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29)

<117화>

남작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티아나를 내려다봤다.

“설마, 당신 지금 저년을 자기 며느리로 받아들인 거요?”

“……….”

“하하하하! 이것 참 웃기군! 그렇게 과거에는 내 딸을 인정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 와서 얌전히 받아들인다고? 아주 희극이나 다름없어!”

“딸이 후작가의 인정을 받는다는데 아비로서 기뻐하지 못할망정 비웃기나 하다니. 참으로 대단하군.”

툭 내뱉는 티아나의 말에 숨겨진 가시들이 어마어마했다. 그에 자극을 받았는지 남작의 눈이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래, 아비로서 축하를 해줘야지. 그런데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아비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데,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

“셀린느! 네가 한번 말해 보거라! 네 입으로 가족들에게 결혼 사실을 알린 적 있느냐? 보고 싶다고 찾아와도 매번 무뢰배 취급을 하며 내쫓던 것이 누구야!”

셀린느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베른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결국 참다 못한 베른이 입을 열었다.

“알렸다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뭐야?”

“전에 그리했던 것처럼 셀린느의 이름을 대면서 무리하게 빚을 끌어다 썼겠지요. 그것도 안 된다면 후작가의 명예를 팔았겠죠. 자식 된 도리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아비 노릇을 한 적 있어요?”

베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매번 셀린느를 핍박하고! 심지어 자식이 아닌 하녀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자신이 진 빚을 갚으려고 딸까지 팔아먹은 주제에! 어디서 자식을 운운해!”

베른이 진실을 토해낼수록 셀린느의 눈에 고인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처음엔 셀린느에 대해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며 제인슨 남작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봤다.

분위기가 180도 바뀌자 남작이 주춤 물러섰다.

무거운 적막 속에서 티아나가 입을 열었다.

“셀린느 양이 베른과 결혼한 이상. 이제 그녀는 저희 캐스퍼 가문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친부라고 하여도 이 이상 난동을 부린다면 엄히 대응하도록 하죠.”

티아나마저 셀린느를 보호했다. 결혼식 직전까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그녀가 자신을 감싸자 셀린느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여봐라, 당장 저자를 끌고 가라.”

“네!”

티아나가 기사들에게 다시 명령을 하자 남작은 이번에 허탈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넋을 놓으며 베른의 품에 있는 셀린느를 쳐다보던 남작은 이내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는 괴성과 함께 또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행동에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기사들이 그를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남작의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기사가 차고 있던 검을 낚아챈 것이다.

비틀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남작을 보고 모두 비명을 질렀다.

“내가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것 같아!”

당장 셀린느에게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주변에 아무도 오지 못하도록 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루시아와 크리스틴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루, 루시아 저희 빨리 피해요.”

“응, 일단 다른 곳으로…….”

“다 죽여버릴 거야! 다 죽이고! 저년까지 죽여버릴 거야!”

그때, 제인슨 남작이 지척에 있던 루시아와 크리스틴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루시아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그와 떨어진 거리는 불과 3m. 몇 걸음만 옮기면 금방 닿는 거리였다. 게다가 검까지 휘두르고 있어 비거리가 더 짧았다. 

“꺄아아악!”

남작이 검을 휘두르면서 달려들자 크리스틴이 비명을 질렀다. 루시아와 크리스틴은 미처 도망치지도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쨍그랑-!

남작이 다가오기 전에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남작의 머리에 명중한 듯한 그릇이 보였다. 어느새 가까이 온 헤르윈이 남작의 손을 쳐내며 검을 빼앗고는 그를 바닥에 제압했다.

“끄아아악!”

“크리스틴! 괜찮아?”

저 멀리 있던 브라이언이 어느새 크리스틴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 접시 하나가 들려있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남작에게 그릇을 던진 것이 바로 그인 것 같았다.

“저, 씹어먹을 녀석이 감히 누구한테……!”

벌벌 떠는 크리스틴을 품에 안으며 브라이언이 욕을 읊조렸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한편, 제인슨 남작 입에서는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루시아는 순간 움찔 떨었다.

남작의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헤르윈이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감히 내 여자한테 칼을 휘두르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지?”

브라이언 못지않게 헤르윈 또한 화를 내고 있었다. 분노 그 이상의 감정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이번 일, 결코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헤르윈의 발이 비틀어진 남작의 팔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남작이 비명을 더 내지르다가 고개를 떨궜다. 기절한 것이다.

기절한 남작을 지르밟던 헤르윈이 서둘러 루시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그녀를 살폈다.

“하아, 다친 곳 없어서 다행이다.”

“……헤르윈.”

“앞으로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헤르윈이 루시아를 꼭 끌어안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던 루시아는 편안함을 느끼고 헤르윈에게 기댔다.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아 저도 모르게 심히 놀란 모양이었다. 오크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

그건 헤르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슴팍에 기대고 있으면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자신에게 달려와 준 그가 고마웠다.

“헤르윈, 고마워.”

“당연한 일이야. 그 누구도 네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해.”

헤르윈의 뒤에서 사람들이 서둘러 기절한 남작을 데려가고 사건을 정리하려는 것이 들려왔다.

“아그네스 영애!”

그때, 셀린느가 베른과 함께 다가왔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울음을 쏟아내며 루시아의 손을 허겁지겁 잡았다.

“저, 정말. 죄, 죄송합니다. 정말,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루시아 양. 이번 일은 저희의 관리 소홀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저자는 어떻게 할 셈이지?”

눈빛이 가라앉은 헤르윈이 저 멀리 끌려가는 제인슨 남작을 쳐다봤다.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손봐주겠단 눈빛이었다.

베른은 침을 꿀꺽 삼키며 똑같이 이를 갈았다.

“셀린느의 가족이었기에 그동안 봐주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벌을 받게 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자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대로 처리하셔야 할 겁니다. 오늘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네, 당연하죠.”

“어떡, 어떡해…….”

흐느끼는 목소리에 베른과 헤르윈의 고개가 모두 돌아갔다. 셀린느는 아직도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루시아와 크리스틴의 손을 잡으며 계속해서 사과를 해왔다.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우는 그녀 때문에 도리어 두 사람이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셀린느를 진정시키는 루시아와 크리스틴을 보고 베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드려 너무나 죄송합니다, 여러분.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비를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피로연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으니 최대한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하객들을 진정시킨 베른은 루시아와 크리스틴을 저택으로 데려가 의사의 진찰을 받게 했다.

큰일을 당하기 전에 헤르윈과 브라이언이 나타나서 보호했기에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베른은 끝까지 두 사람을 책임지며 온갖 진단을 받게 하였고, 따로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베른과 셀린느의 결혼식은 결국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잡음을 남기며 끝나게 되었다.

아주 잠깐 제인슨 남작에 대한 얘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긴 했으나 곧바로 그가 감옥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 사태를 비롯해, 그간 셀린느와 베른이 모아둔 제인슨 남작의 비리와 탈세, 그리고 도박혐의 등을 전부 엮었다고 한다. 죄질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아마 당분간은 후작가 근처에 오지도 못할 거란 연락을 받았다.

일이 좋게 마무리되어 다행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골치 아픈 일도 있었다.

그날 피로연에 있었던 사람들이 제인슨 남작을 제압하던 헤르윈을 보고 하나둘 입을 연 것이다.

나쁜 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 약혼녀를 지키려는 헤르윈의 행동에 감응을 받은 사람들이 원래 있던 일보다 부풀려서 말한 것뿐.

“눈 깜짝할 새에 루시아 영애 앞으로 가서 남작을 저지시켰대요.”

“맨손으로 칼을 잡았다고 하던데요?”

“아니에요! 손도 안 대고 오러로 제압했다고 들었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아그네스 영애에게 ‘내 여자라’라고 선포했다잖아요! 너무 부러워요! 페네우스 공자처럼 멋있는 남자에게 사랑을 받다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장할 만한 얘기였다. 게다가 이번 일로 인해 저번 오크 사건이 재조명됨으로써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죽고 못 산다는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밖에 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외출을 자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헤르윈은 이 상황이 기꺼운 모양이었다.

광대가 승천할 것 같은 헤르윈을 보며 루시아가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쿡 찔렀다.

“그렇게 좋아?”

“그럼, 모두 우리 사이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잖아.”

“아…….”

헤르윈은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 아닌, 루시아와의 사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하긴, 이전에는 은근 비아냥거리며 둘의 결혼에 대해 비난 아닌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저번에 아버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해주셨어. 한 번 더 인정받게 됐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어?”

며칠 전, 소문을 들은 요한이 헤르윈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했다고 칭찬한 적도 있었다.

요한이 진작에 인정해줬다고 해도 헤르윈은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나도 다 좋아.”

헤르윈의 얼굴을 쓰다듬자 헤르윈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작은 손에 얼굴을 바르작거렸다.

190cm에 다다른 거대한 인간이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결국 루시아는 그대로 헤르윈의 얼굴을 잡고 그에게 뽀뽀했다.

헤르윈의 입가가 더욱 올라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얘들아, 여기에 우리가 있는 건 까먹었니?”

루시아와 헤르윈의 애정행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된 친구들과 루카스가 혀를 내둘렀다.

오늘은 오랜만에 루시아 집에서 모임을 가진 날이었다. 헤르윈과 루시아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머쓱하게 웃었다.

“뭐, 그 기분 모르는 건 아니야. 그치, 크리스틴?”

못마땅한 이들 가운데에 오직 브라이언만이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다. 그도 헤르윈과 루시아 못지않게 크리스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제 애정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크리스틴은 친구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하면서도 굳이 그를 피하지는 않았다.

이변이 생긴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브라이언이 단숨에 달려와 준 것 때문인지 크리스틴은 그에게 깊게 빠져들었고, 헤르윈 못지않게 두 사람에 대한 소문도 퍼져나가 더 이상 브라이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가끔 접근하는 여자들이 있긴 했지만, 크리스틴과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전부 발을 돌렸다. 그만큼, 크리스틴을 보는 브라이언의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오늘은 더 질척거리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에단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교제를 밝힌 날로부터 브라이언이 크리스틴에게 들러붙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행동이 과하긴 했다. 

브라이언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크리스틴과 깍지 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우리 결혼한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리스타가 찻잔을 떨굴 정도였다. 

툭-

“앗, 뜨거!”

“아리스타, 괜찮아?”

“아리스타!”

하필이면 바지에 찻잔을 쏟았다. 모두 그녀를 불렀지만, 그보다 빠르게 옆에 있던 루카스가 손수건을 꺼내 아리스타가 쏟은 찻물을 닦아냈다.

“혹시 많이 뜨거워?”

“아,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루카스가 무릎까지 굽혀 상태를 살피자 아리스타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젖어드는 바지를 보며 루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안 되겠다, 일어나. 가서 바지라도 갈아입자. 화상을 입었을 수도 있어.”

“괜찮아! 거의 다 식어서 많이 뜨겁지 않아.”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얘들아, 우린 잠깐 안에 들어갔다가 올게.”

아리스타가 계속 괜찮다고 말했지만, 결국 루카스의 손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상황에 얼이 빠졌던 이들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기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헤르윈만이 사라진 아리스타와 루카스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보고 있었다.

“괜히 우리 때문에 다친 건 아닌가 모르겠네.”

“오빠가 잘 챙겨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루시아마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헤르윈은 고개를 갸웃하며 겨우 시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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