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크흠! 그래서 결혼 얘기는 대체 뭐야? 서로 알아보고 있는 단계라고 말한 지 겨우 2주밖에 안 됐잖아.”
에단이 입을 열며 다시 브라이언과 크리스틴의 결혼 소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황당해하는 에단을 보고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랬지.”
“고작 2주 사이에 결혼을 약속했다고?”
“제가 진지하게 만나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브라이언이 청혼을 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부끄러워하며 진실을 밝혔다. 크리스틴이 브라이언에게 마음을 연 건 알겠는데 그 틈을 타 결혼 얘기를 꺼낸 브라이언이 참으로 대단했다.
에단, 루시아, 헤르윈이 모두 오묘한 표정으로 브라이언을 보자 그가 호탕한 웃음을 보였다.
“언제 어디서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니까 늘 프러포즈 반지를 들고 다녔거든. 우리 크리스틴이 나를 받아줘서 다행이지. 그치, 자기야?”
“아이, 당신도 참. 친구들 앞에서 그 애칭은 부르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그랬나? 에이, 뭐 어때. 어차피 얘들 앞인데.”
두 사람은 어느새 저들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루시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쳐다봤다.
결혼식 때만 해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더니 지금은 무슨 몇 년은 사귄 연인처럼 구는 것이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다 문득 루시아는 무언가 깨달았다.
‘혹시 나랑 헤르윈도 저랬나?’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에단을 보니, 한창 헤르윈과 자신이 붙어있을 때 짓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루시아는 앞으로 친구들 앞에선 애정 행각을 자제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래도 뭐… 결혼 축하한다.”
“맞아, 축하해. 설마 또 이 멤버에서 커플이 탄생할 줄은 몰랐네.”
“루시아랑 헤르윈이 사귀고, 크리스틴이랑 브라이언이 사귀고, 나도 레이라 영애랑 사귀고 있으니까…….”
하나둘 이름을 언급하며 손가락을 접던 에단은 하나 남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제 남은 건 아리스타뿐이네?”
“어머,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반년 전만 해도 전부 솔로였는데 말이지.”
그 짧은 시간 내에 모두 커플이 되다니 참 신기했다.
꾸준히 연애한 브라이언을 제외하면 모두가 여태까지 솔로였다. 그런데 어느샌가 하나둘 짝을 찾아가더니 이제는 아리스타 한 명만이 남아버렸다.
“아리스타는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걸까요?”
“걔는 가만히 있어도 꼬이는 남자가 열 마차가 넘을걸?”
“맞아, 파티에 참석만 해도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잖아.”
황녀와 쌍두마차를 이룰 정도로 제국 내 최고의 미녀라 일컫는 아리스타.
헤르윈 외에 관심이 없는 루시아마저 볼을 붉히게 만드는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고 보니…….’
루시아는 과거에 아리스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크리스틴과 다 같이 모여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아리스타는 분명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평생 함께할 사람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았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아리스타가 헤르윈을 좋아하는 것이라 착각했었다. 그런데 자신과 헤르윈이 사귀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준 것을 보면 그녀는 헤르윈에게 관심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대체 누굴 좋아하는 거지?’
분명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뉘앙스였는데. 혹시 제 착각인가?
“우리 모두 가 버리면 아리스타가 외로울 텐데.”
“괜찮은 남자라도 소개해 줄까?”
모두 혼자 남은 아리스타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말을 내뱉을 때, 헤르윈이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 좋아하는 사람 있을걸?”
헤르윈 품에 있던 루시아를 포함하여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폭탄 발언을 해놓고 정작 본인은 무덤덤했다.
“뭐어?! 정말?”
“아, 아리스타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야? 누굴 좋아하는 건데?”
에단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밝혔을 때만큼이나 격한 반응이었다. 제게 쏠린 친구들의 시선에 헤르윈은 고개를 뒤로 뺐다.
“누구를 좋아하는 건지는 몰라. 그런데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와아…….”
“그 아리스타가 짝사랑이라니 믿기지가 않네.”
“짝사랑이 아니라 비밀연애일지도 모르잖아요!”
“비밀연애를 왜 해. 우리한테 숨길 이유가 없잖아. 비밀 연애하는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렇네요.”
단숨에 떠들썩해지는 친구들을 보고 루시아는 헤르윈에게 슬쩍 물었다.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여름제 첫날에. 루카스 형이 애인이랑 같이 왔을 때, 그 애인이 나랑 아리스타를 엮었거든. 근데 아리스타가 정색하면서 자기는 다른 사람 좋아한다고 말했어.”
“정말?”
“응. 그때, 형 애인이 엄청 무례했어. 그래서 왜 저런 사람이랑 사귀나 했는데 다행히 헤어졌다고 하더라. 약혼까지 생각했다는데 빨리 헤어져서 다행이지.”
헤르윈의 말을 듣고 루시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번에 루카스에게 갑작스레 애인과 헤어지게 된 경위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리스타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애인이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그 이전에는 아리스타로부터 애인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루카스를 도와준 아리스타에게 고마웠었는데 지금은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루카스와 아리스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막연한 직감만 있을 뿐이었다. 루시아는 텅 빈 두 자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아리스타, 다리는 어때?”
문밖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리스타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른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 화상 안 입었어.”
“다행이다. 어디 빨갛게 달아오르거나 한 곳은 없지?”
“응, 없어. 멀쩡해.”
루카스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한참 후에야 아리스타는 긴장되는 숨을 내뱉었다.
이곳은 루카스 방에 딸린 욕실이었다. 찻물이 쏟아진 허벅지를 확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아리스타는 제 다리를 내려다봤다. 매끈한 허벅지 가운데에, 붉게 달아오른 부분이 있었다.
루카스에게 괜찮다 말은 했지만, 경도 화상을 입은 채였다.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의사를 부를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붉게 달아오른 부분을 건드리자 쓰라렸다. 아리스타는 바깥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물을 틀었다.
그리고는 다리에 물을 맞으며 열기를 식혔다.
‘심하지 않으니 금방 가라앉겠지.’
허구한 날 검을 휘두르고, 대련을 하면서 생기는 상처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다고 생각할 때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아리스타는 서둘러 근처에 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아리스타, 문 앞에 바지 뒀어. 사이즈를 몰라서 일단 작은 걸 갖고 오긴 했는데 만약 안 맞으면 말해. 다른 거 갖다줄게.”
“……응! 알겠어!”
아리스타를 배려하기 위해 루카스가 서서히 문가에서 멀어졌다. 아리스타는 손만 문밖으로 내밀어 더듬더듬 바지를 가져왔다.
“허리가 조금 크기는 한데…….”
바지를 갈아입으니 기장은 딱 맞아떨어졌다. 허리끈만 졸라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최대한 세게 잡아당겼다.
그렇게 대충 바지를 챙겨 입은 아리스타는 원래의 옷까지 잘 챙겨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자 창틀에 걸터앉은 루카스가 보였다. 가을에 들어선 지 꽤 되어 그런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아리스타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바깥 풍경을 보던 루카스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때? 바지는 좀 맞아?”
“아… 으, 응! 맞아. 허리가 조금 크기는 하지만…….”
“어디 봐.”
루카스가 성큼성큼 다가와 아리스타의 바지 부분을 훑어봤다. 손을 댈 수 없으니 그저 살펴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묘하게 긴장됐다.
“그래도 많이 크지는 않은 것 같네?”
“최대한 졸라매니 얼추 맞더라고.”
“그럼, 그거 입고 가면 되겠다. 사실 처음에는 루시아 치마라도 가져다 줄까 했는데 루시아랑 너랑 키 차이가 꽤 나잖아. 그래서 그냥 내 바지를 들고 왔어.”
“이거 오라버니 바지였어?”
아리스타가 화들짝 놀라며 바지를 만지작거렸다. 180cm 정도 되는 루카스한테는 척 보기에도 작은 바지였다.
“내가 아카데미 1학년 때까지 입었던 바지야.”
아리스타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 이후에는 갑자기 키가 쑥쑥 커지더라고. 몇 번 못 입었어.”
“그렇구나…….”
“어차피 못 입는 거니까 너 가져.”
“어? 하지만…….”
“돌려줘봤자 내가 입을 일이 없어서 그래. 그거 내 허벅지에도 안 들어갈걸?”
루카스가 농담을 내뱉었지만, 허벅지에 바지가 끼어 안 올라가는 상상을 하게 된 아리스타는 얼굴을 붉혔다.
열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아리스타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면… 잘 입을게. 고마워.”
“고맙긴 뭘. 당연한 일이지.”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가운데에 벽안이 날카롭게 빛나며 아리스타 뒤쪽을 슬쩍 훔쳐봤다. 물기 하나 없던 욕실에 물을 쓴 흔적이 있었다.
아리스타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루카스는 웃는 얼굴로 다른 말을 꺼냈다.
“자, 우리 이만 가자. 애들이 기다리겠다.”
다행히 아리스타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두 사람은 별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정원에 있는 애들에게 다가갔을 때, 뭔가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루카스도 그걸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리스타가 떨떠름하게 자리에 앉으며 친구들 눈치를 보자 에단이 입을 열었다.
“아리스타, 너 좋아하는 사람 있어?”
“……뭐?”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순간 아리스타는 방심하고 말았다. 놀란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이들은 확신했다.
“맞네, 맞아. 아리스타 좋아하는 사람 있네.”
“세상에! 아리스타! 누굽니까? 누굴 좋아하는 거예요?”
“설마 너, 짝사랑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아리스타는 정신이 없었다. 한편 옆에 있던 루카스가 눈을 휘둥그레 키우며 얼어붙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너 분명 전에 마음에 담은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잖아.”
뒤늦게 정신 차린 아리스타가 변명하려 했지만, 헤르윈은 단호했다. 아리스타는 이 사태의 원인이 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여름제에서 루카스 형의 전 애인이 우리 엮으려고 했을 때. 그때 네가 딱 잘라서 아니라고 말했잖아.”
“……아.”
루카스는 그제야 아리스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그 이전에도 그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뭐 하러 숨기려고 그래. 누굴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아리스타는 입만 뻐끔거렸다. 맞는 말인데 헤르윈이 죽도록 얄미웠다. 결국 자포자기한 아리스타가 얼굴을 쓸어내리자 친구들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그래, 좋아하는 사람 있다. 어쩔래?”
오오오-
감탄사가 튀어나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옆에 있는 루카스가 신경 쓰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상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는 모를 텐데 말이다.
“누굽니까? 누굴 좋아하는 겁니까?”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설마 우리 몰래 사귀는 건 아니지?”
“빨리 무슨 말이라도 해봐!”
친구들이 답답해하는 마음도 이해가 가지만 갑작스러운 습격에 아리스타는 아찔하기만 했다. 그녀는 최대한 화를 잠재우며 말했다.
“비밀이고, 좋아한 지는 꽤 됐어. 사귀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몰라.”
“세상에, 그 얼굴로 고백 한 번 안 했다고? 네 얼굴이 아깝다!”
“맞아, 네가 고백하면 대부분 넘어갈 텐데 왜 고백을 안 해? 누군지 대충 말이라도 해봐. 우리가 자리라도 마련해줄게.”
“됐어, 이것들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더 이상 파고들지 마.”
아리스타가 학을 떼자 아쉬운 소리를 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얘들아, 그쯤 하자. 아리스타가 싫어하잖아.”
친구들이 다시 몰아세우려 하자 눈치를 살피던 루시아가 중재에 나섰다. 그제야 모두 뒤로 물러섰지만, 아쉬운 기색은 역력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나중에 고백할 생각은 있어?”
브라이언의 질문에 아리스타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저를 보고 있는 루카스를 훔쳐보며 말했다.
“……응, 언젠가는 할 거야.”
모두들 자기 일처럼 설레며 고백하고 나면 꼭 말해달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기분이 가라앉은 사람은 아리스타와 루카스뿐이었다.
루카스는 도저히 웃으면서 얘기하는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아리스타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응원해 주는 게 맞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려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루카스를 아리스타가 몰래 훔쳐보았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헤르윈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