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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31화 (31/235)

31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7)>

백족이 거대한 아가리를 순식간에 다물었고. 나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콰자작! 사방으로 끔찍한 파육음이 터졌다.

―…그루루룩?!

뭐, 당연한 말이지만.

내 몸이 아니라 백족의 아가리가 박살 나는 소리다.

―퀘에에에에에엑!!!

파바바박!

백족의 아래턱에 무수한 혈선이 그어졌고. 이내 수많은 육편 조각으로 찢겨나갔다.

나는 찢어진 아가리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탈출했다.

“후우.”

스르릉!

피로 흠뻑 젖은 머리털을 잠깐 털어냈다. 대태도를 어깨에 짊어졌다.

파지직, 파직! 대태도의 칼날에는 어느새 새파란 스파크와 붉은 오라가 휘감겨 있었다.

[스킬 발동: 인챈트 / 번개의 분노]

[스킬 발동: 인챈트 / 절삭력 강화]

[스킬 발동: 인챈트 / 내구성 강화]

이 무형의 기운들은 인챈트형 스킬.

무기나 방어구에 사용하여 아이템의 성능을 증폭시키거나, 특별한 추가효과를 부여하는 특수 스킬들이다.

‘번개의 분노’는 무기에 벼락, 감전 속성을 추가해 준다.

‘내구성 강화’, ‘절삭력 강화’는 스킬명 그대로가 효과. 각기 장비의 내구성과, 날붙이의 절삭력을 대폭 강화해 준다.

‘이 정도는 해야 데미지가 온전히 들어가는군.’

같은 몬스터라도, 몇 번째 붕괴에 나오냐 따라서 스펙이 천차만별로 바뀐다. 5차 붕괴가 넘어가면 던전의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장송의 백족 역시 마찬가지.

놈의 경우 순번이 늦어질수록, 방어력이 특출나게 강해지는 편이다.

“…파악 끝났다.”

어느 정도의 출력에 대미지가 박히는가.

그것을 완벽하게 체득했다.

‘아직 좀 약해.’

나는 아까 백족에게 삼켜질 때. 놈의 대가리 전체를 썰어 넘길 작정으로 칼질을 했다.

턱주가리에 기스 나는 정도론 만족 못 한다.

[스킬 발동: 매질 강화]

칼날 표면을 긁어 스킬을 하나 더 발랐다.

파지지직! 칼날에 흐르던 스파크가 더욱 증폭되었고. 검붉은 아우라의 빛깔도 더욱 선명해졌다.

매질 강화.

현재 인챈트 스킬이 사용된 아이템의 효율을 더욱 증폭시키는 스킬이다.

―그르… 크르르르……!

뒤룩뒤룩.

놈의 수십 쌍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간다. 내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기운에 경계심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다.

―쿠에아아아악!!

하지만 백족은 키메라. 인조 생명체.

기본적으로 무지성인 괴물이다. 야수 같은 육감도 달려있지 없다.

그렇기에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한번 불도저처럼 내게 달려드는 선택을 했다.

“우리 복족이는 착하기도 하지.”

지면을 박찬다. 그리고 허공을 밟아, 한 번 더 가속한다.

푸쉬이익! 음속에 가까운 속도. 대태도를 치켜든 채 백족의 미간에 쇄도했다.

“얼마나 좋아. 알아서 죽으러 와주니.”

가공할 속도로 서로가 가까워진다.

침착하게 타이밍을 쟀다. 하나, 둘, 셋.

‘바로 지금.’

양손을 거세게 휘둘렀다.

콰드득! 대태도를 놈의 미간에 쑤셔 박았다.

―그루루룩……?!

푸바바박!

질펀한 파육음. 아니, 폭발음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놈의 대가리가 풍선처럼 폭발해 버렸다.

―……!!……!!!

콰드드득!

머리를 잃은 백족의 거체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관성에 따라 한참이나 지면을 긁어대며 꿈틀거렸다.

쿠구구궁! 그것만으로도 주변에 어마어마한 땅울림이 일었다.

―……!!……!!!

백족의 거대한 다리 수백 개가 일제히 버둥거린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놈의 의미 없는 발악이 서서히 잦아드는 차.

“크기가 저렇게 크니 이거. 돌진만 해도 기본이 초토화구만.”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백족의 신체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곳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마도 어린이대공원…이었던 것. 추측조차 어려울 정도로 완파된 폐허만 있었다.

‘아파트 밀집 단지가 아닌 게 어디야.’

그랬으면 백족도 문제지만, 나머지 잡몹 키메라도 심각한 문제가 됐을 거다. 내가 백족을 죽이는 동안 잡몹들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잡아먹었을 테니까.

나는 한숨 겸 탄식을 길게 흘렸다.

‘지금만 해도… 벌써 꽤 많이 탈출했네.’

현자의 눈으로 시야를 넓게 확장했다.

나와 백족 주변을 서성이는 키메라가 있는가 하면. 이미 어린이대공원을 빠져나가 광진구 시가지로 흩어진 놈들도 꽤 많이 느껴졌다.

“귀찮게 됐어.”

인명 피해는 둘째 치고. 사람을 먹을수록 스펙이 강화되니까 문제다.

아무리 버러지 같은 잡몹이라도 수백, 수천 마리가 일제히 벌크업을 해온다? 나라도 당연히 부담을 느낀다.

다구리에 장사가 없는 건 동서고금 만고불변의 진리다.

“…음?”

부우우웅!

문득 왼손의 시계가 미친 듯이 진동한다.

슬쩍 시선을 내려봤다. 헌터 전용 스마트워치가 새빨갛게 빛나며, 무수한 경고 패널을 쏟아내고 있었다.

[경고: 코드 Z - 실제상황]

[게이트 붕괴 발생. 재난 레벨 최소 10으로 추정.]

그리고 삐비빅!

뒤이어 첨부 파일이 하나 도착했다. 좌표를 기재한 입체 지도 파일이다.

파일에 표기된 좌표는 볼 것도 없이 바로 여기. 서울 어린이대공원이다.

[좌표 송신 완료.]

[해당 문자를 수신한 헌터는 예외 없이 기재된 좌표로 즉시 출동할 것.]

[D급 헌터 한정용: 준전시 긴급소집 / D급 헌터 제16부대, 일반병 소속]

[불응 시 군, 형사상 중형에 처해질 수 있음.]

준전시 긴급 헌터 소집령. 지금까지도 게이트가 붕괴할 때면 항상 왔던 문자다.

한심함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빨리도 보낸다. 호성아.”

게이트가 열리고 백족이 등장한 지 벌써 5분도 넘었다.

이미 몇몇 키메라들은 시가지를 습격하기 일보 직전인 상황.

지금부터 좀 쓸만한 헌터들이 모이고, 편제와 전열을 가다듬는 데만 넉넉잡아 10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S급이 출격하려면 15분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늦는다.

이미 피해자는 만, 십만 단위까지 폭증할 것이다.

‘뭐, 애초에 도움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어.’

일주일 좀 넘는 사이에 무려 5번의 게이트 붕괴.

역사상 전에 없고 다시는 없을 미증유의 연속 재앙. 협회도 정부도 이 숨 막히는 템포를 끝까지 따라오지 못한 채,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야멸차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나저나.”

잡생각 좀 하면서 꽤 오랫동안 기다려줬다고 생각하는데.

이 빌어먹을 거대지네 새끼가. 아직도 장난질을 치고 있네.

“언제까지 뒤진 척 할 거냐, 복족아.”

쉬릭!

미약하게 경련하는 백족의 몸통 위로 훌쩍 점프해 올라탔다.

“개수작 멈춰.”

대태도를 들어 올렸고. 손잡이를 가볍게 돌려 역수로 쥐었다.

콰자작! 놈의 태산만 한 옆구리를 사정없이 헤집기 시작했다.

―…크뤠에에에에엑!!!

그러자, 비명 소리가 다시금 밤공기를 찢어발겼다.

분명히 놈의 대가리가 박살 난 마당인데.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렴 내가 한참 전에 한 번 속았지. 두 번은 안 속는다.

아까 내가 부순 건 진짜 대가리가 아니다.

―퀘게게게겍!

아니지.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진짜 대가리가 맞긴 하다. ‘진짜 대가리 중 하나’라고 해야겠다.

지금 백족의 몸통에서 우후죽순 솟아나고 있는, 무수한 대가리들처럼.

―끄에에에엑!!

―크기기기기긱!!

―크구구구구구!!

뿌드득, 우지직!

백족의 질긴 갑피를 뚫고 괴기스러운 머리통이 끊임없이 솟아난다.

기다란 몸통의 관절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빠짐없이 머리통이 꾸역꾸역 들어찬다.

―퀘오오오오오오!!!

그렇게 생겨난 수백 개의 대가리가, 일제히 하늘을 향해 포효를 쏟아냈다.

공기가 찌르르 울리는 엄청난 굉음. 한참 떨어진 우리 집에서도 선명하게 들렸을 수준이다.

이어진 백족의 행동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크르륵… 키이이이익!!

푸직, 뿌드드득!

놈은 그 거대한 신체를 크게 비틀었고. 주변에서 서성이던 키메라들을 일거에 짓뭉개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압사돼 피떡이 된 키메라들을, 수백 개의 대가리가 일제히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그룩… 크루룩…….

동족 살해.

그리고 포식.

―크거거걱……!!

놈은 지금 때 아닌 식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상처를 회복하고 더욱 진화하기 위해.

주변에 마땅한 생명체가 없으니, 자기 부하를 죽여 섭취하는 것이다.

―킥… 키기기긱!

―삐이익! 키갸갸갸갹!

생명의 위협을 느낀 잡졸 키메라들이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이내 황급히 백족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분히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다.

체격의 차이가 너무 현격하다.

―크웨에에에엑!!

쿠구구구구!!

잡졸들이 필사적으로 벌린 거리는 백족의 한 걸음에 불과하다.

놈은 거대한 원통형 육체를 데굴데굴 굴렸고. 무수한 키메라들을 일거에 압살시켜 버렸다.

―께에에엑!

―크게게게게겍!!

넓이가 100미터를 상회하는 특대형 로드롤러.

잡졸 키메라들은 로드롤러 앞의 개미 새끼들처럼, 그저 온몸을 으스러뜨리며 체액을 울컥 쏟아낼 뿐이다.

―크룩! 그루룩!!

뿌드드득!

엿가락처럼 늘어난 수백 개의 목들이, 빈대떡이 된 키메라 시체들을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변화가 백족의 온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루룩… 쿠에에에에엑!!

꿀럭꿀럭.

놈의 살갗이 액체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나 싶더니. 전체적인 덩치가 두 배 이상 비대해진다. 표피가 윤기를 흘리며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수많은 대가리에 달린 이빨도 더욱 날카로워졌다. 눈알이 있던 자리엔 촉수처럼 길쭉한 더듬이가 튀어나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변신을 마친 백족은 다시 한번 포효를 내질렀다.

―키이이이이이!!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저것이 장송의 백족 2페이즈.

하나의 던전을 책임지는 최종 보스답게, 2차 변신을 자행한 것이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

그러면 고민해 보자.

지금부터 저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가장 빠르게 숨통을 끊을 수 있을까.

살기등등한 위압감 앞에서 태평한 고민을 하자니.

“아부. 갸우.”

문득, 얌전히 안겨있던 이브가 내 가슴팍을 꾹꾹 잡아당겼다.

나는 퍼뜩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뭐냐. 이브.”

“아우우. 우갸.”

꾹꾹. 연신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내게 뭔가를 요구할 때 보여주던 특유의 띠꺼운 표정. 행색은 내 상의를 어떻게든 벗기려는 듯하다.

“흐음.”

나는 급박한 와중에 재빨리 머리를 굴렸고.

이내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이브. 미안하지만 난 남자다.”

“응애?”

“임신도 안 했다. 하고 싶어도 해당 장기가 구비돼 있지 않아. 그러므로 아기를 양육할 수 있도록 유선(乳腺)이 발달하지 않는다.”

“으, 응애…….”

“모유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해두자면. 사람의 모유에선 딸기우유처럼 새콤달콤한 맛이 나지 않…….”

“갸우우우!”

팍, 파팍.

이브가 짜증 부리듯이 내 가슴팍을 툭툭 두들겼다. 답답하다는 양 표정을 왕창 찡그리고 있다.

뭐지.

배가 고픈 게 아니었나.

“흡.”

투콰콰쾅!

별안간 내가 펄쩍 점프했고. 쭉쭉 늘어난 백족의 대가리가 그 자리에 쉴 새 없이 처박혔다.

그새를 못 참고 백족이 힘자랑을 해온 것이다.

“…쯧.”

외계인 아가랑 오랜만에 교감 좀 해보겠다는데. 그걸 방해하는군.

살짝 짜증이 일어서 손아귀를 오므렸고. 어깨 뒤로 한껏 당겼다.

“너는 좀.”

파지지직!

오른손을 중심으로 거센 스파크가 얽히고설켜, 눈부신 번개의 그물망이 형성되었다.

거대하고, 더욱 거대하게. 어린이대공원 하늘을 뒤덮을 만큼 비대해진다.

“잠깐 닥치고 있어 봐라.”

번개 그물이 백족을 뒤덮을 만큼 거대해진 순간.

손을 힘껏 내뻗었다.

[스킬 발동: 천라(天羅)]

투학!

그물이 백족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물의 형태라곤 해도 번개는 번개. 속도는 가히 빛살처럼 빨랐다.

―끄륵……!

백족은 정면에서 덮쳐오는 그것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거대한 상체의 절반가량이 섬광의 그물에 뒤덮였다.

―크로로로로록!!

파지지직!

섬광이 위협적으로 번득인다.

백족은 감전된 버러지마냥, 온몸을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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