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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29)

<122화>

“그럼!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신부가 나타났다. 모두 여신이 강림한 것 같은 루시아의 고운 자태를 보고 감탄했다.

특히 헤르윈은 요한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루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간 자신이 해오던 상상은 모두 지금의 광경의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여인이 이제는 제 부인이 된다는 사실이 차마 믿기지 않았다.

헤르윈이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리며 넋을 놓자, 브라이언이 친구들에게 속삭였다.

“저러다 턱 빠지겠다.”

“헤르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야. 우리 눈에도 루시아가 저리 아름다워 보이는데 헤르윈 눈에는 오죽하겠어.”

비단 친구들 눈에만 헤르윈의 놀란 모습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헤르윈을 연모하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오늘 결혼식에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을 생각이었던 몇몇 영애는 헤르윈의 표정을 보고 두 손 두 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헤르윈에게서 저 표정을 자아낼 수 있는 사람은 루시아 외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늘 냉철하기만 하던 헤르윈이 풀어지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경악과 혼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헨리는 미소 지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끝에 드디어 루시아가 헤르윈 앞까지 도착했다. 요한은 루시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헤르윈을 보고 피식 웃었다.

“헤르윈, 내 딸을 잘 부탁하네.”

요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헤르윈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제게 루시아의 손을 건네는 요한의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평생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요한이 뒤로 물러서며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헤르윈은 제 손에 쏙 들어오는 가녀린 손을 느꼈다.

면사포에 가려진 루시아의 얼굴이 슬쩍 보였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때도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가까운 데서 보니 다시금 황홀감이 느껴졌다.

“헤르윈, 앞을 봐야지.”

오른쪽 볼을 콕콕 찌르는 따가운 시선에 루시아가 웃음을 흘리며 주의를 줬다. 그에 헤르윈은 곧바로 반응하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례와 각종 식순이 끝나고 앞에 서 있던 교황이 마지막으로 결혼서약서를 읊었다.

루시아 아그네스가 아니라 루시아 페네우스로 불릴 때마다 그녀가 자신의 부인이 됐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신랑, 헤르윈 페네우스는 신부, 루시아 페네우스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생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 것을 맹세합니까?”

“네!”

당차고 우렁찬 대답에 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루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미소 지은 교황이 이번엔 루시아에게 물었다.

“신부, 루시아 페네우스는 신랑, 헤르윈 페네우스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생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 줄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부드럽지만 어진 대답에 헤르윈은 루시아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지인분들이 있는 이 자리에서 평생 함께할 부부가 되기를 굳게 맹세했습니다. 오늘 참석한 모두가 증인이 되어 이 결혼이 진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와아아아-!

환호성과 박수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였다. 루시아와 헤르윈은 서로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양가 부모님들이 눈물을 훔쳤다.

교황이 손을 들어 하객들을 조금 진정시켰다. 교황 옆에 대기하고 있던 화동이 반지를 가지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그럼, 반지 교환식이 있겠습니다.”

헤르윈이 먼저 루시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처음에는 10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맞추려 했지만, 루시아가 너무 부담스러워해서 바꾼 반지였다.

그럼에도 다이아몬드를 포기하지 못한 헤르윈 때문에 링 전체에 다이아몬드가 둘려져 있었다.

이번엔 루시아가 헤르윈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맞았다.

반지를 낌으로써 사랑의 결실이 더욱 단단하게 맺어진 것만 같았다.

“맹세의 키스가 있겠습니다. 신랑, 헤르윈 페네우스는 신부, 루시아 페네우스의 베일을 넘겨주십시오.”

헤르윈은 떨리는 손으로 그동안 루시아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머리 뒤로 넘기자 고운 자태의 루시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헤르윈이 베일을 넘긴 자세로 굳어버렸다. 하객들이 그 모습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 하나둘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이, 누군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헤르윈의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맨 앞줄에 앉아있던 양가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교황까지 놀랄 정도였다.

헤르윈은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며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당황하던 루시아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교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맹세의 키스를 하면 되는 거죠?”

“그… 네, 그렇습니다.”

루시아는 씩 웃으며 헤르윈의 양 볼을 잡고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헤르윈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고, 그에 맞춰 루시아는 까치발을 들었다.

루시아의 입술이 헤르윈의 입술에 맞닿았다. 신부가 먼저 입을 맞추는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잠깐 정적에 휩싸였던 결혼식장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드디어 현실로 돌아온 헤르윈이 보기 좋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루시아…….”

“새신랑께서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 이러다가 사람들이 울보 신랑으로 생각하겠어.”

“네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에 묻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교황이 유일했다. 정략결혼이 만연한 귀족사회에서 이리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부부는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이거 부인을 사랑한 나머지 눈물을 쏟으시다니. 세기의 사랑꾼이 탄생했군요.”

교황의 농담 아닌 농담으로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헤르윈은 순간 부끄러워졌지만, 루시아의 말간 웃음을 보고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이었다. 헤르윈은 루시아를 번쩍 안아 들어, 다시 한번 키스를 날렸다. 곳곳에서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잠깐 놀라던 루시아가 헤르윈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 * *

성황리에 본식이 마무리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다.

웨딩드레스 다음으로 루시아가 입은 것은 하늘빛이 도는 드레스였다.

겨울 분위기에 맞춘 드레스답게 눈꽃이 드레스에 내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헤르윈이 직접 잡아 온 순백의 여우 털로 만든 숄을 둘러 따뜻함과 포근함을 놓치지 않았다.

웨딩드레스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이번 피로연에서 입은 드레스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루시아가 새로 옷을 갈아입고 왔을 때, 헤르윈이 다시금 눈물을 흘릴 뻔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눈물을 겨우 참아낸 헤르윈은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루시아를 보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제 고백을 거절하던 남자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도 덕분에 의심을 하지 않게 됐지만.’

솔직히 헤르윈의 마음을 받아들였을 때만 해도 약간의 불안감이 있었다.

일전에 깊은 고민을 하고, 모든 것을 감내할 각오로 그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불안감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그가 갑자기 마음이 돌변해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모두 제 착각이었다고 말하면 어쩌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지만, 헤르윈과 같이 지낼수록 제 마음에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졌다.

‘저 눈을 보고 어떻게 의심을 하겠어.’

자신에게 눈길이 향할 때면 헤르윈의 붉은 눈은 초콜릿보다 더 달콤하게 변했고, 늘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것처럼 매번 놀라움을 선사했다.

어느샌가 정신 차리고 보니 오랜 기간 헤르윈을 짝사랑해왔던 자신보다도. 헤르윈이 저를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한 번도 헤르윈이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 없던 저가 가끔은 헤르윈의 치댐이 귀찮다고 느껴졌었으니 말 다 했다.

올해 봄, 헤르윈에게 마지막 고백을 했을 때를 생각하면 전혀 상상치도 못할 일이었다.

앞으로 마음 편히 행복한 일만 남아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제 손을 단단히 옭아매는 따뜻한 손을 느끼며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헤르윈은 계속해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루시아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자 헤르윈의 얼굴에 감격이 서렸다.

그에 부스스 미소 짓던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여보.”

처음으로 부르는 애칭이었다. 번개를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던 헤르윈이 루시아의 손을 꽉 쥐었다. 손에 낀 반지 때문에 조금 아팠지만, 이 정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

헤르윈은 당장이라도 루시아를 끌어안고, 키스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주위에 보는 시선이 많았기에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나도 사랑해, 자기야.”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루시아는 헤르윈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대다가 저들을 보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갔다.

사람들은 피로연 복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을 열렬히 맞이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준비한 피로연이니 마음껏 즐기고 가시기 바랍니다.”

루시아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헤르윈이 자연스럽게 루시아를 리드하여 텅 빈 댄스홀에 나갔다. 루시아와 헤르윈은 연주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첫 곡이 끝나자 아그네스 백작 부부, 페네우스 공작 부부, 브라이언과 크리스틴 등 사람들이 파트너와 함께 댄스홀로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나둘 사람들이 늘어갈 때 루시아의 시야에 익숙한 두 얼굴이 잡혔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루시아의 얼굴만 보고 있던 헤르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자기야?”

헤르윈 입에서 나오는 애칭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루시아는 그 점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기서 2시 방향.”

“2시 방향…….”

루시아의 시야에 맞게 2시 방향으로 고개를 튼 헤르윈은 왜 루시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루카스와 아리스타가 함께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타가 용기를 낸 건가 추측하던 그때, 루시아가 도통 자신과의 춤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두 사람만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루시아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보다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게 조금 심통 났다.

헤르윈은 곧바로 루시아의 허리를 번쩍 들어. 빙그르르 돌았다. 그제야 루시아의 벽안이 헤르윈에게로 향했다.

“자기야, 어딜 보는 거야. 날 봐야지?”

“……깜짝이야! 지금 다른 사람 봤다고 삐진 거야?”

“삐지긴 누가 삐져.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루시아의 눈에 입술이 삐죽 나온 헤르윈이 들어왔다. 허탈한 웃음을 내뱉던 루시아는 그냥 그에게만 신경 쓰기로 했다.

“미안해, 두 사람이 춤을 출지 몰라서 그랬어. 사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오빠가 아리스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거든.”

“호오-”

귀를 솔깃하게 하는 얘기였다. 마침 다음 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쉰다는 핑계로 댄스홀에서 나와 아리스타와 루카스를 관찰했다.

확실히 루시아의 말을 듣고 나니 루카스가 아리스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 투명하게 보였다.

“자기야. 아리스타도 형 좋아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헤르윈은 곧장 루시아에게 진실을 알렸다. 루시아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그들의 온 신경은 미래의 커플에게 쏠려 있었다.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은 금슬 좋은 부부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헤르윈과 루시아를 잘 아는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특히 아그네스 부부와 페네우스 부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애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걸까요?”

“줄리안 네가 봐도 그렇지? 꼭 사고라도 칠 것 같잖아.”

“결혼해서 철 좀 드나 싶었더니. 여전하네.”

“그래도 그만큼 편안해서 풀어지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간 결혼 준비니 뭐니 해서 많이 바빴잖아요.”

“하긴, 그도 맞는 말이군.”

모두 줄리안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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