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6)>
“또 또 시작이네. 이 X발년.”
반전영화는 반전이 밝혀지는 순간 수명이 다한다.
절름발이가 범인인 걸 알고 보는 유주얼 서스펙트만큼, 개노잼인 영화가 세상에 또 없다.
“하지 마라. 안 통한다.”
모르고 당해도 족같은 게 저놈이 준비한 반전이다.
심지어 한 번 된통 당해서, 뼈저리게 알고 있는 지금. 그저 놈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증스럽고. 더더욱 족같을 뿐이다.
“너 때문에… 안 좋은 기억이 하나 또 나버렸잖아.”
8번째 붕괴에서의 타르타로스. 전에 경험했던 것은 두 번.
첫 번째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라 두 번째는 거의 잊고 있었는데. 놈이 연기한 진부한 반전 때문에 떠올랐다.
―끄어… 그거걱… 오, 오빠… 오빠아아악!!!
그때. 어떤 비극으로 그 회차가 파국을 맞았는지.
애써 잊고 있었는데. 지금 떠올라 버렸다.
“아무튼. 뭐.”
지금은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 안 좋은 기억들을 강제로 물렸다.
파지직! 손아귀에 푸른 뇌정을 속속들이 집결시켰다.
“넌 최악의 선택을 했다. 던전 마스터.”
여태처럼 나선의 번개 줄기가 아니다.
빠지직, 바직! 손가락 끝에서 뻗어나간 번개가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혔고. 촘촘한 뇌전의 그물망을 형성해 나갔다.
속공. 반응할 틈도 없이 몰아쳐 주지.
[스킬 발동: 천라]
투학!
순식간에 뻗어나간 번개의 그물이 여자를 뒤덮었다.
빠지지직! 푸른 섬광이 여인을 마구 지진다. 그녀의 몸이 갓 잡은 망둑어처럼 펄떡거렸다.
“끄아, 가가가각!!”
쩍 벌어진 입. 여인의 것이라곤 생각도 되지 않는 괴성이 터져 나온다.
핏발이 시퍼렇게 선 여인의 시선이 나를 노려봤다.
“…이, X발. 너 이 새끼. 대체 어떻게……!”
“뭐. 어떻게 보자마자 알았냐고?”
“……!”
“별거 없다. 그냥 감이었다.”
폐쇄된 홍대입구역 플랫폼. 시체가 즐비한 어둠 속.
던전 마스터의 뒤를 쫓아 도달한 곳에 던전 마스터는 어디가고, 시체들 사이에 덩그러니 쓰러져 있던 가련한 여자 하나.
“틀리면 틀리는 거고. 아님 말고.”
물론 이건 새빨간 거짓말.
그냥 아무렇게나 떠드는 거다.
나는 처음 그녀를 목격한 순간,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다.
이성도 감성도 즉각 원천 차단했고. 언제나 그랬듯, 가장 먼저 현자의 눈부터 사용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기생수 프사이라크]
[체력: 6 마력: 3]
[힘: 2 민첩: 1 지능: 3]
[상세: 제66던전 ‘미궁 던전 타르타로스’의 던전 마스터. 기생한 숙주의 모든 것을 학습하여 그대로 모방한다. 행동, 기억, 습관, 생각과 무력 수준까지. 기생의 의미는 퇴색하고, 곧 숙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전부터 누누이 말해왔지.
내 눈은 거짓말을 할지라도. 현자의 눈과 던전 시스템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
환술. 기만. 눈속임. 위장.
이런 개족같은 짓거리 해대는. 바로 너 같은 새끼들을 위해.
이빨 바득바득 갈면서 전생에서 계승해 온 게, 바로 이 ‘현자의 눈’이란 말이다.
“뒤질 준비나 해라. 던전 마스터.”
숙주는 분명 인간 여성이 맞다.
그러나 저건 이미 던전 마스터에게 뇌까지 잠식당한 껍데기. 본질은 뇌부터 척추까지 꾸덕하게 들어차 있는 기생수 쪽이다.
아마도 내 가공할 추격 속도에 도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적당히 주위에서 도망치거나 숨어있던 여자 하나를 잡고, 허겁지겁 숨어든 거겠지.
“뭐, 나쁘진 않은 임기응변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위기모면뿐만이 아니라 그다음. 안심한 내 뒤를 습격해, 이 몸을 빼앗아 버리는 것까지 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전생에 실제로… 수아와 내가 당했던 것처럼.
“내가 곧바로 간파하지 못한다. 그게 전제라 문제였던 거지.”
내가 놈을 보는 즉시, 던전 마스터로 확신해 버려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프사이라크는 숙주의 모든 것을 모방한다. 행동, 기억, 습관, 심지어 사고방식과 무력 수준까지.
무력 수준까지.
다른 건 모르겠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뭘 믿고, 인간 여자한테 제 발로 기어들어 간 거냐?”
최소한 낌새가 이상하다 싶을 때 바로 도망을 치든가.
놈은 지금 천라로 영혼까지 구속당해, 숙주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잠깐의 안일함. 그리고 역으로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
그게 너를 죽이는 거다. 프사이라크.
“이번 건 좀 더 따끔할 거다.”
파지지직!
아까와 차원이 다른 기세로 벼락이 모여든다.
흉흉한 나선을 그리며, 스파크가 날름거리는 번개의 구체가 손아귀 안에 완성되었다.
“자, 잠깐! 자, 잠깐만요! 잠까아아안!!”
문득 천라에 휘감긴 여자… 프사이라크가 다급하게 목청을 높였다.
그녀가 절박한 얼굴로 호소하기 시작했다.
“대, 대체 왜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저, 저는 사람이에요! 진짜라고요! 믿어주세요!!”
프사이라크가 귀 막고 눈 막고 우기기를 시전했다.
놈이 온몸을 연신 버둥거린다. 그 힘없는 가녀린 몸짓이, 여인의 연약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다.
“제, 제가 괴물인 것 같아서 이러시는 거예요?!”
“괴물인 것 같아서가 아니야.”
“…아, 네? 그, 그럼요?!”
“괴물 같은 게 아니고 괴물이라서다. 이 괴물 새끼야.”
“즈, 증거! 증거는요? 제가 괴물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요!!”
나는 입을 다물고 프사이라크를 빤히 쳐다봤다.
푸하. 나 치고는 드물게도, 헛웃음을 소리 내서 크게 터뜨렸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진짜… 짜증나게.”
증거.
X발. 그놈의 증거.
왜 내 주변엔 이렇게, 있지도 않은 증거 운운해가며 억지를 부리는 여자가 이리 많아.
프사이라크 저 씨X년은 애초에 여자도 아니긴 하다만.
“그래. 알겠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없이 차가운 눈매로 프사이라크를 내려다봤다.
“너 그냥 사람 해라. 인정해 줄게.”
“제, 제 말을 믿어주시는 건가요?!”
“그래. 믿는다. 너는 분명히 사람이야.”
“아, 그, 그럼… 이제, 저는 어떻게 되죠?”
“죽을 것이다.”
“…에?”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가는 프사이라크의 표정.
단숨에 해쓱해진 프사이라크. 놈의 요동치는 눈동자를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내가 사람 하나 깜빡 잘못 죽인 걸로 치자. 오, 마이, 미스테이크.”
애초에 저 새끼도 이상하다.
대체 왜. 네가 사람이면, 내가 당연히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내가 동정심이라도 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타 평범한 사람들처럼?
프사이라크. 누가 사람 더 많이 죽여봤는지 나랑 내기나 할 테냐?
분명 내가 이길 텐데.
“한 방에 보내주마. 여자 사람.”
거짓말을 싫어하는 나답게 말한 대로 행했다.
파지지직! 새파란 나선의 번개를 발사했고. 뇌전이 프사이라크의 숙주를 무참하게 지져버렸다.
“그아, 아아아아악……!!”
한동안 여성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공동을 가득 메웠다.
그 비명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뭉개지는가 싶더니.
―끄가가가가가가각!!
이내 뿌득, 우드드득!
그녀의 등가죽이 울룩불룩 솟아나며, 안에 숨어있던 프사이라크의 본체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끄엑, 끼에에……!
꿈틀꿈틀꿈틀.
생을 추구하듯 거세게 펄떡이는, 다른 기생충들보다 한층 거대한 애벌레.
프사이라크가 여인의 정수리를 헤집으며 허겁지겁 기어 나왔다.
―께에에에에엑!
프사이라크가 전류에 지져지며 부글부글 끓다가, 푸화악! 이내 온몸이 폭발해 버렸다.
라이트닝 헬릭스의 발동을 중지했다.
[제53던전 ‘미궁 던전 타르타로스’의 던전 마스터, ‘기생수 프사이라크’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게이트 폐쇄 패널을 한참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피곤하다.”
전에 없이 피곤을 느끼고 있었다.
새삼 떠오른 안 좋은 옛날 기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빨리 거점에 돌아가, 다음 붕괴까지 한숨 퍼질러 자고 싶다. 그런 생각만 가득해졌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의무감에 휩싸여 몸을 움직였다.
산란장을 초토화했으니 당장 연옥벌레들이 증식할 일은 없겠다만. 그래봤자 잠깐이다.
놈들이 한 마리라도 살아있는 한. 제2, 3의 산란장이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역시… 이번에도 다 묻어야 하나?”
좀 귀찮고 희생이 따르긴 하지만. 확실성을 기하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한다.
파짓. 공간을 찢어발겨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작은 은색 박스 하나가 손에 들려 나왔다.
[아이템 정보]
[명칭: 듀라의 유산 (A급)]
[타입: 설치형/보조]
[효과: 점착형 폭탄의 무제한 생성.]
[효력범위: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상세: 제23던전 ‘클락워크 그라운드’의 히든 퀘스트 클리어 보상. 마도 공학과 기계장치의 대가, 듀라가 만들어낸 회심의 역작. 결과적으로 엘리아데를 지키는 데는 쓰이지 못했다.]
흡사 007가방처럼 생긴 은색 장방형 박스.
실제론 물리학자들 뒷목 잡고 쓰러지게 만드는 장치다. 원하는 규모의 폭탄 규격을 입력하면, 상자 안에서 마도 폭탄을 자체적으로 무한히 생산해 낸다.
유틸성이 워낙 뛰어나서인지, 랭크상으론 A급으로 책정된 아이템.
그러나 영원회귀 속에서 쓸모는 끔찍할 정도로 없다. 나도 랭크에 낚여서 계승한 아이템이다.
‘던전 마스터가 X발. 폭탄 따위에 죽겠냐고.’
마도 폭탄이라곤 해도, 화학작용을 기본으로 하는 구조는 똑같다. 그런 만큼 하나의 폭탄이 낼 수 있는 최대 화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1차 붕괴의 드래곤조차, 이 폭탄으로 죽이려면 한 세월 걸린다.
“이런 때나 써보는 거지.”
지금부터 2호선 지하철역 중, 기생수에게 점령된 역들을 죄다 폭파시켜 버릴 거다.
역을 붕괴시킬 때마다 일일이 스킬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니. 8차에서 타르타로스가 붕괴했을 때 한정으론 꿀템이 맞긴 하다.
좋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가볼까.’
푸쉬익!
블러드 스트림을 발동해 하늘로 날아올랐고. 상자 표면의 패널에 원하는 폭탄 규격을 빠르게 입력했다.
“…하나당 C4 정도 위력이면 되겠지.”
치지직!
상자 표면에 푸른 빛무리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폭발물 생산을 시작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패널이 떠올라, 성공적으로 작동했음을 알려줬다.
[현재 작동 모드: 무제한 생성]
[중단 명령이 별도로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폭탄을 생성합니다.]
덜컥. 나는 곧장 상자를 열어봤다.
그사이 생성된 폭탄들이 주르륵, 상자 안에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드가자.”
쉬쉬쉬쉭!
삐끼들이 오토바이 타고 명함 날리듯, 지하철역들을 종횡무진하며 꼼꼼하게 폭탄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카가각! 으가가가각!!
―키에에에엑!!
중간에 수많은 기생충 숙주들이 덤벼왔다.
그러나 놈들의 숙주는 날고 기어봐야 인간. 뚜벅이 새끼들 속도론 혈천갑을 따라잡을 수 없다.
가볍게 무시하고 마빡 위로 폭탄이나 우수수 떨궈줬다.
‘여긴 점령됐고. 여기도… 점령됐고.’
프사이라크를 죽인 홍대입구역부터, 다시 시작 지점인 선릉역까지. 거기서 더 나아가 삼성, 종합운동장. 그리고 잠실역까지 역행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기생충들에게 점령된 역에 폭탄을 전부 도배했다.
“대충 끝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나는 유유히 지하도를 빠져나와 하늘 높이 솟구쳤다.
화악! 쌀쌀한 겨울바람과 은은한 햇살이 동시에 나를 반겼다.
“후우.”
순간 차가운 공기에 폐가 얼어붙는 듯했다.
어느새 아침놀이 대낮처럼 훤히 떠있었다. 나는 밝아진 태양을 멍하니 올려다봤고.
“예술은… 폭발이지.”
중얼거리면서, 꾸욱.
‘듀라의 유산’ 기폭 버튼을 힘껏 눌렀다.
“갈.”
콰앙! 콰콰콰쾅!!
일대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터진다.
쿠구구궁! 거대한 땅울림과 함께 지면이 움푹 꺼지며,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해당 구역 내의 생명 반응: 0개체]
완전히 붕괴해 버린 지하철역들을 배회했고. 현자의 눈을 다양한 방법으로 스캔을 돌렸다.
간혹 운 좋게 살아서, 꾸역꾸역 토사를 뚫고 나오는 놈들이 있었다. 일일이 찾아가 짓이겨 죽여버렸다.
마침내 기생충의 수는 완벽하게 0에 수렴했다.
“드디어 끝났다.”
귀찮은 뒤처리 작업이 끝난 후. 나는 혈천갑의 변신을 풀었다.
슈르륵. 붉은 점액질이 모여들어 나른한 표정의 이브를 형성했고. 내 품에 슬며시 안겨왔다.
“…음?”
그리고 그 순간. 내 표정이 미묘하게 틀어졌다.
재구성된 이브의 외관 때문이었다.
“이브.”
“으웅. 아빠아, 왜애?”
이브는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짙은 백색 속눈썹에 뒤덮인 붉은 눈을 마주치자, 헛숨을 들이켰다.
‘이 목소리.’
전보다 한층 간드러지는, 여자아이의 얄팍한 목소리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새 너… 심하게 많이 자랐다?”
애들은 못 본 사이 쑥쑥 큰다고들 하지. 근데 이건 존나 선 넘었다.
잠깐 못 본 사이, 이브가 너무 쑥쑥 커있었다.
‘또 뭐냐. 이건.’
이전이 영락없는 유아기였다면. 지금의 외관은 성장기.
최소 유치원생 정도는 되어 보이는 그녀가… 내 품에 다소곳이 안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