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9)>
처음에 까마귀들의 학살을 방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계엄군과 헌터들이 꼴도 보기 싫어서?
꼴 보기 싫은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그것보단 훨씬 실리적인 이유다.
‘어차피 물리적으로 못 막는 걸 어떡하냐.’
까마귀들에게 각인된 불사의 저주가 문제다.
이건 대상자끼리 공명하는 형태의 저주. 쉽게 말해 까마귀들이 서로 가까울수록 저주의 효력이 강해지고, 반대로 멀리 떨어질수록 효력이 대폭 약해진다.
저주의 효력이 약해지면.
당연히 개체의 부활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대폭 늘어난다.
‘최초엔, 죽고 나서 5초면 부활하는 수준.’
그러나 호중천이 점점 넓어질수록 까마귀들의 행동반경이 넓어진다.
그런 만큼 필연적으로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저들끼리 싸우는 일보다 불청객을 척살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최소 남산공원 전역을 뒤덮을 정도는 대기해야 한다.’
그 정도론 호중천의 늪이 넓어져야 한다.
그러면, 전혀 보이지 않던 이 개노답 던전의 공략 활로가 생긴다.
‘이젠 부활 텀이 최대 5분까지 늘었을 거다.’
제한 시간 5분.
이게 내가 짐작한 나의 최고 속도다.
최초로 죽인 까마귀가 부활할 때까지. 5분 내에 호중천의 모든 생물을 남김없이 살해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이 던전은 클리어 된다.
“그래. 와라. 어서. 옳지.”
푸확, 빠직, 뿌드득!
미친 듯이 달려드는 까마귀를 사복검으로 베고, 주먹으로 부수고. 힘껏 짓밟아 바닥에 짓이기는 와중.
나는 짬짬이 헌터들과 계엄군에게도 견제를 가했다.
[스킬 발동: 라이트닝 헬릭스]
파자자작!
말이 견제지. 내가 평소 사용하는 공격 스킬을 그대로 때려 박았다.
“끄, 으가가가각!”
“흐아아아악!!”
나선의 뇌전이 군의 진형을 후려치는 순간. 눈이 타들어 갈 것처럼 눈부신 섬광이 연쇄적으로 폭발한다.
수백 명의 헌터와 군인들이 뇌전 다발을 맞고, 숯덩이가 되어 즉사했다.
“이, 이런 미친……!”
“히이이익!!”
가공할 위력에 아연실색해 뿔뿔이 흩어지는 병력들.
나는 허겁지겁 꽁무니를 빼는 그들을 보며 피식, 조소를 흘렸다.
“전부터 영 재수가 없단 말이야. 너희나, 나나.”
난 거짓말을 싫어한다.
처음에 내가 했던 선언. 다 죽여주지. 이거 그냥 빈말로 한 게 아니다.
난 호중천 안의 모든 생물을, 몰살시킬 예정이다.
‘우선은 헌터랑 계엄군. 너희부터다.’
고독의 까마귀.
헌터 부대. 계엄군 부대.
그리고 어쩌다 재수 없게 휘말린 일부의 민간인까지. 전부 죽여버린다.
결과적으로 이 시커먼 늪에서 살아남는 건, 나 혼자가 될 거다.
“최대한 빨리 끝내는 줄게. 서로 피곤하잖냐.”
‘버려진 호중천’의 클리어 조건은 ‘까마귀의 몰살’이 아니다.
호중천 안에 단 하나의 ‘전사’만 살아남을 것. 어디까지나 그게 유일한 탈출구이고, 유일한 조건이다.
한 번이라도 호중천의 검은 늪을 밟은 순간. 우리는 모두 까마귀들과 동등한 입장.
항아리 속에 던져진 한 마리 독충 신세로 전락한다.
최후의 1인. 까마귀들이 숭앙하는 진정한 ‘전사’가 탄생하기 전까지.
아무도. 절대로. 무슨 수를 써도. 이 살육전에서 도망갈 수 없다.
“도망치지 마. 헌터잖아.”
본업이 게이트를 닫는 사람들이잖아.
사람들 지키라고 라이선스 줬고. 게이트 닫아주는 대가로 돈을 왕창 받아왔잖아.
근데 이 늪을 밟은 너희들이 살아있으면.
붕괴한 7차 게이트가 평생 안 닫힌단 말이다.
“영웅놀음은 여기까지다.”
호중천이 더 넓어져서 피해가 커지기 전에.
그 한 몸 희생해,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하라고. 어서.
“얌전히 뒤져. 전부.”
뭐, 그렇게 됐다.
오늘부로 의문의 영웅, 레드 저거너트 전설은 폐막이다.
처음부터 돼지 목의 진주였어. 나한테 어울리는 본업으로 돌아갈 때다.
“전부 죽여버린다.”
파지지직!
나선의 뇌전을 마구잡이로 내리꽂았다.
사복검이 공간을 도약하며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아악!! 크하아악!!”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절규의 연속.
쿠구구궁. 스킬의 폭격에 버티지 못한 남산타워가, 육중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살육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아아아아악!!”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였을까.
고작 20분 남짓. 체감으론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 헉… 커헉……!”
그 짧은 시간에 수만에 달하는 헌터와 군인을 죽였다.
증원을 온 수많은 전차와 헬기, 그리고 전투기를 보이는 족족 격추시켰다.
콰과과광! 떨어지는 융단폭격을 맨몸으로 맞으며, 반대로 뇌전을 발사해 폭격기를 격추시켰다.
“라이트닝 헬릭스.”
산발적인 나선형 번개의 폭격.
그리고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까마귀들의 광기 어린 돌격. 무자비한 학살의 서라운드.
가장 먼저 버티지 못하고 궤멸한 것은, 계엄군과 헌터 부대였다.
“끄, 아아. 왜, 왜 이러세요……!”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바아알!!”
다음 타자는 얼마 없는 민간인들.
하필이면 오늘. 모종의 이유로 남산공원에 왔다가, 재수 없게 호중천의 늪에 휘말린 민간인들이 그다음으로 전멸했다.
“다음.”
그리고. 그다음.
내 주위를 가득 메운 채, 제들끼리 싸우고 있는 까마귀들.
“다음은… 이제 너희들이야.”
파지지직!
왼손에 나선의 번개. 오른손에 흐느적거리는 사복검을 꼬나쥔다.
투학! 블러드 스트림으로 단박에 쇄도한다.
“간다.”
우선 가장 가까이 있던 까마귀 한 놈. 면상을 왼손으로 힘껏 쥐었다.
뿌드득! 특이한 방독면을 으깨버림과 동시에, 이글거리던 뇌전을 흘려 넣었다.
―…크훅……!
퍼거걱!
놈의 머리통이 터져버렸다. 온몸이 경련하고,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섬광이 번쩍번쩍 춤을 춘다.
“…….”
털썩.
까마귀의 육체가 퍼석거리며 으스러졌고. 그대로 바닥에 조각조각 쏟아진다.
나는 왼손을 허공에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5분이다.”
사복검을 허공에 원형으로 휘둘렀다.
쉬리리릭! 늘어난 칼날이 올가미처럼 머리 위를 맴돌며, 위협적인 소음을 냈다.
“5분 내에 전부. 뒤질 준비해라.”
나직하게 통보한 뒤. 블레이드 아크로 허공을 찢어발겼다.
카가가가각! 수많은 장소에서 동시에 칼날이 튀어나왔고. 그 와중에도 제들끼리 싸우던 까마귀들의 진형을 휩쓸었다.
―……!
―…크, 그욱……!
우드드득!
고기를 써는 파육음.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
그리고 수리검과 쌍검, 사복검이 교차하는 소리가, 호중천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 * *
전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으으으……!!
순식간에 네 명의 까마귀가 내게 쇄도한다.
앞뒤. 그리고 오른쪽과 위. 투박한 쌍검의 끝자락이 급소를 향해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이 정도 협공은 이제 질리지도 않는다.
“개문.”
블레이드 아크 발동.
공간을 찢고 들어간 사복검이, 까마귀 네 명의 후방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촤촤촥! 칼날이 일제히 까마귀들을 덮쳤다.
―……!
두 명은 가까스로 회피.
한 명은 목을 꿰뚫려 피를 쏟아냈고, 또 다른 하나는 상반신이 대각선으로 양단되어 두 쪽이 나버린다.
나는 남은 두 명의 까마귀 쪽으로 지면을 박찼다.
―스으으……!
―후우우!
그사이 까마귀 둘이 어디선가 난입했다.
내 공격에서 살아남은 까마귀들과 그대로 싸움이 붙었다.
―……!
―크후욱……!
채채챙!
쉴 새 없이 휘둘리는 쌍검. 넷이서 두 개씩, 총 8개의 칼날이 가공할 속도로 허공에서 맞붙는다.
높은 금속음과 번쩍이는 불꽃이 감각을 자극한다.
“지들끼리 신났네. 아주.”
나는 대차게 조소를 지었고.
스윽. 놈들을 향해 손을 뻗어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발동: 절대영도 영역]
이번 회차에 최초로 얻은 스킬. 절대영도 영역.
사용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게 무슨 스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사용법은… 이거군.’
던전 마스터 ‘냉혈의 아스트라에아’가 거의 패시브 스킬처럼 항상 사용하던, 바로 그거.
뼛속까지 꽝꽝 얼리는 혹한을 강렬하게 연상했다.
“스킬 발동.”
스스스스!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싶더니. 인위적인 세찬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나는 물론이고, 까마귀들의 방독면에서도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
―스읏, 스으……!
꾸드득, 꾸득.
까마귀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고. 이내 신체 말단부터 천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놈들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이 틈을 놓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라이트닝 헬릭스.”
파지지직!
손아귀로 나선을 그리며 모여드는 뇌전. 가공할 기운을 머금은 구체가 손안으로 응집된다.
투학! 그것을 곧장 까마귀들에게 날려버렸다.
“죽어.”
빠자자자작!
뇌전 다발이 폭발하며 섬광을 토해냈다.
번개의 섬광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살라먹을 기세로 춤췄고. 네 명의 까마귀를 새카만 잿더미로 만든 뒤에야 사그라들었다.
“다음.”
쉴 틈은 없다.
가장 먼저 죽인 까마귀의 부활까지 남은 시간. 어림잡아 30초 남짓.
‘현자의 눈.’
쿠우웅! 나를 중심으로 육중한 파동이 퍼져나간다.
곧장 호중천 영역 전체를 스캔해봤다. 실시간으로 파악된 정보가 패널에 정리되어 나타났다.
[해당 영역 내 모든 생명 반응: 4개체]
한 명은 나니까 제외하고. 생존자 세 명인가.
고지가 멀지 않았다. 눈에 더욱 마력을 불어넣어, 생존자들의 정확한 위치를 스캔했다.
찾았다.
‘저기다.’
타탁!
나는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질주했다. 호중천 끝자락의 꽤 먼 거리였지만, 속도가 속도인지라 순식간에 도착했다.
생존자들을 확인하고 얕은 탄성을 흘렸다.
“저건…….”
일단 까마귀가 둘.
그리고 의외로,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건 만신창이가 된 인간이었다. 내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헌터인 듯하다.
그것도 무려, 내가 아는 얼굴이다.
“…장수혁.”
놈의 이름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한국 헌터 서열 2위. S급 오버랭커. 협회장 양호성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 일컬어지던, 협회의 명망 높은 고위 간부.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
그리고 내 목소리가 들렸음인가.
까마귀 둘과 장수혁이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으으.
까마귀들은 피 튀기던 난전을 즉각 멈췄고. 곧장 스텝을 밟아 서로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이내 스르릉. 나를 경계하듯 쌍검을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다.
“…허억, 허억… 너. 너, 이… 새끼.”
그리고 장수혁.
놈은 온몸을 피로 적시고, 죽을 듯이 헐떡거리면서도. 나를 향해 증오심 어린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 개… X같은, 인류의, 배신자 새끼야. 대체… 왜냐.”
혼란. 공포. 그리고 의문.
수많은 감정들이 덕지덕지 낀 표정이다.
“뭐냐고. 너. 인간, 같은 인간이잖아? 왜… 대체 왜!! 왜 우리를 죽인 거냐!!”
놈이 투정을 부리듯 빽빽 소리 지른다.
뿌리 깊은 증오와 원망의 눈동자. 놈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고 있었다.
“푸흐.”
그래서 나는 웃어버렸다.
아니. 하도 어이가 없어가지고.
나는 아연실색하는 장수혁에게 조용히 뇌까렸다.
“그런 얘기 네 아가리로 지껄이면. 쪽팔리거나 하진 않냐?”
“…뭐, 뭐라고?”
“같은 인간인데. 왜 죽이냐고? 그거 평소에 네가 제일 많이 듣는 말 아니냐?”
내 싸늘한 한마디에, 장수혁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벌벌 떨리는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그 말은. 네놈, 대체 그걸 어떻게……!”
“아니다. 됐어. 말해 뭐 하냐.”
고개를 저으며 양손을 치켜들었다.
남은 시간이 10초가 채 안 된다. 놈과 길게 얘기를 나눌 시간은 없다.
양호성과 똑같다. 대화할 생각도 딱히 없다.
“뒤지기나 해.”
파지지직!
양손에 나선의 번개가 차오른다.
“네가 뭘 알겠냐고. X발.”
나는 당신들 편이라고.
왜. 대체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냐고.
그만하라고. 아프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최소한 수아만이라도. 걔한테는 손대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싹싹 빌었을 때.
양호성이랑 장수혁 너는, 나한테 무슨 말을 했었냐.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하던 고문을 계속했지. 내가 고통 끝에 죽어버릴 때까지.
협회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암부(暗部) 조직. 슈레더(Shredder).
그 헤드가 바로 장수혁, 너니까 말이다.
“전생에 업보가 많았다고 생각하든가.”
콰자자작!
라이트닝 헬릭스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방사형으로 매섭게 퍼진 번갯불이, 까마귀들과 장수혁을 동시에 지져버렸다.
“끄아! 카하아아악!!”
장수혁의 단말마.
유려하게 춤추는 번갯불이 잦아든 후. 그곳엔 싸늘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털썩. 세 구의 숯덩이가 뒤늦게 나뒹굴었다.
[‘버려진 호중천’의 던전 마스터, ‘고독의 까마귀’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꿀럭꿀럭.
패널의 등장과 함께, 호중천의 시커먼 늪이 파도처럼 요동치나 싶더니.
이내 스르륵, 땅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