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00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13)>
11월 27일로 다시 시간이 돌아가는 것. 과거로의 무한정 회귀. 이하 편의상 ‘영원회귀’라고 부르겠다.
영원회귀가 발동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별 탈 없이 12월 27일까지 한 달이 흐르고. 예정대로 최후의 15번째 던전 게이트 붕괴가 일어나는 것.
최종 15차 붕괴의 던전 마스터. 통칭 ‘그놈’. 그놈이 세상에 나오고 약 3시간이 지난 뒤. 세계 인구는 그놈의 손에 8할 이상이 초토화되고, 강수아도 당연히 죽는다.
그 시점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원회귀가 일어난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 12월 27일이 오기 전에, 내가 죽어버린다. 그러면 역시나 영원회귀가 일어난다. 이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999번째 회차는 전자의 케이스였다. 그리고 이번 1000번째 회차는, 후자의 케이스가 되시겠다.
“흐음.”
아공간에서 뽑아낸 푸른 단검을 허공에 몇 번 휘둘러봤다. 쉬쉭! 청명한 파공음이 울린다. 검의 궤적을 따라 시퍼런 검광이 번득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이게 좋겠다.”
블라이스의 단검. S급보다 한 단계 낮은 A급 무기.
대상의 단단한 외피나 실드의 방어력를 무시하는, 관통 공격력이 특징인 단검이다.
‘…자살하기엔 안성맞춤이지.’
이 세계에서 가장 살가죽이 튼튼한 인간. 한정용.
한정용의 뱃가죽을 뚫는 데 이것만큼 잘 듣는 것이 없다.
“스으으.”
배에 단검의 칼날을 정조준 한다.
심호흡을 길게 들이쉬었다. 망설임을 억지로 무시했다.
어느 순간. 짧게 기합처럼 숨을 내뱉는다.
“흡.”
푸직.
서늘한 칼날이 내 배를 쑤시고 들어왔다.
뱃가죽이 끓어오르는 듯한 고통. 몸속 깊은 곳에서 신음이 우러나온다.
“끄으윽……!”
지금껏 수많은 날붙이에 온몸을 꿰뚫려 왔다.
수천, 수만 번을 찔렸는데. 수천, 수만 번 찔릴 때마다 어김없이 비명을 질렀다.
‘한 번으론, 안 되지.’
푸직, 우지직!
빼고, 찌르고, 다시 빼고 찌른다.
“하아. 하아… 하아!”
뱃가죽이 너덜너덜 해지고, 주변 바닥이 피바다가 될 때까지. 탈인간 급으로 높아진 생명력 수치는, 내 목숨을 상상 이상으로 질기게 만들었다.
“X… 발. 아프네. 존나게.”
찔리는 공포는 익숙해진다.
근데 이 강렬한 고통은, 절대로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크, 허억. 흐으……!”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저절로 가빠져 온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생명력이 같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죽어가는 감각. 그것이 온몸으로 엄습한다.
‘무섭다.’
머릿속이 죽음의 공포로 둘러싸인다. 1천 번째 반복해도 죽음은 여전히 공포였다.
죽음이 무섭다는 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두려운 한편 기쁘기까지 했다. 그 일말의 환희에서 내가 망가졌음을 느낀다.
“…컥.”
그렇게 단말마의 한숨을 내뱉은 뒤. 의식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시커먼 늪에 머리끝까지 잠긴다.
[1000번째 도전은 실패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세상 속.
그런 문구와 아련한 목소리만이 내 감각을 어지럽혔다.
[기억과 유물을 계승하고, 1001번째 도전을 실행합니다.]
이 패널도 지긋지긋하다.
이젠 안 나오면 서운할 것 같을 정도다.
[회귀까지 남은 시간: 30초]
[스킵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당연히 [예]를 선택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지만. 패널은 내 의지를 곧잘 읽어 들였다.
[다음 회차로 계승할 유물을 선택하십시오.]
가지고 갈만한 아이템은 있었나? 아니. 딱히 없다.
그러면 쓸만한 스킬이나, 쓸만한 스킬의 강화 포인트를 얻었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야.
‘능력치를 계승한다.’
결국 이번 회차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삐빅. 곧 장문의 패널이 떠올라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해당 회차에서 획득한 능력치는 체력+0, 마력+0, 힘+0, 민첩+0, 지능+0입니다.]
[최소 능력치 계승치를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최소 능력치 계승치인 자유 능력치 1포인트를 인계합니다.]
이번엔 뭘 해보기도 전에 끝나서 그런가. 축적된 능력치조차 없다. 자유 능력치 1포인트라도 얻은 게 어디냐. 개평 주는 걸로 감지덕지 하자.
그래. 가끔은 뭐, 이런 회차도 있는 법이지.
[유물의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초인 ‘한정용’의 선택에 의해, 시간선이 역변합니다.]
그리고 그런 패널이 어른거린 순간. 두근, 심장이 크게 요동쳤고. 그대로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심장박동과 함께 세상도 멈춘다.
“……! ……!!”
비명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아득한 감각.
그러나 비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 감각, 이 과정은 지나치게 익숙하다. 너무 익숙한 프레이즈에 이젠 편안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템, 하트 기어가 주인의 육체에 축적된 시간을 흡수합니다.]
문득 그런 패널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현재 축적된 일자: 8일]
[하트 기어의 부화까지 남은 일자: 앞으로 7일 축적 필요]
‘뭐, 뭐야.’
지금까지 뜬 적이 없었던 패널의 등장.
다르다. 뭔가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999번이나 반복됐던 과정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이건. 이건…….’
그것이 내게 불안을 부추기는 한편. 참을 수 없는 흥분과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다.
‘하, 하트 기어라면!’
이번 생에 굉장히 유용하게 썼던 전설 아이템.
무슨 시간이 축적됐다는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게다가 부화? 부화라니?
전에 없이 강렬한 의문에 휩싸였지만. 그것을 길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크우욱!’
영원회귀가 속행된다.
영혼이 어딘가로 순식간에 빨려드는 느낌이 쏟아진다. 정신이 하얗게 열화된다.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하다.
[현재 시간선: 2031년 12월 4일. 오후 4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30일. 오전 5시.]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8일. 오전 11시.]
…….
…….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째깍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린다.
신체의 안과 밖이 뒤집히는 감각에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긴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눈을 떴다.
“…후우.”
[현재 시간선]
[2031년 11월 27일. 오후 2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그런 패널이다.
현재 시간선 표시. 내가 회귀하고 나면, 어김없이 가장 먼저 뜨는 놈이었다.
“돌아왔네. 또.”
내가 성공적으로 회귀했음을 실감한다. 곧바로 패널을 물려버렸고. 침대에 몸을 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피곤하다.’
끼기긱. 침대가 비명을 지른다.
졸음과 노곤함이 온몸을 짓누른다. 뭘 하더라도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해 보자.
“스으으…….”
어김없이 시작된 1001번째 11월 27일.
이번에도 낮잠으로 시작했다.
* * *
눈을 뜨자마자 이것이 꿈이라는 걸 알았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오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아가 내게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벌떡. 곧장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두 손을 쭉 내밀었다.
“자, 세배했으니까 세뱃돈! 주세요! 히히.”
강수아가 새해맞이로 세뱃돈을 뜯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잔망스럽게 헤실거리는 강수아를 멍하니 쳐다봤다.
“…….”
얼떨떨하게 핸드폰 액정을 켰다. 거기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오늘의 날짜에 시선을 뒀다.
[2032년 01월 01일]
신정. 해가 넘어가 있었다.
2032년. 1천 개월 지나도록 보지 못한… 비현실적인 연도였다.
“…하. 하하핫.”
덕분에 나는 꿈속에서나마 오랜만에 웃었다.
내가 핸드폰을 보며 대뜸 실실거리자, 꿈속의 강수아는 식겁하며 물러났다.
“어… 오빠. 혹시 뭐 잘못 먹었어요?”
“그래. 그런 것 같다.”
“아이씨. 솔직히 말해 봐요! 세뱃돈 주기 싫어서 미친 척하는 거죠!”
“그래. 그런 거 같다.”
“와. 진짜 뭐 잘못 먹었나 보네……?”
이게 내가 바란 이상적인 미래다.
그냥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의 여동생. 그 정도의 소소한 관계. 가끔 찾아와서 이렇게 안부 겸 장난도 치고. 고민 있으면 상담도 하고. 즐거운 일은 나누고. 그렇게 평범하게 해를 넘기는 것.
내가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발악하는 이유 중 하나. 바로 이 장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오빠.”
그러나 다음 순간. 풍경이 격변했다.
수아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고.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곳은 화목함을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폐허가 되었다.
“나한테, 그렇게까지 희생할 가치가, 있어요?”
주르륵, 콸콸콸.
수아의 온몸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얼굴이 짓무르고, 피부가 찢어지고, 누런 진물이 흐른다. 하반신이 건물 잔해에 깔려 형체도 없이 뭉개져 버렸다.
“오빠. 대체 날, 왜 구하려는 거예요?”
구원받는 당사자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실제로 저 질문은, 회귀를 반복하면서 수아에게 수도 없이 받았던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했다.
“…나도 잘 모른다.”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었다. 이 여자, 강수아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뇌간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단순한 연애 감정이 아냐.’
그렇다고 동정심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이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놀음 따위보단 한참, 아득하게 절박하다. 그러니까 난 아직까지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그게 확실한데.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런데 왜 지켜야 하는지. 정작 그 이유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오랜만에 좋았다. 수아야.”
수아가 근심 없이 웃는 표정을 오랜만에 봤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만 꿈에서 깨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침까지 풀침을 때렸다.
족같은 개꿈을 꾼 기분이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깨자마자 잊어버렸다.
뭐, 개꿈들이 다 그렇지.
“흐음.”
어쨌든 다음 날. 내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드물게도 햄스터 풀어주기가 아니었다.
하트 기어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흐으음.”
양끝이 뾰족한, 마름모꼴의 반질반질한 붉은색 돌. 그것을 손바닥 위에서 가만히 굴려본다.
삐빅. 자연스레 현자의 눈이 발동된다.
[아이템 정보]
[명칭: 하트 기어 (S급)]
[타입: 설치형/보조]
[효과: 생명력을 담보로 혈천갑(血天鉀)을 소환한다.]
[효력 범위: 신체 삽입 시 발동.]
[상세: 제12던전의 던전 마스터 ‘노스페라드’의 클리어 보상. HP를 소모하여 혈질(血質) 장비 ‘혈천갑’을 생성한다. 혈천갑의 공격력 및 방어력은 소비 생명력에 비례한다.]
‘딱히, 상태창상으론 변화가 없는데.’
그런데 분명히 뭔가가 변했다. 영원회귀가 일어나기 직전. 1천 번이나 똑같이 반복됐던 지긋지긋한 프레이즈가… 이번에 처음으로 변화했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이 아이템. 하트 기어가 있었다.
‘부화… 한다고 했지.’
내가 아는 그 뜻이 맞다면. 여기서 뭔가가 깨어나는 건가? 그렇다면 생물? 설마 이 아이템은 돌이 아니라, 던전 몬스터의 알 같은 거였나?
‘가능성이 없진 않아.’
아이템이나 보석 따위로 둔갑하는 몬스터가 실제로 꽤 빈번하다.
만약 그렇다고 치면. S급 스킬인 현자의 눈까지 속이는 건 좀 놀랍군. 현자의 눈은 던전 마스터급 몬스터의 위장도 가볍게 간파해 줄 텐데.
‘시간을 축적한다고도 했다.’
8일.
8일이 축적되었다고 했다. 부화까지 남은 일자가 7일이라고도 했고. 워낙 이례적인 일이라 패널의 내용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그렇다는 건 전체 분량은 15일이라는 건데.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중에 8일이 채워졌다는 거냐.
‘아직은 모르겠군. 정보가 너무 없어.’
한 가지 추측되는 건 있다.
내가 전생에 체류했던 시간. 그게 딱 8일 정도 된다.
영원회귀를 반복하면서 소비된 시간이, 그대로 하트 기어에 축적된다. 증거는 없지만 이런 추측 정도는 가능하다.
“뭐, 이게 맞다면… 조만간 보기 싫어도 보게 되겠지.”
이 하트 기어라는 아이템의 정체. 그리고 여기서 대체 뭐가 부화한다는 건지.
회귀하고 이제 하루 더 지났으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만 더 비비면… 자동적으로 알게 될 거다.
‘그때까지 나는 뭘 하면 되냐?’
뭘 하긴. 지금까지랑 똑같다.
강수아를 살리기 위해 개발악을 하면 된다.
“아―! 오빠!! 또또! 지금 딴생각 하고 있었죠!!”
그렇게 속으로 결론짓는 순간. 옆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당연히 수아였다.
“맨날 이런다니까. 진짜아… 저랑 얘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없어요?”
수아가 볼을 잔뜩 부풀리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난 듯, 서운한 듯, 복잡미묘한 표정이다.
‘…햄스터나 놔주러 갈까.’
수아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을 떠올려 버렸다.
파블로프의 개새끼인 양. 거의 조건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