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0)>
7차 던전 붕괴가 종식되었다.
나는 곧바로 혈천갑의 변신을 해제해 버렸다.
스르륵. 몸을 감싸던 붉은 갑옷이 녹아내려 한 점으로 뭉쳤고, 이내 그것이 이브의 모습으로 변한다.
“푸햐아.”
이브는 내 품에 안겨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졸린 듯이 눈가를 연신 부볐다. 그리고 내게 온몸을 푹 기대왔다.
“으웅. 아빠. 나 힘드러어.”
“고생했다. 이브.”
“후아암. 나 졸려, 아빠아…….”
“그래. 쉬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브는 곯아떨어졌다.
새근새근. 품 안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던전 마스터 ‘고독의 까마귀’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다음은 언제나 그렇듯 보상 획득 시간.
웬만한 던전들 같으면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겠지만. 버려진 호중천에 한해선, 딱히 대단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호중천의 최후의 1인이 되어, 진정한 전사의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자유 능력치 10포인트를 고정 획득합니다.]
이렇다니까.
버려진 호중천은 보상이 고정이다. 때문에 기대할 건덕지가 없다.
자유 능력치 10포인트. 회귀 초창기였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지금 기준으론 계륵 같은 보상이다.
‘전에 회귀하면서 받은 것까지 치면… 11포인트 쌓였군.’
회귀하면서 받았던 자유 포인트조차 묵혀둔 상태다.
어차피 8차 붕괴 이전까지는 무르무르를 만나지 않는 이상, 몸에 기스 날 일조차 없다. 그래서 그냥 방치해 놓은 것도 있고.
사실 더 큰 이유는 이거다.
“힘도 민첩도, 지능까지 이미 만렙인데… 이제 뭐 올리냐.”
피지컬 계열 헌터의 핵심 스탯. 힘과 민첩이 이미 둘 다 99.
심지어 스킬의 공격력과 최대출력을 증폭시켜 주는 ‘지능’ 스탯조차 이미 만렙이다. 이다음 투자할 스탯이 애매했다.
여기서 올린다고 해봐야 HP와 방어력을 증가시켜주는 ‘체력’ 스탯.
아니면 MP와 마법 방어력을 올려주는 ‘마력’ 스탯 정도.
“이 둘은 효율이 안 좋으니 문제고.”
던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인 자라면, 누구나 적용되는 <스테이터스 시스템>.
이 시스템은 공격에 관련한 스탯의 효율은 지나치게 높고. 반면 수비 관련 스탯의 효율은 지나치게 낮다.
그것은 비단 헌터들뿐만이 아니라, 같은 시스템에 속박된 몬스터들도 마찬가지.
‘어차피 체력이 100대나 200대나. 크게 다를 게 없어.’
12번째 붕괴 후론, 어떤 던전 마스터든 전부 죽창 싸움이 된다. 제대로 얻어맞으면 서로가 3방 안에 무조건 대가리가 터진다.
지금 내 스테이터스는 대략 이렇다.
[명칭: 한정용]
[별칭: 1001번째 회귀자, D급 헌터]
[체력: 198 마력: 81 신체 상태: 정상]
[힘: 99+ 민첩: 99+ 지능: 99+ 포텐셜: 1]
[최종 전투력: 968]
여기서 체력에 11포인트를 투자한다고 치면 209가 되겠지.
그리고 제14붕괴쯤 가면 대부분의 던전 마스터가 힘이나 지능, 둘 중 하나는 90대를 상회한다.
아무런 방어 없이 놈들의 공격을 얻어맞는다 치면. 지금의 나는 3방까지 버티는 게 한계.
좀 빗맞는다면 어떻게 4대까진 견딜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체력을 더 올릴 생각은 없는데.’
이 이상의 체력은 의미가 딱히 없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세 방 버티는 지금 상황에서 다음 체력의 목표치는? 당연히 네 방 버티기가 될 거다.
그러면 체력치를 앞으로 얼마나 더 올려야 하는가?
‘안전빵으로, 최소 280까진 올려야겠지.’
그러면 거의 100에 가까운 스탯 포인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스탯 포인트는,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이번 생처럼 포인트를 10개나 얻을 상황이 왔다 쳐도 문제다.
“회귀할 때 가져갈 수 있는 보상은… 딱 하나뿐이니.”
이번 생을 예로 들어보자.
스탯 포인트를 다음 생으로 계승하기 위해선 블레이드 아크, 절대영도 영역 같은 유용한 스킬들을 전부 포기해야 한다.
이 뒤로 어떤 좋은 스킬이나 아이템을 얻더라도. 그것들을 죄다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한 방 더 버티겠다고 몇 번을 더 회귀해야 되냔 말이야.”
그런 대출혈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럴 시간에 쓸 만한 방어구 하나 더 얻어서 전신에 둘둘 떡칠하거나. 훨씬 효율적인 방어 스킬들로 적의 공격을 상쇄시키는 쪽이 싸게 먹힌다.
‘그래서 체력을 딱 198로 맞춘 거고.’
이건 올리다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된 게 아니고. 다분히 의도해서 맞춘 수치다.
최종 붕괴를 제외한 사실상 라스트 보스. 14번째 붕괴에서 무르무르가 나왔을 때를 대비했다.
‘14번째의 그 새끼한테 한 방 제대로 맞으면… 체력치는 195 정도 삭감된다.’
정확히는 195에서 플러스마이너스 2 정도 오차치가 있다.
존나게 처맞아 봐서 안다. 거의 확실한 수치다.
‘놈의 일격을 정통으로 버틸 수 있는 최소치. 그게 198의 체력.’
살아만 있으면 된다.
사지가 한 방에 뽑혀나가는 한이 있어도 일단 살아만 있으면. 그 뒤론 리스토레이션으로 몸을 꾸역꾸역 수복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든 전투를 속행 가능하다.
“역시, 차라리 마력을 올려야겠다.”
결국 그렇게 결정했다.
마력은 올려두면 마나통이라도 늘어난다.
라이트닝 헬릭스를 한 발이라도 더 갈길 수 있고. 혈천갑의 블러드 스트림 유지 시간도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겠지.
그게 차라리 내 생존율을 훨씬 높여줄 거다.
“자유 능력치 포인트. 마력에 11포인트 투자.”
혼잣말로 명령어를 입력했다.
그러자 삐빅. 곧장 적용이 완료된 결과창이 내 앞으로 떠올랐다.
[명칭: 한정용]
[별칭: 1001번째 회귀자, D급 헌터]
[체력: 198 마력: 92 신체 상태: 정상]
‘그래. 이건 됐고.’
어차피 스테이터스를 계승할 일은 없으니, 이번 생이 끝나면 다시 81로 돌아갈 예정이긴 하다만. 그래도 올라간 수치를 보니 뿌듯하긴 했다.
“그나저나…….”
지금 나의 관심사는 스테이터스가 아니다.
나는 스킬창의 한 구석. ‘절대영도 영역’의 상세 설명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절대영도 영역이 생각보다 많이 쓸 만했다.’
고독의 까마귀는 단체형 던전 마스터라서 개체 스펙이 좀 약하긴 하다.
하지만 던전 마스터급 몬스터에게 슬로우 및 동상까지, 광역 군중 제어가 먹힌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호재다.
“블레이드 아크랑, 절대영도 영역…….”
이번에 절대영도 영역을 직접 써보기 전까진, 블레이드 아크를 계승하는 걸로 거의 확정해 놓고 있었다.
근데 이건 좀 고민을 많이 해봐야겠는데? 생각보다 탐이 많이 나는 스킬이다.
“슬슬 광역기를 모을 때도 되긴 했어.”
안 그래도 요즘은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이 자주 든다.
한 500회차 때까지만 해도, 마지막 붕괴까지 살아 남아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땐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만 남아보겠다는 악바리뿐이었다.
남의 목숨. 특히 엑스트라들 목숨 따위 알 바냐. 나부터가 못 살아남으니 내 코가 석 자였다.
‘600회차 언저리까진 개인 스펙만 계속 키웠었지.’
지금까지 내가 사용했던 수많은 인챈트 스킬.
그리고 이미 만렙을 찍어버린 힘과 민첩, 그리고 지능 스탯.
모두 그 당시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때는 자유 포인트 보상이 굉장히 유용했다.
인명 피해 최소화를 위해 게이트 폐쇄 시간 단축에 힘쓰고. 잡몹의 효율적인 처치를 위해 광역기에 관심 갖기 시작한 것.
그 자체가 비교적 최근 회차의 일이다.
“좀 살 만해졌으니… 이런 생각도 드는 건가.”
원래 나부터 살 만해야 남 생각도 나고 하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성장하긴 성장한 듯하다. 나름 감개무량하다.
‘집이나 가자.’
비행 스킬로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날아가다가, 중간에 덜컥 멈췄다.
“아.”
이쪽 방향이 아니었지.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의 우리 집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쓴웃음을 지으며, 이세라의 칵테일 바로 궤도를 수정했다.
* * *
내가 900개월 언저리를 살아보고 느낀 건데.
보통 타인을 향한 호오(好惡)에는 대단한 이유가 없다.
“흐흐흥, 흐흥~”
그 사람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첫인상에서 이미 8할이 결정된다.
구체적인 이유는 나중에 뒤늦게 만든다. 뇌 내에서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이곤 하지.
“후훗. 우후후.”
선입견이 박히는 데는 3초면 충분하다.
그리고 박힌 선입견을 깨부수는 데는, 보통 3개월도 빠듯하다.
“저기, 저기요? 정용 씨?”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면. 그냥 내버려 둔다.
선입견을 깬다는 게 너무 비효율적인 행위니까.
“정용 씨. 저 좀 봐주세요. 일부러 무시하시는 거예요?”
이건 당연히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있을 리가 만무한 상황이긴 하다만. 누군가가 특별한 이유 없이 날 좋아해도… 내버려 둔다.
보통 이 경우엔 ‘선입견’이라고 안 하고, ‘콩깍지’라고 하던가?
“으음. 진짜 너무 하시네요. 이렇게까지 무시하시면, 저 화낼 거예요?”
아까부터 앞에서 줄기차게 나를 불러대는 맹인 여자.
전 S급 헌터이자, 진짜배기 예언자. 칵테일 바 오라클의 오너. 이세라.
“여기 제 가게예요? 확씨. 수아 씨랑, 이브랑 같이 쫓아내 버릴 거라니까요?”
이 여자가 놀랍게도, 나한테 있을 리 없는 후자의 케이스.
그 산증인이었다.
“후우.”
배 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흘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도 슬슬 한계를 느낀다.
“뭐냐. 왜. 아까부터 왜 부르는데.”
피곤한 눈을 들어 올렸다.
카운터 너머의 이세라를 향해 슬쩍 시선을 뒀다.
“…쯧.”
이세라는 익숙한 차림이 아니었다.
하늘하늘한 연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있다.
심지어 눈을 가린 안대도 옅은 보라색. 화장도 살짝 둘렀다. 전체적으로 수수하긴 하지만, 한껏 치장했다는 느낌이다.
‘뭐… 그래. 솔직히 놀랍긴 하군.’
반복된 전생을 통틀어서, 나는 이세라가 저런 소녀틱한 옷을 입은 걸 처음 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아까부터 좀 혼란스럽다.
“용건이 뭐냐. 대체.”
나는 나른하게 물었고.
“후훗. 이제야 이쪽을 보시는군요?”
이세라는 즉각 카운터 위에 엎드려, 상체를 바싹 가져오며 나를 올려다본다.
장난을 잘 칠 것 같은, 잔망스러운 대사와 자세였다.
“이상한 거 따라 하지 마라.”
“조금 올드한 패러디였을까요?”
“올드한지 새로운지 문제가 아니지.”
“그럼 뭐가 문제일까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원피스 같은 걸 입는 거냐.”
꾹 참고 있던 질문을 결국 내뱉었다.
이세라가 당황은커녕, 반색하며 내 질문을 반겼다.
“그거. 바로 그거예요!”
“…뭐?”
“바뀐 복장에 대한 감상이요. 그걸 묻고 싶어서 계속 불렀던 거였어요.”
“그런 거였냐.”
“네네. 그래서, 어때요? 잘 어울리는 것 같나요?”
“평소의 정장이 더 낫다.”
언제나 그렇듯 사실대로 입에 담았다.
이세라는 능청스럽게 충격 받은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와. 진짜 너무하시네요. 정용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큰맘 먹고, 쪽팔린 것도 꾹 참아가며 꾸며 입고 기다렸는데…….”
“앞으론 쪽팔림을 참지 말고 정장을 입으면 될 것 같다.”
내가 딱히 반응이 없자, 이세라도 어설픈 연기를 그만뒀다.
그녀가 무안한 듯이 머리를 긁적인다.
“…정말 감흥이 1도 없으세요?”
“거짓말은 안 하는 주의라.”
“이거 수아 씨가 코디해 준 건데도?”
“술을 너무 마셔서 잘못 봤네. 다시 보니 선녀 같긴 하다.”
그 중요한 걸 먼저 말했어야지.
하긴. 이세라는 마력을 사용할 순 있어도 일단 장님이다. 그리고 저 원피스는 내가 봐도 혼자 입기 많이 힘들어 보인다.
누군가 조력자가 있을 확률이 높고, 조력자가 누구일지는 불 보듯 뻔한데.
생각이 짧았다.
“으음. 수아 씨가 부럽네요. 정말로.”
문득 이세라가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느껴질 리 없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는 듯하다.
흠칫 상체를 물렸다.
“왜 쳐다보냐.”
“정용 씨의 그 맹목적인 관심이랑 집착이, 수아 씨가 아니라 내 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좀 하느라요.”
“…….”
“좀 노골적이었나요?”
“꽤 많이 노골적인데.”
뭐냐.
대체 내가 까마귀들 때려잡는 동안. 이세라와 강수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갑자기 이세라가 소녀틱한 원피스 차림을 하지 않나. 대놓고 나 좋다고 앵겨대질 않나.
‘이렇게까지 자초지종이 궁금해지는 해프닝은 난생처음이군.’
아무튼 지금 이 뇌절 파티는 좀 문제가 있다.
결국 과열된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화제를 수아에게로 돌렸다.
“…수아는, 자냐?”
시간은 새벽을 바라보는 한밤중. 마력 중독이 아니더라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이세라는 체념하듯 피식 웃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쪽의 직원 휴게실에 눕혀놨어요.”
“좀 궁금한데. 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대답해 드릴 수야 있는데… 대신에 저도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정보엔 정보냐.”
“좀 딱딱하게 말하면 그렇죠?”
“좋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반면 이세라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녀는, 이런 것을 물어왔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얘기. 듣고 싶어져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