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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116/129)

<116화>

“헤, 헤르윈, 루시아!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우리 사귀기로 했어.”

“저희가 사귀기로 해서… 브라이언!”

무어라 말을 하려던 크리스틴은 브라이언에게 넘어가 결국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

혹시 친구들이 이상하게 볼까 싶어 그녀는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그들을 축하해줬다.

“축하해!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맞선까지 본 사이인데, 결혼도 아니고 그냥 사귀는 거야? 어떻게 된 거야?”

오히려 가볍게 만나는 사이란 말에 놀란 눈치였다.

분명 친구들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 예상했던 크리스틴은 어버버 말을 잇지 못했다.

심히 놀란 그녀를 진정시키며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이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다고 일단 차근차근 만나보자고 했어.”

“새삼? 어차피 결혼하려고 맞선을 본 거잖아.”

“맞아, 언제는 빨리 결혼하고 싶다더니. 브라이언이랑은 알고 지낸 지 오래됐으니 바로 결혼해도 상관없지 않아?”

헤르윈의 말에 루시아가 힘을 실어주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크리스틴도 맞선을 보러 갔을 당시에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까지 하는 상상을 했으니까. 

하지만, 선 자리에서 브라이언을 보는 순간 그녀는 모든 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문득 모든 걸 쉽게 말하는 친구들에게 서운해졌다. 크리스틴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루시아와 헤르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5년 넘게 친구였던 사람이랑 갑자기 결혼하라고 하면 어느 누가 쉽게 할 수 있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을지 몰라도 저는 아니란 말이에요!”

크리스틴은 아직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한때 브라이언에게 호감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아주 찰나였을 뿐이다.

그 후로는 그저 친구로서 오랜 기간 사이좋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맞선 상대로 나와서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농담으로 치부하려 해도 브라이언이 워낙 진지하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위해 당분간 데이트도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차차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다. 친구가 아닌 남녀로서.

그런 제 마음도 모르면서 친구들이 멋대로 내뱉는 말들이 서럽기만 했다.

크리스틴이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자 루시아와 헤르윈은 당황했다. 

“미안해, 크리스틴. 널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맞아, 우리는 그냥 궁금해서…….”

“그만. 내가 알아서 달랠게.”

미처 사과를 마치기도 전에 브라이언이 그들을 제지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크리스틴을 자신의 품에 안으며 무어라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틴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는 모습이나, 여린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머지않아 눈물을 그친 크리스틴이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루시아를 쳐다봤다.

“죄송해요, 갑자기 울컥하는 바람에…….”

“아니야! 아니야! 우리야말로 미안해…….”

“……미안하다, 크리스틴.”

헤르윈마저 미안하다 말하자 마음이 조금 풀린 듯싶었다. 크리스틴은 이제 괜찮다며 방긋 웃었다. 

그녀의 기분이 풀려서 다행이지만, 단숨에 그녀를 달래는 브라이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꼭 무슨 마법을 부린 것만 같았다.

모두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틴만이 브라이언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며 자연스레 앞으로 흘러나온 잿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친구였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한편으론 한층 더 친밀하게 보였다.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말이다.

“……크리스틴, 아직 브라이언한테 호감이 없다고 했지?”

헤르윈이 루시아에게 속삭였다. 

“응, 분명히 그런 뉘앙스로 말했어.”

“그런데 호감이 없다고 말한 것치고는 친구 그 이상으로 대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브라이언이 무슨 수를 쓴 걸지도 몰라. 브라이언이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서로 속닥거리던 두 사람은 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떨었다. 그들을 보고 싱긋 웃던 브라이언은 곧바로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헤르윈이 난 놈이라며 중얼거렸다.

“아, 아.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길 바랍니다.”

때마침 사회자가 어수선한 하객들을 진정시켰다. 곧 결혼식이 시작될 것이다.

루시아와 헤르윈도 앞을 보며 결혼식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렸다.

헤르윈과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는 잠잠해질 테니까.

보통 결혼식에서 신부는 신부 아버지와 함께 입장하곤 하지만, 셀린느와 베른이 함께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했다. 처음만 제외하고는 결혼식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반지를 주고받고 서로를 평생토록 사랑하겠다는 서약까지 맺은 뒤 입맞춤을 나누었다.

한때는 저 신부 자리에 자신이 있을 뻔했지만, 지금은 저곳이 아닌 헤르윈의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아는 자신의 어깨에 얹어진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박수를 보냈다.

결혼식이 끝나자 곧바로 피로연으로 이어졌다. 결혼식만 보고 가려 했지만 셀린느가 붙잡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있다가 가기로 한 루시아와 헤르윈은 피로연을 즐겼다.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어서 그런가 결혼식이나 피로연들의 세세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이거 아이디어 좋다. 헤르윈, 우리도 나중에 이런 식으로 테이블을 세팅할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뭐든 따를 테니까.”

“흐음, 그러면 더 고민해봐야겠다.”

“응? 고민을 왜 해. 하고 싶으면 해야지.”

“너도 그렇고 어머님이랑 아버님도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하는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면 돈을 허투루 쓸 수 없다고. 좀 더 좋은 게 없을까 찾게 된단 말이야.”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러지 않아도 돼. 너한테 부담 주려고 한 말 아니야. 결혼식은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잖아.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어서 그렇지.”

“그건 알지만…….”

그래도 부담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왠지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라고 하면 정말로 뭐든 해주실 것 같아서 무서웠다.

루시아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단호히 고개를 내젓자 헤르윈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그네스 영애.”

그때, 잠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떠났던 셀린느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베른과 함께.

“제인슨 영… 아니, 이제는 캐스퍼 후작 부인이라고 불러드려야 하죠?”

그 말에 셀린느가 수줍게 웃었다.

“네, 조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꼭 영애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셀린느가 조심스럽게 루시아의 손을 꽉 잡았다.

“나중에라도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아그네스 영애라면 뭐든 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두 분께 뭘 했다고요. 이제껏 몇 번이나 인사하셨는데 계속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주책이라…….”

“저희가 부담스럽게 해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루시아. 하지만, 셀린느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에요. 루시아 양의 일이라면 소매를 걷고 나설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루시아에게 도움이 필요할 만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캐스퍼 후작 부부가 루시아에게 질척거리자 헤르윈은 두 사람에게서 루시아를 떼어냈다.

경계심 가득한 그의 모습에 후작 부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페네우스 공자가 있는데 그럴 일은 없겠군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저희가 도와드리기도 전에 일이 일단락될 것 같아요.”

놀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에 헤르윈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루시아는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크리스틴이었다. 브라이언과 같이 있던 그녀가 뚱한 얼굴로 혼자 나타나자 루시아는 의아했다.

“크리스틴, 왜? 브라이언은 어딨어?”

“모릅니다, 그런 사람.”

“……응?”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사이좋더니 왜 크리스틴은 토라진 것인가. 삐죽 나온 입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루시아는 잠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크리스틴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무슨 일이야?”

“……저를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여자가 많더군요.”

앞뒤 사정을 모르는 루시아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브라이언이라면 모두 정리했을 텐데?

루시아는 주변을 살폈다. 그때, 저 멀리 브라이언이 보였다.

그는 웬 여자와 함께였다. 미모가 출중한 여자가 브라이언을 붙잡고 있었다. 그에 반면 브라이언은 이곳으로 오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무슨 상황일지 대충 눈에 훤했다.

“저 여자가 브라이언한테 대시했구나?”

크리스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정답이었다.

“그럼, 브라이언을 두고 나온 거야?”

“……그야, 저 여자가 계속 브라이언을 아는 척하면서 둘이서만 대화하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브라이언이 사귀는 사람은 너잖아. 너희 둘이 사귀는 사이라고 딱 못을 박고 얘기해야지.”

“저도 그 말은 했어요!”

크리스틴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억울한 표정을 보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노력한 것 같았다.

“그런데 저 여자가 저더러 사귄 지 별로 안 됐으면 곧 헤어지겠다고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길래……!”

“브라이언이 그걸 보고만 있었어?”

“……몰라요, 그냥 와 버렸어요.”

브라이언의 처세가 잘못됐다고 단정 짓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상황이 그렇게까지 됐다면 그는 지금 당장 이곳으로 그녀를 쫓아 왔어야 했다.

그런데 저 멀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어지간히 여자가 질척거리는 모양이었다. 웬만해선 여자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는 놈이 얼굴을 구기고 있으니 말이다.

“잘했어. 그건 브라이언이 잘못했네.”

“그쵸! 제가 잘못한 게 아니죠?”

“그럼. 적어도 너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면 자기가 알아서 정리했어야지. 저놈 업보야. 그간 했던 행동들이 있으니까 쉽게 다가오는 여자들이 있을 텐데 매번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그… 매번 그러는 건 아니고요. 저번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었어요. 저를 애인이라고 말하면서.”

크리스틴 편을 들어줬더니 도리어 크리스틴이 브라이언을 두둔했다. 이러나저러나 크리스틴이 브라이언에게 마음이 있는 건 확실했다.

신기하게 돌아가는 두 사람의 연애를 보고 루시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브라이언 흉 안 볼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은……!”

“셀린느, 이년 어딨어!”

갑자기 어디선가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간에 들리는 셀린느의 이름에 루시아와 크리스틴을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웬 남자가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저 사람은 누구죠?”

“……나도 몰라.”

3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루시아와 크리스틴은 목소리를 낮췄다.

활기찼던 피로연의 분위기는 단숨에 가라앉았다.

“아버지……!”

셀린느에게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이 그 있느니만도 못한 제인슨 남작인 모양이다.

“어떻게 결혼을 하는 데 가족을 한 명도 부르지 않을 수가 있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제인슨 남작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려 하자 근처에 서 있던 보초병들이 재빠르게 그를 저지했다. 남작은 잠깐 주춤하다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셀린느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불효막심한 자식! 후작이랑 결혼을 할 거면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니야! 후작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내 사위가 될 거면 당장 나한테 와서 얘기라도 전해야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어!”

남작이 날뛰면 날뛸수록 분위기는 더 어수선해졌다. 남작의 무례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남작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번 결혼식으로 말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두 사람은 평생 꼬리표처럼 오명을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리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낯빛이 창백한 셀린느가 보였다. 베른은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으며 남작을 쏘아보았다.

“당장 돌아가세요. 저희는 당신을 초대한 적 없습니다.”

그때,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나타났다. 결혼식에서 봤던 베른의 어머니, 선대 후작부인 티아나였다.

그녀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남작을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그녀 특유의 위압감에 남작이 주춤 물러섰다.

“대체 이 자의 출입을 허락한 자가 누구지? 당장 끌고 나가도록.”

“네, 마님.”

기사들이 남작의 팔을 붙잡고 그를 끌어내려 하자 남작이 발버둥을 쳤다. 남작은 꽤나 덩치가 큰 편이었기에 기사들은 쉽게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이거 놔!”

결국 기사를 뿌리친 남작이 성큼성큼 티아나 앞으로 다가왔다. 자칫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티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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