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29)

<121화>

“세상에나…….”

“황궁에서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황족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페네우스 가문이 아주 이를 갈고 준비했네요.”

12월 1일.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자, 제국을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든 루시아와 헤르윈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웬만한 귀족들은 전부 초대하여 많은 이들이 결혼식에 걸음을 옮겼다.

기껏 해야 수도에 있는 대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릴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초대장에 적힌 주소를 보고 모두 눈을 비볐다.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가 바로 황궁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잘못 기입된 건가 싶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물론 황궁 중에서도 큰 연회가 열릴 때나 사용하는 대연회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거지만, 그럼에도 황궁에서 열리는 건 확실했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저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이 혀를 내둘렀다.

혀를 내두르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세상 화려한 결혼식을 보고 모두 입을 벌릴 정도였다.

겨울에 접어든 날씨 때문에 꽃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결혼식장은 싱그러운 꽃들로 가득했다. 옷에 꽃향기가 흠뻑 밸 정도였다.

막 결혼식장에 들어선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새삼 루시아가 페네우스 일가의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헤르윈도 참 대단하네요. 정말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을 준비한 모양이에요.”

“아리스타, 나중에 아레스 형이 곤란하겠는데?”

마침, 크리스틴과 함께 식장에 도착한 브라이언이 아리스타에게 다가오더니 혀를 찼다.

“아레스는 왜?”

“왜긴 왜야 몇 달 뒤면 황녀님이랑 결혼하잖아. 황실에서도 이 정도 규모로 꾸미려면 꽤 어려울 걸?”

“듣기로는 루시아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모양이에요. 처음에는 대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황궁에서 결혼을 올리는 거지?”

“이번 결혼식에 공작부인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대요. 눈 깜짝할 새에 예산이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크리스틴의 말을 들으며 아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낯이 점점 창백해지기는 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손이 떨릴 정도라고 말하던 루시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루시아는 지금쯤 준비하고 있을 테고, 헤르윈은 어딨지?”

“사람들이랑 인사라도 나누고 있지 않을까?”

“얘들아!”

넓은 결혼식장을 둘러보던 그때, 에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깔끔하게 머리를 정돈한 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 에단!”

에단을 반기던 것도 잠시 그의 옆에 있는 아기자기한 외모의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친구들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 여자가 바로 에단이 입이 닳도록 말하던 레이라 영애라는 것을.

루시아처럼 작은 키에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루시아는 약간 제 할 말은 다 하면서 단호한 면이 있는 다람쥐라면, 레이라 영애는 포식자 앞에 놓인 토끼처럼 연약한 이미지였다.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얘들아, 인사해. 내 여자친구 헬라 레이라야.”

“처, 처음 뵙겠습니다. 헬라 레이라라고 합니다.”

헬라가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사실 헬라는 이곳에 올 때부터 긴장하고 있었다.

제 애인이 제국 내에서도 유명한 인물들을 친구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는 주인공들이 에단의 친한 친구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에단에게 친구들 얘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친구들을 많이 아끼고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만큼 자신이 그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화려한 이력과 외모를 가진 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보잘것없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들이 저를 탐탁잖게 여기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헬라는 에단의 손을 꼭 잡으며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흠칫 떨 수밖에 없었다.

모두 싱긋 웃으며 자신을 환영하고 있었다. 특히 그 유명한 아리스타 리디아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제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네요. 에단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리스타 리디아입니다.”

“네, 넵! 반갑습니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에단이 하도 자랑을 해서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는데 듣던 것처럼 참 귀여우시네요.”

“에단, 너 능력도 좋다. 어디서 이렇게 귀여우신 분을 데려온 거야?”

“하하, 헬라가 좀 많이 귀엽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유난으로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헬라는 기겁하며 에단의 팔을 꼬집었다. 아플 텐데도 에단은 헤벌쭉 웃고 있었다.

창피해서 눈치를 보자 모두 훈훈한 미소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을 받아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마침 잘됐네. 우리 헤르윈 찾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너도 갈래?”

“그래, 좋아. 헬라, 괜찮지?”

“으응! 괜찮아.”

헬라는 바짝 긴장하며 에단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에단의 친구 중 가장 기대되는 인물은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인 헤르윈 페네우스 공자였다.

제 주변의 친구들이 한 번쯤은 짝사랑 해봤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헬라도 아카데미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선배였다. 물론, 멀리서 본 것이 전부였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얘기들을 떠올리며 헬라는 에단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 힘을 느낀 에단이 헬라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긴장돼?”

“……조금?”

“걱정하지 마. 헤르윈이 인상은 차가워도 내면은 따뜻한 사람이야.”

그 마음 이해한다며 에단이 헬라의 손을 두드렸다.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저깄다.”

때마침 헤르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헬라는 에단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에게 가까워질수록 헬라는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세상에, 저게 사람이야?’

왜 친구들이 그간 공자, 공자 노래를 불렀는지. 결혼 소식이 발표됐을 때 그토록 많은 여자들이 눈물을 흘렸는지 헬라는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헤르윈 페네우스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에서 빛이 났다.

헤르윈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헬라는 축하 인사를 받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헬라는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순간 붉은 눈이 상위 포식자처럼 사납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헤르윈, 여긴 내 여자친구 헬라 레이라야. 처음 보지?”

“그래.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인상이 차갑다고 느껴지기 무섭게 헤르윈의 입가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르윈 페네우스 입니다.”

“……헬라 레이라라고 합니다.”

“오늘 결혼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편하게 즐기고 가세요.”

“네…….”

너무 현실감 없는 외모로 말을 건네오자 헬라는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넋이 나간 헬라를 보고 모두 에단을 놀렸다. 이러다가 헤르윈한테 홀리는 거 아니냐고.

“자, 자기야 내가 제일 좋은 거지? 그렇지? 아무리 헤르윈이 잘생겼다고 해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이야.”

헬라가 부끄러워하며 에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애정 가득한 한 쌍의 커플을 보며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툭 쳤다.

“긴장돼?”

지금은 이리 웃고 있지만, 친구들 눈에는 보였다. 그의 입가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단단히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말이라고…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조금 힘이 풀렸는지 헤르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기민한 아리스타의 감각이 쿵쾅거리는 헤르윈의 심장 박동을 눈치챘다.

겨우 옆에 있을 뿐인데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면 심장이 빠르게 뛰는 모양이었다.

“루시아가 드레스 입은 모습은 봤어?”

“아니, 못 봤어. 오늘이 처음이야.”

“아이고, 처음이라면 제대로 일 나겠네. 이러다가 만인 앞에 헤르윈이 팔불출이란 걸 들키겠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브라이언이 걱정이라는 핑계로 헤르윈을 놀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정색했을 헤르윈이었지만, 중대한 결혼식인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는지 세상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재미없다고 투덜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윽고 다른 사람들이 다가왔다. 캐스퍼 후작 부부였다. 친구들은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베른과 셀린느는 잘 지내고 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이 훤했다.

아리스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곤 친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아리스타는 무언가를 포착했다.

“얘들아, 먼저 가서 내 자리 좀 잡아줘. 나 잠깐 누구 좀 만나고 올게.”

“그래, 알겠어.”

아리스타는 허겁지겁 달려가 그 사람을 붙잡았다.

“아리스타!”

바로 루카스였다. 오늘이 동생의 결혼식인 만큼 루카스도 멋지게 빼입고 있었다. 루카스는 이내 아름답게 치장한 아리스타의 모습에 귀를 붉혔다.

“오늘… 예쁘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조금이나마 진심을 말했다. 아리스타는 볼을 붉히며 발을 배배 꼬았다.

“오라버니도 오늘 멋있어.”

두 사람은 부끄럽지만 진심이 담긴 칭찬을 나누었다. 얼굴을 붉히던 루카스가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불렀어?”

“잠깐 인사라도 할까 싶어서. 나중엔 이렇게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것 같더라고.”

“하긴, 본식이 끝나면 이것저것 챙기느라 이렇게 둘이 얘기할 시간은 별로 없겠다.”

“그리고…….”

“음?”

“괜찮으면 피로연에서 나랑 파트너 안 할래?”

“……어?”

순간 루카스는 말문이 막혔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파티처럼 춤을 계속 추지는 않지만, 피로연에서도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다.

마침 루카스도 아리스타에게 파트너 제안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이미 파트너가 있는 거야?”

침묵이 길어질수록 아리스타의 얼굴도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루카스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좋아! 나랑 파트너 하자!”

아리스타가 괜히 오해할까 싶어 목소리를 높였더니 너무 경박스럽게 말한 것 같았다. 루카스가 뒤늦게 볼을 붉히자 아리스타가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러면 나랑 파트너 하는 거다? 알겠지?”

“……으응.”

루카스가 넋을 놓고 있을 때, 멀리서 친구들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걸 듣고 아리스타는 걸음을 옮겼다.

“난 이만 가볼게. 좀 있다가 봐.”

아리스타가 먼저 자리를 떠나고 루카스가 덩그러니 남았다. 멍하니 손을 흔들던 루카스는 저 멀리 흔들리는 금발을 보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허공에 주먹을 내질렀다.

두 사람 모두 각기 다른 곳에서 기쁨의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 * *

똑똑-

문이 열리고 요한이 나타났다. 그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정장을 확인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주한 모습에,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시아.”

아버지의 부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뒤를 돌아봤다.

루시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아 하나로 곱게 틀어 올렸고, 본연의 매력을 강조할 수 있는 화장을 통해 미모를 더 끌어올렸다.

어깨부터 시작하여 손목까지 이어지는 레이스와 허리에서 풍성하게 내려오는 드레스 라인, 그리고 곳곳에 박힌 보석들이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발하며 루시아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운데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요정, 아니 여신처럼 보일 정도로 눈이 부셨다.

‘아름답다’는 단어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새삼 제 딸이 결혼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요한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루시아에게 다가갔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고민할 새도 없이 바로 루시아 아그네스라고 말해야겠구나.”

나이가 들수록 무뚝뚝해지는 요한의 입에서 헤르윈 못지않게 팔불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루시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제게 뻗어진 요한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도 참, 그러다가 새신부들한테 몰매 맞아요.”

“어디 한번 네 모습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꾸나. 괜히 내 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야.”

“네, 그렇게 생각할게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도통 믿지 않는 눈치였다.

요한이 의도치 않게 선사한 웃음 덕분인지 긴장이 풀려버렸다. 루시아는 요한과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어제만 해도 마냥 들뜨고 기쁨이 가득했는데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아꼈는지 되새기게 되었다.

이제 저 문만 열면 자신은 루시아 아그네스가 아닌 루시아 페네우스가 될 것이다.

문 너머로 사회자가 헤르윈을 소개하고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자, 그러면 이제 그만 결혼식의 주인공을 만날 시간이겠죠?”

곧 제 차례였다. 루시아만큼이나 긴장한 요한이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루시아.”

“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딸.”

요한의 그 한마디에 루시아가 애써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결혼 축하한다.”

“그럼! 신부 입장하겠습니다!”

열리는 문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왔다. 그 순간 루시아는 고개를 돌려 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은 사랑을 가득 담은 벽안으로 루시아의 모습을 가득, 힘껏 품었다. 누군가가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 좋은 날에 울 수는 없었다. 루시아는 심호흡을 하며 요한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했다.

“절 이토록 잘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제 손을 꽉 쥐는 요한의 따스함을 느끼며 루시아는 정면을 바라봤다. 저 멀리, 앞으로 자신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헤르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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