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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25화 (25/235)

25화

<1001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1)>

파란의 휴일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김없이 4차 게이트 붕괴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오늘도 D급 헌터 부대의 일원으로서, 마포대교 주변의 한강 둔치에 도열해 있었다.

‘오늘은 빼먹은 거 없겠지?’

집 안에 쳐둔 배리어. 2중, 3중으로 확인하고 왔다.

수아는 확실히 재웠나? 코 고는 것까지 확인하고 왔다.

그리고 하트 기어… 아니. 거기서 부화한 종말의 이브.

‘걔는…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허여멀건 꼬맹이를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한숨부터 나왔다.

그 던전발 외계인 아기, 이브도 원래는 수아와 함께 재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알림: 스킬 사용불가]

[해당 대상은 모든 스킬에 면역 상태입니다. 스킬 효과를 일체 무시합니다.]

이브에게 ‘슬립’ 스킬을 사용하려 한 순간. 내 앞에 그런 경고창이 떠올랐다.

확신할 수 있다. 1천 번의 전생을 통틀어서 최초로 있는 경험이었다.

모든 스킬 면역? X발 장난하냐?

그런 개사기 특성을 가진 몬스터가 있었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근데 또, 현자의 눈은 먹혔단 말이지.’

모든 스킬에 면역이면 당연히 현자의 눈도 안 먹혀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의문이 남아있다.

하긴. 그것도 제대로 발동이 안 되긴 했지. 몬스터한테 인물 정보창이 뜨질 않나.

‘진짜… 갈수록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그 애새끼.’

어쨌든 걔는 집 안에 그냥 방치해놓고 나왔다. 스킬이 면역이라도, 제가 꼴에 갓난아기니까.

스테이터스상으로 이렇다 할 능력이 없는 건 확인했다. 현관문만 제대로 잠가놔도 걔는 우리 집에서 나가지 못한다.

“으… 으, 씨, X발. 왜 하필. 왜 하필 내가 헌터가 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

문득 옆에서 징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봤다. 유약한 인상의 20대 청년 하나가 울먹이고 있었다.

“어.”

뭐야. 익숙한 얼굴이다.

나는 일단 현자의 눈부터 발동시켜 봤다.

[인물 정보]

[명칭: 오경태]

[별칭: D급 헌터, 악운의 사나이]

거기까지.

나는 패널을 물리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진짜 그때 그 새끼 맞잖아.’

오경태. 분명 전생에서 같은 타이밍에 봤던 이름이었다.

워낙 낯익은 얼굴에 귀에 익은 대사 때문에 혹시나 했는데. 진짜 전생에 마주쳤던 그 징징이가 맞았다.

박현우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이번 회차는 정말로 뭔가 있긴 하군.

생전 다시 볼 일 없는 엑스트라들을 계속 재회하니 말이야.

“아… X발. 이번엔 그 새끼 안 나와주나.”

문득 부대원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기에 잠자코 있었다만.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서 동의한다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다. 에휴. X발.”

“야. 들었냐? 이번 붕괴 전조, 재난 예상 레벨이 8단계까지 찍혔다던데. 코드 S란다. S.”

“X발… 꼼짝 없이 뒤지게 생겼네.”

“이번엔 전조까지 나왔는데, 이 새낀 왜 안 나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제발. 제발 그 새끼만 나와줬으면…….”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그 새끼’를 찾고 있었다.

아하. 나도 그제야 그 새끼의 정체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관대하, X발아. 제발 좀 나와달라고―!”

관대하.

바로 나다. 레드 저거너트.

다들 영웅의 등장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

‘뭐, 기분은 좋군.’

영웅 취급을 받아서 기쁘다기 보다는, 우상화가 계획대로 흘러가서 좋은 것이다.

한 줄기 희망에 목맨 저 표정을 봐라. 그야말로 영웅의 구원을 부르짖는 민중들의 형상 아닌가.

이거야말로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이미지였다.

‘나도 마음 같아선 바로 출격해 주고 싶은데…….’

아쉽게도 이번 던전 붕괴에서 레드 저거너트의 출격은 없다.

왜? 하트 기어가 사라졌으니까. 정확히는… 웬 외계인 갓난아기로 변해버렸으니까.

이번엔 어쩔 수 없이, 이가 없으니 잇몸으로 대충 때워야 한다.

‘저번 생에 기획했던 전략도 물 건너갔군.’

속전속결.

S급 헌터 부대가 출격하기도 전에, 던전 마스터를 사살해 버리는 전략을 세웠지.

그럼으로써 S급 헌터 부대의 죽음을 사전에 틀어막고. 거기서 연계되는 민간인 수만 명의 희생을 막는다.

그 전략이 시작 단계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하트 기어가 없으면… S급 헌터 부대가 오기 전까진 절대 던전을 못 닫는다.’

하트 기어는 괜히 S급 아이템이 아니었다.

혈천갑의 압도적인 기본 공격력과 방어력. 블러드 스파이럴의 가공할 순간 파괴력. 블러드 스트림을 통한 터무니없는 기동력.

그리고 마지막 하나.

999번째 회차 이후로 써본 적도 없는 비장의 스킬까지.

그 전략은 어디까지나, 하트 기어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었기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우선. 무슨 던전이 열리는지나 볼까.”

내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쿠구구궁!

한강 한가운데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 *

푸화아아악!

마치 한강 중심에서 거대한 물 폭탄이 터진 듯했다.

찐빵처럼 둥그렇게 솟아오른 수면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거대한 파도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저, 저… 저거.”

D급 헌터 부대원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절망이 어렸다.

파도가 아니라 해일이 맞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물의 성벽이 시시각각 다가오며, 그들의 위로 아득한 그림자를 덧씌웠다.

“으, 으아아악!”

“저, 저게 뭐야!”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시민들과, D급 헌터들이 부리나케 파도를 피해 달아난다.

하지만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그것은 육안으로 목격된 순간, 이미 노력으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재앙이 아니었다.

“오, 온다아아아!!”

쿠르르르!

한강 물의 해일이 제방을 훌쩍 넘어 육지를 덮친다.

“그루룩… 크르륵!”

“푸합! 사, 살려… 살려줘!”

성난 파도는 지치지 않고 육지로 뻗어나갔다.

아파트, 가로수, 자동차, 빌딩, 그리고 사람. 맞닿는 모든 것을 분쇄하고 잡아먹으며, 여의도 전역을 수장시킬 기세로 넘실거렸다.

“…으음. 저런.”

나는 이미 공중부양 스킬로 해일을 피한 상태.

나 외에도 비행 관련 스킬을 익힌 헌터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모기향 짙게 쬔 버러지들인 양, 허공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이 종종 포착된다.

“씨, X발…….”

“뭐야. 대체… 지, 지금 무슨 일이……!”

극히 일부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상태.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히 수장돼 버린 여의도의 참상을 내려다본다.

“씨, X발… 이, 이건 미쳤어!!”

“으아아악!”

이내 헌터들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초토화된 여의도를 가만히 내려다봤고. 이내 혀를 낮게 찼다.

“벌써 한 1만 명은 죽었겠네. 쓰읍.”

이런 전방위로 쏟아지는 재해는 내가 커버를 쳐주기 힘들다.

내가 광역 배리어 스킬이 없는 건 아니다. 근데 그 유일한 광역 배리어 스킬, 지금 우리 집에 둘러쳐져 있다.

단 한 순간도, 이걸 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국인이 한 2천만 명쯤 일거에 집단 폐사 당할 위기면 생각해 보겠다. 그 정도 재앙이면 어차피 수아 멘탈이 못 버티니까.

“가뜩이나 하트 기어도 없는 마당인데.”

나는 가볍게 투덜거리며, 폭발의 진원지를 향해 흘깃 시선을 뒀다.

한강 물이 엄청난 열기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수면 위에는 어느새 거대하고 새하얀 건물이 둥둥 떠 있다.

순백으로 늘어진 열주와, 신성함이 느껴지는 다양한 부조들.

마치 그리스의 고대 신전을 연상케 하는 웅장함과 거룩함이 깃들어 있다.

고고한 자태의 신전. 가로 세로가 최소 수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백색 신전이었다.

‘사양(斜陽)의 신전.’

튀어나온 신전 자체는 몬스터도 던전 마스터도 아니다.

저건 문자 그대로 낡고 오래된 이세계의 신전. 던전 마스터가 똬리를 튼 둥지에 불과하지.

다만 저 거대한 질량이 물리법칙을 무시한 채, 공간을 찢고 한강의 한가운데 생성된 거다.

그때 생기는 엄청난 마력 에너지와 충격파. 당연히 가공할 해일이 발생할 수밖에.

“…가볼까.”

어쨌든 던전 마스터는 바로 저 신전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펄럭! 나는 인벤토리에서 시커먼 코트를 몸에 둘렀고, 코트에 달린 후드를 깊숙이 뒤집어썼다.

‘광학 미채 발산.’

치지징!

코트에서 유리 조각처럼 명멸하는 빛이 쏟아져 나왔고. 이내 내 신형을 신체 말단부터 서서히 지워나갔다.

내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혈천갑이 없으니, 이번엔 은밀하게 움직인다.’

지금 몸에 두른 시커먼 코트는 ‘광학 미채 슈트’라는 던전발 아이템이다.

특수 기능은 광학 미채 발산. 빛을 산란시키는 광학 미채를 코트 주변으로 둘러, 내 모습을 은폐한다.

의외로 판타지가 아니라 SF 계열 던전에서 파밍한 장비다. 속칭 클로킹이라고 하지.

이런 형상 은폐류 장비, 스킬들만 최소 5개는 갖고 있다. 원리는 다양하지만 결괏값은 비슷해서, 결국 효율이 가장 좋은 이 아이템을 많이 쓴다.

“우선은… 준비물부터 챙기고.”

내 기억이 맞다면. 사양의 신전을 완벽하게 폐쇄하기 위해선 준비물이 하나 필요하다.

다른 게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 하나 필요하지.

‘이 꼬라지가 돼선 좀 구하기 힘들겠는데.’

평소라면 발에 채는 준비물인데. 지금은 주변이 물난리로 초토화돼서 입수 난이도가 부쩍 올라갔다.

그나마 살아있던 몇몇 헌터들도 그새 저 멀리까지 도망가 버렸으니까.

‘좀 짜증나는군.’

일이 귀찮게 돌아간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현자의 눈을 전방위로 살포했다. 근방의 생존자 인원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해당 위치 내 생명 반응: 1개체]

“오?”

나는 의외의 결과에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반쯤 자포자기하면서 스캔한 거였는데. 단 한 명.

진짜로 주변에 생존자가 있었다.

‘어디. 어디지?’

현자의 눈 서칭 범위를 점점 좁혀가며 생존자의 위치를 색출한다.

이내 특정되었다. 완전히 수몰되어 버린 여의도 공원의 한가운데. 수면 위에 뭔가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푸쉬익! 나는 그쪽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저거다.”

그 물체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의 정확한 형상이 파악되었다.

남자였다. 휘황찬란하고 고급스러운 경장갑을 착용한, 유약한 인상의 사내.

“푸하악! 사, 살려! 아, 아, 아무나! 제발 살려줘요! 씨, X발! 엄마! 엄마아아!!”

남자는 절박하게 외치며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놈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이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거… 오경태잖아.’

일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낯이 익은 놈이었다.

오경태. 전생에서나 이번 생에서나, 불길한 말로 부대 분위기를 한 번씩 곱창 내던 그 새끼.

질리지도 않고 엄마 찾는 비명 덕분에 바로 알아봤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아니.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살아있는 인간. 준비물이 나를 위해 마련돼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나는 투명화를 풀지 않은 채 놈에게 다가갔다.

“어디.”

덥석!

놈이 입은 갑주 뒷목을 붙잡고 냅다 하늘로 끌어 올렸다.

‘…아하. 이래서 살아남았군.’

놈이 입은 경장갑을 가까이서 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해일에 가까운 강물의 파도를 처맞고도 이놈만 살아남은 이유. 바로 이 경장갑 때문이었다.

[아이템 정보]

[명칭: 수룡왕의 가호 (A급)]

[타입: 장비/상의]

[효과: 방어력 대폭 증가. 힘, 민첩 스테이터스 보정]

[효력 범위: 아이템 착용자에게 적용]

[상세: 제1832던전의 필드 보스 ‘수룡 그라함’의 처치 보상. 수속성 타격에 대한 면역력을 대폭 증폭시키며, 수중에서 일정 시간 호흡을 가능하게 한다.]

무려 A급의 장비.

직접 입어보지 않아서 정확한 스탯 보정이나 방어력 증가량은 모르겠다만. A급이 괜히 A급은 아니니 상당히 증가하겠지.

‘D급의 허접 헌터가 가질만한 물건이 아니야.’

B급 장비만 해도, 쓸 만하다 싶은 건 10억대 가격을 호가한다.

이건 볼 것도 없다. 전말이 대충 그려진다.

‘부모의 빽이군.’

오경태는 돈 좀 있는 집안 출신인 듯하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찾아 음메, 아빠 찾아 음메, 개지랄한다 싶었더니.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돈이 너를 살렸구나. 오경태.”

돈 없는 것도 서러운데, 돈 없어서 먼저 죽어야 하다니. 억울해서 이거 살겠나.

나는 무심결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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