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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41화 (41/235)

41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7)>

“사실, 정용 씨가 어떻게 대답할지 다 알면서 물어봤어요. 미안해요.”

문득 이세라가 샐쭉 웃으며 사과를 해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웃음기가 전혀 없는 침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 알고 있어도… 정용 씨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어요. 최선을 다하겠다고요.”

“그러냐.”

“저기요. 정용 씨. 그래도 아직, 희망이 손톱만치는 있겠죠?”

불안과 공포가 담긴 얼굴로 물어오는 이세라.

아무렴. 무섭기도 할 거다. 상황이 특수한 나를 제외하면, 세상이 곧 여지없이 멸망한다는 걸 아는 세계 유일의 여자니까.

“꼼짝없이 전부 사라지는 미래만 남은 건… 절대 아니겠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막을 방법도 없다. 이세라는 그저 보고, 알 수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무력하다. 그녀는 나와 닮은 처지다.

아니. 거의 똑같다.

“무서웠어요. 정말로. 너무 무서워요. 솔직히… 지금도요.”

주르륵.

덜덜 떨리던 이세라의 안대 아래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질질 짜는군. 한숨을 슬쩍 내쉬었다.

“뭐가 그리 무섭냐.”

무슨 대답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물어봤다.

“딱히 보이는 것도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무서워하지.”

지금껏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공포와 혼란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에는 꽤 도움이 될 테지.

그냥 듣는 것. 내가 이세라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천천히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이세라의 목소리.

절망과 공포, 그리고 혼란으로 가득했다.

“12월 27일을 기점으로. 온통 노이즈만 끼어있다가, 눈앞이 새카매져요. 이런 적은, 미래시를 배우고 처음이에요.”

“그러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끝없는 나락. 까마득한 암흑. 그냥 한없이 시커먼 구멍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압도적이고, 절망적이에요.”

“…….”

“그래서 무서워요. 모른다는 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너무 무서워서… 흐흑!”

이세라는 말을 뭉개고 다시 안대를 적셔가며 울기 시작했다.

성숙한 이미지가 무색하게, 이브 같은 갓난애처럼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처지가 비슷하다 보니, 아무래도 좀 동정이 가긴 한다.

“쯧.”

나는 적어도 저항할 여지라도 있다.

그러나 이세라는 그저 갑갑한 마음으로, 멸망을 향해 시시각각 달려가는 세상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세라를 빈말로라도 위로해줬느냐?

“근데 나도 아직까지 딱히 답은 안 보인다.”

그럴 리가.

거듭거듭 말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이하 생략.

“적어도 내가 1천 번 회귀해 본 바로는. 딱히 희망 같은 거 하나도 없었어.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세상은 어김없이 멸망하더라.”

“그, 그럴, 수가.”

“이런 패배주의 발언은 싫어하긴 하지만. 웬만하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다.”

이세라의 안색에 절망이 가득해졌다.

“그건. 너무… 심하게 가혹하네요.”

글라스를 쥔 그녀의 손이 하얗게 질렸고. 걷잡을 수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일리단녀.

미래의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해주던가?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는다.”

우뚝. 이세라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자연스럽게 손의 떨림도 멈춰버렸다.

그 틈을 타서 떠벌거렸다.

“희망이 있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야. 네가 14만 가지 미래를 보고, 거기서 전부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 군요…….”

“내가 너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이유 말인데. 단순히 미래를 읽기 때문이 아니다.”

“…….”

“읽고서 체념해 버린 년이라 그런 거지. 난 패배주의자가 싫다.”

이세라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그녀에게 마지막 일침을 가했다.

“내가 너한테 호감을 가질 때는, 나도 모든 것을 체념해서 동질감을 느낄 때뿐이다. 한참 전 회차 때 내가 잠깐 그랬지.”

“…그런가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널 다시는 안 좋아하길 빌어라.”

“풉. 쿠쿡.”

문득 이세라가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물은 멈춰있었다.

“네. 제발 저를 계속 싫어해 주세요. 정용 씨.”

“그래주지.”

그렇게 굵직한 대화는 대강 일단락되었다.

내 영원회귀를 인지하는 존재는 총 셋. 이번 생에 그중에서 둘을 만났다.

이러다 마지막 세 번째까지 만나는 거 아닐까 싶다.

‘그런 일은… 웬만하면 없었으면 좋겠는데.’

제발 이 불길한 예감이 틀렸길 기도했다.

그 새낀 어떤 의미에서 무르무르보다 한층 더 소름 돋는 새끼니까.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최대한 만나고 싶지 않다.

* * *

12월 10일 아침. 7시 반.

우뚝 솟은 남산타워 끝자락이, 새벽 여명에 희끄무레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그 순간.

파지지직!

아침의 적막을 찢고 7차 던전 붕괴가 일어났다.

“왔구나.”

나는 남산타워 꼭대기에 대충 걸터앉아 있었다.

빠지직, 파직! 머리 위에서 위협적으로 튀는 스파크. 시커먼 균열이 허공에서 퍼져나간다.

서울 하늘 전체를 잡아먹을 기세다.

“갸우. 아빠아. 구멍! 구멍, 대따 커! 헤에!”

어김없이 이브는 등에 포대기로 둘둘 매여 있었다.

게이트 균열을 보면서 신나서 떠벌거리는데. 나는 어제의 ‘이브 노쇼 사태’ 이후로 그녀에게 상당히 삐진 상태.

그래서 딱히 반응해 주지 않았고.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혈천갑만 아니었으면, 참교육을 해주는 건데. 진짜로.’

내가 삐져봤자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무시.

반대로 이브가 삐져서 혈천갑의 힘을 빌려주지 않기라도 하면, 아쉬운 건 전적으로 나다.

갓난애한테 본의 아니게 갑질 당하는 처지가 슬플 따름.

“우아. 아빠아. 쌔까매! 아저씨들, 까매!”

문득 게이트를 보던 이브가 연신 탄성을 흘렸다.

뭔가 드디어 게이트에서 나왔나 보군. 나도 이브를 따라 시선을 돌려봤다.

“껌은, 껌은 아저씨! 잔뜩!”

이브의 말대로였다.

게이트 너머에서 시커먼 경갑 차림의 남자들이, 지금도 우수수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놈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까마귀다.”

게이트에서 융단폭격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시커먼 사내들.

외관을 본 순간 이미 확신했지만. 어김없이 상태창은 띄워봤다.

[몬스터 정보]

[명칭: 고독(蠱毒)의 까마귀]

[체력: 98 마력: 46]

[힘: 35 민첩: 47 지능: 13]

[상세: 제69던전 ‘버려진 호중천’의 던전 마스터 중 하나. 항아리 속의 어두운 별세계. 낙오된 전사들은 죽음마저 거부한 채 싸운다. 단 하나의 진정한 ‘전사’가 탄생할 때까지.]

꿀럭꿀럭.

사내들의 위로 시커멓고 반질거리는 구체가 함께 쏟아진다.

철퍽, 철퍽! 철퍼덕!

지면과 충돌해 터져버린 구체는 흐물흐물 지면에 녹아내렸고. 남산타워 일대를 질척하고 시커먼 늪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

―…….

시커먼 늪 위로 나동그라진 검은 갑옷의 사내들.

어느 순간. 그들이 침묵을 고수한 채, 어기적거리며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

―…….

―…….

천편일률적인 생김새였다.

수백 명이 전부, 시커먼 광택의 날렵한 경갑 차림. 챙이 넓은 검은 모자와 넝마가 된 망토. 양손에 꼬나쥔 낡아빠진 쌍검.

그리고 방독면.

역병 의사처럼 날카롭고 기괴한 디자인의 방독면을 뒤집어써,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다.

―스으으…….

―후우우…….

방독면 안에선 수백 개의 일그러진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놈들의 닳아빠진 흑색 망토가 게이트의 마력 폭풍에 일제히 나부낀다.

―스읏, 스으으으.

―후욱, 후우…….

키리릭, 키릭!

망토 안감에 부착된 수십 개의 수리검들이 마찰하며, 스산한 금속음을 낸다.

마치 괴물의 숨죽인 울음소리 같다.

―스으. 스으으…….

―후우우…….

시커먼 전사들의 이름은 고독의 까마귀.

독기를 한가득 품고. 살기 위해 죽고 죽이는, 항아리 속 버러지들이다.

“나왔다! 몬스터다!!”

그리고 두두두두! 일사불란한 발소리가 까마귀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려 그쪽을 쳐다봤다.

“각자 지정된 위치로!”

“어서 포위해! 움직여!!”

마력탄 소총과 방탄복으로 무장한, 군의 안티게이트 특수부대. 그리고 헌터 협회 소속의 일부 S급 헌터들과 A급 헌터 부대가 보인다.

휘유, 나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호성이. 이번 생엔 일 좀 열심히 했구나?”

모인 헌터들의 수가 꽤 된다.

저번 6차 붕괴에서 고위 헌터의 집단 폐사로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을 텐데. 어디서 또 S급을 저렇게 긁어모았나 모르겠다.

‘둘, 넷, 여섯… S급이 11명이나 되잖아.’

그중 하나는 양호성 본인이다.

정말 바닥까지 득득 긁어서 추려서 왔나 보군. 저 엉덩이 무거운 협회장 양호성까지 직접 행차하다니.

이건 좀 많이 놀라웠다.

‘이렇게 되면. 이번 생의 헌터 협회는 여기까진가.’

이곳에 모인 헌터들은 몰살 확정이다.

그러니까 사실상 회장까지 출동해 총력을 긁어온 이번 생의 헌터 협회는, 오늘부로 완전히, 뿌리까지 와해될 것이다.

‘다른 게이트였으면 희망 사항이라도 걸어볼 텐데.’

상대가 저 ‘고독의 까마귀’들이다.

그러면 이건 나가리다. 생존자는 확정적으로 1명. 나밖에 없을 예정이다.

말씀드리는 순간.

“…시작됐네.”

나도 그쯤에서 벌떡 일어나 전투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몬스터… 까마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스으으으……!

―후우우……!

그들이 일제히 투박한 쌍검을 치켜들었고. 둔탁한 숨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 전투가 목전에 임박했음을 누구라도 직감한다.

“저, 전투 개시!!”

“쏴라!! 다 죽여버려!!!”

투두두두!!

선제공격은 인간 측. 까마득한 화망의 포화가 퍼부어진다.

동시에, 투하악! 까마귀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섬광처럼 쇄도해 나간다.

―……!

푸직, 뿌드득!

까마귀들의 피와 살점이 흩뿌려진다.

놈들의 박살 난 갑옷과 육편, 그리고 방독면 쪼가리가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

―……!!!

까마귀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사지를 뜯겨나가면서도 침묵을 고수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 순식간에 수십에 달하는 까마귀가 무참히 도륙되었다.

“…뭐, 뭐야. 미친.”

“씨, X발. 대체, 뭔 상황이야……!”

하지만 공포에 질리는 것은 오히려 인간 측이었다.

까마귀들에겐… 주변의 수많은 인간들 따윈, 안중에도 없다.

까마귀들은 지금. 제들끼리 싸우는 중이었다.

―……!!

―……!! ……!!!

푸직, 뿌드드득!

놈들이 치고받는다. 서로의 사지를 미친 듯이 잘라낸다.

쉴 새 없이 쌍검을 휘둘러, 다른 까마귀의 몸에 쑤셔 넣었다.

―스으, 스으으……!

―후우우욱!

쉬리리릭!

수많은 수리검이 날아다니며 까마귀들의 방독면을 깨부쉈다.

콰장창! 까마귀들의 두개골이 산산이 박살난다. 이미 박살 난 머리통을 또 다른 까마귀의 쌍검이 거칠게 헤집는다.

“…씨, X발.”

피와 살이 난무하는, 그들만의 살육 축제.

찐득한 광기의 난전 앞. 모든 병력들이 입도 뻥긋 못 했다.

화망의 포화도 어느새 우뚝 멈춰있었다.

“…….”

“…꿀꺽.”

그사이 백 개체가 넘는 까마귀가 죽었지만. 무수한 총알 세례는 무용지물이었다.

까마귀들은 인간들의 공격에 기스 하나 없었다.

―후우욱……!

―스으으으!

우악스럽게 휘둘리는 까마귀들의 쌍검. 그리고 기상천외한 궤도로 날아다니는 수리검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손에만 죽어나갔다.

“뭐야. 이거… 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아등바등 갈팡질팡.

다들 초유의 사태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 ‘버려진 호중천’ 던전은, 영원회귀 이전에 열린 적이 없는 신천지다. 그러니 아무도 적절한 대응법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협회장 양호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

“…….”

사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던전 마스터들이 똥오줌 못 가리고 서로 싸운다. 이 틈을 타 적을 섬멸하자. 그런 발칙한 발상이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씨, X발……!”

어쭙잖게 저 광기에 발을 들이면. 그 순간이 내가 죽는 날이다.

모두가 그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이변이 시작된 건.

선두의 병사들이 낸 작은 탄성부터였다.

“뭐, 뭐야 이거. 바닥이……!”

“으윽, X발! 어느새 여기까지 늘어났어?!”

스멀스멀. 꿀럭꿀럭.

조금씩 넓어지던 바닥의 시커먼 늪. 그게 어느새 널찍이 포진해 있던 특수부대의 발밑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스으으.

우뚝.

수백 명의 까마귀들이 일제히 정지.

휘리릭! 놈들의 시선이 완전히 똑같은 타이밍에, 인간들에게 향했다.

―…….

―…….

까마귀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다만 흐느적흐느적, 천천히 쌍검을 치켜들었고.

―스으으!

투두두두!

그야말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제히 사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계엄군도 헌터 부대도, 반응이 조금 늦었다.

“으, 으아! 으아아아악!!”

“온다! 놈들이 달려든다!!”

“쏴! X발 쏴!! 다 죽여버려!!!”

투두두두두!!

다시 한번 화망이 형성되고, 무수한 총알이 일제히 쏟아졌다.

고위 헌터들의 각종 스킬이 그에 호응하듯 남산공원 일대를 뒤덮었다.

“끄아아아악!!”

멈췄던 학살이 재개되었다.

고함과 비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크아아아아!!”

사냥꾼은 여전히 시커먼 까마귀들이지만.

사냥감은 달라졌다.

“사, 살려줘!! 사람 살려!!!”

무자비한 인간 사냥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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