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5)>
쿠르르륵!
거칠게 물어뜯긴 가슴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 물컹거리는 혈액으로 변한 이브가 거기에 뒤섞여, 내 전신을 뒤덮는다.
익숙한 형태의 검붉은 갑옷이 완성되었다.
“푸흐.”
생명력을 단숨에 빨려나간 탈력감. 벌어진 입에서 절로 한숨이 쏟아진다.
그와 비례해 온몸에서 넘쳐흐르는 강렬한 힘의 파동에 전율했다.
“이거… 전보다 더 강해졌지 않나?”
꾸드득.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며 중얼거렸다.
아이템을 통한 스탯의 증감은, 시스템의 수치상으로 표기되지 않는다. 오직 본인만이 감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하트 기어… 이브가 변신한 혈천갑. 확실히 전보다 강력해졌다.
‘진화하고 있다. 실시간으로?’
뭐지.
대체 어떤 트리거로 강해지는 거지?
단순히 시간이 흐를 때마다. 변신할 때마다. 내 피를 빨 때마다. 아니면… 던전을 격파할 때마다?
몇 가지 그럴싸한 가정들이 뇌리를 스친다.
‘안 그래도 많던 의문이 또 하나 늘었군.’
안 되겠다. 조만간 이브 데리고 청문회 한 번 열든가 해야지.
뭐, 그 의문들은 나중에 해소한다 치고.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호재요.”
힘이 강해져서 나쁠 건 없다는 사실이다.
스킬 발동. 곧장 블러드 스트림으로 공중에 훌쩍 날아올랐다.
콰아앙! 튕겨나가듯, 철길을 따라 지하도를 꿰뚫었다.
* * *
1천 번 반복한 전생 중, 타르타로스가 8번째에 붕괴한 건 3번 정도다.
100개의 던전 중 랜덤으로 15번의 붕괴. 다음 회차에서 같은 순번에 같은 던전이 붕괴하는 상황은, 사실 확률이 지극히 낮다.
‘하지만 시행 횟수가 1천.’
무려 천 번이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도 전생에서 수아에게 물어보고 알았다.
이 정도 횟수면 무슨 던전이든, 어떤 순번이든, 중복될 확률이 상당히 높아진다고 한다.
강수아의 계산으론 3번 겹칠 확률은 15% 정도 된다는 듯한데. 수아가 명문대 출신이지만 수학 전공은 아닌지라 확실하진 않다.
“이번은 어디냐. 던전 마스터.”
아무튼 내가 8차에서 타르타로스 붕괴 경험이 이미 있다는 것. 이게 중요하다.
미로처럼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지하도의 특성 때문인가. 타르타로스도 지상에선 없던 약간의 성가신 특성이 하나 생긴다.
‘던전 마스터의 위치가 달랐었지.’
지난 회차들에서 겪은 첫 번째랑 두 번째 경험.
한 번은 선릉역과 바로 이웃역인 역삼에 던전 마스터가 있었고. 그다음 때는 한참 떨어진 사당역에서 발견됐었다.
‘이유는 나도 아직 모른다.’
나는 그저 두 번에 걸친 인체실험 모르모트일 뿐. 그 결과만을 알고 있다.
그러니 전생의 실험 결과물을 바탕으로, 지금부터 이번 생의 결과를 추론해야 한다.
‘그나마 확률이 높은 건…….’
한 번은 역삼. 그다음은 사당.
둘 다 선릉역 기준으로 역삼 방면의 2호선 역들이다.
이를 통한 단순하지만 가능성 높은 추론. 이번에도 역삼 방면의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래놓고 이번엔 반대편이라 그래라.”
최악의 상황을 입에 담으며 쓰게 웃었다.
뒤로 넘어져서 코뼈가 개박살 난 전적이 많아서 그런가. 웃음이 오래 가질 못했다.
―키에에에엑!!
―퀘엑! 카가가각!!
음습한 지하의 공기를 찢어발기며 비행하던 와중. 지하도 전역에 즐비해 있던 감염된 숙주들이 왕왕 덤벼들었다.
어떤 구간에선, 바글대는 숙주들로 통로가 꽉 막혀버린 곳도 있었다.
“…굳이 꼭.”
나는 비행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는다.
촤르륵! 다만 사복검을 채찍처럼 늘어뜨리고, 칼날의 채찍을 사방으로 휘날릴 뿐이다.
“매를 벌어요. X발.”
촤자자작! 뿌드득!
일점돌파. 내가 비행하는 궤도상으로 새빨간 피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폭발하듯 뜯겨나간 숙주들의 살점과 피가, 지하도 벽면에 덕지덕지 수놓였다.
“나와라. 빨리 나와라…….”
쾌진격이 이어졌고. 나는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역삼. 강남. 교대. 서초. 그리고 방배역까지.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주파했는데, 여전히 던전 마스터의 모습은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건…….”
대신 다른 걸 발견하긴 했다.
이번에도 사당역이었다.
전기가 나가 암흑만 가득한 플랫폼. 스킬 ‘나이트비전’을 켜고, 스크린 도어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산란장인가.”
인간의 시체가 한가득.
그야말로 악명 높은 혼잡시간대 2호선 광경처럼. 수많은 시신이 플랫폼에 빽빽하게 들어차, 촉수로 목을 고정당한 채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것만 봤을 땐 ‘산란장’보단… 불경스럽게도, 정육점에 진열된 고기들이 먼저 떠오른다.
‘저 시체들이… 알의 역할인가?’
시체들의 복부가 남산만치 부풀어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남녀구분 없이 임신한 것처럼.
―부륵, 부그륵.
그들의 부푼 배 안쪽. 뱃가죽 너머에서 무언가가, 길쭉하고 작은 무언가들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크에에… 께에에엑!
―끼에에에에에!!
우지지직!
시신들의 뱃가죽을 찢고, 배꼽을 뚫고. 새하얀 애벌레 같은 것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그 과정이 여기저기서 현재진행형이었다.
“이건 좀… 놀랍네.”
나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전에는 산란장을 보기 전에 던전 마스터를 마주쳤고. 놈을 죽인 뒤엔 2호선 전역의 지하도를 그대로 폭파시켜 뭉개버렸다.
나머지 잡몹 기생충과, 감염된 숙주들을 일거에 죽여버리기 위해서다.
‘기생충 산란장. 이번 생에 처음 봤네.’
지상에 열릴 땐 애초에 산란장 자체가 생기질 않는다. 저 기생생물들 자체가, 아무래도 지하에만 산란장을 제작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이것도 타르타로스가 지하에 열릴 때만 생기는 특성. 일단은 기억해 두자.
“흐음.”
플랫폼에 우글거리는 허연 벌레들을 한눈에 담았다.
아직 첫 숙주도 감염시키지 못한 유년의 기생충들. 스테이터스를 확인하기 위해 현자의 눈을 발동시켰다.
[몬스터 정보]
[명칭: 연옥벌레 (유생)]
[체력: 6 마력: 13]
[힘: 9 민첩: 11 지능: 16]
[상세: 제66던전 ‘미궁 던전 타르타로스’의 레귤러 몬스터. 아직 양분으로 삼을 숙주를 만나지 않아 연약한 상태다.]
연옥벌레.
기생충의 이름은 내가 알던 그대로다.
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전체적인 스테이터스는, 사람에게 기생한 후에 비하면 훨씬 약한 수준이었다.
‘연옥이 아니라 응애구만. 응애벌레.’
파지지직!
곧장 양손에 나선의 번개를 충전시켰다.
“이건 못 참지.”
당장 플랫폼 바닥에 바글거리는 것만 못해도 수천. 아니 수만 마리다.
바퀴벌레보다 명줄이 질긴 저 기생충 유충들을, 손쉽게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이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던전 마스터 수색을 잠깐 중단해서라도.
“…라이트닝 헬릭스.”
기회가 된다면 불꽃 계열 광역마법 스킬을 가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뇌전 계열은 단일 대미지는 모든 속성 중 최강이지만. 타격범위가 타 속성에 비해 넓지 않으니까.
촤자자작! 곧장 플랫폼 일대를 지져버리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끄레레레레렉!!
꼼꼼하게, 모든 벌레와 알들을 태워 죽인다.
섬광이 춤을 춘다. 소름 끼치는 기생충의 괴성이 플랫폼을 가득 메운다.
번개 폭격은 멈추지 않았다. 사당역 플랫폼 전체가 석탄 채굴장 꼴이 될 때까지.
“후우.”
작업을 끝내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당역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시커멓게 타들어 간 폐허. 그뿐이다.
그 자리에서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제 어떡할까.’
사당역까지 왔는데 던전 마스터를 찾지 못했다.
이대로 내 선택을 관철해야 하나. 아니면 이제라도 돌아가서 반대 방향을 수색해 봐야 하나.
고민해 본 결과.
“일단은 이대로 가본다.”
푸쉬익! 나는 결국 직진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선택의 이유는 간단하다.
‘어차피 3분이면 2호선 한 바퀴 돌아.’
던전 마스터가 반대 방향 끝자락인 삼성역 쪽에 있지 않는 이상에야. 이제 와서 후진하는 건 시간 낭비다.
스킬 발동. 현자의 눈을 지속적으로 발동해 주위 생명체를 스캔했다.
[범위 내 생명 반응: 0개체]
서칭 조건에 스테이터스 하향 제한을 걸어뒀다. 정확히 이 던전의 주인 스펙에 맞춰서.
그러니 누군가 이 스캐닝에 걸리면. 그게 무조건 던전 마스터라고 봐도 된다.
‘안 되겠군. 좀 더 빨리.’
블러드 스트림의 속도로 모자라 각종 가속 스킬을 첨가하기 시작했다.
투하악! 신형이 일순 앞으로 쏠렸다.
“크윽.”
눈 감을 새도 없었다.
스스로 제어가 안 될 정도의 가공할 속도에, 나는 결국 얼마 못 가 스킬을 해제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범위 내 생명 반응: 1개체]
찾았다.
드디어 놈의 꼬리를 잡았다.
내가 속도를 한껏 올리자 그제야 서칭망에 걸렸다. 이 말인즉슨…….
“지금 던전 마스터도, 이동 중인가?”
그것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이렇게 빠르게 이동할 이유?
“…도망.”
놈은 지금 나의 추격을 확실히 인식했고. 나를 피해 도망가고 있다.
현재로서는 도주 외에는 생각나는 가정이 없었다.
‘왜지?’
타르타로스의 던전 마스터가 나를 콕 집어 회피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처음 겪는 일 앞에서 잠깐 사고가 굳었다.
하지만 나는 금방 고개를 휘휘 저었다.
“던전 마스터. 게 섰거라.”
궁금하면 족쳐보면 된다. 알아서 불겠지.
가속 스킬들의 재발동. 줄였던 속도를 다시 극한까지 높인다.
투하악! 음속을 초월한다.
찌부러질 듯한 압박감이 온몸을 죄어온다.
“후우, 후웃……!”
쉬쉬쉭!
육감에 가까운 판단으로 꼬불꼬불 휘어있는 철길을 따라 선회했다. 직선 구간에선 그야말로 한 줄기 섬광처럼 어둠을 갈랐다.
‘압력이, 장난 아니군.’
꾸드득. 혈천갑조차 가공할 가속도의 압력에 찌뿌듯한 염을 토해낸다.
심장은 어느 때보다 세차게 요동쳤다.
“…잡았다. 던전 마스터.”
던전 마스터행 급행열차 한정용은, 그대로 홍대입구까지 직행했다.
걸린 시간 대략 30초. 선릉에서 사당역 가는 데까지 걸린 시간보다 적었다.
그야말로 발바닥 불나게. 아니, 갑옷에 불붙도록 날아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이런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지하도를 질주하니. 던전 마스터도 곧 꽁무니를 잡히지 않고는 못 배겼다.
나는 경고 겸 협박을 으르렁거렸다.
“더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뒤진다.”
아니, 뭐.
물론 도망 안 쳐도 죽일 거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라고.
어차피 결과는 바뀔 게 없는데. 나만 더 피곤하잖아.
“아, 으… 아아.”
주춤주춤. 내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던전 마스터를 빤히 쳐다봤다.
여자. 인간 여자의 형상이다. 어떤 괴물의 건덕지도 없는, 영락없는 평범한 한국인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있다.
이내 그녀… 던전 마스터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뗐다.
“아, 아아… 다, 다행이다!”
여인이 눈물을 펑펑 흘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 양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레, 레드 저거너트……? 지, 진짜 레드 저거너트인 거죠??”
얼마 전에 버린 히어로 명을 연호하는 여자.
희망을 가득 담은 절박한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무서웠어……! 저, 여기 지하에 갇혀버려서, 너무 무서웠어요! 저 이제 살 수 있는 거죠?! 흐흐흑… 으아아앙!”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는 듯, 목 놓아 울기 시작하는 여자.
진짜 한국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레드 저거너트도 알고 있다. 누가 봐도 무고한 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나는…….
“또 또 시작이네. 이 X발년.”
곧장 쌍욕부터 싸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