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0)>
답지 않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금세 잠재웠다.
‘진정해라. 한정용.’
강제로 잡생각을 삭제했다. 머릿속에 다시 차가운 피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자 술렁거리던 심장도 점차 잦아들었다.
‘이미 그에 대한 대처법도 전부 공략했잖아.’
8백 몇 번째 전생 때의 쓰라린 기억.
그 이후로 나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하면 수아의 신뢰를 잃지 않을지 필사적으로 연구했고. 결국은 해답을 찾아냈다.
‘매뉴얼대로만 하면 돼. 매뉴얼대로.’
뭐, 세상사 그렇게 매뉴얼대로 흘러갔으면. 내가 1천 번이나 뒤질 일도 없었겠다만.
아니지. 부정적인 생각 멈춰. 어쨌든 지금은 이성적으로 대처할 때가 맞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냐. 수아야.”
우선은 수아의 의중을 떠보는 질문부터 시작.
그에 대한 수아의 반응은, 가장 평범한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이상하잖아요.”
“뭐가.”
“게이트 붕괴 때만 되면 잠에 들어버려요. 어김없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그것도 오빠 방에서만요!!”
“그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 내가 침대엔 돈을 안 아끼긴 해. 원래 잠이 보약이거든.”
“아잇! 시치미 떼지 마요! 오빠!!”
그나저나 이번엔 눈치채는 게 좀 빨랐다.
평균적으론 6차, 7차 붕괴 이후로 저걸 추궁해 오는데.
전에 나눴던 대화. 혹은 어떤 행동에 의해 변수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의심의 씨앗이 증폭된 거지?’
아니.
아니지. 아니구나?
어쩌면 의심이 증폭된 게 아니라… 단순한 태도의 변화일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는 ‘혹시?’ 하는 의심을 좀 길게 품고 있었고. 이번엔 의심이 들자마자 바로 나한테 하소연하는 거지.
‘이 가설도, 꽤 일리가 있는데?’
즉 몇 번째 회차든. 수아는 5차 붕괴 이후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다는 소리.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의심할 건… 그저께의 남산타워 나들이인가.’
그 경험으로 내가 좀 더 편해졌거나. 아니면 한층 불편해진 거다. 덕분에 나를 대하는 태도도 좀 더 직설적으로 바뀐 게 아닐까.
역시 그 나들이는 여러모로 무리수였나 싶어서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때늦은 후회를 접어버렸다.
‘그런 자잘한 변수까지 염두에 두는 건 불가능해.’
나는 신이 아니니까.
뭐, 애초에 전생에 한 번도 없던 일이 발생한 것도 아니다.
시기가 좀 앞당겨져서 깜짝 놀랐을 뿐. 대책이 준비된 마당에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맞아. 사실이다. 내가 재운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냥 이실직고하기. 이것이 가장 올바른 대처법이다.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일단 잘 하지도 않는다.
임시방편으로 둘러대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
‘여기서 거짓말을 하다 들켜버리면. 거기서부터 모든 게 틀어진다.’
수아의 신뢰가 단숨에 나락까지 치닫는다.
한번 잃은 신뢰를 복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상대가 배신감과 불신에 차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그 상태가 되면. 수아가 이제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는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건 곧 수아의 사망률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가지 말라는 데로 가서 죽고.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죽곤 한다.
전생에서 수도 없이 그랬듯이.
“…믿으라고요? 제가 오빠를요?”
“어떻게, 제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가 있어요?”
“오빠는… 제가 오빠를 믿을 수 있게 해줬어요?”
수아의 목숨도 목숨인데. 내 멘탈도 많이 힘들어진다.
그 불신에 찬 시선과 경멸에 찬 표정. 더는 보고 싶지가 않다.
다른 것보다도 그게 싫다.
“아니… 하. 그, 그럴, 수가.”
수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하다.
이내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예요?”
뭔가 이유가 있으면 말해줘라.
나는 너를 진심으로 믿고 싶다. 수아의 눈빛이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유를 말해줬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저를 지켜요?”
“그래.”
“오빠 집에서 저를 재워버리는 거랑, 지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너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이 집엔 배리어가 둘러쳐져 있어.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않는 아주 강력한 배리어가.”
“여, 여기에?”
수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우리 집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여기에.”
냉장고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찬물을 한 번 시원하게 들이킨 다음. 한결 차분해진 머리로 천천히 설명했다.
“붕괴 때마다 너를 재운 이유는 두 가지다.”
“두 가지……? 뭔데요?”
“첫째론 네 멘탈을 보호하는 것. 둘째는 설명하기가 곤란해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 집에 강력한 배리어가 둘러져 있는 이유. 나는 그걸 지금도 너한테 설명해 줄 수 없다.”
“아?”
배리어의 출처를 설명하려면 나의 강함을 설명해야 하고.
나의 강함을 설명하려면, 영원회귀를 필수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걸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해진다. 그리고 네가 덥석 믿어줄 거라는 보장도 없어.”
빌드업을 완벽하게 해놓지 않는 이상, 수아는 내 영원회귀를 안 믿어줄 때도 많다.
내가 압도적인 무력을 눈앞에서 보여줘도 마찬가지. 오히려 ‘부정한 짓으로 힘을 키운 게 아니냐?’라고 나를 의심할 때도 있다.
“그래서 설명하길 포기했지. 말을 안 하고 재워버린 이유는 그거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서 세상을 본다.
살면서 쌓아온 상식들이 곧 그 사람의 가치관. 세상을 투영하는 세계관이다.
‘회귀 초창기에 영원회귀를 밝혀버리는 건 위험해. 리스크가 있다.’
영원회귀는 수아가 쌓아온 상식을 완전히 박살낸다.
그래서 그녀의 무의식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그것이 그대로 나에 대한 거부감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수아가 영원회귀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려면… 최소 9차 붕괴까진 가야 한다.’
9차 게이트 붕괴.
열강들의 웬만한 헌터 협회와 정부가 완전히 궤멸한 뒤. 세계 전역이 죄다 구심점을 잃어 무법천지 아포칼립스로 변해가는 시기다.
상식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 시대.
그때가 되면 비로소 수아는 영원회귀를 쉽게 받아들인다.
“그, 그게 뭐예요. 대체…….”
수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이제 나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애매한 내 태도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
“…….”
침묵이 이어진다.
차갑고 날 선 분위기.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질 것 같다.
그래서 섣불리 무슨 말을 꺼내기도 애매하다. 아마 수아 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부터가 진짜 문제군.’
나도 깊게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어떻게든 나의 결백을 주장하는 흐름으로 이야기를 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남은 건 불신 끝에 파국뿐.
그런데 거기까지 향하는 과정에서 아직 확정된 정답이 없다.
‘미치겠구만…….’
인간관계는 나비효과의 집합체다.
서로 교류하는 자잘한 순간들. 그 모래알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모래성 같은 것.
그래서 쌓은 것은 나지만, 정작 무슨 형태로 모래성이 완성될지는 나조차 모른다.
‘똑같은 말에도 전생마다 다르게 반응을 하니, 원.’
나는 분명히 똑같은 과정으로 쌓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모래의 성질과 그날의 날씨, 습도 등. 예기치 못한 수많은 변수에 의해, 최종 형태가 제멋대로 바뀌는 것이다.
‘이번에도 농담으로 시작해 볼까?’
나의 호감도가 아직 일정 수준 이상이라면 먹힌다.
먹힌다면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지고, 최상의 결과가 될 확률이 높다.
반대로 지금 농담이 나오냐, X발놈아? 라는 식으로 흘러가 최악의 대화 단절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바로 2회차 전의 전생이 아마 그랬을 거다.
‘아니면 그냥 당당하게 호소할까.’
이건 호감도보단 신뢰도의 문제가 된다.
성공률은 이게 약간 더 높은 편. 그녀가 날 아직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성공률이 크게 좌우된다.
문제는 꽤 길게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중간에 말 한번 잘못하면, 이것도 완전히 엎어질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웬만하면 둘 중 하나다.’
저 둘이 그나마 성공률이 높은 편에 속하는 선택지.
다른 선택지들은 이미 대부분이 쓰디쓴 고배 끝에 폐기되었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
“아바, 아빠아!”
문득 소파 쪽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와 수아가 동시에 퍼뜩 어깨를 떨었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브였다.
“아빠. 맘마. 맘마아.”
이브가 두 팔을 쭉 뻗은 채 나를 간절히 쳐다본다.
당당히 맘마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바아. 배고파아. 맘마. 삥크. 삥크 맘마조. 으응?”
내 반응이 없자 이브는 재차 보채왔다.
강렬한 시선이 사정없이 쑤셔온다. 더 이상 무시하긴 좀 그랬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스읍.”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덜컹. 구석에 쌓아놓은 딸기우유를 하나 꺼냈다.
“자. 핑크 맘마다. 아껴 먹어라.”
우유 팩을 까서 이브의 양손에 꼭 쥐여줬다.
“우햐~! 우갸아!”
좋아 죽는 이브.
그녀가 우유팩에 코박죽을 했고. 숨도 안 쉬며 우유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망했다. 완전 계획이 꼬여버렸군.’
이브가 있는 걸 잊고 있었네.
이브의 난입으로 산통을 제대로 깨버렸다.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보는데.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하지.
조심스럽게 수아를 쳐다봤다.
“…음?”
근데 수아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만면에 불쾌함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딸기우유 흡입하는 이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 오, 오빠.”
수아가 연신 헛숨을 퍽퍽 들이키며 나를 불렀다.
이내 더듬더듬 말문을 텄다.
“이, 이, 이브가. 마, 말을 하네요?”
“…아.”
나는 그제야 수아의 반응을 이해했다.
수아는 이브가 던전발 외계인인 걸 모른다.
그녀에겐 생후 일주일 된 갓난아기가, 별안간 말문이 트인 기인열전으로 보일 테지.
“아, 아빠? 지금 분명, 오빠한테 아빠라고 한 거죠?”
“그래. 아마 맞는 것 같다.”
“맘마 달라고?”
“맞아. 그래서 줬지.”
“근데 딸기우유가 왜 맘마예요?”
“…….”
“벌써부터 저런 거 먹어도 돼요? 크,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나한테 물어봐도 곤란하다.
딸기우유는 내가 아니라 이브 본인의 요구니까.
마침 말문도 트였겠다, 이브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떠냐. 수아야.
“…으음.”
내가 말없이 고개만 젓고 있자니.
수아가 성큼성큼 이브한테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브!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분유 먹어야지!”
그리고 덥석!
냉큼 이브의 딸기우유를 뺏어 들었다.
“…후아?”
이브는 딸기우유를 뺏긴 자기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내 뺏어간 당사자인 수아를 올려다봤고. 그녀의 손에 들린 딸기우유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빼애애애애액!!!”
엄청난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나라 잃은 나라님도 옆에서 울다가 머쓱해질 수준. 아주 대성통곡을 했다.
“내 거어어! 내 맘마! 내 거야아아!!”
바둥바둥 버둥버둥.
이브가 소파 위에서 온몸을 비틀며 시위를 감행했다.
수아도 설마 이 정도로 반향이 엄청날 줄은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 안 돼 이브! 이거 먹으면 아야 해, 아야!”
“안 해!! 미워! 엄마! 맘마 뺏어가! 엄마 미워어엇!!”
이브가 수아를 빤히 노려보며 빽빽 소리 질렀다.
수아는 엄청나게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으, 어? 어, 엄마?! 내가 왜 네 엄마야?!”
억울함을 가득 담아 소리치는 강수아.
그녀가 얼굴을 한껏 붉게 상기시키고 나를 흘끔거린다.
내 마누라로 엮인 게 어지간히 수치스러운 모양.
“줘!! 맘마! 엄마, 내 맘마 줘어!!”
“안 돼! 이건 못 줘!”
“빼애애액!! 줘어어어!!”
“울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쯤 곤욕을 치렀으면 애새끼 탈나든 말든 딸기우유 돌려줄 법도 한데. 수아가 은근히 쇠고집이었다.
수아가 좀 자기 주관이 뚜렷한 애긴 하지.
“이거 참.”
이대로 놔두면 저 울음소리 때문에 또 사방에서 민원이 들어올 것이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나는 그쯤에서 수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수아야. 그냥 네가 줘라.”
“…네? 뭐, 뭘요!”
“그냥 네가 주라고. 이브 맘마.”
이쯤이면 넌 할 만큼 했다.
딸기우유를 다시 돌려주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쫘악! 갑자기 수아가 얼굴을 터질 듯이 붉히며, 내 싸대기를 후려쳤다.
“오, 오빠! 미쳤어요?! 농담으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노발대발하며 숨을 몰아쉬는 강수아.
내 스탯이 스탯이라 맞은 게 아프진 않다. 다만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뭐가. 무슨 소리냐. 수아야.”
“저, 저보고 이브 맘마를 주라면서요!”
“그랬지.”
“안 나와요!”
“……?”
“오빠까지 왜 그래요! 제가 진짜 얘 엄마가 아니잖아요!! 근데 어떻게 맘마를 줘요!”
“……?”
이, 발칙한 계집애가.
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냐.
“주라고.”
억울함을 가득 담아 딸기우유를 가리켰다.
가리키는 걸로 부족해서 우유팩을 확 뺏어 들었다.
“이렇게.”
그리고 그걸 다시 이브에게 돌려줬다.
이브는 행복한 얼굴로 다시 딸기우유를 먹기 시작했다.
“갸! 갸우! 아빠, 아빠 조아! 맘마! 삥크 맘마! 으히히.”
아. 수아의 짤막한 탄성.
아찔한 표정으로 가만히 중얼거린다.
“아, 아하. 그, 그렇게. 주라고… 아하.”
그제야 자기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수아가 해쓱한 얼굴로 나를 홱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
다시 한번 거대한 침묵이 도래했다.
수아의 새빨개진 얼굴이 한없이 바닥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겠다. 이제.’
될 대로 돼라. X발.
이미 사태는 내가 컨트롤 가능한 지경을 아득히 넘어섰다. 이제 이 뒤로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조차 안 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가만히 수아의 반응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