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하아, 오늘 재밌었다. 조만간 또 모이자.”
“그래, 맞아! 루시아 결혼식도 두 달밖에 안 남았잖아.”
“에단 나중에 네 애인도 데려오는 거 어때?”
“나중에 한 번 물어볼게.”
슬슬 떠나려는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시끌벅적했다. 루시아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다가 헤르윈이 제 옆에서 멀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너도 가게?”
“응, 처리해야 할 업무가 좀 있어.”
“저녁까지 있을 줄 알았는데…….”
루시아의 어깨가 축 처지자 헤르윈의 손이 움찔 떨렸다.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면 루시아에게 키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헤르윈은 인내심을 한계치까지 발휘하며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나중에는 더 오래 있을게. 일찍 가서 미안해.”
“아니야, 내가 괜한 투정을 부린 건데 뭐.”
루시아가 헤르윈의 볼을 쓰다듬자 헤르윈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두 사람은 짧은 뽀뽀를 하며 인사를 했다.
헤르윈은 한 마차에 옹기종기 타려는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아리스타를 불렀다.
“아리스타, 넌 나랑 같이 가자.”
“응? 나?”
“그래, 여기서 나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그러게? 아리스타, 헤르윈 마차 타고 가.”
“맞아요. 그게 더 편하겠네요.”
확실히 아리스타 혼자만 가는 방향이 달랐다.
딱히 고민할 것도 없이 아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얘들아, 나중에 봐.”
“네! 나중에 봐요!”
“아리스타! 다음에는 꼭 누굴 좋아하는지 말해줘야 해! 알겠지?”
“말 안 한다니까. 저 자식들이…….”
아리스타가 화를 내기도 전에 마차는 출발했다. 주먹을 불끈 쥐던 아리스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침 페네우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다가왔다. 헤르윈이 문을 열었다.
“자, 타.”
“그럼, 실례…….”
“아리스타.”
아리스타는 마차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은 루카스였다. 다같이 작별인사를 할 때 사라졌던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자, 이거.”
루카스가 무언가 건넸다. 작은 통이었다. 통을 받아든 아리스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화상연고야. 혹시 모르니까 얻어왔어. 오늘은 그거 꼭 바르고 자. 알겠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화상을 그가 끝까지 챙겨주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차를 쏟았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하던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오늘따라 유독 루카스가 자신을 챙겨주는 것 같았다.
저절로 얼굴이 달아오른 아리스타는 하늘이 어두운 것에 감사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
두 사람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헤르윈은 씩 입꼬리를 올렸다.
“형, 우린 이만 갈게.”
“그래, 아리스타 잘 데려다줘.”
걱정하지 말라고 루카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헤르윈은 마차에 올라탔다. 커튼을 걷어, 루시아와 손 인사를 하고 마차가 움직였다.
루시아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헤르윈은 그제야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정면을 보니 아리스타가 여전히 연고 통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씩 들었던 의심이 오늘부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리스타, 너 형 좋아하지?”
아리스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든 아리스타는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헤르윈은 내심 놀랐다. 아리스타의 표정이 저리 풀어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마차 안이 어두워도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알 수 있었다.
“그, 그, 그걸 어, 어떻…….”
“애초에 숨기지도 못하네.”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아리스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이제야 알겠다. 형의 전 애인이랑 유독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더니. 형을 좋아해서 그랬던 거구나?”
“……….”
“왜 말이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응?”
아리스타가 쥐방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걸 듣기 위해 헤르윈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걸 제일 먼저 알아차리다니……!”
뭐지, 이 묘한 기분은? 칭찬도 욕도 아닌 것 같은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아리스타에겐 헤르윈의 기분 따윈 관심 없었다. 아리스타는 지금 혼란 속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으니까.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
“아니, 나도 오늘에야 확신한 거야.”
“하아…….”
아무래도 루카스에게 애인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들뜬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제 마음이 들키기 전에 그에게 늘 새 연인이 생기곤 했으니까.
“형은 아직 네가 좋아하는 거 모르지?”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지 않겠지.”
“하긴, 네가 고백이라도 했다면 지금쯤 사귀고 있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려던 아리스타는 문득 무언가 걸리는 말에 헤르윈을 쳐다봤다. 헤르윈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 말 틀려? 네가 고백하면 바로 받아줄걸?”
“……그럴 리가.”
넋이 나간 목소리에 헤르윈은 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설마, 너 지금 형이 안 받아줄까 봐 그러는 거야?”
침묵하는 걸로 보아선 맞는 모양이다. 제게는 이런저런 조언 다 하던 사람이 정작 본인의 일에는 쩔쩔매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특히 아리스타처럼 뛰어난 외모를 가진 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여러 이해관계가 엮여있긴 했지만, 자신 또한 루시아가 받아주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으니까.
“네가 봤을 때는…….”
아리스타가 입을 열자 헤르윈은 귀를 기울였다.
“오라버니가 날 받아줄 것 같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과, 잘게 떨리는 어깨, 그리고 기대감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헤르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충분히.”
아리스타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퍼졌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를 하며 기쁨을 억눌렀다.
“뭘 불안해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자신감을 가져.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시작도 안 해 보고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놓치면 그때는 더 후회할 거라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아리스타는 자신이 헤르윈한테 했던 조언을 떠올리며 짐짓 얼굴을 굳혔다.
“솔직히 형이 애인과 헤어지면 얼마 있지 않아서 새 여자를 사귀는 편이잖아. 그런 걸 보면 형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고, 형도 딱히 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는 거겠지. 게다가 전에 만난 애인은 약혼까지 생각했었다며. 너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네 말이 맞아.”
헤르윈 말 중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자신도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웠다. 늘 자신을 동생으로만 여기던 그가 자신을 부담스럽다고 거절하고, 피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영영 그를 놓치는 것도 싫었다.
끊임없이 갈등하는 아리스타를 보며 헤르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섰다. 어느새 리디아 공작저에 도착한 것이다. 아리스타는 바깥에 보이는 자신의 집을 보며 마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헤르윈이 말했다.
“네가 형을 좋아한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아리스타가 피식 웃었다.
“그래, 고맙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그래.”
아리스타가 문을 닫자 마차는 다시금 움직였다. 저택에 들어서는 아리스타를 보던 헤르윈은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형도 아리스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제 추측뿐이라 아리스타에게 말하진 않았다.
만약 제 말을 믿고 아리스타가 고백을 했다가 차이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없을 테니까.
헤르윈은 부디 자신의 추측이 맞기를 바라며 달이 차오르기 시작한 밤하늘을 쳐다봤다.
* * *
“오빠, 아리스타 좋아해?”
“푸훕!”
루카스가 물을 마시다 말고 내뿜었다. 루시아가 질색하며 뒤로 물러선 건 당연했다.
“대, 대체 무슨 소리를…….”
“당황하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
루카스는 입을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황하던 것도 잠시 루카스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내가 아리스타를 왜 좋아해.”
“그런데 왜 방금은 아무 말도 못했어?”
“그야 네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지.”
“흐음…….”
“……너, 그 표정은 뭐냐.”
루시아가 팔짱까지 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쏘아내자 루카스는 뒤로 주춤 물러섰다.
“정말, 아리스타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래도!”
“하지만 아리스타가 차를 쏟았을 때 바로 반응한 것도 그렇고, 손수 데려가 옷을 갈아입힌 것도 그렇고… 게다가 아리스타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니까 바로 얼어붙었잖아.”
“……그건.”
루카스가 우물쭈물 말을 못하자 루시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뭐, 아니면 말고.”
사람 속을 뒤집어놓고서는 태연한 반응이었다.
“그래도 만약 진짜 좋아하는 거라면 긴장 좀 해야 될 텐데? 아리스타가 오죽 인기가 좋아? 지금 아리스타 만나보겠다고 줄 선 남자가 아주 많아. 게다가 아리스타는 마음 맞는 사람만 만나면 바로 결혼까지 할 생각인 것 같더라고.”
“정말?”
아니라고 할 때는 언제고 관심을 보이는 루카스에 루시아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일단은 뻔히 보이는 루카스의 마음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확실한 건 아니고. 이왕 결혼할 거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고 싶다고 했어.”
“아…….”
“말하는 뉘앙스나 평소 아리스타 행동 생각하면 답이 딱 나오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결혼까지 가지 않을까?”
루시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루카스의 어깨가 처지기 시작했다. 왜 기운이 없어지는 건가 싶었더니 아무래도 자신은 아리스타가 좋아하는 사람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근데 아리스타는 오빠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오늘 불현듯 아리스타와 루카스의 행동이 눈에 밟혔다.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니 두 사람 다 서로를 간간이 훔쳐보는 것이 보였다.
특히 아리스타가 자주 그런 행동을 보였다.
너무 찰나의 순간이라 자세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모를 정도였다.
이 모든 게 제 착각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리스타가 루카스를 좋아했으면 했다.
‘둘이 잘 어울려.’
아리스타가 조금 아까운 것 같기는 해도 남매로서 루카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 만약 마음이 맞는다면 두 사람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일단 아리스타의 감정은 몰라도, 루카스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그때, 가만히 있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그는 루시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너는… 아리스타가 누구 좋아하는지 알아?”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루시아는 고민하는 척 머리를 짚었다.
“글…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뭐야. 알면 아는 거지.”
“응, 잘 모르겠네.”
초롱초롱했던 벽안이 순식간에 짜게 식었다. 루카스가 됐다며 걸음을 옮기자 루시아는 입을 열었다.
“오빠. 관심 있으면 다가가 봐.”
루카스가 멈춰 섰다.
“혹시 알아? 아리스타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빠일지?”
“……아리스타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잠시 말이 없던 루카스가 빽 소리 지르며 자리를 벗어났다. 부리나케 도망가는 루카스를 보고 루시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간 여러 여자도 만나고, 사랑도 해봤을 텐데 왜 저리 아무것도 안 해 본 어린애마냥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편 방으로 도망쳐 온 루카스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꾹 눌렀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던 루카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쳤어, 루카스…….”
루카스가 문가에 등을 기대며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리스타를 좋아하나 봐.”
아리스타가 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였던 것도, 그녀를 만날 때면 시선을 뗄 수 없는 것도,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것도 전부…….
“좋아해서 그런 거였어…….”
한 번 자신의 마음을 인지하고 나니 심장 박동 소리가 더욱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간 여러 여자를 만나, 사랑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푹 빠져 한 사람만 생각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미처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 어떡하냐…….”
당장 내일출근해서 아리스타를 봐야 하는데… 이런 감정으로 그녀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밤이 유독 길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