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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3화 (33/235)
  • 33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9)>

    생각보다 얼마 안 된 일이다.

    대충 800, 아니 850회차쯤인가. 정확히 몇 번째 전생인지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딱히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수아야. 오늘은 무조건 우리 집에 와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마.”

    다짜고짜 수아네 집에 찾아가 그런 부탁을 했다.

    그리고 수아의 표정과 시선은 더없이 싸늘했다. 혐오와 경멸이 들끓는 표정으로,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제가 왜. 오빠 말을 들어야 하죠?”

    왜냐고?

    왜겠냐. 오늘 일어날 일들을 내가 전부 꿰고 있으니까.

    네가 오늘 죽을 확률이 터무니없이 높으니까.

    “…….”

    그리고 우리 집은, 이 세상 어디보다도 안전한 곳이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어놨으니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을 거다.

    “수아야. 네가 날 믿지 못하는 건 알고 있다.”

    그 회차에서. 나는 이미 모종의 이유로 수아에게 모든 신뢰를 잃었다.

    무슨 말을 아무리 조리 있게 한들, 아마 그녀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도 않겠지. 그것도 안다.”

    하물며 내가 시공 회귀를 했고. 존나게 강하다느니.

    그러니까 네가 죽을지도 모르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우리 집에 가두려 한다니.

    그딴 개불알 빨아먹는 소리. 나 같아도 안 믿는다.

    믿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더 믿어줘. 부탁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오체투지를 했다.

    지면에 온몸을 납작 처박았고.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런 기분일까?

    인조, 족같았겠구나. 심심한 동정을 표한다.

    “…믿으라고요? 제가 오빠를요?”

    수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내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고 했다. 물론 힘 스탯이 지구 최강인 내가 꿈쩍 할 리는 없었다.

    결국 수아는 헐떡거리며 나를 일으키는 걸 포기했다.

    “하아. 어떻게, 제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가 있어요?”

    대신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나도 정말 그러고 싶었어요. 근데 오빠는… 제가 오빠를 믿을 수 있게 해줬어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 개족같은 전개를 맞이했겠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와중.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냥 재워버릴까? 오늘 하루 내내?’

    하지만 곧장 단념했다.

    수아가 마력의 취급에 익숙한 헌터라면 상관없지만. 그녀는 던전에 손가락 한 번 담가본 적이 없는 일반인 중의 일반인.

    던전발 수면 마법을 지나치게 길게, 혹은 자주 사용하면. 마력 중독에 빠져서 다시는 못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

    반박은 받지 않는다.

    그 마력 중독으로 수아를 한 번 죽여보고 하는 말이다.

    ‘지금은 배리어 위치를 바꿀 수도 없고.’

    우리 집에 걸어놓은 배리어.

    무려 S급. 내가 가진 최강의 방어 스킬인 <아이기스 암즈>라는 광역 방어 스킬인데.

    재사용 쿨타임이 무려 15일. 보름이나 된다.

    ‘이번 배리어 재구축 기회는 이미 써버렸다.’

    나는 회귀할 때마다 항상 선택한다.

    이 ‘아이기스 암즈’를 그녀의 집에 두를지, 아니면 우리 집에 두를지.

    통상적으로 우리 집 쪽이 생존율이 좀 더 높았다. 이유는 너무 복합적이라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그래서 언제부턴가는 우리 집에 두르고, 수아를 이쪽으로 유도하는 게 기본이 됐다.

    ‘지금 강제로 우리 집에 가둬놔 봤자, 수아가 일어나면 곧장 자살한다.’

    수아는 지금 뼛속까지 나를 불신하는 상태.

    갑자기 전처럼 잠에 들어서 한참 후에 깨어났는데. 우리 집에 갇혀있는 상태다?

    그녀는 칼같이 자살을 해버린다.

    ‘왜인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겠다만.’

    내게 능욕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그냥 나에 대한 실망감에 짓눌린 건지.

    어쩌면 단순히 꾹 참아왔던 절망과 공허, 게이트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 감금 사태로 폭발한 걸 수도 있다.

    [죽어. 쓰레기. 짐승 같은 새끼.]

    어쨌든 결과는 수아의 자살. 무조건 그렇게 된다.

    그녀는 우리 집 거실에 목을 맨 채 발견되고. 옆에는 그런 쪽지만 남아있을 것이다.

    ‘죽어. 쓰레기. 짐승 같은 새끼.’

    얄궂게도 그 쪽지의 내용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수아가 나를 이유로 자살할 때면. 어김없이 유서에는 저 세 마디가 적혀있다.

    ‘어떻게 슬립 스킬이 먹힌다 해도. 시간이 문제다.’

    슬립 스킬의 1회 최대 수면 시간인 12시간.

    그 안에 내가 오늘 붕괴할 던전을 제압할 수 있으면 상관없다.

    하지만 안 된다. 절대로 안 될 것이다.

    12시간 내로 그날의 던전 붕괴를 막아낸 적이,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 이제 믿어 달라고도 안 하겠다. 날 믿지 않아도 되니까 제발.”

    그러니 결국 이게 최선이다.

    수아에게 직접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더욱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한층 간곡하게, 없는 감정도 꽉 짜내서 말했다.

    “오늘 하루만 예전처럼 우리 집에 와라. 그리고 나가지 말아줘. 부탁이다.”

    그렇게 나의 간곡한 부탁은 끝내 결실을 맺었는가?

    맺었다. 실패라는 결실을 말이다.

    “…죽어. 쓰레기. 이 짐승 같은 새끼.”

    콰당!

    수아는 지긋지긋한 그 멘트를 직접 입으로 담았고. 매몰차게 현관문을 닫았다.

    나는 그야말로 영혼 빠진 인형처럼, 망부석이 되어 한참이나 그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

    어김없이 던전은 붕괴했다.

    13번째 게이트 붕괴. 12월 22일.

    63빌딩 상공이었다.

    ―왜 그렇게 죽상인가, 초인.

    그때 붕괴했던 건, 공교롭게도 제77던전.

    외눈박이 백사자 무르무르가 지배하는 어스름의 세계였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웃어보라고. 크큭.

    놈은 나를 볼 때마다 그랬듯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고.

    나는 놈을 보자마자 체념의 한숨을 흘렸다.

    “…X박았네. X발.”

    무르무르는 다른 던전 마스터들과 한 차원이 다르게 강하다.

    다른 던전 마스터라면 14번째 붕괴도 거뜬히 막았겠지만. 당시 나로선 무르무르가 12번째에 나왔어도 승리를 함부로 점칠 수 없었다.

    ―초인. 두려운가? 내가 두려운 게냐??

    지금 내 앞에 등장한 무르무르의 체장은 족히 300미터에 육박한다. 이미 생물이 아니라 움직이는 지형지물 수준.

    14번째 붕괴에 나왔으면 저기서 얼마나 더 커지는 거지. 상상도 하기 싫다.

    ‘이번 생은 여기까진가.’

    그렇게 확신하면서도.

    스르릉! 나는 아공간을 열어 수많은 무기들을 한꺼번에 꺼냈다.

    그것들을 내 주변에 둥둥 띄워 배치한 뒤. 한껏 투지를 머금고 허공을 박찬다.

    “죽어……!”

    투하악! 곧장 놈에게 달려들었다.

    무르무르는 이빨을 갈며 즐거운 듯이 그르렁거렸다.

    ―크하핫. 역시 화끈해서 좋단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절대로 회차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포기하는 경우는 단 하나. 살아있어야 할 목적이 사라졌을 경우.

    수아가 죽었을 때뿐이다.

    ―즐겨보세나! 초인!!

    콰쾅, 콰자자작!

    번갯불과 충격파, 그리고 가공할 풍압이 주변을 마구 휩쓸었다.

    건물들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서울 전역이 화마에 휩싸였고, 하늘은 갈수록 짙어지는 시커먼 어둠에 뒤덮였다.

    ―크하하하하핫!

    그날.

    한강 아래의 서울 및 경기지역은 사실상 소멸한다.

    나와 무르무르가 전투를 속행하는 와중. 본의 아니게 개미 새끼 한 마리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덤벼봐라! 더 필사적으로! 더 애달프게 말이다!!

    “……!!”

    이미 헌터 본부도 한국 정부도 와해된 지 오래.

    우리의 전투를 중재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꺄아아아악!”

    “으아악! 아아아악!!”

    저 아래. 까마득한 지상에서 힘없는 민간인들이 죽고 터져나가는 모습이 얼핏 보인다.

    공허한 단말마의 절규가 귓가를 스친다.

    ―초인! 어딜 보고 있는 게냐!! 하하하핫!!!

    “크욱!!”

    그러나 엑스트라들 신경 쓸 틈은 없다.

    잠깐만 저 괴물에게서 신경을 돌리면. 나 역시 꼼짝없이 죽는다.

    저 아래 엑스트라들과 나는, 처지가 다를 게 없었다.

    “그으으윽……!”

    서걱. 팔뚝이 어깨부터 송두리째 날아갔다.

    푸드득. 뿌득! 배에 구멍이 뚫린다. 얼굴 가죽이 손톱의 풍압만으로 벗겨져 버린다.

    허벅지에 손톱이 스친다. 반대편 다리까지 한꺼번에 뜯겨나갔다.

    “…리스토레이션……!”

    리스토레이션.

    리스토레이션.

    그리고 또 리스토레이션.

    몸의 부하를 무시하고 무작정 육체를 강제 수복한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더 싸운다. 놈에게 대미지를 더 입힌다. 죽이기 위해 노력한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아아아……!!”

    힘의 차이는 현격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도 지리멸렬하다 느낄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덤벼들었다.

    예상대로였다. 전투 시간은 12시간을 훌쩍 넘어,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흐음.

    “허억. 허어… 커헉. 후우…….”

    새벽 여명에 비친 무르무르의 거체는 자잘한 생채기가 났고.

    나는 이미 한계까지 몸을 혹사해, 온몸이 말단부터 부패하고 괴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영 재미없군.

    무르무르는 타오르는 새벽놀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료함과 권태가 뼛속까지 찌든 말투. 놈은 광기가 서린 붉은 눈매로 이죽거렸다.

    ―이쯤 하지.

    무르무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푸각! 뿌드득!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기 목을 쑤셔버렸다.

    ―다음엔 좀 더 강해져 있길 바라네. 초인.

    무르무르는 단박에 목을 관통해 버린 손톱을, 그대로 힘껏 휘두른다.

    서걱. 맥없이 잘려버린 무르무르의 거대한 머리. 그것이 힘없이 바닥에 추락한다.

    쿠웅. 육중한 땅울림이 울었다.

    ―재회가 기대되는군. 그렇지 않나? 크크큭.

    놈은 하나뿐인 눈을 구부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

    나는 그 숨 막히는 광기를 직면한 나머지 잠깐 숨도 쉬지 못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곧장 우리 집으로 날아갔다.

    “사, 살았다……!”

    결국의 결국엔 내가 살아남았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결국 무르무르는 죽었고. 던전은 그렇게 폐쇄됐다.

    아직 이번 세계, 나의 생에 의미와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멈춰있을 수 없다.

    “수아. 수아야…….”

    쿠당탕!

    고속으로 허공을 가르던 나는 별안간 바닥을 굴렀다.

    비행 스킬이 캔슬되었다. 몸을 한계까지 굴려서 그런가. 스킬조차 내 마음대로 사용이 힘들었다.

    “기다려. 수아. 수아야… 내가……! 아직!”

    그래도 많이 날아와서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다.

    비척비척. 다리를 열심히 놀려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왼 다리가 완전히 부패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사악한 이단 놈들을 쳐 죽여 버리자!!”

    “오오오! 우우우우!!”

    문득 성난 군중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시선을 흘깃, 소리 나는 곳으로 돌렸다.

    이젠 꽤 익숙해진 광경이 나를 반겼다.

    “던전만이 살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던전에 대한 공포가 너무 강해져 버린 탓인가.

    멸망을 향해 시시각각 달려가는 한국. 서울 시내의 얼마 안 남은 생존자들에게선, 던전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는 중이다.

    “오오오, 던전 신님,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통받는 건. 세계의 순리인 던전과의 합일을 거부하고, 지구의 낡은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건 이런 어처구니없는 교리였다.

    “이 세상 것을 숭앙하는 사특한 이단 놈들을 죽여버리자!!”

    “죽여라! 족같은 악마 새끼들, 다 죽여버려!!”

    그리하여 벌어진 것이 눈앞의 광경.

    놈들은 어떻게든 정신 줄 잡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다른 선량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다 태워버려!!”

    수많은 시체들이 아스팔트 위에 동산만큼 쌓였고. 기름불에 휩싸여 불타오른다.

    딴에는 정화의 의식이란다.

    “사,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꺄아아아악!”

    푸직, 푸화악!

    다양한 무기를 빼든 헌터들이 그들의 선봉에 서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도살했다.

    한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헌터들은, 인간 도살장의 망나니가 되었다.

    “죽어! 이 불신자 새끼들!”

    “다 죽여버려!!”

    저 광기를 멈춰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이 세상엔 경찰도, 군대도, 정부도 헌터 협회도 전부 망해버렸으니까.

    “던전 신님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둬라!!”

    그리고 그들의 뒤편. 긴 장대를 든 인간의 무리가 우글우글 걸어온다.

    개선장군 행차하듯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하고 있다.

    “어리석은 불신자들아! 이것이 너희들의 말로다!!!”

    놈들이 든 장대 끝자락에는 인간의 잘린 머리가 효수되어 있었다.

    재수 없게도. 본보기 삼아 ‘불신자 사냥’을 당한 것이다.

    “…….”

    광기 어린 고가도로 행진을 묵묵히 쳐다봤다.

    내 시선은 효수된 목. 그중 하나에 계속 붙박여 있었다.

    “…흐.”

    허탈하게 웃었다.

    시커멓게 혈색이 죽고, 혀를 길게 빼문 수아의 머리를 본 순간.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라이트닝 헬릭스.”

    나도 모르겠다.

    사실 이 부분은 기억이 좀 애매하다.

    지금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먹먹했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딱 하나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

    서울 상공 높은 곳까지 날아가, 사방을 향해 번개 폭격을 내리꽂는 나의 모습이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라이트닝 헬릭스…….

    …….

    …….

    “던전 신님! 부, 부디! 부디 진노를 거두어주세요!!!”

    던전교 놈들은 끝까지 던전신을 부르짖었다.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서, 아가리 벌리고 번개 펀치를 쑤셔 박았다.

    놈들은 애타게 부르짖던 던전신의 품에 사출되었다.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그날은 던전이 열리는 날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 천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죽었다.

    당연히 전부 내가 죽였다.

    인명 피해만 따지면 무르무르보다 내가 더 많이 죽였을 정도.

    “…후우.”

    대의는 없다.

    딱히 변명할 생각도 없다.

    화풀이 맞다. 그냥 존나 화나서 그랬다.

    사람 형체인 건 보이는 족족 다 죽여버렸다.

    뭐. X발. 어쩔 거냐.

    누가 날 심판할 거지?

    판사, 배심원, 검사, 변호사, 피의자, 피해자까지. 내가 오늘 다 죽여버렸는데.

    내 살육은 하루 내내 이어졌다.

    “미안하다. 수아야.”

    구더기가 꼬이기 시작한 수아의 목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줬다.

    그 옆에 내 자리를 하나 더 팠고. 다음 날 14번째 던전이 붕괴하는 순간, 블라이스의 단검으로 단칼에 내 목을 썰었다.

    지금껏 꾹 참아왔던 억하심정과 분노를 발산한 뒤라 그런가.

    그날따라 칼날이 순풍순풍 쑤셔 박혔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그렇게 그 회차는 지겹도록 반복된 배드 엔딩을 맞았다.

    나는 8백 몇십 몇 번째 2031년 11월 27일을 맞이했다.

    “오빠!! 또 저랑 대화하면서 딴생각 하는… 으엥?”

    여느 때처럼 멍하니 있던 나를 수아가 다그쳤고. 이내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내 뺨에 손을 뻗었다.

    “오, 오빠. 갑자기 왜… 울어요?”

    그 때 오랜만에 울어봤다.

    멀쩡히 살아서 재잘대는 수아를 보며. 무표정으로 눈물만 줄줄 쏟아냈다.

    * * *

    내가 이런 장황한 과거사를 갑자기 떠올린 이유.

    아주 간단하다.

    “오빠. 저한테 무슨 짓… 하고 있죠?”

    5차 게이트 붕괴가 끝난 다음 날. 수아는 아침부터 난데없이 그런 질문을 해왔다.

    나는 입을 콱 다물었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수아가 나를 뼛속까지 불신하게 되는 분기점.

    그 씨앗이 되는 질문이 바로 저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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