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쾅-!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루시아가 눈을 번쩍 떴다. 뿌연 시야를 손으로 비비자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분명 처음 보는 방인데 어딘가 익숙했다. 가구 배치나, 모양들이…….
“아.”
루시아는 잠이 깨고 나서야 이곳이 페네우스 저의 헤르윈 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제 결혼식을 올리고, 친구들과 이곳으로 와서 광란의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고 나서 헤르윈이 나를 여기로…….”
방으로 들어와서 헤르윈이 제 옷을 벗겨줬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 뒤에 헤르윈이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잡아먹을 듯…….
천천히 어제 있었던 일을 상기시키던 루시아는 이윽고 얼굴을 붉히며 뒤로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이불을 빵빵 찼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헤르윈과 드디어 그렇고 그런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아는 이불을 꽉 잡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까워……!”
왜 하필이면 거기서 필름이 끊긴 것인가. 그 뒤로 헤르윈과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첫날 밤만큼은 전부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헤르윈과의 소중한 첫날밤을 술로 허비한 것이 허망하고 너무나도 아까웠다.
루시아는 울상 지으며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무언가 깨달았다.
“……안 아프네?”
분명 친구들과 하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하면 여자의 첫날밤은 아픔을 동반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걸 빼고는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몰라 이불을 들추자 어제 입은 이너원피스가 그대로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분명 필름 끊기기 직전에 헤르윈과 뜨거운 키스를 했었는데.
“루시아…….”
옆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아는 흠칫 떨며 서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베개에 반쯤 파묻혀 한쪽 눈만 살짝 보이는 헤르윈이 있었다. 헤르윈의 얼굴을 보던 루시아는 데구루루 눈만 굴려 아래를 쳐다봤다.
저가 끌어당기느라 흐트러진 이불 밑으로 성나있는 등 근육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루시아는 도통 헤르윈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졸린 눈으로 루시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헤르윈은 부스스 웃었다.
그리고는 루시아를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엉큼해.”
“누, 누가 엉큼하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엉큼한 우리 새 신부지.”
놀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루시아가 삐죽 입술을 내밀자 헤르윈이 앞으로 나온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베어 물었다.
루시아는 흠칫 떨다가 이내 자연스레 헤르윈을 받아들였다. 어느새 헤르윈이 루시아 위로 올라왔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헤르윈 품에 갇힌 루시아는 키스가 끝나자 떨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겨우 눈을 떴다.
코앞에 그 어떠한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붉은 눈이 보였다. 베일 듯 날카로운 콧등이 제 볼을 간지럽혔다.
헤르윈이 낮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헤르윈의 훌륭한 몸이 훤히 드러났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어제 술 많이 마셨잖아. 울렁거리지 않아?”
“어… 조금?”
“제롬한테 숙취에 좋은 음식이라도 차리라고 해야겠네.”
헤르윈이 이제 일어나라며 루시아의 코를 가볍게 두드렸다. 상체만 탈의한 헤르윈이 벽 한켠에 걸려있는 로브를 가져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루시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헤, 헤르윈!”
“응?”
“우리 어제… 별일 없었어?”
물을 따르던 헤르윈이 멈칫했다. 헤르윈이 웃는 얼굴로 돌아봤지만, 순간 루시아는 그가 화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그… 우리 방에 들어온 거까지. 네가 나한테 키스하고 나서는… 기억이 없어…….”
점점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자 헤르윈의 코에서 흐음- 하는 비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있었냐면……?”
루시아 앞으로 다가온 헤르윈은 활짝 웃었다.
“네가 잠들어버렸어.”
“……어?”
루시아의 입에서 떨떠름한 의문이 나왔다. 미처 그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헤르윈은 태연하게 흐트러진 루시아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어제 네가 그대로 잠들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정말?”
“응, 그러니 루시아.”
가라앉은 눈빛으로 제 목을 훑어보던 헤르윈이 눈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잠들면 안 돼, 알겠지?”
루시아는 멍하니 넋을 놓다가 이내 낯이 창백해졌다. 웃는 헤르윈의 뒤로 악마가 보이는 것 같았다.
헤르윈이 단단히 벼르고 있단 것을 알아차린 루시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그, 그러니까… 헤르윈. 내가 미안…….”
“응? 아니야, 아니야. 오늘 다시 만회할 건데 뭐 어때. 얼른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으러 가자. 밤을 대비하려면 속 든든하게 채우는 게 좋을걸?”
음습하게 빛난 눈동자가 제 몸을 훑자 루시아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괜히 눈치를 살피며 살금살금 움직이던 루시아는 헤르윈의 말에 그에게 다가갔다. 헤르윈은 문가에 서서 복도를 살피고 있었다.
“왜? 누가 있어?”
“아니, 뭔가 떨어지는? 문이 열리는? 아무튼 좀 큰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서.”
“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큰 소리가 들렸었다. 하지만 헤르윈을 따라 바깥을 살피자 아무것도 없었다.
“뭐, 아무 일도 아니겠지. 나 먼저 좀 씻을게.”
금세 관심을 끈 헤르윈이 루시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며 먼저 욕실에 들어섰다. 쌀쌀함을 느낀 루시아는 숄을 두르고는 복도로 나왔다.
아침 9시인데도 어제 늦게까지 놀아서 그런지 복도는 조용했다. 분명 친구들을 근처의 방에 재웠던 것 같은데.
친구들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 방을 서성이던 루시아는 문이 열려 있는 한 곳을 발견했다.
그곳을 기웃거리기 전에 문이 벌컥 열리며 눈앞에 보랏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깜짝이야!”
“……루시아!”
바로 아리스타였다. 아리스타도 루시아 못지않게 놀랐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제 여기서 잤었구나? 잘 잤어?”
“어? 어어…….”
아리스타는 대답을 하면서도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복도를 살피는 아리스타를 보며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응.”
대답하는 아리스타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그녀의 눈치를 보자, 아리스타가 대뜸 루시아에게 물었다.
“루시아.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소원?”
부탁도 아니고 소원이라니. 단어 선택이 조금 이상했다.
“예전에 네가 나한테 뭐든 말만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소원 하나만 들어달라고 했고.”
“내가… 그랬었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떠오르는 게 없자, 아리스타가 입을 열었다.
“내가 헤르윈을 오거로부터 구해줬을 때. 기억 안 나?”
기억을 차츰 더듬던 루시아는 퍼뜩 떠올렸다.
“아! 맞다!”
오거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헤르윈을 데리고 하산한 그녀에게 고맙다며 뭐든 들어주겠다 약속한 적 있었다.
“세상에, 아리스타. 너 기억력 엄청 좋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이야?”
루시아가 기함하자 아리스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지금 여기서 소원 빌어도 돼?”
“어, 그래. 뭐든 말만 해. 뭘 원하는데?”
루시아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리스타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루카스 오라버니가 지금쯤 도망치려고 할 거야.”
“응?”
갑자기 제 오빠의 이름이 나오자 루시아는 당황했지만, 아리스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말을 이었다.
“루카스 오라버니가 도망치지 못하게 해줘. 오늘 오전까지만 이곳에 묶어두기만 하면 돼.”
“어… 그러니까 오빠가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해달라는 거지?”
“응.”
대체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건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루시아는 일단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타가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순간 루시아의 눈에 유난히 난장판이 된 침대가 보였다.
혼자 잔 것 치고는 이불이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리스타가 잠꼬대가 심한 편인가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깨를 들썩였다.
일단은 아리스타의 소원을 들어줘야만 했다.
루카스가 도망치려고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루시아는 1층으로 내려갔다.
하인들을 비롯한 사용인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제게 작은 마님이라고 부르며 인사하자 루시아는 조금 쑥스러웠다.
그때, 제롬이 눈에 띄었다.
“제롬.”
“앗! 작은 마님,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야, 제롬. 저기 혹시 오빠 못 봤어?”
“오빠라면… 루카스 영식 말씀이시죠?”
제롬이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주위를 살폈다.
“루카스 영식이라면 방금 전에 마차를 찾으셨습니다.”
“마차?”
“네. 급한 일이 있으신지 좀 서두르시던데요?”
“이런… 혹시 벌써 간 건 아니지?”
“그건 아닙니다. 루카스 영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제롬의 안내에 따라간 곳은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루시아는 그곳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불안해 보이는 루카스를 볼 수 있었다.
루카스의 상태가 영 이상해 보였다.
“오빠, 여기서 뭐 해?”
“……루시아!”
뒤늦게 루시아를 발견한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롬에게 들었어. 마차를 불렀다고?”
“어? 어어… 좀 급한 일이 생겨서…….”
“많이 급한 일이야?”
“그건…….”
루카스가 더듬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급한 일이라면 차분하게 답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리스타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전후 사정을 모르니 답답하기는 했지만, 일단 아리스타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리스타의 말대로 루카스가 도망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루시아는 일단 그의 발을 붙들기로 했다.
“급한 일 아니면 식사하고 가.”
“아, 아니야. 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하지만, 오빠. 나 신혼여행 가고 나면 다시 수도로 오지 못할 텐데?”
루시아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루카스는 동요했다.
“헤르윈이 공작위를 물려받기로 해서 아마 수도에 들르지 않고 바로 북부로 올라갈 거야. 북부에 가면 언제 수도로 내려올지 몰라.”
“……정말? 수도에 들를 시간도 없어?”
사실 신혼여행을 마치고 아주 잠깐은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루시아는 대충 얼버무렸다.
“응, 아마도?”
동생 바보인 루카스가 떠나면 언제 올지 모르는 동생과의 마지막 식사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루시아의 맑은 눈망울을 보던 루카스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래, 마지막이라는데 같이 식사 정도는 해야지.”
“잘 생각했어!”
루시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아리스타가 말한 시간대까지는 어떻게든 묶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냥 기뻐하는 동생을 어쩔 수 없다는 미소로 보던 루카스는 루시아의 어깨에 흐트러진 숄을 보고 멈칫했다.
이내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루시아에게 성큼 다가왔다.
“너 목에 그건 뭐야?”
“응? 뭐가?”
“뭔가 빨간 게 묻은 것 같은…….”
루시아에게 다가와 숄을 밑으로 내리던 루카스는 급격히 얼굴을 붉히며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큼! 크흠! 루시아, 아무래도 너 이만 방에 들어가 보는 게 좋겠다.”
“왜. 목에 뭐가 묻었는데?”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자신의 목이 보일 리 없는 루시아는 루카스가 보던 곳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래봤자 손에 묻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루카스는 차마 그녀의 목에 무엇이 있는지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숄을 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둘러줄 뿐이었다.
“오빠, 답답해.”
“참아. 나중에 나한테 왜 말 안 했냐고 따지지 말고.”
“그게 무슨…….”
“자, 얼른 들어가! 집으로 안 가고 여기 있을 테니까.”
루카스가 서둘러 루시아의 등을 떠밀었다. 루시아는 떨떠름하게 걸음을 옮겨 결국 제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으며 루시아는 방 한켠에 놓인 전신 거울에 다가갔다.
“대체 뭐가 있길래 그런 거…….”
숄을 풀며 툴툴거리던 루시아는 루카스가 그리했던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루시아의 벽안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리곤 거울에 비친 제 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이게…….”
목에는 무언가에 물린 듯한 잇자국과 함께 피부가 빨갛게 변해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상처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루시아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할 때, 마침 헤르윈이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루시아. 넌 안 씻어?”
태연하기 짝이 없는 남편을 보고 루시아가 빽 소리 질렀다.
“헤르윈!”
처음엔 영문도 모른 채 루시아에게 등짝을 맞던 헤르윈은 이윽고 그녀가 화난 이유를 알고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