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29)

<128화>

“작은 마님 너무 좋아.”

“나도! 얼마나 부드럽고 선하시던지!”

“그뿐이야? 마냥 여리지도 않으시고 카리스마 넘치잖아!”

“도련님이 작은 마님 말씀엔 꼼짝도 못 하시더라.”

“게다가 마님과 있을 때면 활짝 웃으시던데? 와, 난 도련님이 웃을 수 있다는 거 이번에 처음 알았잖아.”

루시아가 공작성에 들어온 지도 어언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루시아와 같이 지낸 사용인들은 날이 갈수록 그녀를 높게 평가하며 종국에는 ‘작은 마님을 사모하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에 가입했다.

대부분은 헤르윈이 그녀에게 꼼짝 못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빠져든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루시아의 칭찬이 넘쳐나자, 그녀와 같이 온 세인의 어깨가 날이 갈수록 위로 치솟았다.

어제는 루시아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오는 하녀도 있었다.

처음에 헤르윈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 걱정이 무색해졌다. 

루시아가 페네우스 공작저에 잘 녹아들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자신을 부러워하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끼며 세인은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때, 헤르윈 집무실 앞을 서성이는 제롬이 보였다.

“제롬,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세인 양.”

강아지마냥 낑낑거리던 제롬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세인의 손으로 향했다.

“간식을 가지고 온 겁니까?”

“네, 곧 간식 시간이잖아요. 주인님께서 이곳에서 드시겠다고 하셔서 가져왔습니다.”

“하아, 역시…….”

“음? 왜 그러시죠?”

제롬이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자 세인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래 노크를 해도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으시네요.”

“……아.”

해탈한 제롬의 표정을 보자 세인은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주인의 허락이 없는 이상 사용인은 문을 열 수 없는 법.

이 시간대면 헤르윈은 물론이고, 먼저 가 있겠다던 루시아도 집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들려오지 않는다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나 보네요.”

“큼! 크흠!”

태연한 세인의 말투에 제롬이 귓불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긴, 신혼부부라면 눈만 마주쳐도 불타오를 시기이지. 

“기다린 지 얼마나 되셨어요?”

“저 말인가요? 한 5분 정도…….”

“그럼 10분 뒤에 다시 오도록 해요. 두 분께서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역시 그러는 게 났겠죠?”

제롬과 상의를 마치고 세인은 일부러 노크를 크게 했다.

“주인님! 10분 뒤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역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질 않았다. 하지만 의사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기에 제롬과 세인은 짧은 시간이나마 잠시 자리를 비켜주도록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자 헤르윈이 기민한 감각으로 문가에서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늘게 뜬 눈을 정면으로 돌리니 꾹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헤르윈은 다시 루시아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벌써 몇 분째 이어지는 키스라 루시아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아무리 가슴을 쳐도, 밀어내려고 바르작거려도 헤르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그녀를 앉힌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양팔로 그녀를 가둘 뿐. 

그렇게 몇 분을 더 루시아를 음미하던 헤르윈은 드디어 뒤로 물러섰다.

루시아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헤르윈을 째려봤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어느새 퉁퉁 부으며 번들거렸다.

그걸 멀거니 보던 붉은 눈에 다시 음습한 기운이 돌자 루시아가 그의 어깨를 쳤다.

“정말!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신호 줬잖아! 창피해서 세인 얼굴 어떻게 봐!”

“뭐 어때. 두 사람도 우리가 뭐 하는지 알고 자리 비켜줬잖아.”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하, 제발 갑자기 달려들지 좀 마…….”

루시아는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집무실에 들어와서 같이 간식 먹자고 한 것뿐인데, 갑자기 헤르윈에게 번쩍 들려 몇 분이나 붙잡혔다.

솔직히 즐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세인과 제롬에게 애정행각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낯이 홧홧 달아올랐다.

루시아는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곤 헤르윈을 째려봤다. 제 날 선 시선에도 그는 뻔뻔하게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이럴 시간도 없었잖아. 좀 봐줘.”

토라진 루시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헤르윈이 그녀의 가슴에 기대곤 루시아를 올려다봤다.

잘생긴 얼굴을 이럴 때 쓰다니 치사했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루시아는 결국 두 손을 들며 헤르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긴, 요즘 많이 바쁘긴 했지.”

신혼여행 때도 밤마다 지독하게 괴롭히던 사람이었는데 공작성에 오고 나서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둘이서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힘들었다.

루시아는 상대적으로 한가했지만, 헤르윈은 본격적으로 하일의 업무를 조금씩 인계받기 시작했고, 2주 뒤면 가주 계승식이 있을 예정이다.

계승식이 있기 전까지는 아마 눈곱 뗄 새 없이 바쁠 것이다.

방금 전 일은 괘씸하긴 해도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모습이 기특했다.

루시아는 제 손에 얹어진 헤르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참 좋았다.

똑똑-

“아가씨, 간식 가져왔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10분이 지난 모양이다. 루시아는 서둘러 헤르윈을 밀치고 창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괜히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드, 들어와.”

말끔한 얼굴의 세인 뒤로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른 제롬이 나타났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루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흠흠. 즐거운 시간 보내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조금 급한 일인지라.”

제롬과 눈 마주치기가 민망했던 루시아는 세인의 곁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르윈이 작게 웃으며 제롬이 갖고 온 서류를 살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진지하게 업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신을 마구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 참 신기했다.

“아가씨, 간식 좀 드셔보세요.”

“응, 고마워.”

어느새 다과상을 차린 세인이 향긋한 재스민차를 건넸다. 루시아는 평소처럼 향을 음미하고 차를 마시려다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멈칫했다.

“……뭐지?”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응? 아, 아니야. 향이 참 좋네.”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쿠키도 좀 드셔보시겠어요?”

루시아는 세인이 주는 대로 쿠키를 받았다. 달콤함이 입에 맴돌자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즐겁게 쿠키를 먹고 있던 때, 소파가 꺼지는 느낌이 들며 헤르윈의 묵직한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제롬과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수고했어. 이것 좀 먹으면서 쉬어.”

루시아는 헤르윈 입에 쿠키를 하나 넣어주었다. 헤르윈은 행복한 표정으로 음미하며 루시아를 품 안에 가뒀다.

“하아, 신혼인데 이게 뭐야. 그냥 헨리한테 작위 넘겨버릴까?”

“그런 소리 하면 못써.”

“하지만, 바빠도 너무 바쁘잖아. 한숨이라도 좀 돌리고 싶어.”

마냥 부리는 응석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루시아는 그의 고난을 잘 알기에 그저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루시아, 넌 요즘 괜찮아? 너도 요즘 어머니한테 일 배우고 있잖아.”

“나름 할 만해. 오히려 일을 배울수록 어머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져. 생각보다 하시는 일이 많으시더라고.”

스칼렛은 루시아가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주는 편이지만, 옆에서 그녀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괜히 공작부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칼렛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루시아는 차근차근 자신의 미래를 그려 나갔다.

그래도 처음 하는 일이라 그런지 요즘 따라 몸이 무겁고 피곤함이 밀려왔다.

헤르윈도 루시아의 말에 동의하는지 아버지인 하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부모님이 좀 대단하시지.”

부모님에게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늘어져 있던 헤르윈이 어느새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차를 단숨에 마시며 루시아의 볼에 뽀뽀했다.

“차라리 빨리 끝내버려야겠어.”

헤르윈이 어느덧 의지를 불태우며 자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책상 한켠에 쌓인 서류의 양이 어마어마했지만, 지금 그의 기세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 세인과 함께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2월 5일.

눈이 펑펑 내리는 오늘, 바로 가주 계승식이 열렸다.

스칼렛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계승식을 준비한 루시아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거울 안에는 평소의 단아하고 다정한 모습을 지워낸, 강인한 인상의 루시아가 서 있었다.

가주 계승식에는 페네우스 가문의 가신들과 북부 귀족들이 모두 모인다.

앞으로 헤르윈과 함께 그들의 리더가 되어야 하기에 유약한 인상을 줄 수는 없었다.

스칼렛이 귀에 닳도록 하던 말이 있다.

‘전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페네우스 가문이 오랜 기간 북부를 다스린 만큼 불만을 가진 가문도 상당히 많단다. 계승식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생활이 좌지우지될 거야.’

일부러 겁주려고 한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래서 요 며칠간 스칼렛에게 사람들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아가, 준비 다 됐니?”

문이 열리며 스칼렛이 나타났다. 루시아를 찾던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루시아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꼭 갑옷을 입은 다람쥐 같구나.”

“큽!”

딱 적절한 비유라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황급히 웃음을 삼켰다. 웃지 않으려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이들 가운데에 세인이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진지한 표정이던 루시아가 울상을 지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그러시면 어떡해요.”

“하하하, 미안하다. 네 무슨 전장에 나가는 사람처럼 있으니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루시아가 입고 있는 것은 역대 공작부인들이 가주 계승식에서 입었던 드레스였다.

역대 공작부인들은 스칼렛처럼 키가 크고 체격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작은 체구의 루시아에게는 옷이 맞지 않았다.

마치 언니의 옷을 빼입은 꼴이라 옷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루시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건 매한가지지만.

“긴장되니?”

“……후우, 네.”

“너무 걱정하지 마. 대놓고 너희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없을 거야. 있다고 하더라도-”

스칼렛이 관절 꺾는 소리를 냈다.

“나와 하일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우리 새아가는 마음 편히 계승식에 임하기만 해.”

약간의 협박이 섞여 있었던 것 같지만 무척이나 든든했다.

스칼렛이 다른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아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곁을 맴돌던 세인이 곧바로 다가와 속삭였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조금 속이 답답하네…….”

오늘따라 영 속이 좋지 않았다. 화장하기 전부터 안색이 파리했던 루시아를 떠올리며 세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의원에게 약이라도 받아올까요?”

잠시 고민하던 루시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괜찮다고 말했지만, 세인은 여전히 루시아가 걱정이었다. 요 며칠 계승식을 준비하면서 부쩍 그녀의 체력이 떨어진 것이 보였으니까.

세인은 남몰래 의사에게 루시아의 상태를 털어놓고 약이라도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시아.”

열린 문가로 헤르윈이 나타났다. 그는 루시아를 보자마자 무표정한 얼굴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스칼렛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너 정말 내 아들 맞니?”

“제가 어머니 아들이 아니라면 누구 아들이겠어요.”

“이거야 원. 아내 바보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혀를 내두르긴 했지만,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헤르윈과 루시아의 모습이 무척이나 화목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헤르윈이 루시아를 그대로 놓쳤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가 지금만큼이나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걸.

“자, 이제 사람들에게 얼굴 비추러 가 볼까?”

스칼렛이 헤르윈의 어깨를 내리쳤다. 뭉근한 고통에 잠깐 몸을 비틀었던 헤르윈이 이내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이윽고 헤르윈과 루시아는 나란히 서로의 손을 잡은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홀로 향했다.

어느덧 닫혀있는 홀의 문 앞까지 도착했다.

하일이 신호할 때 들어가기로 사전에 맞춰놨기에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후우우-”

떨리는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만큼이나 긴장한 헤르윈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자신과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그 못지않게 떨리지만, 이럴 때일수록 그에게 든든한 배우자가 되고 싶었다. 루시아는 헤르윈의 손이 떨리지 않을 만큼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걸 느낀 헤르윈이 자신을 바라보자 루시아는 부드럽게 눈가를 휘었다.

괜찮아.

세 글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임에도 단숨에 떨림이 잦아들었다. 헤르윈은 저도 덩달아 부드럽게 웃었다.

“제 다음 대를 이을 차기 가주를 소개하겠습니다.”

때마침 안에서 하일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루시아와 헤르윈은 환한 빛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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