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5)>
갓난아기와 놀아줄 만한 소재거리도 거의 다 떨어져 간다.
강수아의 고민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바니바니. 바니바니.”
“당그은! 당근! 꺄후후!”
하다하다 술 게임까지 하기 시작했다.
시골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가로등도 제대로 없는 집주변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길 때까지.
결국 수아는 입을 뻥긋도 하지 않았다.
“음냐아. 아빠아… 응헤헤.”
그리고 9시가 조금 넘은 뒤. 놀다 지친 이브가 마침내 곯아떨어진 그 순간.
사박사박. 유령처럼 희미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음.”
시선만 슬쩍 올려 쳐다봤다.
할 말이 잔뜩 있는 기색의 수아가 보인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전에 없이 무미건조하다.
“…흐.”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대화할 마음이 좀 생겼나 보구나. 수아야.”
“…….”
할 말은 많아 보이지만.
수아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항상 이런 식이지. 그녀는 본래 심란할수록 말이 극단적으로 없어진다.
‘좋지. 바라던 바다.’
제2차 여심 공성전을 시작해 보자고.
수십 번의 트라이에도 난공불락이었던 강수아라는 성벽. 그녀의 완고하고 철저한 현실 부정.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한 고집을, 이번 생에야말로 무너뜨려 주겠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이것부터 알고 가자.”
나는 소파에 한껏 상체를 기댄 뒤.
나른하게 반쯤 뜬 눈으로 수아를 빤히 쳐다봤다.
“내 말을 어디까지 진실로 받아들였냐. 수아야.”
흠칫. 수아가 어깨를 눈에 띄게 떨었다.
그녀는 한동안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고. 이내 기어드는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건 안 된다.”
“네, 네?”
“잘 모르겠어요는 대답이 되지 않아. 그 대답은 틀렸다.”
“그러면……?”
“차라리 하나도 안 믿는다고 해. 그게 차라리 방향성을 잡기 쉬우니까.”
“…뭐, 뭐예요. 그게.”
극단적인 선택지에 수아가 불평을 토로했다.
평소에 내가 이렇게 단호하게 밀어붙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수아는 지금 내 태도에 좀 당황한 행색이다.
‘나도 팔자에 없는 차도남 행세 하느라 힘들다. 수아야.’
나는 원래 이렇게 깐깐하게 말하지 않는다. 뼛속까지 대충 사는 유전자가 박혀있으니까.
이건 1천 번을 회귀해도 고치기가 힘든 본성에 가까운 습성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회귀로 쌓인 통계에 따르면. 수아는 힘든 때일수록 다소 강압적인 설득이 잘 먹힌다.
그러니 일부러 냉정한 체를 하는 거다.
“그래서. 실제론 어떠냐, 수아야. 내 말을 손톱만치라도 믿고 있긴 하냐?”
“그, 그야……!”
수아는 즉시 입을 열었다.
열었지만, 잠시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는… 믿고 싶어요. 오빠 말이라면. 정말로 뭐든지요.”
결국 수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휘저었다.
“하지만, 죄송해요. 역시… 믿고 싶지 않아요. 믿을 수 없어요.”
복잡 괴기스러운 소녀 모드에 들어가 버렸군.
뭐 괜찮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런 복잡한 반응조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완벽하게 똑같은 대답도 이미 몇 번 들어봤다.
‘…이제 내가 달라져 볼 차례지.’
애석하게도 수아는 전생에서 전혀 진전이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내 쪽에서 뭔가를 바꿔야 한다.
‘전과 똑같은 노선을 타선 안 돼. 절대로.’
꼼짝없이 배드 엔딩이 기다릴 뿐이다.
이대로면 수아는 ‘가족들이 죽은 증거를 찾을 때까진, 죽어도 서울에 있겠다’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지껄인다.
그러면 얄짤없이 손에 손잡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되겠지.
‘죽어도 서울에 있겠다… 라니.’
그런 개소리를 주장하다가 진짜 죽는다고.
별의별 방법으로. 갖가지 장소에서. 지긋지긋하게도 죽어댄단 말이다.
‘여기서 도박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알았다.
평범한 설득으론 저 광기에 찬 똥고집을 말릴 수 없다.
그러니 나조차 한 치 앞도 예측이 안 되는, 도박 수를 사용해 보겠다.
“수아야.”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수아를 불렀다.
수아는 흠칫 고개를 들었고. 나는 불안에 찬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레드 저거너트. 알지.”
수아를 한때 희망과 동경에 빠뜨렸던 그 이름. 여기서 갑자기 언급했다.
수아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야… 알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요?”
“그래. 나도 안다.”
“그쵸? 오빠도 알 정도면 진짜 한국인 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소리가 아니라. 나는 레드 저거너트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어, 예?!”
수아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째진 목소리에서 얼마나 당황했는지가 느껴졌다.
아직 놀라긴 이르지. 결정타를 한 방 더 먹였다.
“아는 사이뿐일까. 사실 나다.”
‘그게 나야, 움비두바 두비두바’를 시전했다.
수아는 적잖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내 숨을 흠칫, 삼켰다.
“눈빛 보니 진심이네요. 농담이 아니라.”
“그래. 진심이다.”
“하아. 오빠.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계속…….!”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한국이 망하기 직전이다. 너희 가족이 어제 몰살당했다. 이런 말들보다 훨씬 불신에 찬 행색이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수아는 나를 워낙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무려 10년 넘게.
약해빠졌고, 그래서 벌이도 시원찮고, 얼간이라 앞가림도 잘 못하는 옆집 D급 헌터 오빠.
수아가 가진 내 이미지는 그 정도일 테다.
‘그걸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게, 옳은 선택인가?’
그래서 솔직히 지금도 좀 걱정스럽다.
안 그래도 지금 수아의 정신은 안팎으로 위태로운 상황이다. 조금만 살짝 잘못 건드려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도박이다.
내가 레드 저거너트였다는 게 수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진실로 다가간다면. 그 뒤론 어떻게 되나.
나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그녀의 현실 부정이 극단적으로 심화될 수도 있다.
‘몰라. 배 째.’
어차피 판은 이미 벌려놨다.
엎질러 놓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직진뿐이다.
“믿기 힘들겠지. 아무래도.”
“말이라고 하세요?! 당연하죠!!”
“그래서 지금부터 증거를 보여주려고 한다.”
“…증거?”
“그래. 내가 레드 저거너트라는 증거.”
수아에게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나는 당당하게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엔 곤히 자고 있는 이브가 있었다.
문득 수아를 흘깃 쳐다봤다.
“수아야. 레드 저거너트의 갑옷 생김새는 알고 있냐?”
“…네, 뭐. 뉴스에 몽타주가 워낙 많이 나왔으니까요.”
“그래. 좋아.”
수아의 눈앞에서 변신해주겠다.
내가 직접 혈천갑을 뒤집어쓴 ‘레드 저거너트’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녀는 좋든 싫든 내가 레드 저거너트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게 되겠지.
“나중에 딴 소리 하기는 없기다. 수아야.”
“…즈, 증거나 보여줘 보세요. 그래야 딴소리를 하든 말든 하죠.”
“그러지.”
거기까지 확인한 뒤.
나는 곧장 이브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이브. 일어나 봐라.”
“우우웅…….”
이브가 몸을 뒤척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두들기는 정도론 안 되는가.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상하좌우로 살살 흔들기 시작했다.
“이브. 이브. 어서. 네가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 당장.”
“웅… 우엥. 시러어… 졸려어.”
이브는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극구거절 했다. 그리고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씨구. 당황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이브……?”
이런 망할.
이 앙큼한 외계인 꼬맹이가,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이면 여기서 앙탈을 부려?
평소엔 잠깐만 흔들어도 잘 깨던데. 왜 갑자기 이 중요한 타이밍에서만 이러는 거냐?
‘이건… 어쩔 수 없군.’
뒤에서 불신에 찬 수아의 시선이 따갑다. 시간이 없다.
약간의 손찌검이 필요하겠다.
‘충격요법 실시.’
번쩍.
나는 이브의 머리 위로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아니!! 오, 오빠! 잘 자던 애는 왜 갑자기 깨우는데요?!”
수아는 내 행동에 깜짝 놀라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더니 덥석. 내게서 황급히 이브를 빼앗아 버렸다.
“손 치워요!!”
“아.”
“세상에, 말도 안 돼!! 어, 어디 할 게 없어서! 이 조그만 애를 때리려고 한 거예요, 지금?!”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수아를 쳐다봤다.
적대감이 잔뜩 어린 수아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거 조졌다.’
너무나 익숙한 표정이 수아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다.
불신. 뿌리 깊은 불신의 감정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지금 내 행동이, 기껏 쌓아놨던 수아와의 신뢰까지 건드린 듯했다.
“아니. 수아야. 그러니까, 증거를 보여주려면 우선 이브가…….”
“됐어요!! 좀 조용히 해요 오빠!”
“…….”
“대체 아까부터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게이트 붕괴로 진짜 미쳐버린 거예요?! 이제 지긋지긋해요!!”
기어코 저 대사가 나와버렸군.
끝났다. 저건 수아가 완전히 대화할 의지가 사라졌다는 방증이다. 항상 그래왔으니 모를 수가 없다.
허탈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좀… 허무하군.’
중요한 순간에 이브가 깨질 않았다.
설마 이딴 황당한 이유로 일이 어그러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상상을 못 해봤기에, 지금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것도 갈피를 못 잡겠다.
‘항상 내 머리 위에서 노는구나. 빌어먹을 새끼.’
운명. 혹은 신.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의미 없이 욕을 했다.
그리고 난 곧장 수아에게 말했다.
“서울로 돌아갈 거냐.”
후회는 많지만 미련은 없다.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수아의 마음은 절대로 돌아서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네.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요.”
아니나 다를까.
수아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보다니. 뭘 말이냐.”
“엄마가 진짜 죽었는지. 그리고… 어, 언니도요. 시신을 직접 보기 전까진, 저는, 도저히… 못 믿겠어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내가, 억울해서라도 반드시 말해야겠다.
“시신을 어떤 식으로 확인할 생각이냐. 방법은 있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종로구의 폭심지 일대엔 지금 계엄군과 헌터 협회의 조사병력이 쫙 깔려있다.”
“그, 그런.”
“놈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날이 바짝 곤두서 있어. 접근하려는 기색만 보여도 마력탄과 스킬 세례로 벌집이 될 거다.”
수아는 아연실색했다.
그녀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저는 미, 민간인인데요? 심지어 무기 하나도 없는데?”
“S급 헌터도 와꾸만 보면 민간인이다.”
“…….”
“변장한 몬스터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긴 하다.”
그러니까. 시신 찾기는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네 엄마도 언니도, 육체가 분자 레벨로 분쇄돼서 시신이 나올 리도 없거니와. 그걸 차치해도 애초에 종로구 수색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수아야.”
보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러는데.
자기를 속이는 건 그쯤 하는 게 어떤가 싶다.
‘너도 이미 다 알고 있잖아.’
TV에서 브리핑 되는 서울의 동향을 하루 종일 듣고 있던 수아다.
피해 현황. 대략적인 사망자 수. 군의 동향 등. 이번 회차의 서울 상황을 나보다도 빠삭하게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수아가 종로구 일대의 군사 동향을 모른다?
그냥 근본 없는 개소리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전생에도 항상 그랬지. 엄마는 몰라도 최소한 언니는 살아있을 거라고. 그녀는 항상 그렇게 자위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신이 못 버티는 거다.
“오빠. 언니는 오버랭커라구요……. 우리나라에서, 8번째로 센 사람이란 말이야……!”
매번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렇게 울먹거리는데. 내가 X발 무슨 말을 해줘야 하냐.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씨알도 안 먹힌다.
아니까 그냥 닥치기로 했다.
“그런 언니가,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잖아요? 그쵸……? 네?!”
그것도 맞긴 하다.
강서윤은 절대 쉽게 죽는 법이 없다.
‘매번 어렵게 죽지.’
그래서 무슨 던전이 붕괴하든. 항상 시체 쪼가리 하나 안 남긴다.
덕분에 손톱 하나 증거품으로 챙기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손톱 가져와 봐야 믿지도 않지, 참.’
실제로 강서윤의 각종 신체 부위를 증빙(?)해 본 적도 많다.
대부분의 경우 강서윤은 6차 붕괴의 교전에서 가루가 되다시피 시체가 훼손된다. 그래서 조그마한 파편 하나만 챙겨가도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당연히 안 믿는다.
믿었으면 이번에도 미리 챙겨놨겠지.
자기 언니가 아닐 거란다. 내가 잘못 봤을 거란다.
아무리 사실적으로 증명해 줘도 엉터리라고 우긴다. 21세기 천동설 신봉자한테 지동설 설명하는 과학자가 된 느낌이다.
어느 부위를 가져가도 반응은 일률적이었다.
‘딱 한 부위 빼고는.’
그래. 뭐.
믿을 수밖에 없는 부위가 하나 있긴 하지.
‘머리.’
그때는 믿었다. 유일하게.
대신 충격받은 수아는 멘탈이 산산조각 나서 그날부로 식음을 전폐했고. 며칠 안에 아사로 자살해 버린다.
그 회차 후론 강서윤의 유품이나 시신을 챙기는 건 그만뒀다.
‘이젠 지금까지 그랬듯이… 수아의 호기심이 최대의 적이겠군.’
내일은 7번째 게이트 붕괴가 있는 날.
7번째 붕괴 이후로 서울은 본격적으로 무법 도시화가 진행된다. 도처에서 테러와 범죄가 밥 처먹듯 일어나지.
‘제발. 말을 잘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몇 번째 생이든 수아의 사망원인 부동의 1위는 변함이 없다.
내 말을 안 듣는 것. 괜히 바깥의 여러 상황에 관심을 둬서, 내가 둘러놓은 배리어 밖으로 기웃거리는 거.
좀 부정적인 스포일러를 하자면. 아마 이번에도 그렇게 끝나지 않을까?
사실 나도 반쯤 체념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됐다. 안 때릴 거니까 다시 가져간다.”
“어, 앗!”
나는 수아의 품에서 새근새근 자던 이브를 다시 뺏어 들었다.
그녀가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돌아가자. 서울로.”
휴일 하루를 꼴딱 박은 여심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다.
벌써 몇 번째 실패인지 모르겠군. 혹시 다음 기회가 온다면… 이브가 무조건 깨어있는 상태에서 시작해야겠다.
한숨을 내쉬며,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