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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번째 로그라이크 헌터-7화 (7/235)

7화

<1000번째 로그라이크 헌터(6)>

자이로드롭 기둥 꼭대기. 덩그러니 놓인 소녀 인형이 하나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저게 바로 던전 마스터다.

‘현자의 눈.’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했다. 가장 먼저 본인인증부터 하기로 했다.

[몬스터 정보]

[명칭: 꼭두각시 소녀]

[체력: 1 마력: 78]

[힘: 1 민첩: 2 지능: 58]

[상세: 제53던전 ‘유령의 축제’의 던전 마스터. 모든 축제는 그녀를 춤추게 하기 위해 벌어지는 것. 그녀가 부서지면 축제의 의미는 퇴색한다. 거대한 슬픔이 도래할 것이다.]

‘맞군. 확인.’

나는 외관상 확실하더라도 반드시 상태창을 확인한다.

지옥의 한 달을 반복하며 생긴 버릇이다. 100가지 던전의 던전 마스터 중에는 내 기억을 토대로 환상을 만들어내는 새끼들도 있다.

그래서 이 작업이 필수적이다.

내 눈은 구라를 쳐도. 던전 시스템의 상태창은 거짓말을 안 하니까.

“뒤졌다고 복창이나 해라.”

나는 짤막하게 통보하고 오른 손등의 사복검을 늘어뜨렸다.

끼리릭, 끼릭. 그제야 부자연스럽게 소녀 인형의 목이 돌아갔다.

―어, 아?

푸석한 금발 아래.

거대한 녹색 눈망울이 나를 향해 깜빡였다.

―당신. 누, 구야?

“알 거 없어.”

―무, 서워. 당신은, 너무. 무서. 워.

“그러냐. 실은 나도 그렇다.”

영양가 없는 몇 마디가 오갔다.

나는 곧장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사복검을 내리치려 했다.

“오, 오. 우리 아가씨.”

하지만 끼리릭, 끼릭.

소름 끼치는 관절음이 시야 밖에서 들려왔다.

등 뒤였다.

“우리 소중한. 꼬마 아가씨.”

“지켜야 한다. 아가씨, 지켜야지……!”

어느새 수많은 묘지기 광대가 모여들었다.

전후좌우. 머리 위까지 점령당했다. 못해도 50마리. 붉게 물든 눈과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다리가 눈에 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 같은 것으로 조종당하는 듯하다.

‘실제로 조종당하지.’

그것이 저 꼭두각시 소녀의 힘이다.

자기 지배하의 권속을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 그래서 저 던전 마스터를 사냥하면. 대개 육체나 정신의 제어권을 빼앗는 아이템이나 스킬을 준다.

‘나한텐 아무 짝에 쓸모없는 능력.’

어차피 나중 가면 대부분의 던전 마스터에겐 정신 지배 같은 꼼수가 통하지 않는다. 이미 수십 번이나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봐서 안다.

‘이건 좋지 않은데.’

한 회차당, 아이템이나 스킬을 얻을 기회가 고작 15번이다. 마지막 붕괴를 빼면 사실상은 14번이지.

‘그중 벌써 두 번의 뽑기가 꽝이 나와버렸어.’

이 14번의 사냥 중에서, 멸망을 막는 데에 유의미한 아이템이나 스킬을 얻어내야 한다.

엊그제 드래곤 레이드에서도 별게 없었는데. 이번 붕괴까지 가챠가 망한 셈이다.

“쓰읍.”

그래서 솔직히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무보수 노동을 하는 느낌이랄까. 까놓고 존나 하기 싫다.

“최대한 빨리 죽여는 준다.”

나는 짧게 통보하고 곧장 팔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사복검이 내 주변을 유린하며 공기를 찢어발겼다. 뱀처럼 유려한 붉은 궤적이 허공에 일렁거렸다. 모든 궤적이 광대들의 몸 어딘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으, 어?”

“하히?”

광대들이 일제히 의문 어린 탄성을 흘렸고. 우직, 뿌드득! 스무 마리의 광대들이 일거에 토막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끄… 오, 오호호호!!”

놈들은 단말마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새빨간 불꽃놀이가 되어 흩어졌다. 잘됐군. 그렇게 좋아하던 불꽃놀이를 제 몸으로 하게 됐으니.

―아, 아아?

끼릭, 끼릭. 꼭두각시 소녀의 목이 연신 까딱거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행색이다. 이해시켜 줄 필요는 없다. 이제 뒤질 건데 이해가 뭔 소용인가.

―그, 사, 살려, 주세요?

소녀가 나무로 만들어진 몸을 까딱까딱 떨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주워섬겼다.

―다, 다시… 는. 안, 그럴, 게요. 정말, 이에요?

애처로워 보이긴 한다만. 어딘가 어색한 목숨 구걸이었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저 인형은 살고 싶어서 저러는 게 아니다.

‘저렇게 빌면. 진짜 살려주는 사람이 있었던 거겠지.’

좀 옛날. 몇 년 전 ‘유령의 축제’ 던전이 지구와 연결됐을 때. 그곳에 오고 간 많은 인간들을 체험하고, 그것을 학습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항복한 게 아니다. 반격의 기회를 보고 있는 거다. 지긋지긋하게 많이 봐온 블러핑. 이제 동정심 쪼가리도 안 든다.

“안 살려줘.”

통보한 뒤에 사복검을 합체시켰다.

키잉! 높은 금속음과 함께 장검의 형태로 합쳐진 검. 나는 일순간에 앞으로 치고 나가며, 그대로 인형의 목에 칼날을 욱여넣었다.

―악.

뿌드득, 퍼걱!

턱을 뚫고 올라간 붉은 칼날이 소녀의 정수리에서 튀어나왔다.

―어, 윽.

인형의 단말마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드득. 칼날을 빼냈다. 인형의 내부에서 박살 난 나뭇조각과 함께, 태엽 장치가 장기처럼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으극. 그그극.

소녀의 신형이 흐느적거리더니.

이내 휘청, 자이로드롭 아래로 기울어졌고. 추락한다.

―그, 아… 으.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릅뜬 눈이 빠르게 멀어진다.

퍼걱. 둔탁한 소음과 함께 지면에 부딪친 인형. 완전히 박살 나며 사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축제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불꽃놀이다.

“다음 생엔. 나 안 만나길 빌어라.”

내 나름대로 애도의 말을 주워섬겼다.

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다음 생을 운운하다니.’

너무 패배주의적이군.

이미 이번 생은 글렀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태도는 좋지 않다.’

불필요한 기대를 갖지 않는 건 좋은데.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 멘탈 관리도 강수아의 멘탈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다 또 네거티브 한정용이 될라.’

나는 한번 안 좋은 생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무기력증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절망은 끝도 없는 늪이다.

이 무력감이 뼛속까지 좀먹었던 시절. 집구석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안 한 채, 인류 멸망을 수십 회차나 끊임없이 되풀이한 적도 있었다.

[제53던전 ‘유령의 축제’의 던전 마스터, ‘꼭두각시 소녀’가 세계와 단절되었습니다.]

[게이트가 힘을 잃고 서서히 소멸합니다. 던전의 붕괴가 종식됩니다.]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찰나. 눈앞에 패널이 하나 떠올랐다.

던전 클리어 패널이다. 남은 던전 붕괴도 내가 계속 파훼할 예정이니, 이번 생엔 12번 더 봐야 한다.

[던전 폐쇄자의 이름을 만방에 알립니까?]

문득 패널이 내게 그런 것을 물어왔다. 던전 마스터를 죽인 내 이름을 동네방네 소문 낼 거냐는 소리다.

이건 되풀이되는 한 달 이전, 평범하게 던전을 클리어할 때도 있던 시스템이다. 대체 이런 시스템이 왜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내 이름을 세간에 알릴 생각이 전혀 없다.

“족까고. 보상이나 내놔라.”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패널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삐빅. 다시금 패널 하나가 시간차를 두고 올라왔다.

[던전 마스터 ‘꼭두각시 소녀’ 사냥 보상을 획득합니다.]

[스킬 ‘괴뢰(傀儡)의 실’을 획득하셨습니다.]

나는 이마빡을 빠악! 있는 힘껏 후려쳤다.

“망할.”

역시나. 이미 있는 스킬이다. 그것을 시스템도 곧 눈치챘는지, 또 다른 패널을 띄웠다.

[스킬 ‘괴뢰의 실’을 이미 보유하고 있습니다.]

[스킬 강화 포인트를 1포인트 획득하셨습니다.]

“필요 없어.”

스킬은 강화 포인트로 강화할 수가 있다.

이 스킬강화 포인트는 던전 내부의 다양한 방법으로 파밍할 수 있는데. 강화를 하면 스킬이 더 강력한 효과로 대체된다. 스킬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최대 5강화까지 가능하다.

‘괴뢰의 실은 이미 풀 강화 상태다.’

당연하지. 이 던전을 마주친 게, 내 기억에만 벌써 30번은 넘은 것 같다. 그동안 저 스킬을 보상으로 몇 번이나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못 해도 10번이다. 강화 포인트가 스킬창에서 썩어나는 중이다.

나는 내친 김에 문제의 ‘괴뢰의 실’ 스킬을 눈앞에 띄워봤다.

[스킬명: 괴뢰의 실+5 (희귀)]

[타입: 액티브/저주]

[효과: 자신보다 지능 스탯이 낮은 상대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다.]

[효력 범위: 반경 20m, 최대 5명 동시 조종]

[상세: 제53던전의 던전 마스터 ‘꼭두각시 소녀’ 처치 시 랜덤 보상 중 하나. 사용 방법에 따라 굉장히 강력한 스킬. 그러나 이성이 없는 무기물이나 고스트 타입 몬스터에겐 효과가 없다.]

원래 1레벨 스킬 때 효과는 ‘육체의 일부를 잠시간 장악한다’였다. 그게 +5 강화가 되어서 저렇게 변한 거다.

지금 내 지능 스탯은 99. 전 세계 마법사 계열 순위 1위의 오버랭커가 지능 49인가 그렇다. 사실상 지구의 모든 헌터들이 나보다 낮다고 보면 된다.

‘그러면 뭐 하냐.’

사람한테는 누구나 통해도. 마지막 게이트 붕괴 때는 아무 짝에 소용없다.

그러면 나한텐 그냥 무쓸모나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아쉽게 됐네.”

14번의 던전 마스터 보상 뽑기 중에 2번이 망했다. 그래서 앞으로 12번이 남았다.

너무 실의에 깊게 빠져선 안 된다. 가감 없는 현실만 파악하고 끝내자.

“죽 쒀서 개 줬군.”

나른하게 씨근거린 뒤 자이로드롭 아래로 훌쩍 점프했다.

쇄애액! 공기를 가르며 신형이 빠르게 추락한다. 지면과 닿기 직전에 블러드 스트림을 사용해서 대미지를 없앴다.

털썩. 사뿐히 착지한 나는 시선을 슬쩍 돌렸다.

“아… 아아아……!”

사산(四散)해버린 꼭두각시 소녀 옆. 월미도 전역에서 난동부리던 묘지기 광대들이, 그곳으로 스멀스멀 모여들었다.

“축제가, 끝났다… 끝나버렸어어…….”

광대들의 창백한 얼굴로 시뻘건 피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입은 귀까지 찢어져 웃고 있는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흐느낀다. 꽤 섬뜩한 광경이다.

“아아… 아가씨… 이제 우릴 위해, 춤춰주지 않는 거냐?”

그 말에 모든 광대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들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온몸을 경련했다. 시커멓게 물든 눈에 점점 붉은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아… 아아…….”

“축제가 끝나 버렸으니.”

그들은 하나같이 손톱을 바짝 세웠다. 그리고 푸직. 자기 목을 망설임 없이 쑤셨다.

“이제.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우지직, 뿌득!

수십, 수백 마리의 광대가 일제히 자기 머리를 뽑아버렸다. 특유의 소름 끼치는 광소를 입가에 두른 채. 날카로운 이빨을 까득까득 갈아댔다.

“아가씨. 우리 귀여운 아가씨.”

“이것이 마지막이다.”

“함께 피날레를 맞이하자.”

그리고 우우우웅. 놈들의 대가리가 일제히 눈부신 섬광을 뿜어냈다. 킬킬거리는 광소가 하얗게 물든 시야 너머에서 들려온다.

“…….”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나른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다.

“…하핫!”

“카하하하하!”

“아카카카카칵!!”

섬광이 최고조에 달한 그 순간. 찢어지는 광소와 함께 광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후의,”

“불꽃놀이다!!”

콰아아아앙!!

광대들의 대가리가 일제히 폭발했다. 가공할 충격파와 폭발의 섬광이 세상을 새하얗게 메웠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도래한 듯한 순간이었다.

* * *

대폭발로 월미도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월미도(였던 것)’만이 그곳에 남았다. 폭발의 여파로 황무지가 된 땅과, 건물이 있었다는 것만 간신히 가늠되는 폐허. 그리고 석탄처럼 바싹 메마른 인간의 시신들이 그곳에 가득했다.

“그… 부, 붉은 갑옷을 입은 사람이, 묘지기 광대들을 학살했어요.”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뉴스에서 하나같이, 이렇게 증언했다.

“그,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저도 이미 죽었을 거예요.”

“그리고, 정말, 강서윤 랭커님께는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월미도 참사가 일어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다.

나는 내 방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뉴스를 보고 있었고. 이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계획대로 됐네.”

내가 말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랜덤성이 아닌 확정성 사건. 운명에 대해서 말이다.

월미도에서 무슨 던전이 붕괴하든, 월미도는 반드시 오늘 지도에서 사라진다. 999번의 회차 중에서 모든 회차가 전부 그랬다.

‘강서윤이 아니었으면. 원래 생존자도 없을 예정이었지.’

최후에 묘지기 광대들이 일으킨 거대한 폭발. 그 섬광은 월미도 어디에서도 보일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핵폭발이 그렇듯이.

“대규모 순간이동은 역시 유용하단 말이야.”

촉이 좋은 강서윤이 심상찮은 폭발의 조짐을 느꼈다.

그래서 생존자들을 그러모아, 공간이동으로 월미도 밖에 대피시킨 것이다. 물론 나도 그걸 직접 본 건 아니고. 뉴스를 보고 정황상 추측한 거다.

“이번에 살아남은 사람은… 719명?”

나는 TV 하단으로 흘러가는 자막을 읽어봤다.

엄청 많군. 이것도 신기록이다. 역시 하트 기어로 빠르게 던전 마스터를 처리한 것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듯싶다.

강서윤에게도 좀 더 많은 여유가 생겼던 거겠지.

[김대기 기자, 사망자 수가 2천 명에 이른다고요?]

[그렇습니다. 피해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문득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아무 짝에 쓸 데도 없는, 뒤진 놈들 염불 외는 소리가 이어졌다.

[현재 집계된 사망 확정자 수만 2천 2백여 명에 이릅니다. 지난 용산 게이트 참사 때의 2배에 가까운 수치인데요. 유족들의 통곡 소리가 마를 날이 없는 가운데…….]

더 봐도 영양가는 없겠다.

나는 TV를 끄고 기지개를 켰다.

“후. 뻐근하다.”

나는 그 월미도의 대폭발을 제로거리에서 직격으로 얻어맞았다. 물론 대미지는 1도 안 들어왔다만. 온몸이 아직도 꽤 찌뿌듯하다.

‘하트 기어를 너무 믿었나.’

방어력을 테스트할 목적도 있긴 했지만. 역시 깝치지 말고 도망이나 칠 걸 그랬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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