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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58화 (58/235)

58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4)>

내 지나친 평온을 에티도 슬슬 이상하게 느낀 듯하다.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경계가 어렸다.

“뭐, 뭐야. 지금 상황에, 뭐 역전할 방법이라도 있다고? 설마!”

에티도 눈을 부릅뜨고 장기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강하게 휘저었다.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하, 하핫. 허세는! 승기가 완전히 기울었어, 아저씨! 이걸 어떻게 뒤집겠다는 거야 대체!”

던전 마스터 에티. 그녀는 놀이와 게임의 사랑을 받는 자.

세상의 모든 놀이를 보는 동시에 이해하고. 즉시 그 극의에 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생초보가 봐도 나의 패배가 일보 직전인 상황이다.

하물며 이 게임에 통달한 그녀가, 지금 형국을 읽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던전 마스터. 언제부터 판을 읽기 시작했냐.”

나는 별안간 그런 질문을 던졌다.

에티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선은 장기판에 고정하고, 머릿속으론 계속 기억을 떠올린다.

에티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 형국이 언제부터 보이기 시작했냐는 소리다.”

“언제부터……? 으음, 한 10수쯤 전?”

“그래. 그랬지. 앞으로 10수. 그게 네 한계라서 그렇다.”

“한계라니?”

“내가 이기는 유일한 수. 10수 안으론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모든 연산이 끝났다.

손끝을 장기말로 옮긴다. 마지막 하나의 수를 완성시킨다.

“이제.”

타각!

중앙의 졸, 한 칸 전진.

“내가 이겼다.”

장군을 친 것도 아니다. 당장 졸이 위협적인 포지션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선언했다.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진짜.”

에티의 표정도 천천히 굳기 시작한다.

분노. 황당. 그리고 약간의 불안. 내가 억지를 부린다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 ‘설마?’ 하는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아니. 그러지 마라. 깊게 생각할 필요 없다.

이미 게임은 끝났어.

“네 차례다. 던전 마스터.”

“어, 아… 으, 으응.”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에티. 천천히 장기말을 들어 올린다.

타각. 타탁. 한동안 서로가 말없이 장기말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 수 정도를 진행했을까.

“…어?”

문득 에티가 아찔한 탄성을 흘렸다.

부릅뜬 눈이 장기판 위를 뒤룩뒤룩 탐색한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듯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훑어 내려간다.

“슬슬 보이나 보지?”

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고.

퍼뜩! 에티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이걸 보고 있었어?”

“말해도 못 믿을 거다.”

“말하라고. 믿을지 말지는 내가 정해!”

“처음부터다.”

에티의 표정에서 힘이 쫙 풀렸다.

그녀는 멍하니 내 면상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목소리를 흘렸다.

“…처음? 설마 게임 시작할 때부터, 여기까지 읽었다고?”

“정확히는 읽은 게 아니지. 기억해 낸 거다.”

“뭐?”

“이건 노코멘트 하겠다. 말해도 의미가 없어.”

첫 경기. 가위바위보.

두 번째 경기. 한국식 장기.

전생에서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경기. 몇 번이나 토할 정도로 반복했던 내용이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병신 머저리다. 지금 상황은 당연히, 에티와의 수읽기 싸움에서 내가 실력으로 압도한 게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지.’

내가 승리하는 경우.

수많은 수의 흐름 중에서, 거의 유일한 돌파구. 그것을 전생의 언젠가 간신히 찾아냈다.

그 판도의 모든 수. 모든 기물의 움직임. 전생 한 번을 죄다 소모하다시피 해서, 한 판의 대국을 통째로 대가리에 쑤셔 박았다.

대가리에서 림프액 흐를 때까지 달달 외웠다.

‘몇 번이나 이 상황을 반복했는지. 아냐고.’

나는 머저리일지언정 의지박약은 아니다.

옆집 개새끼 뽀삐도 나만큼 반복하면, 징글징글해서라도 이 정돈 외울 거다.

“자.”

타악!

중앙의 졸. 다시 한 칸 전진.

왕의 궁까지… 앞으로 한 발자국.

“7수 남았다. 네 패배까지.”

나직이 사형선고를 내린다.

으드득. 에티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드디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이!”

에티가 전장 구석에서 놀던 차(車)를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안 된다.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내가 압박해 온 졸의 배치가, 어느새 차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다.

“이게… 이, 이게……!”

포(砲)를 움직이려 해본다.

역시나 안 된다. 그사이 모든 기물이 포의 동선에서 빠져있었다.

포는 다른 기물을 넘어서만 움직이는 기물. 포를 움직이려면, 우선 다른 기물의 움직임이 강제된다.

‘물론, 그래선 늦는다.’

이번 수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장 막지 않으면, 다음 내 수에서 그대로 외통수의 포석이 나온다.

그것을 에티도 확실히 알고 있다.

“이… 이건! 이딴 건… 말도, 안 돼!!”

그러나 에티는 끝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예상대로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지. 그녀는 끝까지 의미 없는 발악의 수를 두기 시작했다.

“이, 이러면!”

탁!

에티의 마(馬)가 전진한다.

나는 기억 속의 흐름대로 차를 움직였다. 이미 끝났다. 모든 조건은 맞춰졌고, 다음 한 수로 나는 외통수를 만들어낸다.

초왕(楚王)의 궁으로, 속속들이 서로의 병력이 모여든다.

“으. 흐으윽!”

“X발… X바아알!!”

유리판 위의 인간 기물들은 정확한 형국을 모른다.

그러나 전장에 감도는 일촉즉발의 분위기. 폭발하기 직전까지 응축된 죽음의 냄새.

그것만은 확실히 읽어낸 듯하다.

“이익!”

그리고, 타가각!

에티가 먼저 폭풍전야를 부쉈다. 무리한 돌격 진형을 감행해 온다.

끝까지 소모전을 하다 죽으시겠다? 마음대로 해봐라. 내가 이긴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아.

“장군.”

타악!

중앙의 졸.

마침내 궁에 입성해, 초왕에게 칼을 겨눈다.

“멍군!”

타각!

에티의 차가 졸의 목숨을 삼킨다.

“장군.”

상(象)을 움직여 다시 한번 장군을 친다.

“멍군!!”

에티의 마가 상의 경로를 막는다.

그리고 그 움직임으로, 내 차의 경로가 궁까지 훤히 뚫렸다.

“장군.”

타각!

차를 진격시켜 사(士)를 참살, 동시에 왕의 목을 위협했다.

“멍군!!”

에티의 포가 날아온다. 내 차를 잡아먹는다.

궁 주변에 그녀의 기물이 한가득. 덕분에 왕이 움직일 자리가 없어졌다.

그리고 이것으로, 딱 7수째.

“외통.”

타악!

궁 우측에 있던 졸을 한 칸. 전진시켰다.

“…아.”

에티가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도망갈 구석이 어디에도 없다. 사방이 기물로 막혀있거나, 죽을 자리뿐이다.

졸을 왕으로 먹어버리자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내 고급 기물, 기마병 하나가 그곳을 노리고 있다.

“으, 으아아아악!!”

“죽어! 이 X발! 죽어어어!!”

퍼걱, 퍼버벅!

공중의 유리 전장에선 기물들의 살육전이 한창이다.

외통수까지 이어지는 최후의 난타전. 순식간에 몰아붙이는 바람에, 기물 인간들이 대국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싸움을 중단시켜도 되겠냐?”

나는 그 아수라장을 가리키며 에티에게 물었다.

“이미 2세트는 내 승리다. 한참 전부터 이미 너도 그걸 알고 있었지. 무의미하게 더 이상 죽일 필요가 없어.”

근거는 그것이었다.

에티는 그때까지도 장기판에 시선을 처박고 있었다.

“…….”

간간이 어깨와 목을 움찔거릴 뿐. 미동도 없고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흐.”

에티가 입꼬리를 피식, 올리는가 싶더니.

“푸하! 아하하! 하하하하핫!!”

굽혔던 허리를 쫙 펴고 찢어지는 광소를 흘린다.

휘적, 휘적휘적. 문득 에티가 허공에 손날을 미친 듯이 휘저었다.

“끄윽……!”

“머, 머리… 가아아아악!!”

“끄아아아악!!”

푸확! 퍼버버벅!

유리 장기판 위의 인간 기물들 전부. 그리고 광장의 반수 이상이 일제히 머리가 폭발했다.

사정없는 정산과 집행. 2세트의 끝을 알리는 핏빛 축포였다.

“…끝까지 살아남으면. 내보내 준다 하지 않았던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시선은 끈덕진 피와 살점으로 점철된 유리 장기판에 향해 있었다.

방금의 집행으로 인간 기물은 몰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푸흐흐! 내 맘이야. 내 맘!”

에티는 광소를 멈추고 대답해 줬다.

번쩍. 광기로 희번득한 황록색 눈동자가 가늘게 뜨였다. 그녀가 나를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지그시 쳐다본다.

“원래는 진짜로 살려줄 생각이었어. 근데…….”

“근데?”

“마음이 바뀌었어. 아저씨 때문에.”

“나 때문이냐.”

“그래! 다 아저씨 때문이야! 아저씨가 괜히 짜증나게 말하니까! 그래서 저 사람들이 죽은 거라니까?! 파하하하!!”

개소리다.

내가 어떤 반응을 하든. 무슨 말을 지껄이든. 에티는 반드시 2세트가 끝난 뒤 인간 기물을 몰살시킨다.

심지어 아무 말도 안 해도 마찬가지.

그러면 자길 무시하는 거냐면서 몰살시킨다.

‘저건 그냥 화풀이니까.’

자기가 진 게 화가 난다.

화가 너무너무 나는데 풀 데가 없다. 그러니 사람을 좀 죽여버려야겠다.

그런 지랄 과격한 논리다. 에티는 심지어 이런 자기 생각을 딱히 숨길 생각도 없다.

[게임 스코어 현황판]

삐빅. 문득 전자음이 들려오며 전광판에 글자들이 배열된다.

나는 흘깃 쳐다봤다.

[플레이어 VS 나]

[2 : 0]

[이번 베팅에서 사망한 관객 수: 2,916명]

[이번 베팅에서 생존한 관객 수: 1,453명]

처음엔 1만 명이 넘게 갇혀있던 광장이었지만. 어느새 그 숫자는 10분의 1 정도로 줄어있었다.

살아남은 면면을 훑어봤다. 모두 피로 새빨갛게 절어, 피폐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딜 보고 있어. 아저씨! 나를 봐!!”

콰아앙!

에티가 테이블을 후려친다. 사정없이 박살 나버렸다.

그러나 슈르륵. 에티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시간을 역행한 양 테이블이 원상복구 되었다.

“관객한테 한눈팔 시간도 있어?”

덥석. 에티가 내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지금! 나랑 게임 중이잖아?! 아직, 게임은 안 끝났단 말이야!!”

광기로 번들거리는 에티의 시선이 강제로 얽혀들었다.

히익! 겁먹은 숨소리는 내가 아니라, 내 옆에서 들려왔다.

“이, 이 언니, 무서워! 흐에엥… 아빠아, 이 언니 무서워어……!”

이브였다.

그녀가 에티를 가리키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번득. 그제야 에티의 찡그린 시선이 처음으로, 이브 쪽을 향했다.

“아아?”

에티의 성격은 실로 불도저 같다.

나를 향했던 분노가 그대로 이브에게 전염된다.

“야… 너. 이 존만 한 꼬맹아.”

살기등등한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난 에티는, 그대로 이브의 멱살을 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이브는 눈을 질끈 감고 울음을 터뜨렸다.

“으에에에엥! 아빠아! 이 언니가 나 괴롭혀어어!!”

“닥쳐! X발 닥치라고 존만아! 너, 아까부터 대체 뭐야. 뭔데 이 아저씨 옆에서, 쫑알쫑알 왱알왱알……!”

다그치던 에티의 입이, 콱.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다물렸다.

“…아?”

그녀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온몸을 경련하고, 이빨을 부딪친다.

“으, 아. 으……!”

에티가 허겁지겁 이브의 멱살을 놨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는 양, 필사적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털썩. 이내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지?’

지금. 에티가 이브를 보더니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

이 상황은 나로서도 처음 겪는 상황.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뭔가가 변했다. 이런 전개는 나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빼애애애액! 아빠아아아!!”

이브가 엉엉 울며 내게로 도도도 달려왔다.

덥석.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가만히 머리를 쓸어줬다. 그리고 한편으론,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는 에티를 주시했다.

그러자니 문득. 별안간. 난데없이.

“…귀머거리 토끼. 길을 잃은 까마귀. 목이 잘린 붉은 용.”

에티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다.

흡사 미친년 같은 행색. 그리고 녹음된 전자 음성처럼,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하트 여왕의 눈물. 주저앉은 광대. 그리고 마지막이, 죽어버린 왕의 옥좌…였지?”

퍼뜩!

에티는 얼굴을 확 쳐들고, 부릅뜬 눈을 내게 향했다.

갸웃.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슬쩍 기울어진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아저씨. 전에도… 나 본 적 있지? 엄청 많이.”

그리고 문득. 별안간. 난데없이.

청천벽력의 발언을 내뱉는다.

“…뭐?”

당황했다.

아니. 단순한 당황 정도가 아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뭐라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다.

“으응. 그렇구나. 그런 거였어. 그래. 그랬으면 이해가 가지.”

에티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스윽. 에티는 자기 관자놀이에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었다.

“다음 게임. 할 필요도 없었네? 나, 어차피 지잖아.”

뭐랄까.

후련하면서, 동시에 허탈한 표정을 짓는 에티.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직감했다.

“잠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방금. 그 말 뭔데. 뭐냐고.

아직, 아직이다. 좀 더 자세히. 저 발언들의 의미를 물어야 해……!

강박에 가까운 충동이 몰아친다.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도, 뭐. 덕분에 심심하진 않았어. 아저씨.”

들려온 것은 유언이었다.

퍼어엉! 에티의 손가락 총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고. 그녀의 목 위를 깔끔하게 도려냈다.

털썩. 목 없는 몸뚱이가 널브러진다.

[제41던전 ‘장난감 왕국’의 던전 마스터, ‘심심한 에티’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망연자실한 내 앞으로 삐빅, 삐빅.

패널은 연신 떠오른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9차 붕괴가 종식되었다.

“…….”

무언가.

아주 중요한 뭔가가 변했던 에티가, 자살해서 도망가 버렸다.

이번 생에선 다시는 볼 수 없게. 무대 밖으로 퇴장해 버렸다.

그런 통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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