 뭐냐?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욕구가, X으로 보이냐?”

대다수 사이비 종교들은 희망적인 미래로 약을 팔지. 던전교조차 그랬다.

하물며 저놈들은 과거의 좋은 시절로 약을 팔고 있다. 일말의 발전 가능성조차 없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현시점에서, 내 기준으로.

죄질이 가장 나쁜 종교단체일 뿐이다.

“그리고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파지지직!

사복검의 붉은 칼날에 싸늘한 전류가 감돈다.

어둑한 사위가 번쩍거리며, 혈천갑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춤췄다.

“이세라는 죽었냐. 살았냐.”

저벅. 놈들을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키키킹! 수많은 투척 나이프와, 빛의 화살이 발치에 꽂힌다.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입을 콱 다물고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다.

박상아의 호위 병력들이 어느새 전면으로 나섰고.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있었다.

“…세라. 세라 말이죠.”

벌떡.

박상아 본인도 쓴웃음과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오히려 내 쪽으로 몇 발짝 다가온다. 그리고 우드득, 건틀릿을 끼운 손의 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 당신이 말할 때 말이죠. 좀 놀랐어요.”

“무엇에.”

“정용 씨가 한 말이요. 이미 세라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전히 똑같이 나한테 말했어요. 지금 당신처럼, 제 제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저를 설득하려고 하더군요.”

“…….”

“그렇구나. 지금 우리가 대화하는 장면을 봤던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좀 되네요.”

“…그러냐.”

“네. 그래요. 다 당신 때문이었던 거야.”

박상아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런데 입으론 이를 바득바득 가는 중이다.

그리고 시선엔 여전히, 광기와 맹목이 가득하다.

“너. 너한테 안 좋은 영향을 받아서. 세라가 내 제안을, 거부해 버렸던 거야.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세라가 어떻게…? 그 줏대도 없는 눈깔 병신년이! 감히 날… 거부하겠어!!”

사상범의 눈.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범죄자의 눈이었다.

스윽. 박상아가 천천히 상체를 웅크린다.

“사실대로 말하고, 체험해 보라고 했던가요?”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처럼. 박상아의 온몸에서 정제된 살기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온다.

키잉! 그녀의 주먹에서 샛노란 마력이 응축되었다.

“이제 너도 체험하면 되겠네. 세라가 어떻게 됐는지.”

투학!

정면에 박상아. 측면과 후방으로 호위 병력이 일제히 달려든다.

동시에 투두두두! 멀찍이서 캐스터들이 불꽃과 얼음, 수류의 탄환을 까마득하게 쏟아낸다.

“하아앗!”

“죽어어어!!”

놈들의 기합 소리와 함께 포화가 가까워진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딱히 긴장감은 없다.

“흐.”

오히려 힘 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박상아의 발언으로, 사실상 이세라의 죽음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죽은 이세라를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

“…공감하는 척이라도 해보지 그랬냐. 멍청하긴.”

줏대가 없는 눈깔 병신년이라고? 틀렸다.

이세라는 자기가 죽을 걸 알면서도 옛 절친에게 충언을 남긴 거다. 사상이 뒤틀린 박상아를 목숨 걸고 설득시키려 했다.

이게 줏대가 없는 거면, X발. 이순신도 매국노 소리 들어야지.

“블레이드 아크.”

파파파팍!!

순식간에 갈라지는 11개의 공간. 그리고 거기서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11개의 칼날 채찍.

일제히 박상아와 호위 병력의 급소를 노리고 쇄도한다.

“아니?!”

“이런……!”

아무도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습적이고, 빠르고, 하나같이 상상도 못할 궤도의 습격이었다.

“이만 퇴장이나 해.”

나직이 사형선고를 했다.

푸직, 뿌드드득! 11개의 파육음이 동시에 울린다.

“끄… 우욱!!”

뒤늦게나마 반응한 이도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피하거나 막아내지 못했을 뿐.

파지지직! 칼날에 인챈트된 번개 줄기가 놈들의 육체를 지져댄다.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크아아악!!”

“꺄아아아아악!!”

보스 박상아.

그리고 그녀의 호위 병력 10명까지. 레드 스컬 중추 11명의 전원 몰살.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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