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2화 (42/235)

42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8)>

제69던전.

버려진 호중천.

그곳의 던전 마스터이자, 유일한 거주자들이 바로 고독의 까마귀다.

고독(蠱毒)이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

“끄, 으아아악!!”

“죽여! 주, 죽여버려!! 화력 한꺼번에 쏟아부어!!”

여기에 붙은 고독은 주술적인 의미다.

좁은 항아리 안에 맹독을 가진 곤충들을 마구 집어넣은 다음. 최후의 한 마리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게 만드는 것.

“끄악, 아아아악!!”

“히이이익! 오, 오지 마! 뒤져어어!!!”

그리하여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마리.

그 한 마리를 이용해 강력한 저주를 행한다는 주술. 그것이 바로 고독이다.

결론적으로 까마귀들의 행동 패턴은 정말 지극히 단순하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끊임없이 싸운다.

닥치는 대로 쳐 죽인다.

놈들을 둘러싼, 저 시커먼 늪.

호중천(壺中天) 안에 생존자가 자기밖에 없을 때까지.

이건 까마귀들 서로를 향해서도 예외가 없다.

―스으으……!

―…그훅!!

―크욱, 그우……!

놈들에겐 피아(彼我)의 개념 자체가 없다.

일단 싸운다. 네가 죽던가 내가 죽던가. 무조건 둘 중 하나뿐이다.

내가 죽었으면 그대로 끝인 거고. 네가 죽었으면, 나는 곧장 또 다른 놈을 죽이러 간다.

―스으으으……!

여기서 문제가 한 가지 있는데.

이 까마귀들에겐 불사의 저주가 걸려있다는 점이다.

이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죽여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부활한다.

―크후우… 후우……!

―그룩, 그으으으……!

살아난 까마귀는 당연히 난전에 다시 참여한다.

그래서 까마귀들의 이 저주받은 투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대로 한 번 더 죽는다. 그것을 영원무궁히 반복한다.

“X발… 뭐야! 대체!! 왜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냐고!!”

호중천의 늪지대 범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넓어진다.

그만큼 까마귀들의 살육 반경도 넓어진다.

“막아!! X발, 저 새끼들 막으라고!!!”

“틀렸습니다! 포위망 형성이, 불가능합니다!!”

“중대장님!! 서쪽 방어선이 곧 붕괴합니다!!”

“으아아아악!!”

헌터 부대, 계엄군, 일부 민간인, 그리고 까마귀까지.

시커먼 늪 안. 다양한 인간군상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지고. 삼삼오오 다시 모였다가. 혼잡한 와중에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아아악! 그, 그만! 제발 그마아안!!”

시커먼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서로의 시체와 살점이 섞인다.

피아식별도 없이 죽고 죽이는, 아수라 지옥도가 펼쳐진다.

“끄아아아아악!!”

바로 그런 시점이었다.

진득하게 지켜보던 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나는 남산타워 꼭대기를 가볍게 박찼다.

“지금쯤이면 되겠네.”

투학! 신형이 공중으로 솟구쳤고. 그대로 허공에 둥둥 뜬 채 멈췄다.

비행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브. 일어나 봐라.”

그새 꾸벅꾸벅 졸던 이브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수아의 보는 눈도 없겠다. 쥐불놀이 하듯이 다리 잡고 격렬하게 흔들자, 천하의 잠꾸러기 이브라도 눈을 번쩍 떴다.

“우헤? 머, 머야? 으우, 어, 어지러워, 아빠아…….”

잠에서 깬 이브가 알딸딸한 목소리를 냈다.

아직 비몽사몽한 얼굴. 정신도 제대로 들지 않은 그녀에게, 나는 주절주절 지껄였다.

“지금 당장 거래를 하자.”

“으우우. 거래애?”

“조건은 같다. 딸기우유 3개. 500ml. 전처럼 1시간만 나한테 힘을 빌려줘.”

“으웅…….”

이브는 눈곱을 떼기 위해 연신 눈을 비볐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3개 시러. 적어어…….”

이브가 앙증맞은 손가락 다섯 개를 번쩍. 쫙 펼쳐서 내밀었다.

나는 잠깐 어안이 벙벙해서 말문이 막혔고. 그녀의 행위를 가까스로 이해했다.

“허.”

기가 막힌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5개는 필요하다는 거냐.”

“응응.”

“나와 월급 협상을 하겠다. 이 소리군?”

“응응. 삥크 맘마 세 개? 잉건비도……? 안 나와. 아빠아.”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냐. 발칙한 외계인 년.

지금 세상이 한창 망해가는 중이라 TV 드라마나 영화채널도 안 나올 텐데. 수아가 나 모르는 사이 뉴튜브 영상이라도 보여줬나.

“아빠아. 5개 조. 안대애?”

이브가 포대기 안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묘하게 성숙하고 요염한 기색. 그리고 외관 그대로의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동시에 녹아있는, 기묘한 미소였다.

아무튼 중고나라식 네고를 당하는 내 입장에선, 꿀밤이 심히 마렵다.

“이브. 이빨 썩는다.”

“으으응. 아냐! 나 이빨, 딱딱해. 히―”

빵긋 웃으며 하얀 유치(乳齒)를 보여주는 이브.

뭐냐. 그새 이빨이 나긴 했네? 오히려 그 점에 놀라서 벙쪘다.

‘아니.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브의 투정을 계속 들어주다간 끝이 없다. 나중엔 딸기우유 회사를 인수해 와야 하겠지.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서라. 5개나 한 번에 먹으면 배탈이 난다.”

“배타리? 배타리가 모야?”

“설사가 한여름 장맛비처럼 쉴 새 없이 주룩주룩 쏟아진다. 네 눈물도 흐르고 설사도 흐르고. 아래위로 팡팡 울부짖는 현상을 의미한다.”

“으웅. 설사는 뭐야?”

“…….”

“장마삐가 모야? 아빠아.”

이 새끼, 다 알면서 외모 믿고 저러는 거 아니겠지?

이쯤 되니 합리적 의심이 든다.

“후우.”

아무튼 이대로면 우주의 기원이 뭔지까지 물어보겠군. 내가 먼저 치킨 레이스를 그만두기로 했다.

한숨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졌다. 5개로 가자.”

“와아! 이히히. 아빠가 최고야!”

해맑게 웃으며 짤깍짤깍 박수를 치는 이브.

직후에 쩌억, 그녀가 입을 한껏 크게 벌렸다.

어느새 송곳니가 칼날보다 날카롭게 솟아있었다.

“얼마나?”

“최대한.”

“응응. 잘 먹겠습니다아.”

콰지직.

송곳니가 가슴을 파고든다.

정신이 번쩍 드는 심장의 고동. 그와 함께 온몸으로 맥동하는 아득한 고통.

“크… 후우.”

뜨거운 한숨을 흘렸다.

이게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날이 오다니. 나도 마조히스트가 다 됐군.

그런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던 찰나.

“푸햐아. 배불러어.”

이브가 내 가슴에서 얼굴을 뗐다.

피로 새빨갛게 범벅된 이브가 히죽, 특유의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는다.

“아빠아. 힘내애?”

촤르르륵!

곧장 그녀의 신형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검붉고 질척한 핏덩이가 되어, 내 온몸을 뒤덮는 갑주로 화한다.

뒤늦게 피식. 투구 속에서 웃음을 흘렸다.

“그래. 고맙다.”

철컹! 사복검을 늘어뜨려 허공에 휘적거렸다.

그대로 비행 마법을 해제. 광기의 살육전이 한창인 남산공원 한복판으로 빠르게 추락한다.

스윽. 늘어뜨린 채찍형 사복검을, 머리 위로 한껏 치켜들었다.

‘스킬 발동.’

파지지직!

붉은색,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

무수한 버프의 오라가 사복검 전체를 휘감았고. 마지막엔 새파란 전류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스킬 발동: 인챈트 / 절삭력 강화]

[스킬 발동: 인챈트 / 내구성 강화]

[스킬 발동: 인챈트 / 번개의 분노]

…….

…….

무수한 발동 알림이 눈앞에 지나다니는 찰나.

수직으로 추락한 내 신형은 지면에 거의 가까워진 상태였다.

‘스킬 발동.’

마지막.

결정적인 스킬을 하나 더 영창했다.

[스킬 발동: 블레이드 아크]

키리리리릭!

인챈트가 잔뜩 발린 사복검 주변으로 공간이 길게 찢겨나갔다.

개문. 그리고 진입.

순식간에 능란하게 발동 프레이즈를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절단.”

내가 지면에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파바바박!

사방천지에서 우후죽순 공간이 찢어졌고. 수십 개의 칼날 채찍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한 번의 참격으로, 한참 떨어진 여러 공간에서 다중타격.

블레이드 아크는 이런 것도 가능한 스킬이었다.

―스, 으으……!

―그우우……!

우드드득!

수많은 까마귀들이 그 기습적인 일격에 몸을 관통당했다. 놈들이 일제히 신형을 부르르 떨다가, 방독면 안에서 피를 토하며 축 늘어진다.

“흠.”

촤르륵!

나는 찢어진 공간을 닫고 사복검을 회수했다.

―…….

찰나의 적막이 도래했다.

살아있는 모든 까마귀의 움직임이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스으으, 스으…….

그들의 시선은 오롯이 내게 박혀있다.

적대감. 진한 경계가 어린 붉은 안광이, 방독면 안에서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

―…….

스르릉.

그들이 일제히 내 방향으로 쌍검을 들이밀었다.

의도된 협공은 아니었다. 나한테서 차원이 다른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모든 까마귀가 나를 제1의 타깃으로 변경했을 뿐이다.

“저, 저건.”

“붉은, 갑옷……?”

내 등장에 경악한 것은 헌터와 계엄군도 마찬가지.

그들은 눈을 터질 듯이 부릅떴고. 나를 향해 제들끼리 수군대고 있었다.

“레드… 저거너트……!”

문득 지척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그사이 팔 한 쪽이 날아간 데다, 온몸에 수리검이 박혀 걸레짝이 된 늙은이가 보였다.

헌터 협회장.

양호성이 그곳에 엎어져 있었다.

“왜. 대체 왜… 우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거냐. 이, 개 같은! 빨갱이 새끼!”

양호성이 증오 어린 목소리를 냈다.

시커먼 호중천의 늪, 새빨간 피. 땀과 눈물이 범벅된 채, 바락바락 소리친다.

추악한 노친네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당신 같은 강자가! 대체 어째서! 우리와 함께, 진작에 같이, 게이트 대책을 펼쳤으면……! 훨씬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거 아니냐!!”

“…흐. 푸흐흐.”

투구 속에서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철컥! 사복검을 장검 형태로 합친 뒤. 놈에게 태연스레 인사했다.

“양호성. 아무튼 오랜만에 실물로 보니 반갑다.”

재회의 인사였다.

양호성의 뱁새눈이 화등잔 만하게 떠졌다.

“…너 이 새끼. 나를, 본 적이 있나?”

“알다마다.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해봤는데. 모를 수가 없지.”

“내가, 너와 대화를……?! 지금 무슨 미친 헛소리를!”

“그런 게 있다. X같은 노친네 새꺄.”

양호성을 대하는 나는 빈말로도 살갑지 못했다.

아무렴. 지금까지도 존나게 싫었는데. 방금 저 개새끼가 지껄인 말로 더 싫어졌으니.

X발 욕이 안 나오고 배기겠냐.

“함께 게이트 대책을 펼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 이 지랄.”

가소로운 나머지 연신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가 아니라고. 그렇게나 많은 대화를 했었잖아. 수없이 많은 회차를, 네놈의 환심과 신뢰를 사기 위해 피나도록 노력했는데.

그래서 결과는?

네가 나한테 준 건 뭐였냐. 응?

‘배신. 고문. 그리고 죽음이었지. 그래.’

스킬 발동.

신경질적으로 사복검을 휘둘렀고. 블레이드 아크로 한 번 더 공간을 찢었다.

난 애초에 이 새끼랑 말을 길게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개문.”

그리고 진입.

칼날을 찢어진 공간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는다.

“절단.”

파지지직!

검이 사출될 공간이 뒤늦게 찢어진다.

정확히 양호성의 목 위였다.

“뒤져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푸직!

내 칼날은 단두대처럼 정확히 양호성의 목을 잘랐다.

“……!”

양호성은 단말마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눈을 부릅뜬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진다.

쿠르륵. 질척한 소음과 함께, 그대로 호중천의 늪에 삼켜졌다.

“뭐, 뭐야, X발!!”

“회, 회장님!!”

헌터 부대 측에선 전에 없던 혼란이 도래했다.

당연히 내가 자기들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등장한 순간. 나를 쳐다보는 놈들의 얼굴엔 모두 실낱같은 희망이 서려 있었다.

“씨, X발! 레드 저거너트가, 회장님을 죽였다!!”

바로 지금. 내 손으로 양호성의 목을 잘라버린 순간.

그 희망들이 일순간에 절망으로 뒤집혀 엎어졌다.

“X발!! 저 새끼도 죽여버려!!!”

“그러면 그렇지! 저 빨갱이 새끼도 우리의 적이었어!!”

“적이다! 레드 저거너트를 조심해라!!”

놈들이 허겁지겁, 풀어졌던 긴장감을 다시 조인다.

철커덕, 철컥! 나를 향해 수많은 총구가 겨누어졌다. 스킬을 장전한 손아귀가 이글거린다.

까마귀, 계엄군, 그리고 헌터 부대.

모두의 적대감 어린 시선이 나라는 한 점으로 똘똘 뭉친다.

“하핫.”

오랜만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 당연히 이렇게 되겠지. 너무 예상대로라 오히려 유쾌해졌다.

‘익숙한 구도잖아.’

이 영원회귀 속에는 내 아군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모두가 적이었다.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

“너희들도 이런 기분이냐? 까마귀들아.”

신뢰를 주면 돌아오는 건 배신.

배신하지 않더라도 문제다. 시간이 회귀하는 순간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막대한 공허감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이젠 아무도 안 믿는다.

거슬리는 건 감정이든 인간이든 다 죽여버리고. 나 혼자만 남았다.

호중천의 까마귀들이 그러하듯이.

“와라.”

짐짓 만화 속의 최종 보스인 양, 양손을 넓게 뻗었다.

그리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다 죽여주지.”

쇄애액, 투두두두!!

총탄과 스킬, 그리고 수백의 까마귀가 일제히 나를 향해 쇄도한다.

나는 선언한 대로 행했다.

“…개문.”

카가가각!

사복검이 공간을 넘나들며 휘둘렸다.

종횡무진으로 생명을 찢어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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